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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2

by 【고동엽】 2015. 2. 26.
 

기독교의 죄에 대하여 2
1. 인간의 원죄가 있는가?
성서의 첫 순서가 창세기 이기 때문에 보통은 창세기가 처음 씌였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주전 13 세기에 이집트를 탈출하고 출애급기(탈출기)가 씌여지고 떠돌이 백성인 하비루(히브라)와의 융합 과정을 거치며 국가가 세워진 후에 민족의 정체성과 자신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한 지를 밝혀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전 10 세기에, 주전 18 세기에 산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야기와 원역사로서 연대를 알 수 없는 에덴동산 이야기를 포함한 창세기가 씌였습니다. 에덴동산 이야기는 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죄 문제는 주전 8 세기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권력자들과 기득권층의 부패와 타락을 하나님 앞의 죄로 인식하여 회개를 요청하며 죄 문제가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선지자들이 오늘날처럼 사회에서 낙오하여 일으키는 범죄가 아니라 지배층인 사회 기득권층이 암암리에 벌이는범죄를 하나님 앞의 죄로 인식했음을 주목합니다.
당시에나 오늘날이나 엘리트 신앙인도 기득권층 입니다.
애덴동산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되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유대인들은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죄를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서 주석인 미드라시 14:7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20 살로 만들어 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18 세에 결혼하고 20 세에 선악을 구별하는 나이가 되어 전문 직업을 구하고, 증인으로 법정에 설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20 살에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혜를 얻어 실제적인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랍비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지식 나무라고 합니다. 랍비들은 지식이 없는 사람을 '밀빵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선악과인 지식 나무가 생존의 필수 양식인 '밀'인데 밀빵을 먹어 보지 못했다는 말은 지식이 없어서 전문 직업을 얻지 못하므로 밀빵을 먹을 수 없다는 말 입니다.
(조철수 창세 신화 서해문집 169-171p)
선악을 구별해야 지식을 얻어 필수적으로 세상을 살아 가는데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그 길을 열어 주었다는 의미 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에덴동산 이야기를 기독교처럼 인간 타락에서의 원죄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 현실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한 은혜의 교리 입니다.
하나님은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표를 줍니다. 또한 가인을 죽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일곱 갑절로 벌을 내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십니다.(창세기4:15-16) 에덴동산 이야기를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로 읽지 않으면 가인 이야기는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기독교 교리는 여러 논쟁으로 이어오다가 5 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Agustine 354-430)에 의해 정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는 죄의 뿌리인 아담 안에서 타락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인류는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아담과 그를 죄로 인도했던 여인(하와)으로부터 나왔고 동시에 그와 함께 정죄받게 된다. 어린이들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짊어지고 태어나며 출생 때부터 타락해 있다고 합니다.(Agustine The enchiridion 26)
그는 로마서 5:12 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를 가지고 에덴동산 이야기를 통해 원죄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 언어인 그리스어를 모릅니다. 그래서 히에로무니스(Jerom)가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 역으로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 불가타 역은 정교하지 못합니다.
그 불가타 역에는 바울의 로마서 5:12 절이 '그(아담)에게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로 번역되었습나다.
바울은 아담의 시대가 가고 이제 구원의 시대인 예수 시대가 왔다고 한 본문을, 아우구스티누스와 히에로니무스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사망이 왔다고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이 기독교 정통신학이 되었습니다. (로저 E 올슨 이야기로 읽는 기독교신학 대한기독교서회 321, 328)
아직도 대부분의 신학자와 성직자들은 로마서 5 장을 예수의 시대인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말씀으로 읽지 않고 죄의 기원으로 읽습니다. 지독한 로마서 오독 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고대 기독교가 에덴동산 이야기를 타락의 원죄 이야기로 해석한 것은 당시에 만연한 오르페우스 종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르페우스교 창조 신화에, 인간의 조상인 티탄 형제들이 자신들의 아버지인 디오니시오스 자그레우스를 토막 살인합니다.
