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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신 영광(요 17:1-10)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2.

<내게 주신 영광> 요17:1-10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을 포함한 요한복음 17장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문인 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가 끝난 18장의 첫 몇 절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한 것 보면 예수님의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여기저기 끌려다니시며 심문과 심한 모욕과 온갖 가혹행위를 당하신 후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으로 올라가셔서 결국은 그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시는 일련의 일들이 숨가쁘게 진행되기 직전의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절대절명의 위기 앞에서 드리신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우리는 그 어떤 분노와 원한과 탄식과 불안과 절망의 단어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눈에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영화"(1, 4, 5절), "영생"(2, 3절), "영광"(10, 22, 24절), "기쁨"(13절), "진리"(17, 19절), "사랑"(23, 24, 26절) 같은 말들입니다. 그 중에 특히 많이 반복된 말이 "영화롭게 하심"과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영광을 말씀하셨다는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과연 어떤 것인가?"






먼저 본문 1절을 보면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하십니다. 여기서 "때"라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 고난과 치욕과 죽음을 당하셔야 할 때입니다. 실패와 패배의 순간, 그리고 그 동안의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하신 것은 "아버지, 제가 억울하게도 이 세상에서 이렇게 수치와 오욕을 당하는데 아버지만이라도 저를 영화롭게 하셔서 저에게 위로와 보상을 해주십시오"라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그 결과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평가는 이 세상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맡기신 모든 사명을 완수했고, 이제 곧 지게 될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며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고 그의 삶의 절정이요 그의 모든 지상사역의 마무리라는 확신에서 오는 감격과 기쁨과 감사의 기도인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는 것이 곧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주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2절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일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영생을 얻게 하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가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하시는 일과 그의 삶을 봄으로써 그가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하게 하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과 특징이 드러나게 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는데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26절에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하신 것과 23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인식하신 자신의 사명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합니다. 또 25절에서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하신 것을 보면 그의 사역이 열매를 맺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6-8절을 봅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사명은 본래 하나님께 속했다가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을 다시 아버지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멸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듯이 예수님을 알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의 길이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신 것은 그들을 아버지의 뜻대로 멸망하지 않도록 지키신 것이며 따라서 그 임무를 완수하신 것이 예수님께는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이 임무의 완수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곧 지실 십자가는 그러므로 그에게는 그의 사역의 실패가 아니라 그의 사역의 완성이기에 이제 모든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그는 기뻐하며,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가실 사람들도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고 십자가 앞에서의 예수님의 기쁨을 그들도 나누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본문 5절로 돌아와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신 것은 바로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아버지께서 맡기신 모든 사역을 마무리하면 본래 아버지와 함께 영원전부터 영화를 누리던 그곳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요한복음 17장의 기도가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위대한 승리와 영광의 찬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심오한 해석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히 선하신 뜻의 은혜로운 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기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명령을 받은 우리 모두가 무엇을 우리의 영광으로 삼으며 어떻게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주시는 귀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눈으로는 가장 큰 수치인 십자가에서 그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세상의 영광하고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세상적인 성공과 승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부끄럽게 여기며 다 피하고자 하는 그곳에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승리를 탐하지 않고 추구하지도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좋아하시는 일들을 자신의 뜻대로 행하며 영광을 얻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아버지께서 그에게 하라고 주신 일들만 행하셨으며 모든 일을 아버지의 뜻대로만 행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그의 뜻대로 이루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꾀와 수단을 동원하고 자신의 안녕과 명예를 추구하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영광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16:32-33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였습니다. 가까이 따르던 제자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환호하던 군중들에 의해 배신을 당하고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실 일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평안"과 "승리"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12:23에서도 이미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바로 지키며 따르려 할 때에 우리에게 닥치는 배신과 음모와 핍박과 고난과 오욕과 손해와 심지어는 어떤 의미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실패나 패배나 수치와 허망한 일로 여기지 않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은 "내게 주신 영광"으로 여길 줄 아는 삶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세상적인 영광의 온갖 유혹으로부터 자유하며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진정 승리할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의 바라는 영광은 이 세상이 주는 영광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영화로와지지 않으시는 일 속에서 우리가 영광을 누리려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도록 베푸시는 영광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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