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초대교회 설교와 성찬

by 【고동엽】 2011. 7. 20.

초대 교회의 설교와성찬

 

오늘날 개신교의 예배 순서는 카톨릭 미사에서 유래하였다. 그렇다면 미사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그것은 고대 유대교와 이교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새로 마련한 예배 의식은 카톨릭 미사의 절차를 좀 생략한 축소판이었다. 예배의 중심을 유카리스트(성찬)에서 말씀으로 이동시킨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더구나 여전히 그는 예배 의식 전체가 안수 받은 성직자에 의해 진행되도록 하였고, 회중은 그냥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남아있게 하였다. 이는 초대 교회의 모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초대 교회의 예배 모임은 한 사람이 주도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쌍방향 설교에서 일방적인 설교로

개신교 예배의 핵심은 설교다. 우리에게 익숙한 설교 방식은 목사 한 사람이 도맡아서 외치고 교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열심히 경청하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설교도 그러했을까.

 

구약(선지자)과 신약(사도)에 나오는 설교는 일방적 외침이 아니었다. 청중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형태였다. 설교 중에 청중이 의견을 개진하여, 설교가 청중에 의해 중단되기도 했다. 1세기의 설교와 가르침을 표현했던 그리스 단어는 dialegomai였다(행17:2,17;18:4). 이 단어는 대화의 쌍방 통행(영어의 dialogue)을 뜻한다. 사도들의 사역은 일방적인 주입이 아니라 대화 형식이었다. 오늘날의 설교 형식은 그리스 문화에 근거한 것이다.

 

유대교의 중심은 성전, 제사장, 희생제사였다. 그리스 로마식 이교주의에서도 신전, 제사장, 희생제사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요소들을 모두 없애 버리셨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역사상 최초로 출현한 성전 없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 생각에는 건물이 신성한 것이 아니었다.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교회나 성전이나 하나님의 집이라는 단어가 건물을 지칭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항상 사람의 모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들로서는 건물을 보고 '교회, 하나님의 집'이라 부르는 것이 아주 낯설고 이상한 일이었다.

 

목사는 오늘날 개신교의 핵심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오늘날 목사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단 한 개의 구절도 없다. 물론 '목사들'이란 말은 신약 성경에 등장한다(엡4:11). 이 단어는 복수다. 그들이 여러 명이라는 얘기다. 즉 오늘날 담임 목사 제도는 성경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목사로 번역된 그리스 원어는 poimen이다. 목자들이라는 뜻이다. 이는 '목사'라는 명칭이 그 당시 교회 내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특정한 역할을 의미하는 은유적인 표현이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교회당에 갈 때 치장하는 관습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예전에는 부유한 귀족들만이 사교 모임에 치장하고 갈 뿐이었다.

 

1세기 크리스천들은 예배 모임에 치장하고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정집에서 단순하게 모였고,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밝히기 위해 특별히 옷을 차려 입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은 주일 아침 교회 예배에 격식 없는 옷을 입고 가는 게 '불경한 행동'이라는 거짓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함께 부르던 노래가 성가대의 전유뮬로

 

성가대의 기원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스탄틴의 통치 아래서 유카리스트를 돕기 위한 들러리로 성가대가 생겨났다. 이것은 황제의 의식을 행진 음악으로 시작하는 로마의 관습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교회 안에 성가대가 등장하면서 찬양을 부르는 일이 하나님의 사람들(교인들)의 손에서 훈련된 성가대로 옮겨져 갔다. 그러다가 A.D.367년에는 회중 찬송이 전면 금지되었다. 훈련된 성가대가 찬양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이것도 그리스적 방식이다. 하나님의 사람들(교인)은 말씀뿐만 아니라 찬송을 부르는데 있어서도 구경꾼이 되어 버렸다.

