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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성경의 권위

by 【고동엽】 2010.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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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과 성경의 권위



성경의 권위에 대한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이해는 너무나도 분명하여 이에 대한 다른 논의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 이외에는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가 없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한다.



이 소논문에서 나는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직접적 말씀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는 것을 칼빈의 자명한 입장으로 상론한(I) 후에, 칼빈이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믿어야만 하는 교리를 논하는데서 이 원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II),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이 문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III), 예배 문제에 있어서 어떠한지(IV),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으로서 성경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V) 중심으로 한 하나님 말씀의 기능을 중심으로 한 구체적인 논의를 하여 칼빈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실제로 어떻게 높이고 있는 지를 드러내도록 하겠다.



이와 같이 성경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기능적인 측면에 대한 논의는 칼빈이 16세기에 속한 사람으로서 당대의 거의 모든 사람과 같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 있게 보았다는 식으로 단순히 생각할 수 없게끔 하는 논의이다. 이는 칼빈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실제로 존중하였음을 보여 줄 수 있는 논의이다. 칼빈이 16세기에 속한 당대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어떻게 실제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실질적으로 순종하려고 하는지를 드러내어 줌으로써 이 논문은 칼빈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이 그저 16세기 사람들의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것이었음을 잘 드러내 보여 주게 될 것이다.





I.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과 그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권위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은 “사람들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다. [1]따라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2]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은 “성경 가운데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3]따라서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고, 여기서는 필요하고 유익한 지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또한 유익한 지식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4]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존중과 같은 존중을 성경에 돌려야 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에게서만 기원한 것이고 인간적 기원을 지닌 것이 섞여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 이런 뜻에서 성경의 “글들은 그것들이 그로부터 기원하신 분, 즉 하나님에게서 그 권위를 얻게 된다”는 맥킴의 말은 매우 정확한 것이다.[6] 칼빈은 성경을 따라서 성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하지만,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들을 때 “마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듣는 듯이” 하여야만 성경의 권위에 제대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칼빈은 강조한다.[7]그는 성경 저자들은 “분명하고 참된 성령의 서기관들이고, 따라서 그들의 글들은 하나님의 말씀(oracles of God)으로 여겨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8]그러나 이렇게 사도들이 “성령의 참된 서기관들”이라고 말할 때 칼빈이 사도들을 기계적 역할만 수행한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표현해 본 일이 없다. 그는 소위 말하는 기계적 영감설이나 구술 이론을 제시한 적이 없는 것이다. 물론 칼빈이 성경의 저자들은 “성령의 구술 하에서(dictante Spiritu sancto)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말을 한 적은 있다.[9]그러나 칼빈이 모든 성경이 구술되었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10]이에 대해서는 칸저가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칼빈은 ‘구술’(dictate, dictation)이라는 말을 “형성하다(produce), 확언하다(affirm), 또는 규정하다(prescribe) 등과 같은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11]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저자들의 오류가 있고 제한 된 말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증언해 주시에 충분하다는 뜻에서 성경이 영감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만 권위가 있다는 식의 주장(소위 칼빈의 성경관의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의 주장)에 [12]전혀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시편 119편에 대해서도 칼빈은 “우리가 우리의 눈을 열고서 보기만 한다면 여기서 오류 없는 빛(unerring light)을 발견할 수 있음을 확신하기로 하자”라고 말한다.[13]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우월하다.[14]그러므로 칼빈이 성경이 때로 “교양 없는 방식으로 때로는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나 그 내용은 천상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15]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의 능력에 맞추어(accommodates, accommodare) 계시하셨다고 할 때[16]칼빈의 의도는 (로저스나 맥킴 등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성경의 유오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는 의도로 언급된 것이 [17]아니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18]칼빈에게 중요한 것은 기록된 그대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19]그래서 칼빈은 성경은 “주의 입”(the mouth of the Lord)이라는 말도 한다.[20]적응의 원칙(the principle of accommodation)이 성경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다.[21]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칼빈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연적 충동에 의해 신성에 대한 의식”이 있고 [22]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씨앗이 있다”는 것을 잘 논의한다. [23] 그러나 특히 타락 상태에서는 이 신의식을 불의로 억누르므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거나 그의 뜻에 자신들을 헌신하지 않는” 것이다. [24]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님을 계시하신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제넘음에 의해 자신들이 만든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25] 이런 우상숭배로 사람들은 참된 하나님의 지식을 질식시키고 부패시키는 결과를 낸다는 것이다. [2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셔야 할 필요가 강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그 창조자에게 이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더 나은 도움을(another and better help) 주셨다.” [27]그런데 그 하나님의 구원적 계시 중에서 아주 필수적인 것을 성문화하신 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규정되고 글로 인쳐진 ...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다. [28] 성령의 작용으로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의 참된 의미는 자연적이고 단순한 의미이다”(germanus est et simplex). [29]칼빈은 “이를 받아들이고 단호하게 이를 붙잡도록 하자”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뜻에서 칼빈은 “성경은 ... 참된 하나님을 분명히 보여 준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성경을 안경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30]타락이 후의 “인간의 정신은 그 연약성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도움을 받고 보조 받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에게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31]이제 우리는 안경 역할을 하는 성경을 통해서라야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고, 이 세상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의 가장 거룩한 입을 여시기 때문이다.”[32]



그리고 성경은 그 권위를 교회로부터 끌어 오지 않는다는 것이 칼빈의 매우 중요한 주장이며, [33] 이것이 칼빈과 천주교회를 구별시키는 중요한 요점이다. 칼빈은 오히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았다”는 에베소서 2:20 말씀에 근거해서 사도듥화 선지자들의 가르침, 즉 성경은 교회가 존재하기 전부터 권위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논의한다.[34]



이와 같이 성경의 객관적 권위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칼빈은 또한 성령의 내적 증언(te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을 매우 강조한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신성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언은 모든 이유보다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만이 당신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당신님 자신에 대해 가장 적절한 증인이시기 때문이며, 따라서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인쳐지고서야 사람의 마음에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35]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이유들이나 판단들이나 추론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즉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서 확신을 추구하여야만 한다.” [36] 바로 이런 뜻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던 그 같은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에 파고 드셔서 그들이 신적으로 명령된 것을 신실하게 선포하였다고 우리들을 설득하셔야만 한다. ”[37] 이와 같이 칼빈은 성경의 객관성과 주관성 모두를 가장 잘 강조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경의 모든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고 그 모든 말이 그것이 말하는 것에 있어서 참되다고 믿었다”고 하는 갓프리의 말에 [38]우리는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 칼빈에게는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은 로저스와 맥킴이나 레이뜨 등의 다른 생각에도 불구하고 아주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칼빈의 성경에 대한 최고의 존중이 실제 그의 신학에 있어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논의해 보기로 하자.





II. 교리 문제에서의 성경의 권위



신학적으로 칼빈의 최초의 저술이라고 여겨지는 [39]“영혼의 수면에 대하여”(Psychopannychia)는 당대 재세례파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수면에 들어가 최후의 부활을 기다린다고 하는 견해를 반박한 문서인데, 칼빈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면서 긴 글을 쓴 이유도 역시 이 모든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칼빈의 확신이 작용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칼빈은 이런 견해가 3세기에 아라비아에서 나왔던 이단적 견해이며, 교황 요한 XXII세가 이 교리를 주장하였었으나 1333년에 그 견해를 취소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는 이미 1513년 제 5 라테란 공의회에서 정죄된 교리라는 것을 잘 밝히고 있다. [40]칼빈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그들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재세례파를 염두에 두면서 칼빈은 그들이 성경지식이 부족하여 교회 안에 분열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41]그러므로 칼빈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이 사후에 존재하는 중간 상태는 영혼이 감정과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의식적 상태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주해하며 제시하고 있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 칼빈은 영혼은 몸과는 다른 실체(substance)라는 것을 창조 이야기로부터 잘 논의하고 있다. 그리하여 죽음과 종국적 부활 사이의 영혼의 삶과 상태에 대한 칼빈은 성경에 근거한 명확한 가르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칼빈의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이 그의 기독교 강요 앞부분에서 하는 그의 말이다: “참으로 인간의 마음은 자신 스스로의 실재에도 이르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실재를 찾아 나서겠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지식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기꺼이 맡기도록 하자....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님을 계시해 주시는 모습 그대로를 인식하게 되면,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게’ 될 것이다.” [42]그러므로 칼빈은 그의 <강요>에서 “성경의 문하생이 되지 않는다면, 그 누구라도 바르고 건건한 가르침을 조금도 맛볼 수 없다”고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43]그래서 그는 “다른 방향으로 아주 빨리 달려가는 것보다 이 길을 따라 절뚝거리며 가는 편이 더 낫다”고도 말했던 것이다. [44]그러므로 칼빈은 신앙을 여러 모로 언급하면서, 특히 “그의 말씀 가운데서 파악한,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지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45]



칼빈은 자신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갑작스러운 변개로(subita conversio, a sudden conversion) 나의 마음을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마음(teachableness)에로 돌이키셨다”고 말 한 바 있다.[46] 이 때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자신의 생각과 삶을 고쳐 갈 수 있게 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유년기에는 아주 완고하게 교황의 미신에 헌신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47] 이런 뜻에서 그를 “하나님께서 가르침 받음에로 복종시키고, 성경 가운데서 발견되는 새로운 연구에로 방향을 돌린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성경을 "그의 집중적 지적 노력의 중심 문서"라고 표현하는 맥네일의 말은 옳다.[48] 이와 같이 칼빈 자신도 전통적 기독교로부터 성경의 가르침에로 고침을 받게 된 것이고, 그는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방향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종교적 교리에서 우리는 “겸손과 정신 차림이라는 하나의 규범을 주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외의 모호한 것들에 관해서는 말하거나 추론하거나 심지어 알려고 하서도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49] 예를 들어서 “천사의 본성과계급들과 숫자”와 같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헛된 사변들”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50]



이와 같이 칼빈은 모든 교의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하는 말 그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서는 곳에 선다는 것은 항상 타당한 말이다.





