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성경 해석 원리
최병섭(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1. 인문주의
칼빈은 이미 학생 때에 그의 법률 선생님을 통해 인문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스콜라주의도 배웠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의 요구로 인해 신학 공부를 접어두고 법학으로 넘어갔을 때, 그는 Orleans 대학에서 독일에서 온 인문주의자 Melchior Volmar에게서 헬라어를 배웠다. 그가 Bourges로 옮겼을 때도, 칼빈은 그를 따랐다. 거기서 칼빈은 Volmar와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그로부터 로마법을 인문주의적인 의미에서 배웠다.
그의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는 전문 과정으로서 인문주의 교육과정을 마치게 되어 고대 언어를 매우 잘 알게 되었다. 칼빈의 소위 “직역주의”는 본문 원래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원했던 르네상스기의 학자들의 희망과 직접 연계되어 있다. 칼빈은 어떤 문장의 본래 의미가 비유에 의해 도달한 의미나, 문자적 의미 외에 보완한 의미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런 방법은 인문주의자들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이들은 성경 이전에 이미 그리스 및 로마의 글 해석에 적용하고 있었다. 그의 연구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완전히 프랑스 인문주의의 의미에서 다루었던 Seneca의 “De clementia” 였다. 칼빈은 인문주의자들로부터 해석을 할 때에는 글에서 정말로 말하고자 한 것을 문법적-철학적으로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칼빈은 Demosthenes, Plato 그리고 Aristoteles의 예술적인 작품들에 경탄했다. 칼빈은 분과 증오의 차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수사학 제2권에서)을 인용하며 ‘말은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여야 한다.’는 그의 말을 긍정한다(갈5:19, 고전14:11). 그러나 그는 성경과, 그리고 성경이 독자들에게 역사하는 그 효력이 철학자들이나 수사학자들의 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었다.
2. 주석
의학자 Cop이 그의 개혁적인 연설로 인해 파리에서 탈출해야만 했을 때, Cop과 친했던 칼빈도 수배자였기 때문에 Cop과 함께 나라를 떠났다. 제네바를 비롯한 스위스의 여러 도시에 거주하다가 그는 Strasbourg에 있는 프랑스도피자들을 위한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성경의 글에 대해서 주해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로마서를 해석했다. 그 뒤를 이어 그린도전서와 후서 그리고 다른 주석들이 이어졌다. 칼빈은 그의 해석을 글로 초고를 작성하지 않았다. 그의 좋은 기억력으로 인해 그는 완전히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N. Choladon은 칼빈의 탁월한 기억력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강의 준비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대개의 경우 그는 한 시간도 온전히 준비하는 데 드릴 수 없었다....., 그의 (탁월한) 기억력에 대한 증거를 또 하나 들겠다. 그가 불러주어 받아쓰게 하고 있는 도중에 칼빈이 그와 이야기하려고 찾아온 사람과 30분 내지 한 시간 동안 이야기하다가 돌아왔을 경우 그는 거의 모든 경우 자신이 중단한 부분을 -편지, 주석 또는 어떤 것을 불러주고 있었든지- 기억하여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이 다시 계속하였다”.
그의 강의 여러 청중들이 적었다. 강의 끝에, 칼빈의 비서는 받아 적은 글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정리했다. 이렇게 생긴, 최대한 말에 충실한 초고는 칼빈이 고치거나 보충하기 위해 다음 날 칼빈에게 넘겨졌다. 구약 주석은 강의로 이루어졌지만 신약 주석은 집에서 받아 쓰여졌다. 특별히 이 일에 언급해야 할 사람들은 인문주의자 기욤 뷔베의 아들인 장 뷔베, 그의 처남 샤를르 드 종비예가 있다. 칼빈의 친구였던 Nicolas Colladon이 쓴 “존 칼빈의 생애”의 한곳에 보면 그가 열병에 걸렸을 때는 이미 소선지서 전체를 다 읽고 단지 두세 편의 말라기서 강의만 남아 있었던 관계로 미완성 작품이 출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칼빈은 자신의 방에서 강의를 검토하여 자기 집에 올 수 있었던 몇몇 사람들에게 그것을 불러주어 받아쓰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다른 것처럼 이 강의도 구술된 것을 받아써서 나머지와 함께 출판되었다. 그가 방에서 일했던 것은 겨울인데다 열병을 앓고 있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건강에 해로웠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칼빈의 주석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강의가 학원에서 실시되었다. 칼빈은 강의를 시작할 때 항상 이런 기도를 했다.