 

초대 교회에서 회심한 사람들은 믿는 즉시로 세례를 받았다. 1세기에는 세례가 한 개인의 믿음을 밖으로 드러내는 고백이었다.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는 자는 누구나 그 믿음의 표현으로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2세기 초가 되면서 몇몇 영향력 있는 기독교인들이 세례를 받기 전에 학습의 기간과 기도와 금식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3세기에 이르면서 세례 받기에 앞서, 삶의 행동으로 세례 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하게 되었고, 세례에는 여러 가지 이교적인 절차들이 삽입되었다. 세례가 믿음이 아닌 행위로 구원 받는 표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성찬은 사랑의 만찬으로

 

성찬은 예수께서 죽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행하신 유월절 식사를 기념하는 것이다. 그 식사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주고 포도주를 부어 주셨다. 자신이 어떻게 죽게 될 것인지를 제자들에게 암시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상기시키셨다. 그 날 예수께서 나누신 음식이 빵과 포도주로 기록되어 있기에 우리도 성찬식 때마다 코딱지만한 빵 조각과 아주 작은 포도주 잔을 나눈다.

이 때에 먹는 빵과 포도주는 '함께 먹는다'는 의미보다 '빵과 포도주'라는 음식 자체에 더 큰 의미가 실려 있는 듯하다. 그 먹는 양이 먹었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아주 적기 때문이다. 어느새 우리의 성찬식에서는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행위가 아니라 '떡과 포도주'라는 음식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과연 유월절 만찬 때에도 예수께서 그 날 먹을 음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을까? 그리고 그 때 먹은 음식을 잊지 말고 영원토록 계속 먹으며 기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던 것일까? 그 날 예수께는 먹을 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식사를 한다는 사실이 중요했을 것이다.

사실 떡과 포도주가 아닌 다른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다. 다만 당시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에 따라 떡과 포도주를 하신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떡과 포도주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유월절 만찬의 의미는 죽음을 앞에 두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셨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성찬은 예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얻게 된 구원을 기념하는 것이다. 성찬의 핵심은 떡과 포도주가 아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감당하신 예수의 희생이 핵심이다. 떡을 떼어 내듯 살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을 감당하시고, 포도주를 부어 주듯 자신의 생명까지도 인간을 위해 희생하신 예수의 삶(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다.

떡은 예수의 몸을 상징한다. 포도주는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에 대한 기억을 강화시키는 매개체이다. 그의 고통과 희생을 상기시키는 방편이라는 말이다. 떡과 포도주가 그 날의 진정한 의미를 살리는 매개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늘 날 성찬의 방식은 뭔가 부족한 면이 많다.

토막내서 보기 좋게 만들어 하나씩 집어먹게 만든 빵은 편리하기는 하겠지마는 오히려 그 날의 의미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통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빵이 커야 좋다. 그래서 직접 빵을 떼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빵이 찢겨지는 것을 보면서 예수의 몸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을 상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조그만 잔에 따라져 있는 포도주는 예수의 피를 연상하는데 역부족이다. 술항아리나 주전자에서 따라주는 것이야말로 피흘리심을 연상하는데 더욱 효과적이다. 철철 넘치는 술잔을 보며 예수의 피흘리심과 남김 없이 주시는 희생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성찬은 절기마다 한번씩 치르는 의식으로 우상화처럼 되어버렸다. 검은 예복을 입은 목사와 장로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신성한 제물을 나누듯 사람들에게 정해진 빵 한 조각과 포도주 한 잔을 돌린다. 한 조각 더 먹는다거나 한 잔 더 마시겠다는 불경스런 행위는 일체 용납되지 않을 듯한 분위기이다.

아주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신성해진 제물을 하나님의 은총이라도 입듯이 입에 받아먹는다. 그리고 먹다 남은 것은 다른 이들이 넘보지 못하게 깔끔하게 처리해야 한다. 함께 음식을 나눈다는 행위보다는 음식 자체에 더 비중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성찬은 비밀스런 의식이 아니다. 매일매일의 식사 때마다 지켜져야 할 일상적 행위이기도 한다. 우리는 음식을 나누어 먹을 때마다 자기를 희생하신(나누어 주신) 예수의 삶을 기념하고 우리가 그 길을 따르기로 다짐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식사는 함께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런 식사는 교회에서 절기마다 기념하는 의식적인 성만찬보다는 실생활의 만남의 식사가 의미가 더있는 성만찬일수가 있다고  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