III. 교회 문제에서의 성경의 권위



곤잘레스가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루터는 성경에 위반 되는 요소만 교회의 전통에서 배제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반면에, 칼빈과 개혁파 신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좀더 철저하게 전개해서 신약 성경 유형의 원시 기독교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51] 이런 점에서 칼빈은 루터보다 훨씬 더 성경의 권위를 포괄적으로 생각하며 그 가르침에 종속하려고 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바로 이런 입장에서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말하는 성경적 직분들을 교회에 회복시키려고 하였다.[52] 이 때 직분자들의 평등성에 대한 강조는 성경의 원리를 중시하는 칼빈의 큰 강조점이었다.[53] 디도서 1:5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그 때에는 사역자들 안에 그 누구도 다른 이들에 대해 권위를 가지지 않고 더 높지 않은 그럴 정도의 평등성이 있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54] 이와 같이 칼빈은 교회의 직분의 회복 문제에 대해서도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었다.



칼빈이 교회에서의 치리를 강조하는 것도 성경의 권위를 따른 것이었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1) 그리스도의 몸과 주의 만찬이 황폐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교회 안의 다른 사람마저 부패되는 것을 방지하고, 죄인들을 회개에로 이끌기 위해서 치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55] 그러나 이런 치리를 강조할 때 한편으로는 천주교회의 관습을 반대하면서 성경의 가르침 밖으로 나아가 사제적으로 치리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했고,[56] 또 한편으로는 재세례파 사람들의 여러 훈련들에도 반대하였으니 그들이 성경적으로 바르지 않은 것을 성경적으로 바르지 않은 태도로 시행하려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57]



성례전에 대해서도 신약 성경에서 세례와 성찬 외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의식을 은총으로 주셨다는 암시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칼빈을 강조한다.[58] 칼빈이 천주교회의 칠성례 가운데서 세례와 성찬만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배제한 이유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 때문인 것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칼빈은 교부들의 견해를 언급하기도 한다. 교회의 옛 교부들도 다른 의식에 대해 성례라는 명칭을 준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교부들의 의견의 차이도 언급하면서 교부들의 의견들 가운데서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것만을 의미 있고 존중할 것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이는 성찬 문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칼빈이 교부들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방식이다. 그는 항상 교부들의 해석 가운데서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는 하는 것은 권위 있는 것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교부들의 의견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있는 것은 언급하지 않거나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세례 양식에 있어서도 칼빈의 기본적인 견해는 신약 성경의 단순한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수세기 동안 이 관습에 덧붙여진 장식적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59] 성찬에 대해서도 고린도전서 11:23-26의 성찬 제정의 말씀과 이에 더하여 나오는 27-29절을 강조하면서 성찬을 합당하게 행해야 함을 강조하고 성찬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를 하였다. 이와 같이 회중들은 사도가 그리하라고 한 바와 같이 스스로를 살피라는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칼빈은 성도들로 하여금 천상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마음을 들 것(sursum corda) 강하게 요청했다.



이와 같이 칼빈은 교회의 모든 것도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근거해서만 통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성경의 가르침, 특히 신약 성경의 가르침이 신약 교회의 모든 것에 대한 지침으로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 아주 실제적으로 우리들에 대한 지침이 되어야 만 실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보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다고 해야 한다.





IV. 예배 문제에서의 성경의 권위



칼빈에 의하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과 예배로 “그들의 존재 전체와 그들의 모든 행위들을 하나님께 갚아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드린다(Institutes, IV. xviii. 13). 예배를 이렇게 이해하는 칼빈은 교회 개혁에 관여하면서부터 교회의 예배를 성경이 말하는 요소를 중심으로 정비해 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칼빈에 의하면 참된 경건은 결국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규정된 대로의 적법한 예배”에로 우리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60]



그 중의 하나가 예배 중에 회중 찬송을 도입한 것이다. 이를 위해 칼빈은 자신이 친히 시편을 운율에 맞게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하였고 당대의 프랑스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던 마로(Clement Marot)의 운율적 번역을 사용하여 찬송케 하기도 했다.[61] 그는 이미 제네바의 1537년 규례(the Article of 1537)에서 “시편들은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 올려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찬양으로 그의 이름의 영광을 부르며 높이며 열심 있게 할 수 있다”고 선언한 바 있다.[62] 1539년에 그는 불어 시편 찬송 초판을 발행하였는데, 여기엔 18편의 시편(이전에 사용된 시편 46, 25, 36, 91, 138편과 마로에 의해 운율적으로 재번역된 시편 1, 2, 3, 15, 19, 32, 51, 103, 114, 130, 137, 그리고 143)과 3편의 영창(canticles) 실렸고, 이 중 7편은 칼빈이 친히 번역했다고 한다. 이 시편 찬송들이 후에 제네바 시편 찬송(the great Genevan Psalter, 1562)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63] 1543년판에는 49편의 찬송이 실렸는데, 여기에는 이전에 사용되던 (그러나 개정되고 보강된) 30편의 시편과, 시므온의 노래, 십계명 찬송, 사도 신경 찬송, 주기도문 찬송, 천사들의 찬송, 그리고 성찬 전후에 부를 찬송 등이 실렸다.[64] 그리하여 시편 찬송은 핍박받는 위그노들의 특성이 되었다. 물론 개신 교회는 시편만을 부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후대의 규정적 원리는 시편만을 고집하고 나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지나치게 나간 것은 문제이지만, “시편의 하나님 중심적 경건의 풍성함이 개신교적 헌신을 특징 짖도록 했다”는 말은 참된 것이다.[65]



1538년 제네바에서 축출된 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프랑스 피난민 교회를 목회 하면서 1538년 11월에 처음으로 그 피난민 교회의 성례를 수종들과 그 뒤로는 한달에 한번씩 성찬을 시행했다고 한다.[66] 그리고 1541년 제네바로 다시 왔을 때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셔(Bucer)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된 예배 식순을 채용하여 제네바 예배식을 제안하고 실천하였다.[67]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트라스부르크의 예배 형식을 취하여 그 상당한 부분을 빌어썼다.”[68] 이는 그가 1542년에 낸 “초대 교회의 관례에 따른 기도 형태와 성례 집례 방식”에 나타나 있는 다음과 같은 순서의 제안에 잘 나타나고 있다.[69]



말씀의 예전(The Liturgy of the Word)



기원(votum or adjutorium: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영광송(Gloria)

죄의 고백에로의 초청과 기도

용서에 대한 성경 말씀 낭독과 주의 용서 선언의 말 선언

시편 찬송(운율에 맞춘 시편, 또는 십계명의 앞부분,

각 계명에 대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로 반응함)

거룩송(경우에 따라 생략)

조명을 위한 기도

성경 봉독

설교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collection]

중보 기도를 포함한 기도

[뜻을 풀어 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이에 대한 설명)

[회중이 함께 부르는] 사도신경

시편 찬송

아론적 축복기도)[70]



다락방 예전(The Liturgy of the Upper-Room)



가난한 자들을 위한 모금(collection)

중보 기도

성찬 준비 [동시에] (회중이 함께 부르는) 사도신경

(뜻을 풀어 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성찬을 위한 기도

성찬 제정 말씀 봉독

성찬을 위한 권면

성찬에로의 초대

분병, 분잔, 성찬

성찬 이후의 권면

기도, 시므온의 찬미(Dunc Dimittis, 눅 2:29-32)

아론적 축복 기도



그러므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부셔(Bucer)를 따르면서 중세에 존재하게 된 요소들과 의식들을 거의 모두 완전하게 버려 버렸지만 “예배 의식의 전통적 형태를 조심스럽게 유지했다”는 하게만의 말에 우리는 상당히 동의할 수 있다.[71] 그 때 기준이 된 것이 성경이 말하는 원리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경에 나타난 요소만을 사용하여 예배 순서를 구성하려고 했다.



이와 같이 예배 전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예배 중에 선포되는 설교에 대해서도 칼빈은 매우 성경에 근거한 입장을 표명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목사의 설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만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돕기 위해서 해석자들과 교사들을 우리들에게 더해 주셨다. 바로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천사가 아니라 빌립을 선택해 보내신 것이다.”[72] 그처럼 교회에 보내진 성경 해석자와 교사가 목사이다. 칼빈은 목사의 직무가 근본적으로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임을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목사가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천상적 교리”를 선포할 때 그는 바로 “하나님의 입”(the very mouth of God)이라고 언급되기도 하는 것이다.[73]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목소리가 울리 퍼지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입과 혀에로 당신님의 낮추시기로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사요 특권인 것이다.[74] 성경 해석과 선포를 강조한 것도 결국 성경의 권위가 칼빈의 생각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 준다.





V.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서의 성경의 권위



사실 칼빈의 궁극적 관심 중의 하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로 살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강요������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양을 확대하여 간 것도 “기독교 교리의 끊임없는 조직화가 되기보다는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기독교인으로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안내서가 되기를 바랐다”는 곤잘레스의 관찰은[75] 정확한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고 그것을 세우려고 해야만 한다는 것을 칼빈은 아주 잘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그는 천주교 추기경 사돌레트(Cardinal Jacopo Sadolet, 1477-1547)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간 사상을 자기 자신에게 국한 시켜서 자기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세우는 것이라는 일차적인 동기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건전한 신학이 못됩니다. 우리는 나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거듭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자기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거나 거기서 안주하는 것 이상으로 올라가는 데 있습니다.”[76]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방식을 오직 성경에서 정확하고 바르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율법의 제 3의 용법(usus tertius legis)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은[77] 바로 이런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율법의 교훈적 또는 신학적 용도(usus elenchticus or theolgicus)를 율법의 “정당하고 가장 중요한 용도"(the proper and principal use)로 여기는 루터나 멜랑히톤에 비해서,[78] 칼빈은 이 제3의 용도를 율법의 가장 “가장 중요한 용도”(the principle use)로 언급하고 있다. [79]그러므로 구약 율법을 비록해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교훈적인 뜻은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삶의 규범(rule of life)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칼빈은 분명히 한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의 가변적인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가르침 받고 있는 것이다.”[80] 그런데 “율법의 규례들은 ... 하나님의 뜻을 다 포함하고 있고,”[81] “하나님께서는 율법 가운데서 당신님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다.”[82] 따라서 율법에서 하나님의 뜻에 우리 눈앞에 제시되고 있으며,[83]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당신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제시하셨고, 용약하자면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모든 것을 제시하신 것이다.”[84]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여 그 정신에 따라 구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하며, 그런 바른 해석 작업의 좋은 토대를 제공하고 그런 해석의 에와 그에 근거한 삶의 규범을 잘 제시하는 작업을 해주었다. 이런 해석에 의해서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칙이 그저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님이 잘 드러난다. 그는 율법을 잘 해석하여 그 율법의 정신에 따라 살 것을 잘 보여 주고, 그것을 신약, 특히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시켜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85] 칼빈은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그에 대한 “제일 좋은 해석자인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86]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정신 자체”(vere anima)요,[87] 그 생명이니,[88] 성경이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는 율법의 성취(목표요 마침)이기 때문이다.[89] 그리하여 칼빈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기괴한 규범을 도출시키지 않고, 부정적으로 표현된 것으로부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함의까지를 이끌어 내어 제시한다.[90]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십계명이 교회의 규범으로 나타나는 일이 드물다는 근거에서 개혁자들을 비판하는 에밀 부룬너나[91] 칼빈은 “예수님과 달리 ... 성경적 문자주의의 용어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여 문자주의적 규범집(a legalistic moral code)을 제시하였다”는 조오지아 할크니스 등의 논의는[92] 그들이 그저 문자만 보지 그 배후의 정신으로 헤아리는 바른 해석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93]





