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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개혁과 실상을 생각해 보면서

by 【고동엽】 2010. 3. 15.
 

                    한국교회 개혁과 실상을 생각해 보면서

 

 

현재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고 듣고 아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교계에 대하여 우려와 수치를 느끼고 있다. 헨리 7세와 8세의 주치의였던 토마스 리나크러가 만년에 복음서를 읽고, 이것이 복음서가 아니든지,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 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경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교회의 모습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루터교가 국교였던 19세기의 덴마크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신약성경이 의미하는 기독교는 덴마크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개탄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자기 시대의 러시아 교회의 타락상을 그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속의 대심문관의 이야기를 통해 신랄하게 고발했었다. 재림주 예수가 재림했는데 러시아 교회의 지도자로 상징적인 인물인 추기경이 오히려 예수님을 체포하고 감금해 버렸다. 추기경이 밤에 감방을 찾아가 당신이 정말 예수냐고 물었으나, 주님은 침묵하고 계시는데 추기경은 왜 와서 우리를 방해 하느냐고 힐란하는 이야기다. 

우리가 교권을 잡고 세도를 부리며 영화를 누리는데 왜 벌써 와서 방해하냐는 것이었다.  교회가 그 본질성을 상실하고 비본질적인 교권, 소유, 명예, 지위등 비본질적인것에 포로가 되어 제도화되고 세속화되어 타락한 추악상을 지적한 것이다. 1789년의 불란서 혁명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타락한 기독교와 기독교 국가에 대한 격렬한 반발이었다. 

불란서혁명 당시 최후의 사제의 창자와 최후의 왕의 목을 달아라! 고 했던 군중의 아우성은 본질을 잃고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분노의 소리였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위세를 자랑 할수록 교회답지 못한 때에 치루어야 할 대가가 무겁고 크게 되는데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던 얀 후스나 개혁자 마르틴 루터, 존 칼빈,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이들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궁금하다. 

오늘의 우리 교계는 그들의 시대의 교회들에 비교해서 얼마나 더 나은 차이가 있는가. 스스로 묻고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두렵고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절망해서는 안된다.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절망으로 끝나면 사탄이 개가를 부를 것이다. 우리는 절망만으로는 아무 것도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다. 절망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고후 5:7)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수학보다도 소망이 문제를 푸는 힘이 더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빅토르 위고). 우리는 소망을 품고 오늘의 교회를 바로 잡고 부흥시켜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처지에서 소망의 근거가 어디 있는가.

첫째, 밤이 길었으니 아침이 올 것이다.밤이 깊고 어둡다는 것은 여명이 동트고 있다는 뜻도 된다. 교회의 역사도 흑암과 암울한 시대에 개혁의 기운이 솟아 올랐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권력과 어울려 정교공조를 이루면서 제도화되고 타락하여 사제 계층이 교권과 물욕에 빠져 서로 타협, 경쟁, 합종연행 및 인신공격과 음모를 일삼는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사제가 특권층으로 부상하여 자기들에게 유리한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 현상유지와 자신들의 이권보호에 힘썼던 것이다. 이 같은 시대에 베네딕트수도원이 창설되어(540년) 박해시대의 순교에 걸맞는 성결을 강조했고 교회정화에 기여했었다.  

교회가 다시 부도덕해졌을 때 존 후스, 마틴 루터, 존 칼빈, 존 낙스 등이 일어나 교회개혁에 힘썼던 것이다. 밤이 깊다는 것은 낮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이다. 우리의 처지를 어둡다고 많은 사람들이 탄식하는데 이는 새벽이 오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역설적이지만 이 같은 오묘한 역사발전의 묘미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소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둘째, 평신도 등의 각성이다.교회의 타락은 대개 지도층에서 시작되고, 각성운동은 평신도층에서 발흥되는 경우가 많다. 초대 교회의 예수 선교도 유대교적 입장에서 보면 종교 지도자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과 갈릴리 사람들이 주동이 된 일종의 평신도 운동이었다. 종교개혁도 사제들이 주도 세력을 형성한 것이 아니었다. 마틴 루터가 진리에 대한 사랑과 정열로 면죄부의 능력과 효력에 대하여 토론하자고 했을 때 사제들과 학자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를 교회문에 내 걸었을 때 평신도들이 사방에서 호응하고 전파함으로 개혁운동의 물꼬가 터졌고 로마 교황의 권세로도 막을 수 없는 운동이 전 유럽에 확산되었던 것이다.미국교회가 선교에 관심이 없었을 때 선교의 비전을 제시하고 열정을 불러 일으킨 사람들도 목사나 신학자들이 아니었다. 월리암스 대학의 학생들이 기도하며 선교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회중교회에 선교부가 만들어졌고, 1812년에 아드니럼 저드슨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파송되었다.

1886년 메사추세츠의 마운트 헐몬에서 보였던 학생집회가 몇 해 후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으로 조직을 갖추어 19세기말과 20세기 미국 선교운동의 주력을 이루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소망은 부정적인 현실을 염려하며 기도하고 갱신을 위해 애쓰는 평신도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셋째, 신학생들의 각성이다.교회의 미래는 신학생들이 짊어질 짐이다. 예수님도 제자육성을 핵심적인 사역으로 삼으셨다. 교회가 비정상화하고 무기력해졌을 때 수도원운동과 교단(order)들을 통해 기도, 성결, 순결, 청빈 등으로 젊은이들을 수련시켜 교회의 전통과 정통을 고수해 왔다.

개혁자 루터가 개혁의 깃발을 들고 파문 당하여 곤경에 처했을 때 그를 지지하고 성원했던 중요한 세력은 신학생들이었다. 그가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크 신학교의 학생들의 지원이 컸었다. 루터교회가 형식주의에 빠져 무기력해 졌을 때 경건주의 운동들이 일어난 것도 신학생들의 각성에 기인한다. 비록 소수라도 진리를 향해서 깨어있는 신학생들이 있으며 기도로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또 하나의 소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와 함께 소돔과 고모라에서 찾으셨던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할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돈과 지위와 명예와 인기를 개의치 않고 하나님과 복음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단순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헌신하는 경건한 목사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넷째,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계 21:5)이다.우리의 궁극적 소망은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고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새 창조의 권능에 근거하는 것이다. 죄인을 회개 시키시고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시며 낡고 썩은 교회를 새롭게 깨끗한 교회로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 때문에 우리가 소망을 가진다. 인간의 병든 역사와 왜곡된 현실과 모든 부조리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방법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실 전지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소망 가운데 우리는 참다운 소망의 뿌리를 견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역경과 고난과 암담한 세월 속에서도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지켜 주시고 세계교회의 주목을 받을 부흥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민족 복음화와 21세기 세계선교의 큰 도구로 쓰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비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을 느끼지만, 긍정적인 관점에서는 감히 소망을 품고 전진할 수 있는 믿음의 기회와 근거로 느껴지기도 한다.(뉴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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