인류는 이 티탄들의 후예이기 때문에 범죄의 짐을 나누어 지고 태어납니다.(지그문트 프로이드 종교의 기원 열린책들 230p)
인류에게 특히 여성에게 원죄라는 무거운 처벌을 다룬 신학은 성서 저자들과는 다른 신학과 세계관을 가진 저자들로부터 나온 후대의 신학 입니다.(캐롤 A 뉴섬외 여성을 위한 성서주석 수잔니디취 창세기 이화여성신학연구소 61p)
주전 6 세기 초 에레미아는 유다 왕국의 종말을 경험합니다. 그는 지금은 조상들의 죄로 자신들이 망하지만, 구원의 때가 오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범죄로만 심판받는다고 합니다.(에레미아 31:29-30)
구원의 시대인 하나님나라 에서는 조상의 범죄에서 조차도 벗어난다는 말 입니다.
다시 에덴동산 이야기로 돌아 갑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뱀과 땅에 선포되고 남자와 여자에게는 선포되지 않습니다.(창3:14-19)
인간의 노동은 형벌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원역사는 인간의 타락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성서에는 유전될 수 있는 어떤 죄도 설명되지 않습니다.(C 베스터만 창세기 주석 한들출판사 51, 53, 56p)
에덴동산 이야기는 죄의 기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실존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말하는 이야기 입니다.(김이곤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 한국신학연구소 123p, 윌터 부르그만 구약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665p)
폴 틸리히는 원죄 교리는 인간의 자유로운 원초적 행위와는 부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아담은 본질로부터 실존으로 넘어가는 상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의 문제를 말할 때는 운명과 자유가 반드시 말해져야 합니다.(A J 맥컬웨이 폴 틸리히 조직신학 요약과 분석 한들출판사 215p)
여성 조직신학자인 도로테 죌레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원죄 개념은 전혀 없으며 여기서 하나님께 불복종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아이의 성장에 비유해서 아이가 어떤 권위에 대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 작은 인격이 인간적으로 발달했다는 표징 입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저항을 그렇게 나쁘게 만 보지 말라는 뜻 입니다. 하나님도 인정하고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줍니다. 죌레는 노동과 성은 신의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말합니다.(도로테 죌레 사랑과 노동 분도출판사 128-129)
저항 없는 해방과 자유는 없습니다.
희망의 철학자 블로흐는 기독교의 원죄론이 인간을 불구로 만들었으며, 이로인해 사람들이 의연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에른스트 블로흐 저항과 반역의 기독교 열린책들 478p)
기독교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원죄교리를 만들고, 이어서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데에서 순종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신에 상응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한다면서 성직자가 산앙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순종을 요구합니다. 이에 따라서 구역장을 포함해 교회 일꾼은 누구나 순종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폭력 입니다.
신앙인도 말씀에 순종하여 산다면서 어느 수준을 따라오지 않는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합니다. 예수시대에 바리새인들이 그랬고 오늘날 깊은 신앙인들이 그렇게 합니다.
실은 이것이 최악의 범죄임에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다며 죄인 줄 모릅니다.(죄란 무엇인가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죄는 지배 용어 입니다(서남동)
원죄교리와 원죄론에서 출발한 순종이라는 용어는 기독교에서 사라지는 것이 좋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유대인들은 억지 순종인데, 기독교는 자율 순종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 한테 물어보고 그런 소리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바리새인도 억지 순종이 아니라 자율 순종 입니다.
순종이라고 하면 성서의 문자를 쫒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는 사랑과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순종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지킵니다.
예수에게서 그 예를 봅니다.
예수는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기 위해 안식일을 목숨처럼 여기며 순종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수가 안식일이 무익하다고 폐기한 것이 아니라 예수도 안식일을 지킵니다. 예수는 법을 지키며 차별과 배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는 이 행위가 법을 순종하며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랑하며 지키는 것 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입니다.(로마13:10)
주석과 여러책들을 페친인 예술목회원 심광섭 박사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이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다음 회는 죄의식에 대해 씁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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