VI. 마치는 말



이상의 논의는 칼빈에게 있어서는 매우 자명한 것을 드러낸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실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어 본 것이다. 칼빈의 이런 성경에 대한 존중을 부인하기는 매우 어려우므로 칼빈이 그 당시에 이런 존중을 성경에 나타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이 전통은 개혁파 신앙고백서에 그대로 반영되어서 1559년 프랑스 신앙고백서에서는 성경을 “우리 신앙의 분명한 규범”(sure rule of our faith)이라고 하고, 1561년 벨직 신앙고백서는 “이 무오한 규칙”(this infallible rule)이라고 하고,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1566)에서는 “신앙과 사랑의 규칙” (the rule of faith and love)이라고 하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1647)에서는 “신앙과 순종의 유일한 규칙”(the only rule of faith and obedience)이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성경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그 온전한 권위를 잘 드러낸 전통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에는 이 세상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기독교회에서조치도 (실천적 교계와 신학계에서서 조차도) 성경에 대해서 칼빈과 같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는 태도가 견지되는 일이 매우 드물다는 데에 있다. 성경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흥기하여 칼빈과 같은 성경에 대한 소위 비판 이전적 접근(pre-critical approach)를 가진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시기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여기서 과연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칼빈을 그저 교회사적 주제로만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시대에도 살아 있는 교회적 목소리로 여기는 것인지가 나뉘어 질 것이다. 역사적 관심으로 가지고 칼빈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였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잘 드러내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60년대 이후로 나타난 바르트주의적 칼빈 해석에 반하여 칼빈의 성경을 그대로 존중하는 태도를 잘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작업이 역서 멈춘다면 객관적으로 칼빈의 성경관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으로 잘 드러내어 놓고서도 그것은 16세기적 태도로만 치부해 버릴 위험성이 없지 않다. 지금 여기서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 16세기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면서 기독교 전반에 잘 드러낸 칼빈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이 시기에도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의 구체적인 문제에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까지 나아가지 않을 때 우리는 칼빈을 16세기에 속한 인물로만 머물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시기의 칼빈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을 존중한 그 동일한 태도를 가지고 21세기의 다양한 문제 제기 앞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며 그에 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개혁신학도들의 사명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이 시기에도 인정하는 것이며 진정 칼빈을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작업이 매우 드문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오늘날 급증하고 있는 형식적으로는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격을 인정하되, 기능적으로 그것을 부인하는 다양한 견해들을 배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1) 바르트주의적으로 성경비평을 용인하면서 성경의 하나님 말씀됨을 주장하는 것이나, (2) 성경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용인하면서 정경으로서의 최종 본문인 성경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요구하는 정경적 접근이나, 또는 (3) 성경의 하나님의 객관적 말씀됨을 주장하면서도 해석학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해석학적인 상대주의를 용인하면서 우리들의 해석들은 모두 다 제한된 해석이므로 궁극적으로 바른 성경해석에 대한 궁극적 말을 할 수 없다는 성경해석학적 궁극적 의미 유명론 등의 주장 등이 시사하는 실질적 성경 무시의 태도를 배제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면서 이 논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3.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법칙”(All which are given by inspiration of God, to be the rule of faith and life)이다.『개혁 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 목사 편역(생명의 말씀사, 1992), 18.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요,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성경은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는 것이다. 성경 외에 다른 방법으로 산다면 신자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Karlfried Froehlich에 의하면 교회사는 성경 해석사로 이해할 수 있다. Biblical Hermeneutics in Historical Perspective ed. Mark S. Burrow & Paul Rorem Michigan:William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15. David L. Puckett, John Calvin's Exegesis of the Old Testament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5), ix. 환언하면 성경 해석은 교회의 신앙과 삶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며, 교회의 신앙과 삶은 성경 해석에 영향을 준다는 말로 이해하고 싶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교파 형성의 주된 요인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성경 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각 교파의 성경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그 교파에 속한 신자의 신앙과 삶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 교회사를 보면 여러 가지 이단들이 있다. 그 중에 아리우스는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탄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등 되지 않으며 예수님을 우주의 조성자인 희랍의 데미어즈나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슈퍼맨 정도로 이해했다.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으로 규정했다. “나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요, 빛의 빛이시요,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셨으나 지으심을 받지 않으셨으며,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한 본체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시어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개혁 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 목사 편역, 10-11. 요한 복음 1:1은 예수님의 신성을 명확히 증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리우스는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 하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철학적 논리를 성경의 신적 기원보다도 더 우위에 놓으려는 데서 잘못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 해석에서 논리적인 사고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인 사고를 성경의 신적 권위보다 앞세우려 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데서 온 것이다.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때 성경을 올바로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도 인간의 행동은 해석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은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간에 어떤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가령 요즈음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신당 창당이나 구당 모임이나 민주당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옳고 그름의 차원을 떠나서 그 나름대로의 정치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신앙과 삶의 규범은 성경 해석에 기인한다. 문제는 어떻게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서 성경이 기록하는 말씀대로 올바른 신앙을 갖고 그대로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오늘처럼 문화적으로 다원화되고 사회적으로 혼탁하고 도덕적으로 부패되고 사상과 신앙으로 살기보다는 감정과 느낌으로 살려고 하는 풍조가 강한 시대에서 올바른 신앙과 삶은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신자로서 정체성이 불투명하다고 한다. 이것은 이들을 지도하고 교육해야 할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정체성이란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앙과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에 따라서 살면 개혁주의 신자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고 자유주의 신앙에 따라서 살면 자유주의 정체성을 갖는 신자가 되는 것이다. 올바른 성경 해석과 그에 입각한 삶을 살도록 교육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이런 위기적인 상황에서 장로교의 창시자요 성경 해석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해석자로 알려진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칼빈 학자들의 대다수는 칼빈을 성경 신학자로 특성 지우고 있다. 예를 들면 벤자민 워필드는 칼빈은 독자적인 “성경 연구자”로 봤다.『칼빈. 루터. 어거스틴』 , 벤자민 워필드 저, 한국칼빈주의연구원 편역 (기독교 문화 협회, 1988), 39.Paul Traugott Fuhrmann은 성경 해석자(the expositor of Scripture)로, T.H.L. Parker는 성경의 해석자(the Biblical Exposition)로 특성 지운다. Paul Traught Fuhrmann, Calvin, “The Expositor of Scripture”, Interpretation, Vol.6 (April, 1952). John H. Leith, “John Calvin-theologian of the Bible”, Interpretation, Vol.25 (July 1971), 329-44. T.H.L. Parker, “Calvin the Biblical Expositor”, John Calvin, ed. G.E. Duffield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6), 176-86. Calvin and Hermeneutics, Vol.6, ed. Rhichard C. Gamble (Michigan: Garland Publishing, INC., 1992) 칼빈 신학은 그의 성경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Richard A. Muller, "Foundation of Calvin's Theology:Scripture as Reveling God's Word," Duke Divinity School Review 44(1979), 14-24.John H. Leith는 칼빈을 성경 신학자(Theologian of the Bible)로, 그의 신학은 성경의 주석에서 왔다고 했다. “John Calvin-Theologian of the Bible,” Vol.25, Interpretation (July 1971), 329-44.
칼빈은 제네바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자(Reader in Holy Scripture)로서 그의 일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제네바 교인들이 믿어야 할 고백”(Confession of Faith which all the citizens and inhabitants of Geneva and the subjects of the country must promise to keep and hold 1536)에서 성경만이 “믿음과 종교의 규범”(Scripture alone as rule of faith and religion)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죽기 전 고별사에서 칼빈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고백했으며, 자신은 평생 동안 성경을 의도적으로 왜곡되게 해석한 적이 없었다고 했으며, 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성경의 단순성을 드러내는데 전념했다고 했다. 종교개혁에서 중요시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라고 살도레도 추기경에게 말했다. 칼빈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은 하나님 말씀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Calvin:Theological Treaties, Ed. J.S.K. (London:SCM Press LTD, MCMLIV), 186-87. Richard A. Muller는 칼빈의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서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 Calvin and Hermeneutics, Vol.6, Ed. Richard C. Gamble (New York & London:Garland Publishing, INC, 1992), 398. Cited as CH. 참으로 칼빈은 성경 해석을 통해서 장로교회 신학을 확립한 위대한 신학자이며 목회자이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신학자는 위대한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그 시대를 타락케 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성경 해석은 신앙과 삶의 규칙(법칙)을 정하는 기초가 됨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는 세상 학문에서 해석 방법을 도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경 관에 기초해 있으며 성경 해석 원리는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문제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는 방법의 문제이다. 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라고 한다면 그 말은 오늘날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해석자는 어떤 자질을 가져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명료하게 밝히는 데 초점을 둔다. 이 글은 칼빈의 성경 해석학을 조직적으로 전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칼빈 이전의 해석학의 전통(고대)을 살피면서 칼빈 성경 해석학의 독특성을 부각시키며 칼빈의 해석학의 논리인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natural and obvious meaning of Scripture)를 명료화하는데 이 글의 초점을 두며 이 성경의 의미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는 가운데 목회자 갱신의 방향을 간접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I. 칼빈 이전의 성경 해석 논리
1. 유대인의 성경 해석
(Jewish Approach to Biblical Interpretation)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 논리를 다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유대인의 랍비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문서이다. 토라(모세 오경)는 인간 구원을 위한 성경의 핵심이다. 성경은 여러 가지 차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해석 목적은 인간 실존에 적용하여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David S. Dockery, Biblical Interpretation(Baker Book House, 1992), 27. 예를 들면 토라는 성문화된 49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들에 의하면 성경은 단순한 문자적인 의미, 미드라쉬(Midrash), 폐샤, 알레고리칼, 모형론적인 의미가 있다고 했다.