“주여 ! 우리로 주님의 지혜인 천국의 비밀을 공부하게 허락하셔서 우리의 신앙이 진보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우리로 세움을 입게 하소서.”
먼저 성경본문을 원어로 읽고 다음에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는 Vulgata역에 익숙하였으며 수정도 즐겨했다. 그는 단어의 어원에 관한 문제와 다양한 문법 구조 문제를 거듭 다루었던 것이다. 번역할 때는 불가타역과 에라스무스판을 모두 자기 앞에 비치해 두었다. 칼빈은 본문을 편리하게 나누어서 이야기나 주제를 전체적으로 다를 수 있게 했다. 그는 먼저 해당 본문을 일반적으로 설명한 다음 특정 절, 구, 단어 등을 논하기 시작했는데 때로는 라틴어 또는 원어를 반복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 칼빈은 지리적 역사적 사항을 자세히 논하기도 한다. 그는 세부적인 것을 다룬 후에 본문 전체의 의미로 돌아가 본문이 주는 교훈을 요약하거나 중심 되는 주제를 진술하고 교회와 청중 또는 독자들의 필요에 그것을 적용한다.
그는 한 본분에 대한 설명을 끝마칠 때 칼빈이 자신의 말로 그 본문을 되풀이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 주석들은 주목을 받지 못 했다. 이 주석들을 반세기가 지난 후에 발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칼빈이 그의 성경 해석에서 그 때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말했고, 그것을 성경공부에서 어떻게 그의 청중들에게 전달했는지에 대해서 경탄했다. 단지 개혁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의 학자들이 그의 글을 칭찬했고 인정하였다. 사실 그는 선행했던 많은 사람들을 참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다른 개혁자들보다 깊이 있는 글을 쓰기에 유리했다. 주석에 나오는 수많은 참고사항, 인용문, 찬반 논의 등을 보면 칼빈이 Augustin, Jorome, Christom 대해 광범위하고 분명하게 알고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이 외에도 Tertullian, Cyprian, Irenaeus, Origen, Epiphanius, Hilary, Lactantius, Eusebius, Socrates, 등이 있다. 그러나 교부들의 견해는 성경 이해에 도움을 얻기 위해 참조되었을 뿐 칼빈의 성경해석에 개입되지는 못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로마서 주석의 서문에서 Simon Grynaeus에게 바치는 글에 성경의 주해박사인 루터를 기억하지 않고 Melanchton, Bullinger 그리고 특히 Bucer의 해석을 많이 이용했다는 것이다.
<복음서의 서문에서 칼빈은 자신의 모범이었다고 하는 Bucer를 “하나님 자녀들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는 루터가 시편 132:14을 “피의 약속”이라고 명명한 데 대해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자기 자신의 주장으로 옹호하지만 다니엘 8:22-23에 대해서는 루터와 의견을 달리하여 이렇게 말한다.
“루터는 자기 생각에 빠진 나머지 이것을 적그리스도의 가면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3. 성경 해석학자
칼빈은 매우 훌륭한 해석학자였다. 칼빈은 헬라어의 확실하고 문법적인, 그리고 성경의 원래의 뜻을 물었다. 그는 매우 예리하게, 성경이 그 단일성을 잃고 확신을 제공하지 못 하도록 악마가 매우 교활하게 교회에 불어넣은 “Origen의 비유”를 비판했다. 인문주의자나 칼빈이 말했던 문자적 의미는 반드시 비영적인 의미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본래의 의미 해석은 저자의 의도를 바르게 다루는 해석이었다. 칼빈이 모든 비유적 해석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영적인 의미를 찾은 비유적 해석이 아니라 원문에 없는 의미를 찾는 비유적 해석들을 반대했던 것이었다. 칼빈의 성경해석법에 반대하는 한 팜플렛이 1593년 발간되었다.
“유대교화하는 칼빈, 칼빈은 유대교 주석과 변조를 통해 성경의 가장 분명한 본문들과 영광된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 그리스도 및 성령의 신성, 그리고 메시아의 강림, 출생, 고난, 부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 등을 가증스러운 방법으로 변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변조에 대한 반박을 게재한다.”
