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영광스러운 사람
본 문 : 행28:30-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오늘 봉독한 말씀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이요, 또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의 역사요, 사도들의 전도 활동의 기록이며, 그 가운데 성령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셨는가를 보여주는 성령 행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결론이 어떤 형태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 일대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까닭은 이 성령으로 역사한 일들의 결말이 성령의 감동에 의해 살아가는 우리들 삶의 되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성령의 지시대로 산 사람들의 인생의 결론이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1. 역경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개선 장군으로 도착한 것도 아니오, 한 나라의 대사로 영접을 받으며 들어온 것도 아닙니다. 그는 죄수의 몸으로 쇠사슬에 묵여 끌려온 신세입니다. 그렇다고 신세타령을 한적도 없고 남을 원망한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원하던 이곳에 전도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꽁꽁 묶은 옥중생활 때문에 전도활동이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에게 전도 활동이 중단되었다는 것은 그에게서 생의 의미가 제거된 것과 같으며 또한 그의 생명이 끝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는 바울의 삶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직장을 다니던 사람이 명예 퇴직을 당하고 황당한 퇴직을 당한 것과 같습니다. 사업하던 사람이 사업체를 잃고 할 일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평생에 해 왔던 일을 잃어버린 사람의 공허감과 절망감을 당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들이 아주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해서 인생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사도는 다른 일도 아닌 복음을 전하며 평생을 바친 사람인데 이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그 황당함과 좌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형편에서 하나님의 더 크신 은혜를 찾습니다.
이럴 경우에 하나님의 뜻은 이런 시련과 역경 속에서 더 확실하고 분명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가 그러하고, 다니엘과, 엘리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아시다 싶이 그들은 장인인 사울에게 10년씩이나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쫓겨다니고, 사자가 득실거리는 굴에 던지움을 받았으며 우상을 섬기는 왕과 거짓 선지자 850명이 진을 치고 있는 가운데 엎드려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자식을 잃고 재산을 잃고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악창이 나 미치게 가려운 온 몸을 깨진 기와 조각으로 피가 나도록 긁어 대는 일이 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결코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너무 가혹한 시련을 과감히 도전하여 싸웁니다. 그리고 그들은 승리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할 때 보다 어려움이 많을 때 더욱 확실히 우리들엑 알려집니다. 사람의 성공과 실패는 어떤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바울은 결코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수감된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활용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뜻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는 자유가 없는 몸이기 때문에 밖에 나가 전도할 수가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를 허용해 주었기 때문에 밖에 나가 전도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열심으로 전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실로 역경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불가능 중에서 가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만 있으면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영어 속담에도 보면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된다는 생각부터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일을 안하려고 생각하면 순경도 악조건이 되는 것이고, 일을 하려 하면 역경도 호조건으로 선용되어지는 법입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 어떤 역경에 처하여 깊은 좌절감에 빠진 분이 있습니까?
서양 속담에 ‘한 문이 막혔으면 다음 문을 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고 또 다른 문을 두드려 보라는 것입니다. 최선의 방법이 막히면 차선의 방법을 활용해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위한 사역에는 역경, 순경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역경도 선용하면 순경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찬송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 하여서 더 빨리 감니다.
내 걱정 근심을 쉬 없게 하시고 내 주여 어둔 영혼을 더 밝게 합소서.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때 큰 믿음 줍소서.
2. 현실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행19:21절에 보면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롬15:24절에는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죄수의 몸으로 호송되어 온 몸이기는 하지만 하여간 바울은 오랫동안 바라던 로마에 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당면한 현실은 전도하기에 용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 경제, 군사, 과학, 사교, 수사학 같은 것들에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종교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해서는 로마 사회에서 남의 관심을 끌기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현실이라고 해서 그 당시의 인기 품목인 정치, 경제, 군사나 철학이나 수사학 등의 어느 하나로 그 화제를 바꾼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는 복음으로 일관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현실에 영합하여 출세를 할 생각으로 로마에 오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거기에 복음을 전하여 로마로 하여금 세계 선교를 위한 전초 기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이 로마의 분위기가 세속적이라고 해서 세속적인 방법으로 전도를 모색한 것도 아니오, 순수한 복음 전도가 어렵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다고 3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속에 따라 변하는 것도 아니오, 세상 조류에 따라 적당히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죄로 죽어가는 심령들을 구원하며, 세속에 물든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이 이 사업을 하다가 어려우면 다른 사업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직장을 다니던 분이 다른 직장을 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와 현실 참여도 대단히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말에 ‘우물을 파려거든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토끼를 쫓는데 한 마리의 토끼를 쫓아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현실에 도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단단히 굳은 결심을 하고 옳게 살아 보겠다고 나선 사람들도 얼마 가지 못해서 현실에 적당히 야합하는 수가 많습니다. 법관이나 정치가들도 보면 처음에는 전념 결백하게 살아보려고 시작하였지만 현실에 부닥치다 보니 변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방법이야 달라 질 수 있다고 해도 우리들의 믿음은 달라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의 신의는 변질되여서 안된다는 말입니다. 일구월심, 한 우물을 파고 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변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회 현실에 영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 현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적합하도록 변화시켜 나가는 일입니다. 이럴 때에 그리스도인과 그 교회가 그 땅에 존재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 핍박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는 항상 두 가지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교로부터 오는 핍박이었는데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그리스도(메시야)라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로부터 오는 핍박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예수를 믿는 믿음과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가능하다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이 믿음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두가지 압력이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핍박은 로마에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로 오기 전 유대인 교포들이 세운 교회가 있었는데 그들의 신앙도 유대주의적 신앙의 잔류가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하는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만 된다는 근본적인 복음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저 나라 안에서나 밖에서나 핍박이 계속되었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핍박과 압력은 여전하였습니다. 이쯤 되고 보면 사도 바울도 사람인데 어느 정도 요동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열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가 없다는데 이 아우성 속에서 바울인들 어찌 더 이상 버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옥중에서 전파하는 그의 메시지도 전과 다름이 없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제외된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결코 용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 자신이 말하고 있는 대로 그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였습니다.
진리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주장하기 때문에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기 때문에 진리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진리를 위해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요구와 주장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에 바울처럼 고난으로 연속된 생애를 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시종 여기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무력한 인간처럼 역경 앞에 무릎을 꿇지도 않고 간교한 처세꾼처럼 현실에 야합하지도 않았으며 나약한 백면서생처럼 압력에 굴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이 만일 이러한 것들에 굴복하고 말았다면 복음의 문은 이미 닫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어떤 역경에서도 굴할 줄 모르는 전도자 바울 때문에, 그리고 어떤 유혹에도 꺾일 줄 모르는 사도 바울 때문에 복음의 문은 세계를 향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다 포기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재산을 포기해도 자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설혹 건강을 다 잃어 죽게 되였다고 해도 천국의 소망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설혹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고 해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역경과 핍박이 와도 바울은 주님의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게을리 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지 벌써 10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백여년 동안 무수한 고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처럼 굴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위해서 피흘린 분들이 있었기에 이 땅에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만을 자랑하는 한국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좋은 조건에서 태어난 평생 어려움도 모르고 고통도, 좌절도, 낙심도 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역경을 이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간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이런 거대한 명제가 아니드래도 인생살이 멋있게 영광스럽게 남이 부럽도록 산 사람도 모두 이런 사람이 였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후손들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을 남긴 사람들도 모두 바울처럼 산 사람들이 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며, 현실에 야합하지 않으며 오던 핍박과 고난이 올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만 바라보고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능력을 힘입어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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