1) 문자적인 의미
유대인들의 랍비의 문자적인 해석은 과도한 문자주의나(highper-literalism) 자구주의 (letterism)에 속한다. Shammai학파의 신명기 6:7주석에서 그 방법대로 시행하기를 강조했다〔Impress them (the commandments) on your children. Talk about them when you sit at home and when walk along the road, when you lie down and when you get up.〕. Dockery, Biblical Interpretation, 28.

2) 미드라쉬(Midrash)
히브리말로 해석(interpretation) 혹은 사본 연구(textual study)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드라쉬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 랍비들의 해석이다. Rene Bloch에 의하면 미드라쉬는 랍비들의 성경 해석 방법으로써 네 가지의 특성을 가진다고 한다. ① 해석의 기초는 성경이다. ② 설교적이다. ③ 성경의 텍스트의 의미를 명료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④ 성경의 텍스트를 현상황에 적용시키려고 노력한다. ⑤ 율법적인 것에서는 성경에서 다루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율법과 율례에 숨어 있는 원리를 발견하고자 노력한다. Rene Bloch, "Midrash," in Approach to Ancient Judaism:Theory and Practice, ed. W.S. Green, Trans. Mary Howard Callaway, Brown Judaic Studies 1 (Missoula, Mont.:Scholars, 1978), 29.

3) 페샤(Pesher)
20세기 중반에 쿰란의 사해 사본의 발견으로 알려진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 방법으로써 유대인들이 인위적인 구성 방법으로만 계시될 수 있는 선지서는 숨어 있는 비밀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폐샤는 언제나 꿈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성경에 나오는 꿈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비밀스러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4) 알레고리(Allegory)
1세기에 유대인으로서 알레고리를 성경 해석에 사용한 가장 탁월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이다. 그에 의하면 성경에는 두 가지 차원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문자적인 의미와 문자 뒤에 숨어 있는 의미이다. 그러나 문자 뒤에 숨어 있는 의미는 텍스트와는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다른 것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Harry A. Wolfson, Philo 1 (Cambridge:Harvard University Press, 1968), 115, 134.

5) 모형론적인 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
모형론적인 해석 방법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과 사람 사이에 있는 상관관계를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모형론적인 상관관계는 언제나 기록된 말씀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모형론적인 해석 방법은 예언과 알레고리칼 방법과 구별되는데 예언에서 말하는 텍스트는 주로 예견한다(predict)는 점에서, 알레고리칼 방법은 상관관계를 숨겨진 텍스트에서 찾지만 그것을 표시하는 역사 속에서는 발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형론적인 해석 방법은 텍스트의 역사적인 의미를 무시하지 않으며 역사적인 의미에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떤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때가 차매 일어날 때의 미래의 사건을 미리서 예표(prefigure)한다는 것이다. David S. Dockery, Biblical Interpretation (Michigan: Baker Book House, 1992), 33.

II. 사도들의 해석 논리
David S. Dockery에 의하면 사도들의 성경 해석학은 대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 Perspective)이라고 한다. Dockery, Biblical Interpretation, 44.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이야기식(narrative form)으로 다루지만, 사도 바울은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교회의 특수 사정에 따라서 복음의 핵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재해석한다. 예를 들면 고전 15장은 부활이 없다고 말한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 부활의 역사성과 의미를 편지의 형식으로 기술하면서 변증하고 또한 험증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일상 언어로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음식을 잡수시고 성경을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묘사함으로서 부활의 역사성을 말하고 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는 것도 헛되며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자라고 했다. “만약 없다면”이라는 가정 부정법을 써서 부활 의미의 중요성을 변증하고 험증했다.


III. 성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 논리
성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은 알레고리칼 해석과 문자적인 해석을 병행했다. 어거스틴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3장까지 주석했다. Van der Meersm은 어거스틴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학생이었으며 그는 글자 그대로 성경 안에서 산 사람( the believing Bible student... He literally lived in Holy Scripture)이라고 했다. F. vander Meer, Augustine the Bishop: the Life and Work of Father of Church, Trans. Brain Battershaw and G. R. Lamb (London and New York, 1961), 343. 그는 창세기 주석에서 창세기는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문자적인 의미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고백했다. 참으로 성경 해석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명저 『기독교 교리』 (De Christina Doctrina)는 이방인을 신자가 되도록 하는 성경 교육 방법과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제 삼권)을 제시하고 있다. Collectanea Augustiniana, Melanges T.J., Van Bavel, Publes Par (Leuven University Press, 1990), 1028. 기독교 교리에서 교리에 해당하는 희랍 말은 παιδεια라는 말로서 교육이라는 말이다. 희랍사람들은 완전한 인간을 만드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Philip Schaff는 성 어거스틴의 De Christina Doctrina 〔On Christian Doctrine(knowledge)〕는 최초의 성경 해석학이며 고대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며 그 후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A Select Library of the Nice and Pod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ed. Philip Schaff, St. Augustine's City of God and Christian Doctrine, Vol.II (Grna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9), vii. Cited as CD. 이 책은 4부로 된 것인데 처음 3부는 주후 397년 그리고 마지막 4부는 주후 426년에 완성했다. 그는 그의 『재고록』에서 자신의 책을 성경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저술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어거스틴은 그의 저술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룰(논리)을 제시했다. 이레니우스가 성경 해석 논리로 “진리의 척도” (the cannon of the truth/the rule of truth)를 제시하고 터툴리안이 “믿음의 규칙”(the rule of faith)이라 했다면 어거스틴은 “사랑의 규칙”(the rule of charity)을 말했다. 예를 들면, 이레니우스는 “교회는 비록 전세계에 걸쳐 있지만... 사도들과 그 제자들로부터 이 신앙을 전한다”로 사도 신경의 전신의 내용을 시작한다.

“한 하나님, 전능하신 성부를 믿는다. 그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다. 그리고 한 분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 하셨다.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섭리와 강림,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수난과 죽은자로부터의 부활과 승천과, 만물을 총괄(엡 1:10)하고 인류 전체의 모든 육체를 새롭게 일으키시기 위해 영광 중에 하늘에서 장차 나타나실 것을 선포하셨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 즉 우리 주요 하나님이시요 구세주이시요 왕되신 분께 하늘과... 그 발에 만물이 모두 무릎을 꿇게(빌2:10-11)하시고 모든 혀가 그를 고백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이들에게 정의로운 심판을 하시는데 악한 영(엡6:12)과 타락으로 인해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사악하고 속된자들과 함께 반역의 상태로 떨어진 천사들을 영원한 불에 던지실 것이다. 그러나 의롭고 거룩한자들과,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다른 이들은 회개함으로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사랑 안에서 견인한 자들에게는 은혜로써 불멸을 주시고 영원한 영광으로 그들을 두르실 것이다.” 프란시스 영, 『초대 기독교 신조 형성사』, 이후정,홍삼열 역 (컨콜디아사, 1994), 26-28.