이런 공격을 받은 이유는 칼빈이 항상 성경의 “진정한 의미”에 집중하기를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화적인 성경해석법을 멸시하였는데 그것은 이 방법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선호하는 성경 곡해 수단을 통해 성경을 그들에게 편리한 종교서적화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결과적으로 그의 인문주의로부터 익혔던 글의 해석을 위한 방책을 적용하고, 성경에 대한 연구를 방법론적인 정확함으로 실천해 나갔다. 칼빈은 그의 앞에 있는 신약성경의 헬라어로 쓰여진 어떤 글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소화하여 받아 들였고, 그가 당시에 얻을 수만 있다면 원고 안의 예외에도 주의했다.
요한 복음 1장 3절에 대해서 “지은 것이 하나도......없느니라” 그는 여기의 여러가지 해석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여기에 거의 모든 헬라어 원고들은 적어도 큰 의미에서는 일치한다. ”단지 주님 없이 된것이........하나도 없다”.
그리고 요한 복음 4장 46절에 대해서 그는 여기서 Erasmus가 제시한 글에 “어떤 귀인”에 반대한다. 칼빈은 루터처럼 그리스도 복음의 전체에서, 우선 세부적인 부분에서 해석하지 않고 먼저 그 가까운 주변에의 구체적인 글이 그에게 중요했다. 그런 다음 루터보다 더 강하게, 그는 각 단어에 주의하고 그 의미를 알아내려고 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요한 복음 1장 14절에 대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는 여기서 “육” 이라는 단어의 뜻은 여러 가지 뜻 중에서 일부로 쓰여지고, 그래서 바울이 이 단어를 종종 사용하듯이 여기서도 타락한 특성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 안에서의 유한적인 인간을 의미한 것이다.
요한 복음 16장 25절에 대해서 그는 거기에 사용된 단어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히브리어에서의 “maschal”은 “속담”으로 다시 나타낼 수가 있다. 그리고 속담이 종종 숨겨진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으로 “수수께끼” 의미를 나타낼 수도 있다. 칼빈이 각 단어의 실상적인 의미를 위해 열심을 기울였듯이, 마찬가지로 그는 예리하게 가치 없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거기와 관련 있는 사변에 반대했다. 그는 각 음절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경고한다. 이러한 자세는 정상적인 해석학자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따라서 현재본문의 관련성에 주의해야 하기 때문에 각 단어에 머무르거나 제한해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성경이 말하고자 한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성경에 쓰여진 말씀에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 칼빈은 성경을 해석할 때 각 해당 글의 시대에 대한 역사적인, 지리학적인 그리고 종교사적인 관련성을 알아야한다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들의 삶과 환경에 연관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정확성, 간결성, 명료성에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하여 모든 세대의 독자들로부터 존경과 감사를 받았다. 이런 식으로 그는 마태복음 16장 13절에 대한 해석에서 그 당시에 두 개의 가이사랴, 하나는 오래되고 고귀한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요르단에서 멀지 않은 또한 레바논 아래에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엠마오의 지리학적 위치에 대해서도 정확한 자료를 내놨다. 구약성경 단어의 인용에서, 칼빈은 역사적인 상황을 지적한다. 그는 구약성경 관련성에서 어떤 부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나타냈다. 그 다음에서야 복음서들이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인용했는지를 상론했다. 복음서들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해줄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으로부터의 인용부분을 감안할 때, 예를 들어 포도에 대한 것과 관련하여 알려진 속담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것을 칼빈이 제대로 인식했다.(마 7:16)
칼빈은 종종 성경해석에서 헬라어 시를 인용하고, 그 다음 거기서부터 신약성경의 증언을 더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예수가 죽어가면서 나타났던 일식을 묘사할 때에, 그는 일식이 신의 분노의 표시라는 것이라는 그리스 비극을 지적하고, 예수가 엠마오 도상에서의 제자들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그는 Homer가 모든 동물의 형태로 변신할 수 있는 바다의 신처럼 그렇게 예수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의하라고 한다.(눅 24:31) Cato의 절제, Scipio의 친절과 호의, Fabius의 인내는 시민을 존경할 수 있는 척도로써는 매우 좋은 인간의 미덕이지만, 성령의 열매와는 비교할 수 없다.
이리하여 칼빈에서 이미 글의 비판, 단어의 역사, 역사적인 설명과 종교사적인 비교와 같은 항목들을 볼 수 있었다. 마치 Adolf Schlatter가 신약성경주석에서 피력한 것처럼,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그가 가지고 준비를 했었던 것, 독자들에게 이미 제시된 앞선 전통적인 도구를 제시해주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학식이 높은 신학자들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았고, 넓은 범위에서 약간 교육받은, 그리고 성경을 더 깊고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평신도들을 위해 썼다. 로마서에서 칼빈은 그의 친구 Grynaeus의 헌정에서 “해석학자의 유일한 의무는 그 의미를 투명하고 짧게 나타내는 것” 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에서 벗어나면, 그 사람은 실수를 하게 된다고 경고 한다. 성경은 해석학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석학자가 그의 일로 성경에 봉사를 해야 한다. 그는 각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쓴 자의 관점을 알아내고, 성경의 Scopus에서 벗어나지 않고 성경의 저자인 영에게서 들을 수 있도록 중재해야 한다. 칼빈은 정확한 학문적 번역과 사실적-신학적 해석을 서로 연결했다.
4. 주해설교의 비평가
칼빈은 성경을 볼 때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역사적-비판적 신학자는 확실히 아니었으며, 신학적-해석학적 비판을 했다. 칼빈에 의하면, 성경의 모든 단어가 모든 시대에 같은 방식으로 연결되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성령으로 인해 쓰여졌던 복음서에서 언급된 몇 가지는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일반적인 태도의 법칙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러한 단어와 행위들은 예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일회성에서 존중되어야한다. 누군가가 이러한 것을 특정 상황에 지시된 특정 인물에 억지로 적용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성령이 유발한 행위가 아니고 미신이다. 이렇게 행동하는 자는 원시 기독교적 거룩함을 따르려는 인물이 아니라 원숭이다.
칼빈은 신약성경에 있는 모순들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또한 밝히고, 그러나 곧 이어 그것을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았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서로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앞의 3 복음서들을 순서대로 해석하지 않았고, 마태복음에서 시작하고 다른 복음서의 말씀과 예수의 역사를 마태복음의 윤곽으로 다루었다. 그는 매우 예리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어서, 인자에 대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가 마가복음에 의하면 가는 도중에 일어났고, 누가복음에서는 그가 기도를 할 때 일어났고, 마태복음에서는 시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칼빈은 복음서들이 예수 역사에 대해서 정확한 시제의 일치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을 봤다. 마태가 기적의 이행을 매우 짧게 나타내었다는 것을 이미 그 때에 발견했다. 다른 복음서들이 출혈하는 여인의 치료와 야이로의 딸을 깨운 것을 각 단계로 정확하게 설명하는 반면에 마태는 이것을 전체적으로 짧게 서술한다. 칼빈이 시간적 순서 또는 다른 곳에서 오류를 발견하게 되면, 그는 그것을 평행에 이루도록 그리고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했다. 약간의 불일치는 별 중요한 의미가 없다. 복음서들이 중요 내용을 각 메시지에서 나오게 해서, 복음서기자들은 그들의 저술에 모든 기독교인이 예수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할 것을 나타내었다.
‘인자에 대해서 예수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한 대화’에 대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각 다양한 장소와 시간에 대한 설명에서 칼빈은 이렇게 설명했다: “누가의 말대로 예수가 먼저 휴식장소에서 기도했고, 그러나 그 다음에 그 뒤를 이어서 여행길에서 제자들에게 인자에 대해서 물어보았다고 한다.“ 수난사에 있는 “엘리야가 오는지 보자”는 말은 마가복음 15장 36절에 의하면 군인들이 하는 말이고, 마태복음에 의하면 다른 이들이 이 말을 했다고 한다. 칼빈은 여기서 오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어느 한 사람이 그런 조롱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이 거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러한 불일치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각기 다른 설명은 칼빈에게 있어서 신학적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어떤 부분들이 성경에서 명백하고 투명하게 표현되지 않았다면, 예수가 자신의 설교에서 그의 제자들의 이해력에 맞게 마쳐주었기 때문이었다. 칼빈의 글에서 특징적인 것은 ‘수난사에서의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관점’이다.