터툴리안은 “이제 신앙의 규칙에 대하여... 너희는 다음과 같이 믿음을 규정한 것을 알아야 한다”로 시작한다. 신앙의 규칙과 진리의 척도는 성경에서 도출되며 그래서 이 규칙이 올바른 성경 해석을 컨트롤하는 원리로 사용되었으며 이들은 정통 신학의 시금석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성경을 해석하는 룰은 아주 중요하다고 했으며 그 이유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여 가르치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에 기초한 삶을 형성하도록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점에서 성경 해석자는 책임성 있는 해석과 그 해석에 의해서 사는 삶을 살아야 호소력이 있고 권위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은 성경으로부터 오지만 세상적인 학문이 필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조명(divine illumination)을 통해서 도우심을 얻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며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1부에서는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두 가지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는 성경의 저자가 의도하는 의미를 찾는 방법(mode)이요, 다른 하나는 찾은 의미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방법을 제1-3부까지 다루고 제4부에서는 둘째 방법을 다룬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모든 가르침은 사물(things)에 대해서 가르치거나 언어(signs)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봤다. 사물과 언어는 상관관계가 있다. 첫째, 언어는 무엇을 표시 혹은 제시 (signify)하는 사물이다 (signs are things which are used to signify something). CD, I. ii. 2, 11. 둘째, 언어는 우리 감각을 초월해서 무엇을 생각토록 하는 사물이다(a sign is a thing which causes us to think of something beyond the impression the thing itself makes upon the senses). CD, II.i.1, 5-7. 이 사실로부터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물을 언어를 통해서 배우며 언어는 사물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사물을 이해하며 언어를 통해서 세계와 관계를 가진다. 여기서 언어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현대 언어철학에서 본다면 어거스틴은 언어철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제 2부에서 어거스틴은 언어에는 자연적인 언어(natural sign/signa naturalia)와 일상적인 언어(conventional sign/ signa data)가 있다고 했다. 자연적인 언어는 언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지만 무엇에 대한 지식을 전달한다. 예를 들면, 연기라는 언어는 불을 연상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연기라는 언어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불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연기는 불이 있는 곳에서 나타나는 직접적으로 경험되어지는 현상 혹은 증상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 즉 사상, 감정,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 가령 성경에 나오는 언어는 성경 저자의 의도, 사상,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분명한 성경 언어의 의미는 원문을 보거나 문맥을 통해서, 또한 여러 번역본을 비교함으로써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제3부에서는 해석하기 어려운 언어에 대해서 다룬다. 이것은 은유적인 언어(figurative language)인데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든지 은유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온다. 성경에 경건한 생활(purity life)과 올바른 교리(soundness of doctrine)에 관한 것이 아닌 것은 은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CD, III.10.14. 여기서 경건한 생활이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가 있으며, 올바른 교리 혹은 가르침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지식과 관계된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 구절은 분명한 것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CD, III.26.
어거스틴에 의하면 사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 데 즐겨야 할 사물(thing to be enjoyed)이 있으며, 사용될 사물(thing to be used)이 있으며, 즐겨야 하고 사용될 사물(things which use and enjoy)이 있다. 우리가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할 대상은 우리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한다. 그러나 사용의 대상은 우리를 만족과 행복케 하는 것을 돕는 수단이 된다. 우리를 만족케 하고 행복하게 하는 대상(object)은 인간이 아니요, 세상도 아니요, 지고의 선이시요, 참 인간의 행복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만약 우리가 사용해야 할 수단을 만족케 하는 대상으로 삼으면 그 인생은 방황하게 되고 타락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만족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을 얻고 나면 허무하게 되고 또 다시 영원한 행복을 주는 것을 찾아야만 하며 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이다. 그러나 세상 것을 사랑하게 되면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 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신다.
성경은 말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성경 핵심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규칙(the rule of charity), 즉 올바른 성경해석의 척도이다. 올바른 성경 해석이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즐겨야 할 영원한 대상이요 이웃은 하나님 사랑을 통해서 서로 교제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올바른 성경 해석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는데 있으며 그렇게 하는 성경 해석은 설령 저자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틀린 성경 해석이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잘못된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다 보면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CD, I.36.40.
어거스틴에 의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인정한 것을 희망함으로써 살아가며 희망한 것을 사랑으로 소유하게 된다. CD, I. 37. 41, 38, 42. 성경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지식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아야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자는 자기가 해석한 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권위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다.
IV. 렉산드리아 학파(The Alexandrian School)의
성경 해석 논리
풍유적인 해석학(allegorical hermeneutics)은 주후 2-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생겨난 학파로서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한 방법이다. 이 학파의 대표적인 사람은 클레멘트(Clement)와 오리겐(Origen)이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이 살았을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당대의 석학들이 사는 중심지였으며 당시의 최고의 도서관(70만 장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도시는 플로틴누스와 암모니우스, 사게우스에 의해서 창시된 신 플라톤주의, 바실데스의 영지주의, 필로의 사상을 따른 헬라적 유대주의와,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플라톤주의가 한데 엉켜 있는 도시였다고 한다. Justo L. Gonzalez,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1 Vol. (Nashville: Abingdon Press, 1970), 187.
풍유적인 성경 해석학의 선구자는 헬라적 유대인 필로(Philio)로서 그는 희랍 철학을 이용하여 성경을 해석하고자 했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자적인 의미는 성경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없고 알레고리칼 해석을 통해서만 성경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Donald A. Hagner,"Philo," New Dictionary of Theology, 509-10. 풍유는 비유법의 하나로 본뜻은 뒤에 숨기고 비유하는 말만으로 숨겨진 뜻을 암시하는 방법, 속담 혹은 격언이라고 한다. 한자로 풍자는 “빗되어 말할 諷”과 “깨우칠 諭라”는 의미로서 빗대어서 말함으로 깨우치는 수사학적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直喩는 수사법의 하나로서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에 직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내는 수사법으로 “같다” 혹은 “처럼”이라는 표현을 쓴다. 隱喩(metaphor:숨을 隱)는 수사법의 하나로서 원뜻은 숨기고 유추나 공통성의 암시를 따라 다른 사물이나 관념으로 대치하여 나타내는 방법으로써 예를 들면 “A는 B”이다에서 A는 원 관념이고 B는 보조관념이다. 또한 은유는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그 이상을 초월하는 영적인 의미를 표현할 때 쓰는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Allegory is a narrative in which the agents and action, and sometimes the setting as well, are contrived so as to make coherent sense on the literal or primary level of signification, and also to signify a second, correlated order of agents, concepts, and events”(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5th ed. M.H. Abrahams, Holt, Rinehart and Winston, INC., 4). Parable is a short narrative.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학의 대표자는 클레멘트와 오리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성경을 믿음의 규칙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을 중요시했지만 당시 영지주의 자들이나 헬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규칙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학을 제시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가미한 알레고리칼 성경해석 방법을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그들의 성경 해석학은 변증적인 측면에서 발전시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클레멘트에 의하면 성경에는 한 가지 의미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며 성경의 영적인 의미는 단순히 우리의 관찰이나 경험에 의해서 발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알레고리칼 해석에 의해서 발견되어진다고 봤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성경의 주된 의미가 아니라 이차적인 의미라고 했다. 클레멘트는 플라톤의 철학과 알레고리킬 방법을 조화하여 영지주의자의 잘못된 지식(false gnosis)에 반대하여 성경의 진정한 지식(true gnosis)을 얻고자 했다. 여기서 진정한 지식은 로고스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이다.
오리겐은 최초의 조직 신학자이며 성경 신학자인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클레멘트와 같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의 깊은 의미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며 영적인 의미라고 봤다. 그는 인간의 구성 요소를 인식론의 기초로 하여 인간이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된 것같이 성경의 의미도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 세 가지는 문자적인 의미(litera or physical), 도덕적인 의미(moral or psychical sense), 영적인 의미(allegorical or intellectual sense)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깊은 의미는 영적인 의미라고 했다. Origen, First Principles, 4. 1. 11-17(For as man consists of body, and soul, and spirit, so in the same way does Scripture, which has been arranged to be given by God for the salvation of man). 세 가지 차원의 성경의 의미는 성경에서 한가지 차원의 의미(문자적인 의미)를 주장한 안디옥 학파와 다르다. 문자적인 의미란 성경에 여러 차원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 차원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 성경의 각 언어에는 하나의 의미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오리겐의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은 그의 성경관과 신플라톤 철학에 의거한 것이다. The Fathers of Church, A New Translation, Vol. 80(Washing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1989), 12. Cited as FC.
알레고리는 희랍에서 기원이 되어지며 신의 메시지에는 신비스러운 의미가 있기 때문에 문자적인 의미로써는 파악할 수 없다고 봤다. 알레고리칼 해석(영적, 형이상학적)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영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신적인 기원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신적인 것은 영원하고 비역사적이며 초월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은 한계성이 있고 현상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오리겐도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Dan G. McCarteny,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48 (1986), 281-301. Cited as WTJ. Paul K. Jewett에 의하면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과 알레고리의 해석은 구분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Paul K. Jewett, Concerning The Allegor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 WTJ. 알레고리는 고정되고 인정을 받는 문학의 한 형식이다(an allegory is a fixed and recognized form of literature). 성경에도 알레고리가 있다. 은유적인 표현이 그 중의 하나이다. 알레고리를 해석하는 것은 은유적인 해석(metaphorical interpretation)이다. 그러나 알레고리칼 해석은 알레고리의 해석이 아니다. 알레고리의 해석은 은유적인 해석이다. 그렇지만 은유적인 해석은 은유의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점이 알레고리의 해석과 알레고리칼 해석의 차이다. 하버드 대학 희랍 문학과 철학 교수인 H.A. Wolfson은 그의 명저 『파일로』라는 책에서 알레고리칼 해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알레고리칼 해석은 텍스트에 있는 무엇을 텍스트와 관계없이 해석하는 방법이다”(The allegorical method essentially means the interpretation of a text in terms of something else, irrespective of what that something else is). H. A. Wolfson, Philo (Cambridge, 1947), I., 134.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의 가장 좋은 예는 어거스틴의 사마리아 사람 비유(눅 10:29-37)에서 볼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여행하던 사람은 아담이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하늘 도성이다. 아담은 그 축복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여리고는 달을 의미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달은 만삭되었다가 반달이 되고 결국에는 이울고 마는 특징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담을 공격한 도적들은 마귀와 그의 졸개들이다. 저들이 아담을 때리고 옷을 벗긴 것은 그의 도덕성을 갈취하고 죄를 짓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그를 거의 죽은 상태로 내어버리고 떠났다. 그를 도와주지 아니하고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원을 가져오지 못하는 구약의 제사장과 사역자들이다. 사마리아인이란 말은 보호자란 뜻이 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상처를 싸매는 것은 죄를 덮음을 의미하고, 기름은 소망의 위로를 의미한다. 그리고 포도주는 열심히 일할 것에 대한 권고이다. 인간을 태운 짐승은 인간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을 믿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옮겨진 주막은 하늘 도성으로 돌아가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잠시 쉬게 하는 교회를 상징한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준 동전 두 개는 이 생과 장차 오는 생에 대한 약속이거나 교회에 준 두 성례를 의미한다. 여관 주인은 사도 바울이다.”『성경주석학』, 헤이즈. 할러데이 공저, 김근수역(도서 출판 나단, 1993), 27-28.

오리겐에 의하면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문자적인 의미를 초월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봤다. 세상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그림자로 본 것이다. 환언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적인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여기에 알레고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자적인 의미는 성경의 깊은 의미가 될 수 없으며 감추어진 신령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리겐은 주로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찾고자 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며 인간의 내면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했다. FC, Vol.71, 63. 여기서도 오리겐은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으며 영적인 의미야말로 진정한 의미라고 한다. 그렇지만 오리겐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의 중요성도 말했다.
오리겐은 기독교를 반박한 『셀수스에 반대』(Against Celsus)에서 문자적인 의미의 중요성을 세 가지로 말했다. 첫째, 성경은 사실적이고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있다. 둘째, 단순한 문자적인 의미는 평신도의 신앙을 북돋운다. 셋째, 문자적인 의미는 변증적인 면이 있으며 성경을 공부하도록 돕는다. Dan G. McCartney, “Literal and Allegorical Interpretation in Origen's Contra Celsum,” W TJ, Vol.48 (1986), 281-301. Against Celsus, 3.43., 1.17; 18;27; 7.60), 288-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에 의하면 성경은 풍유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성경의 텍스트에 숨겨있는 깊은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은 성경의 역사성을 무시하며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을 영해함으로써 성경의 본뜻을 곡해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다.

V. 안디옥학파(The Antiochene School)의
성경 해석 논리
안디옥학파는 역사적 그리고 모형론적 해석학(Literal-historical and typological hermeneutics)으로 특성 지워진다. 안디옥학파는 안디옥에서 기인된다. 안디옥은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최초로 이방인 신자를 크리스천이라고 불였던 곳이며 동방 제국의 수도였다. 안디옥학파에 의하면 성경의 주된 의미는 역사적인 의미 즉 문자적인 의미라고 믿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성경의 깊은 의미를 알레고리칼 방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안디옥학파는 성경의 깊은 의미는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theoria/θεωρια)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봤다. Theoria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나 희랍어로 Theoria는 “보다” “관찰하다” “묵상하다(contemplate) ”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사고나 논리적인 추론이라기 보다는 이미 소유한 지혜나 지식을 관조하는 통찰력(insight)을 의미한다. 확정되지 아니하고 변화하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사변이나 논리적인 추론이 필요하지만 이미 확정되고 확고 부동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W.K.C. Guthrie, 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Vol.6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396).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theoria을 통해서 모형을 찾는 것이다. 성경은 구속사이다. 구속사이기 때문에 예언과 성취가 있고 그 가운데 모형이 있다.
안디옥학파의 선구자인 Diodore of Tarsus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은 theoria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알레고리와 테오리아의 차이』 (On the Difference between Theoria and Allegory/τιs διαφορα θεωρια και αλληγοριαs))라는 책을 썼지만 아리안 주의자들에 의해 불타서 없어졌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는 “우리는 영적인 해석이나 theoria을 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이야기(historia)는 theoria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theoria는 탁월한 통찰력의 기초요 하부 구조이다. 그러나 theoria를 역사적인 기초가 없이 사용한다면 결국은 그것은 theoria가 아니라 allegory가 되어 버린다”(We do not forbid the higher interpretation and theoria, for the historical narrative does not exclude it, but is on the contrary the basis and substructure of loftier insights.... We must , however, be on our guard against letting the theoria do away with the historical basis, for the result would then be, not theoria, but allegory)고 말했다. Cited by 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4th Rev. ed(Sanfrancisco: Harper and Row, 1978), 76-78.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게 하는 것은 결국 알레고리칼 해석이 된다는 것이며, theoria라는 말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찾게하는 영적인 통찰력 혹은 관찰을 의미한다. Frederic W. Farra, History of Interpretation, Reprinted 1961 by Baker Book House from the 1886 edition published by E. P. Dutton, 213, 각주 3번. 디오도레의 의해서 배운 두 사람이 Theodore of Mopsuestia와 John Chrysostom이다. Mopsuestia는 성경의 문법적인 구조를 중요시했으며 성경을 역사적 상황에서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성과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theoria를 사용하는 것은 알레고리칼 해석의 결과를 가져온다. 안디옥학파는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가 불가능할 때 모형론적으로 해석했다.
모형(type)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τυπος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닮음(resemblance). 유사성(likeness), 비슷함(similarity)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모형론적인 해석은 구약을 해석하는데 사용된 해석으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신약은 예언의 성취라는 상관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은 구속사로서 구약의 사건은 다소 불분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안디옥학파의 대표자는 John Chrysostom이다. 그는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문법적 의미를 중요시했으며 성경은 하나님이 저자이시며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쓰여 있음을 중요시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플라톤의 이데아와 그림자의 형이상학적 세계 이해에 중점을 둔다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궁극적인 실제는 세상의 사실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성경에서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크릿소스톰은 synkatabasis(God's gracious acceptance of human limitations/astheneia)라고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성을 고려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쓰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 언어의 정확성과 단순성을 말한다. FC, Vol. 74, 17-18 . 그는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은 올바르지 아니하며 신자를 잘못되게 이끈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실례는 잠언 5:17-19, 이샤야 8:7-8, 그리고 에스겔 17장으로 든다. 이들은 알레고리이지만 크리소스톰은 은유적으로 해석한다. 갈라디아서 4:22-24에서 사도 바울의 알레고리를 은유적으로 해석한다. “바울은 언어를 잘못 사용하여 예형(豫型)을 비유라고 하였다. 바울의 진의는 이것이다. 즉 역사 자체는 명백한 의미를 소유할 뿐 아니라 다른 것도 일러준다. 그래서 비유라고 불린다. 그러나 무엇을 일러주는가? 현존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By a misue of language he[Paul] called the type allegory. What he means is this: the history itself not only has the apparent meaning but also proclaims other matters; therefore, it is called allegory. But what did it proclaim? Nothing other than everything that now is). John Chrysostom,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4.24. 그는 안디옥학파의 theoria를 예술과 비교해서 성경의 두 가지 의미(역사적.모형론적 의미)의 관계를 보여준다. “진리가 실현되기까지는 예형(豫型)에 진리라는 명칭을 준다. 그러나 진리가 성취되면 그 명칭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繪畵(회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술가가 왕을 스케치하지만 그 위에 도색 되기 전에는 그 그림은 왕이 아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도색이 될 때 진리 때문에 그 型(형)이 감추어지며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며 그 때 비로소 우리들은 ‘이 왕을 보라‘하게 된다”(The type is given the name of the truth until the truth is about to come, but when the truth has come, the name is no longer used.. Similarly in the painting: AN artist sketches a king, but until the colars are apllied he is not called a king; and when they are put on the type is hidden by the truth and is not visible; and then we say, 'Behold the King'). John Chrysostom, In Epist. ad Phil. Hom., 10. 왕에 대한 스케치와왕의 초상화의 관계에서 스케치는 역사적 의미요 초상화 왕의 윤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상의 최종적인 의미는 스케치와 초상화와의 관계인 모형론적인 의미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는 성경은 분명하게 쓰여졌다고 봤다. 따라서 성경의 명료성을 강조했으며 성경의 콘택스에 의한 문자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VI. 중세 성경 해석 논리
중세에 있어서 성경 해석은 알레고리칼 해석을 네 가지 계층의 의미로 구분했다. Wayne G. McCown은 다음과같이 요약한다.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믿음의 조상들이 무엇을 했는가를 보여주며, 알레고리는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가를 보여주며, 도덕적인 의미는 우리의 믿음이 생활의 규칙을 주며, 신비적인 의미는 어디에서 우리의 영적인 투쟁이 끝나는가를 보여준다(The letter shows us what God and our fathers did. The allegory shows us where our faith is hidden. the moral meaning gives us rules of daily life. The anagogy shows us where we end our strife). 그러나 Mark S. Burrows에 의하면 중세 후기에는 성경과 전통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경향으로 갔다고 했다. Biblical Hermeneutics in Historical Perspective, Ed. Mark S. Burrow & Paul Rorem, 152-72. 전통과 성경의 동시적인 상관관계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한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두 지평의 융합을 의미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텍스트와 해석자의 관계가 동시적이라는 사실이다.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텍스트와 해석자의 관계는 동시적이 아니라 텍스트와 성령님에 의존적이다. 중세 성경 해석은 텍스트보다는 해석자의 관점을 더 중요시함으로서 하나님 말씀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VII.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
Paul L. Lehmann에 의하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칼빈은 루터보다 더 명료하고 단순하며, 성경 해석사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CH, Vol.6, ed. Richard C. Gamble, Garland Publishing, INC, New York, 1992), 412. Kemper Fullerton은 칼빈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성경을 학문적으로 해석한 사람이(the first scientific interpreter in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라 했다. Kemper Fullerton, Prophecy and Authority: A Study in the History of the Doctrine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 (New York: Macmillan, 1919), 133. Fullerton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칼빈과 루터는 모두 문법적 역사적 의미를 성경 해석의 원리(exegetical principle of the grammatic-historical sense)로 삼았다. 루터는 모든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콘택스트를 무시하고 모든 성경의 텍스트에서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 무리한 기독론 중심의 해석은 반대했다. David L. Puckett, John Calvin's Exegesis of Old Testament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5), 10. 칼빈의 성경 해석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칼빈의 성경의 필요성, 성경관, 인문주의 영향, 말씀과 성령의 관계, 해석자의 자질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의 성경 해석의 논리는 성경에서 도출했기 때문이다.

1. 성경의 필요성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양심과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 때문에 예수를 안 믿는 삶도 그 나름대로의 종교성을 갖고 있다. 부적, 섬 지방에 있는 많은 미신, 고사 지내는 행위 등은 왜곡된 종교성의 표출이다. 사실 무신론이라는 언어 자체가 모순된 말이다. 이미 그 말 속에는 신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보여준다(롬1:19).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고의적인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위엄은 인간의 이해력을 능가함으로 하나님을 탐구하기보다는 예배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생각하도록 하셨다. 성경은 창조의 세계를 보이지 않은 것들의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표상이 아니면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세계를 우리에게 표상하기 때문이다(롬 1:20, 히 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이나 종교의 씨앗을 통해서는 참다운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타락을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게 할 뿐이다. 구속주이시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성령님이 선지자와 사도를 감동시키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성경은 안경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 Vol.I(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7), 1.6.1. Cited as ICR. 『기독교 강요 요약』, 이형기박사 옮김(크리스천다이제스트, 1986), 30-31. 이 말은 메타포(은유)이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눈이 아프거나 시력이 약하면 실제로 잘 볼 수 없는 것처럼 성경은 타락으로 인해서 참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게 한다. 성경이 안경이라는 은유는 카톨릭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연 이성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케 하여 교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이성은 올바른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만이 우리에게 참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고 가르쳐 준다.