그는 마태복음 27장 52절에 “예수가 죽을 때 무덤이 열리고 죽은 성인들이 다시 일어났다.” 고 쓰여있는 것이 신학적으로 옳게 기록했는지에 대해서 의심했다. 그의 비판적인 관점은 그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 아니고, 신학적인 이유가 있었다. 죽은 자들의 종말론적인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에 있을 수가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 최초로 부활한 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골 1:18) 그가 부활한 자 중에서 “첫 사람”이라면,(고전 15:20) 그보다 먼저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할 수가 없다. 칼빈은 또한 나중에 부활한 성자에서 나온 문제도 다루었다. 이 두 문제에 대한 칼빈의 대답은: “경건한 자들을 그의 소망 안에서 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모든 자들의 부활을 몇 명의 사람들로 인해 먼저 보여주셨다. 부활한 자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겁을 먹고 쓸데없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성경에 대한 가치 있는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대답해 줄 것이고 그 대답을 찾아 헤매는 자에게 확신을 준다. 진리를 무시하고 단지 무모함으로 질문을 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자신으로부터 멀리 떠나 보내버리는 것이다."
베드로 후서의 저자에 대한 질문에서도 칼빈은 비평적인 입장을 취한다. 베드로후서의 서문에서 그는 베드로전서와 후서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저자일 수가 없다는 Hieronymus의 논제에 동의하기도 했다.
그 외 다른 부분에서도 베드로후서가 사도 베드로가 쓴 편지가 아니라고 가르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곧 이어 그는 베드로서가 격에 맞지 않은 부분이 베드로후서에 또한 없다는 것을 가리키며 자신의 의심을 제한한다. 베드로후서를 성경에 받아들이면, 역시 베드로를 저자로 보아야 한다. 베드로가 아니면서 베드로인 척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것에 있어서 불경건한 속임수가 될 것이다. 편지의 형태는 베드로의 형태가 아니지만, 내용은 베드로의 것이라는 이러한 딜레마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 수 있는가? 칼빈은 베드로가 그 편지를 직접 쓰지 않고 그의 제자가 그의 명을 받아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러한 비서 이론이 이러한 문제의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해주었다. 칼빈은 바울이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4:8)에서 시편68:18절을 인용할 때 비록 “그가 그 본질을 이탈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편의 어순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바울이 실제로 그 시편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의 표현으로 활용하여 당면 문제에 맞게 고쳤다” 고 믿었다.
바울은 “헬라어 번역자들”을 이용함으로써 여러 번 곤경에 빠졌으며(히 10:5,38) 최소한 한 번은 그가 인용한 선지서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고전 15:54). 사도행전7:16에서 스데반이 한 ‘조상들이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값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었다’ 는 말은 창세기 50:13과 여호수아 24:32 에 명백하게 모순이 된다.
칼빈은 Paula가 순례 도중 세겜에서 12족장의 무덤을 보았다는 제롬의 말을 언급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그는 모세가 “제유법”-즉 요셉이 족장들을 대표한다는 것-을 사용하였거나 누가가 옛 전통을 따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이 논의를 끝내면서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바로 잡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히브리어로 말했다고 누가가 기록한 것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행 22:2) 칼빈은 바울이 그 당시의 공통어인 아람어를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칼빈은 부활의 아침 사건에 대해서는 마가가 누가보다 덜 정확하며(막 16:1), 마태복음23:24에 나오는 예수님의 책망에 대한 마태의 설명은 결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자신도 이사야서를 정확하게 인용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에 응용했을 뿐이었다(마 15:7). 칼빈은 성경의 역사적인 조건부적 상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는 복음서에서의 오류와 신약성경의 차이점들을 발견했지만 루터처럼 그렇게 비판적이지 않았다. 루터는 성경의 특정 부분을 교회법규에서 잘라낸 반면에 칼빈은 영감론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피했다. 그의 풍부한 철학적 지식과 비판적인 사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기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역사학자가 아니었고, 그가 쓴 것을 가지고 대중 앞에서 책임감을 느끼는 신학자였던 것이다.