2. 칼빈의 성경관 (Calvin's View of Scripture)
1) 성경의 저자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 (1.6-9), 성령과 구원에 관계(3.2), 성경의 권위와 영감(4.8)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을 다 포함한다. 성경 66권은 표면상으로 보면 다 그 저자가 있다. 오경은 모세가 저자이다. 이사야 선지서는 이사야가 저자이다. 사도 바울 서신은 사도 바울이 저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자기의 말이라고 하지 않았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했다. 사도 바울도 성경을 자기의 말이라고 하지 안했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해 주는가?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반증해 주지 않은가? 만약 하나님이 저자가 아니라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하고 있겠는가? 그렇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어떤 부분은 거칠고 잘 다듬어지지 아니한 문체(a rude and unrefined style)도 있다. ICR, I.VIII.2. 이것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은가?
성경에 거칠고 잘 다듬어지지 아니한 문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순된 것은 아니다. 칼빈은 이 모순을 조정 이론(accommodation theory)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정과 능력을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케 하시고 어머니가 어린애를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의 능력에 맞게 표현하게 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쉬운 말로 알기 쉽게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이다. Lewis Battles에 의하면 조정 이론(God's Accommodation to human capacity/caput)은 칼빈이 창안해 낸 것은 아니라고 했다. 교회사를 볼 때 Origen, Augustine, Chrysostom, Hilary of Poitiers 사용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는 이들과 달리 이 원리를 일관성 있게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매꿀 수 없는 갭을 매꾸는데 적용했다고 말했다. Readings in Calvin's Theology, Ed. Donald K. Mckim (Baker Book House, 1984), 22.
칼빈에 의하면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선지자와 사도들을 성령님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케 하신 것이다.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지만 성경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 들어 있는 책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사상과 감정이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ICR, I.VI. 2.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은 절대 무오하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숨결이시며 하나님 자신이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다(딤후3:16).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을 보여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경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쳐 주며 율법과 선지서,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을 가르쳐 준다. 칼빈은 신정통주의에서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예수님과 증거로써 하나님의 말씀(Neo-orthodox conundrums in driving a wedge between Christi as the Word and Scripture as Word in the sense of witness)을 구분하지 않는다. 성경을 삼위일체적으로 설명한다.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 마음에 성경의 권위와 진리를 증거하며, 동일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성경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주시며, 하나님의 지혜요 말씀으로 증거하며,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말씀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배우며, 우리 마음에 부음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다. Richard A. Muller, “The Foundation of Calvin's Theology: Scripture as Revealing God's Word,” Duke Divinity School Review 44(1979), 14-24.

2) 성경의 권위
성경의 권위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이다. 칼빈이 성경의 권위를 들고 나온 이유는 성경이 신적인 권위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의 권위가 아니라 믿음과 진리의 은행으로서 교회가 성경 권위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이 교회의 수장이요 성경 해석의 최후 재판관이 된다고 믿었다. Paul Lehmann에 의하면 우리 장로교에서는 성경은 믿음과 신앙의 궁극적인 규범이 성경이지만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경의 권위는 교회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구원의 확실성도 성경 자체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부여한 것처럼 보여지므로 성경의 신적 권위를 약화시킨다.
성경이 절대 무오한 진리가 되는 것을 교회가 결정 하게 된다면 절대적인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교회가 성경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성경의 기초 아래 세워진다고 칼빈은 말했다. ICR, I. VII. 2. 그렇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성령님의 내적인 증거에 의해서 확신되어진다. 성령님은 성경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고 계심을 증거한다.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이 우리의 지성에 계시하시고 마음에 인을 치셔서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으로 증거하며 확신케 한다. 이보다 더 완벽한 증거는 없는 것이다. ICR, I. VII. 4.
성령님의 증거나 조명을 통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한 사람에게 성경의 권위는 교회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서 이루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성경의 자증에 기인하는 것이다. ICR, I.VII. 5. αυτοπιστον(self-authenticated) 성경의 자증성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가장 완벽하게 말해 준다. 성경이 스스로 그 권위와 진실성을 말한다. 자증성이란 성경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스스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게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 해석이나 설교는 말씀 자체가 말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하시는 설교나 해석은 자연스럽고 분명한 것이다.

3) 성경의 내용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τα δυναμενα σε σοφιαι εις σωτεριαν δια πιστεως της εν Χριστω Ιησου, 딤후3:15). 칼빈은 분문 주석에서 “구원에 충족한 지혜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대한 아주 귀한 찬사로 다음 구절은 그 의미를 더욱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우리를 성경의 핵심이요, 알맹이가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이끄는 것은 당연하다.” Calvin's Commentary, Vol.21 (Michigan:Baker book House, 1986), 248-49. “For this reason he directs us to the faith of Christ as the design, and therefore as the sum, of the Scripture for on faith depends also what immediately follows.” Cited as CC. 성경에서 예수님게서 직접 성경은 자신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증언하셨다. “Everything must be fulfilled about me in the law of Moses, the Prophets and the Psalms(Luke 24:44-47).” 여기서 모세의 율법은 모세 오경을 말하며 선지자는 선지서를 의미하며 시편은 성문서를 의미함으로서 구약 전체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핵심이요 설계다. 또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치는 책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설계요 핵심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구약을 볼 수 있도록 설계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의 통일성을 이루는 설계요 신구약 통일성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신구약의 통일성을 이루는 핵심이 없이는 신약과 구약을 연결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신구약을 하나로 묶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성경의 모형론적 해석이나 구속사적인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Von Rad는 신구약을 두개의 찬양대로 비유하면서 두 개의 찬양대가 하나의 핵심인 예수를 지칭하면서 부르는 두 개의 찬양대라고 했다. Essays on Old Testament Hermeneutics, Ed. Claus Westermann Trans. James Luter Mays(Atlanta:John Knox Press, 1979), 14-24..

4) 성경의 명료성과 단순성
성경은 왜 단순하고 명료한가?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배려 혹은 조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제약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과 감정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게 쓰여졌을 경우, 우리가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없다고 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에 맞게 언어를 선택하시고 쉬운 말로 기록토록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 가운데 구약을 일상 히브리말로 신약도 일상언어인 코이네 희랍어로 기록케 하신 것이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명료하고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서 어린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처럼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서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칼빈의 조정 이론이며 바로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배려로 말미암아 단순하고 명료하게 쓰여져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해석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칼빈의 십계명설교』, 벤자민 팔리 편역 (성광문화사, 1991), 427-29. 둘째는, 성경은 인간의 사상이나 논리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어느 곳을 읽어도 성령님의 감동이 안된 것이 없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고 각 성경의 개체성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배려와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다. 성경은 구원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성경 해석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는 칼빈의 성경관에 기초해 있고 성경으로부터 도출해 낸 것이다. Donald Mckim은 “살아 있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기록된 말씀이 가장 잘 해석되는 말씀”(The living word, Jesus Christ, is the one through whom the written word of Scripture is best interpreted)라고 했다. 이 말은 성경 해석 방법이 아니라 성경 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시금석이라고 볼 수 있다.

3. 인문주의 사상과 성경 해석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프랑스 인문주의 자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그 당시 최고의 학문을 배운 사람이다. 그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스타일을 자쿠에스 레페브레의 서클(the circle of Jacques Lefevre)로부터 배웠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이 교부들의 경건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변적인 논리나 전문적인 변증법에 의해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세를 지양하고 단순성과 명료성을 중요시하는 자세였다. “What the humanists.... admired in the piety of the Fathers .... was its simplicity and clarity[which avoided] emphasizing difficulties, nodi, openly opposing authorties sic et non, probing questiones in disputuations, and finally reconciling them by a subtle dialectic.....”( Eugene F. Rice., “the humanist idea of Christian anitquity:Lefevre d'Etables and His circle," in Werner L. Gundersheime, ed., French Humanism, 1400-1600(harper Torch books; New York, Harper& Row, Publishers, 1969),169. E. David Willis에 의하면 칼빈의 사상은 dialectical diastasis라기보다는 수사학적 상관관계(rhetorical correlation)라고 했다. 칼빈은 두 가지 수사학 전통에 영향을 입고 있다. 하나는 변호나 토론하는 자가 토론이나 변호하는 것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기술로서 수사학이며 다른 하나는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서 듣는 자가 이해토록 설득하는 수사학이다. 후자의 수사학적인 전통이 칼빈의 사상 형성에 더욱 영향을 주었다. 더군다나 칼빈이 법률가로서 훈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수사학에 능통한가를 시사해 준다. 칼빈의 사상에 후자의 수사학은 믿음을 설득으로 지식을 효과적인 진리로 계시를 하나님의 능력을 낮추어서 인간의 능력에 조정한 것을 통해서 보여진다고 윌리스는 말했다. The Context of Contemporary Theology, eds. Alexander J. McKelway and E. David Willis, John Knox Press, 1974, 43-63.
칼빈은 당대의 최고의 학문을 배웠고 인문주의 학문을 배웠다. 수사학적 방법이란 고전 문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세상적인 수사학은 rethorique frivole (worthless rethoric)이다. 그러나 세례 받은 수사적인 방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된다. 세상적인 지식이 성경을 해석하는 데 직접적으로는 도움이 안되지만 성령 세례를 받은 좋은 방법은 간접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칼빈에 의하면 모든 학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향에 목표를 두고 공부해야 한다고 본다.
Heinrich Bullinger는 “Of the sense and Right Exposition of Scripture”라는 설교에서 다섯 가지 성경 해석 방법을 제시했다. 첫째, 성경 해석은 우리의 믿음에 동의해야 한다. 둘째, 성경 해석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성경 해석은 콘택스트(context)를 고려해야 한다. 넷째,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해야 한다. 다섯째, 성경 해석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The Decades of Herny Bullinger, ed. Thoimas Harding(Cambridge university Press, 1844), 70.
칼빈은 인문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이것은 알게 모르게 칼빈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 사회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했다는 말은 아니다. 인문 사회학을 통해서 인문 사회학의 장단점을 알게 되고 성경에서 도출되는 성경 해석 방법과 다르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칼빈의 성경 해석 원리
1) 성경 해석 목표 (the goal of Biblical Interpretation)
칼빈은 1539년에 강요 2판을 발행한 후에 로마서 주석을 출판했다. 이 주석의 서문에서 주석자의 가장 좋은 목표를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성경의 단순성과 명료성(lucid brevity)에 기초해야 한다. 둘째, 해석자는 성경 저자가 의도하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CC, Vol. 19, xxiii. Richard C. Gamble은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칼빈이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밝힌 대로 성경의 명료하고 단순한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성경의 스타일과 연관을 갖고 있다고 했다(“Exposition and Method in Calvin,” WTJ, 49(1987) 153-165, WTJ 47(1985), 1-17). 그리고 칼빈은 갈라디아서(4:22) 주석에서 성경의 진정한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verum sensum scripurae, qui germanus est et simplex)라고 말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경 해석자의 목표는 성경에서 저자가 말하는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 혹은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는(to show) 것이 중요함을 말해 준다.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당대의 석학들의 성경 해석 방법을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멜랑톤의 로마서 주석은 성경의 주된 개념을 중심으로 성경을 주석을 함으로써 로마서 전체를 보기가 힘들며 부커의 주석은 너무 현학적으로 흘러서 평신도가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자신의 성경 해석은 성경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그 의미에 기초하여 살기를 원했다.
Imbaart de la Tour도 말하기를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단순하게 그리고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P. Imbart de la Tour, Calvin et l'Institution Chretienne(Paris, 1935), 63. Hans-Joachim Kraus도 칼빈의 성경 해석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의 통일성 가운데 나타난 성경의 살아 있는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고 하면서 여덟가지 성경 해석 방법을 제시했다. Calvin's Exegetical Principles, Interpretation, Vol.31(Jan., 77), 8-18.
칼빈은 성경 속에서 성경 해석의 원리를 찾았고 성경 스스로 말하도록 했다.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는 누구나 다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이 발견하는 것이다.

5. 성경 해석과 성령의 조명
성령과 성경 해석 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칼빈에 의하면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올바로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 칼빈은 “문자 자체의 말씀은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아무런 효과도 유익도 줄 수 없다”(the bare word has no effect or profit without the illumination of the Holy Spirit). Instituion of 1541, Vol.II, 29. 성령에 의한 영감은 종교개혁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모든 것 위에 있다. 루터도 성경과 신자 관계를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그에 의하면 “말씀과 성령”이다. 이 말을 칼빈은 더 명료하게 설명했다. “성령 없이는 말씀은 죽은 문자이다. 말씀이 없이는 성령은 환상처럼 떠다닌다”(Without Spirit, the word is a dead letter; without the Word, the Spirit flutters as an illusion). Imbart de la Tour, Calvin et l'Institution Chretienne, p.61f; J. Chartrou -Charbonnel, La Reforme et les Guerres de Relgion (Paris, 1948), 85.
성령은 성경의 기자를 감동시켜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동일한 성령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조명하사 하나님의 말씀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깨닫게 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확신케 한다. CC, Vol.20, 141. 성령의 검으로서 말씀(μακαιραν του πνευματος Ο εστιν ρεμα θεου)은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엡 6:17)에서 논리적으로 보면 말씀은 검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말씀이 검으로서 역할을 하려면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말씀은 검은 검이로되 쓸모가 없는 검이 되는 것이다. 말씀의 칼을 날쌔게 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세상의 해석학이 아무리 좋고 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는 무용지물이 된다. 다만 세상 학문이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는다면 성령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칼빈은 에베소서 주석에서 성령과 말씀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에베소서 6:17말씀은 그것을 설명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만 이라고 주장하면 신비주의에 흐르며 말씀만 이라고 하면 이성주의 빠지며 말씀과 설령을 통해서라야 진정으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은 히브리서 4장 10절 주석에서도 성령님의 역사를 중요시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칼빈은 본문을 주석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선포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했다. CC, Vol..22, 103.
성경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내적인 조명은 필수적이다. 칼빈은 누가복음 24:44-45(“또 이르시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대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을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의 주석에서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의 내적인 조명 혹은 가르침을 받어야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요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이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며 그 성령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주님께서 성경에서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요14:26). 성령은 진리(το πνευμα εστιν η αλητθεια)이시기 때문에 성경을 진리로 가르쳐 주신다(요일5:6).

6. 성경 해석과 해석자의 자질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두 지평이 있다. 성경과 해석자이다. 성경 해석은 이 두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성경과 성경을 해석하는 자이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이 두 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이 두 관계를 Anthony C. Thiselton은 두 지평이라고 했다. Anthony C. Thiselton, The Two Horizons New Testament hermeneutics and Philosophical Description(Michigan:William B. Eermans Publishing Company, 1980), xix. 여기서 지평이라는 말은 은유로 해석 자의 한계성을 의미한다. 두 지평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서로의 상관관계에 의해서 서로의 지평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했다. Anthony Thiselton, The Two Horizons, xix. 그러나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과 해석자의 관계는 상관관계라기보다는 성경과 성령에 의존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해석자는 늘 성경에 의존하며 항상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해석자의 관점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새로워져야 한다.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하지 않지만 해석자의 관점은 항상 바꾸어져야 한다. 해석 자가 살고 있는 시대 상황은 변하기 때문이다. 해석자는 항상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 시대에 주시는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1451년 그의 강요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아서 모든 것에 비추지만 소경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이해하는 데 소경이며, 그래서 우리 내적인 선생님이신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다(the Word of God cannot enter into our spirit unless the Spirit of God, who is the inner master, give us access to it by his illumination). Institution of 1451, Vol.II, Paris, 1937, 13. 중요한 것은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타락성에 의해서 소멸되지 않는 한 본질상 항상 명료하다( Still it remains a fixed principle, that the word of God is not obscure, except so far as the world darkens it by its own blindness). CC, Vol 16, 102-03. 이 말은 아주 성경을 해석하는데 또한 칼빈에 의하면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원리라고 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연스럽고 분명한 성경의 의미는 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칼빈의 성경 해석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명료하고 분명하다. 그래서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이해못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타락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잘 이해 못하는 것은 성경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우리가 회개하고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른 경건한 생활을 하면 우리는 성경에서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철학적인 이론이나 논리에 의해서 추론해 낸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의 언어가 본문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은 아무나 갖는 것은 아니다. 눈이 나뿐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만이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석자의 관점이 늘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1) 성경의 제자 (a disciple of Scripture)가 되어야 한다. ICR, 1.6.1-2.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은유적인 표현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어떤 유명한 사람의 제자라고 할 때 제자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선생이 누구인가를 속속들이 알며 선생의 삶의 스타일을 배우며 또 그렇게 가르치고 사는 사람을 말하여 제자라고 할 것이다. 제자의 특성은 선생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칼빈은 자기를 소개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소개했다. 때문에 그는 일생 동안 말씀을 주석하고 가르치고 선포하며 일생을 살았다.
성경에는 두 가지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지식을 알 수 있는가?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칼빈도 하나님의 올바른 지식은 순종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ICR. I.VII.2.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2) 성령의 학교 (School of Holy Spirit)에서 배워야 한다.
칼빈은 성경은 성령의 학교라 했다. ICR, III.21.3. 성경은 학교이다. 그러나 이 학교는 성령님이 운영하시고 주관하시는 학교이다. 학생은 성경을 배우는 자이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성경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충만하게 배우도록 도와 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선생이다. 학교를 누가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학교의 발전과 학생들의 질이 달라지는 것처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해한 그것에 의해서 신자의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 하시도록 해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학교라는 말은 인문 교육이나 신학 교육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선지자와 사도를 감동시켜 성경을 기록케 하신 분이 성령님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동을 받지 않은 성경 해석, 설교, 가르침은 생명력을 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문자적인 의미는 성령의 학교에서 배운 사람에 의해서 선포되어지고 가르쳐지고 해석되어진다고 할수 있다.

3) 경건한 생활
칼빈은 경건을 다음과같이 정의했다. “경건의 요점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피하고 싶은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으므로 이 심판 앞에서 두렵고 떠는 마음과 태도에 있다. 오히려 참 경건이란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며 그의 의를 수용하고 죽을 지언정 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은, 순수하고 참된 열심에 있다. 이러한 열심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몰염치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날조하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하되 하나님이 자기를 저들에게 계시하고 선포하신 대로 이해한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요약 』, 이형기박사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0), 29.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이란 단순히 외적인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신앙 생활 전체를 의미한다. 참 경건한 생활이란 매사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며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렇게 살도록 변증하고 험증하는 자이다. 특별히 성경 해석과 연관하여 마지막 절에 있는 말씀을 우리는 깊게 영접해야 할 것이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계시하고,” “선포 한대로” 이해한다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혹은 성경대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경건한 삶은 성경 해석이요 성경 해석은 곧 경건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7. 성경 해석 방법
1) 역사적 문법적 성경 해석
(historical grammat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Kemper Fullerton은 그의 저서 『예언과 권위』 (Prophecy and Authority)에서 칼빈의 성경 해석 방법은 문법적, 역사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여기서 문법적이라는 말은 성경의 문법적인 구조와 언어를 중요시하며 역사적이라는 말은 성경 콘택스트의 역사적인 상황을 중요시하며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말한다. 그러면서 칼빈은 신학적인 전제와 석의적인 방법의 조화가 아니라 석의적인 방법이 신학적인 전제를 컨트롤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는 전제가 성경 해석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문법적 역사적인 성경 해석 방법이 주도한다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루터와 다르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적인 전제가 성경 해석의 방법을 인도하는 원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경을 문법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방법을 컨트롤하는 것은 신학적인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위적으로 루터처럼 모든 성경 구절에서 예수를 찾는 것은 아니다. 환언하면 칼빈은 구약을 해석할 때 모형론적으로 해석하지만 그 가운데 있는 루터처럼 문법적 역사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해석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씨는 루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칼뱅은 여자의 “씨”(ערז)는 삼인칭 여성 단수이지만 집단 명사로써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없다. 칼빈에 의하면 집단적 단수 명사가 한 사람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때문에 직접 여자의 씨를 예수님이라고 말하지 아니했다. 교회사를 보면 본문은 Protoevangelium(원시복음)이라고 해석한 것이 통례이다. 칼빈은 이들의 해석에 동의하면서도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사탄과 인간 사이의 계속적인 갈등이 있을 것이며 결국은 인류가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제시한다고 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오심을 말한 것이지 직접 여자의 씨를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CC, Vol. 1, 170. 여기서 우리가 칼빈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칼빈은 얼마나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의 문법적 역사적인

 

(이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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