5. 하나님 계시로써의 성경
칼빈에게도 성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단지 성경으로부터만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단지 그로 말미암아 율법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해석학자의 과제는 그리스도를 성경에서 찾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봐도 진리의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 할 것이다. 성경기자의 영감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곳이 바로 여기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영감에 근거하며 동시에 교회 안에서 성령의 역사에 근거한다.
성령은 선지자들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런데 성령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관계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실 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보면 루터와 같은 맥락을 하고 있는 듯하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
루터의 경우에는, 복음 즉 “solus christus”를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에, 칼빈의 경우에는, 이를 포함한 진정한 믿음 자각에 대한 가르침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위대함과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람은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 통일성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성경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요, “그리스도인의 철학”이며 생명의 길로서 갖가지 위험이 항상 존재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배우게 한다.
그는 성경의 의미를 죄인의 용서와 이신칭의의 복음에만 집중시키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전체 성경이 하나님의 지혜, 의 그리고 사랑에 대한 선포를 내포하고 그로 인하여 포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성경의 형식적인 권위도 강조하기 때문에 “sola scriptura”도 강조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의 권위는 그리스도인의 구체적 상황에 따라 자신을 나타내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였다. 또한 성경 기자들의 영감은 그것을 읽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안에 전제되어 있다.
반면에 루터는 계속하여 “viva vox evangelii”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물론 칼빈은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성령의 “구술”과 “필기자”라는 말을 사용한다.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선지자들이 그들이 받은 신탁에서 1인칭과 3인칭을 번갈아 사용한 것과 동일하게 화자로서 하나님과 선지자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이러한 문단에서 성경의 무오성과 축자영감설을 찾는 사람들은 칼빈 자신이 비서들과 학생들에게 구술한 후 교정한 경험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칼빈은 비서와 그의 기록된 글을 완성시키면서 성경의 무오성을 실재로 경험한 것이다.
6. 말씀과 성령
말씀과 성령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칼빈은 Zwingli나 루터와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계시가 성경을 넘어 확대되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비밀스러운 계시로 자랑하고 설교를 경외하지 않은 자들을 대적했다. 성경의 저자인 성령은 성경에서 나타난 것 이외로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다. 칼빈이 실제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술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구술은 성경의 권위를 세우기보다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 교회를 세우고 특정 상황에 처한 그리스도인에게 유익을 주려는 것이었다. 성령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며 따라서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단이 성령이라는 가면을 쓰고 그의 악한 영을 교회에 잠입시키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성령을 떼어버리는 순간, 악하고 가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들어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또한 말씀의 구원을 주는 능력, viva vox evangelii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루터와 또한 구별된다.
칼빈은 루터와 달리 성령의 의미를 더 강조했다. 칼빈도 역시 말씀 계시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시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 없이는 전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의 설교조차도 성령의 깨달음의 역사 없이는 성공을 거두지 못 했다. 내적으로 효력을 가진 성령의 힘이 없는 단순한 말씀으로는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지지 않는다. 말씀은 성령 없이는 사람들에게 “음성의 소리”를 전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령을 통한 감춰진 계시가 필요하다.
루터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그러나 강조점은 루터와 칼빈에서 차이가 있다. 칼빈은 좀 더 강하게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 반면에 루터는 모든 것을 말씀에 집중시켰다. “말씀만이, 나는 말하기를, 말씀만이 은혜의 동반자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에서는 믿음, 중생 그리고 생명이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이 인간의 의식을 깨운 다음에서야 비로소 인간이 믿음으로 갈 수 있다.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성령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의식을 씻어줘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힌 자는 성경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그와 친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성령이 성경의 신성에 대한 확신을 만들어내고 그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타낸다. 다른 경우에 성령은 복음을 통해 말씀한다. 그를 통해 복음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고, 인간의 마음속 깊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무릎 꿇게 한다. 말씀은 인간구원의 수단이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권세를 나타내신다. 성령 없이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지만, 말씀 없이는 성령의 역사도 없다. 말씀과 성령은 칼빈과 루터에게 있어서 같이 있는 것이지만 그 방법에서는 두 사람의 의견이 다르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루터에게 있어서 성령이 말씀에 묶여있다. 즉, 말씀이 성령을 포함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묶여져있다. 즉, 성령이 말씀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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