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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그리스도인의 증거(요한복음 13:31-35)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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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증거(요한복음 13:31-35)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랑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어느 소아과 병원 의사 선생님이 파리하게 병든 어린아이를 진찰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내가 고칠 수 있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답답한 마음으로 "무슨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 의사는 대답했습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생긴 병입니다." 다시 어머니는 물었습니다. "나는 이 어린아이를 열심히 사랑했는데요." 의사 선생님은 말합니다. "어머니는 사랑했다고 하지만 이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흔적이 없습니다."

이 세대는 사랑이 없어서 병들고 있습니다. 다른 그 무엇으로도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다시 사랑을 찾는 길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이 세대를 치료할 수 없습니다. 요새 유행가 가사의 90%는 그 주제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무척이나 많이 듣고 삽니다.

50년을 해로하고 금혼식을 하는 부부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50년을 같이 산 남편이 그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보았느냐고 말입니다. 한 마디로 해 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50년을 같이 살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안하고 사랑하며 산 것이 옛 우리 조상들의 사랑이었습니다. 요새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헤프게 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변질되었습니다.

이질화되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미국 유학 시절에 학생들하고 같이 식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좋은 음식이 나오면 좋아하고 함성을 지릅니다. 어느 날 애플 파이가 나오니까 "I love an apple pie"라고 합니다. 그들의 영어 하는 것을 보니까 조금만 좋으면 "I love" 라고 말합니다. I love라는 말을 그렇게 흔하게 씁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사과도 사랑하고 나무도 사랑하고 심지어 뱀도 사랑한다고 하니, 정말 사랑하는 애인을 만났을 때에는 도대체 뭐라고 하느냐?" 그랬더니 "I need you"라고 말한답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하오."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I love you는 없어지고 I need you가 남았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서로가 사랑을 받겠다는 사람뿐입니다. 설사 사랑을 한다 하더라도 받는다는 전제하에 사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여러 가지로 소문이 났습니다만 은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사랑 없는 교회입니다. 아무리 찾아가 보아도 인사하는 사람도 없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악수하자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는 말을 붙일 수도 없더라고 합니다. 그럴 거예요 사랑 받기를 바라고 모인 사람들뿐이니까 말입니다. 사랑을 주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사랑을 받겠다고 만 하는데, 주는 사랑 없는 사랑을 누가 받겠습니까? 친절한 교회를 찾아서 방랑의 길을 떠나 돌아다니다가 이 교회로 모였는데, 역시 이 교회도 그 친절을 베풀지 못합니다.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 생각은 없고 누군가가 친절을 베풀어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아무도 여기에 응할 사람이 없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신분증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신분증이라 하면 이름과 나이와 직업과 생일 그리고 주소, 성명 이런 것 아닙니까? 그러나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신분증은 무엇입니까? 십자가 목걸이를 해야겠습니까? 남자들로 말하면 가슴에 십자가 배지를 달아야 하겠습니까?

어느 때 친구가 전에 없이 커다란 금 십자가를 가슴에 단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붙들고 한 마디 했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어느 사람이 쓴 논문을 보았더니 가슴에 단 십자가가 크면 클수록 위선도가 높다 그러더구만" 그랬더니 그는 당장 떼서 주머니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마디 더했습니다.

"주머니에 떼서 넣는 사람은 더 위선자라고 그러더구만." ,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도대체 그리스도인의 증명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오직 사랑 그것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소속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소속된 법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새 계명, 그리스도인의 계명을 지키고 살아야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길은 곧 그리스도 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귀중한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바로 이 말은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결정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시는 말씀이 "새 계명"을 준다고 했습니다.

사랑이란 그처럼 새 것입니까? 예전에 있던 이야기요 물론 구약성경에도 사랑이라는 말은 많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왜 "새 계명"이라고 강조하십니까? 의미가 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기가 새 것이요, 그 방법이 새 것이요, 그 대상이 새 것이요, 그 사랑의 모델이 새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히 새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의미로 사랑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질적으로 새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일생 동안 들었고 오늘까지 부르짖어 왔더라도 오늘 우리는 다시 또 한번 새로운 의미의 사랑을 생각해야겠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사랑을 어원적으로 네 단어로 말합니다. 하나가 "필리아"라는 말입니다. 친구지간의 사랑인데 거기서 friendship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스톨게"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핏줄기의 사랑인 바, 부모 자식간에 이어지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에로스" 이것은 이성간에 가지는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 "아가페"라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가페라는 말은 사실은 칠십인 역이나 혹은 헬라어 고전에 보면 간혹 나옵니다만 그것은 친구지간의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혹은 이성지간의 사랑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개념을 달리해서 특수한 의미로 이 아가페를 썼습니다. 그 깊은 뜻을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습니다. 한 마디로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바로 그 사랑 이것이 아가페의 정의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의 뜻이 무엇이냐?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니다. 이 사랑은 의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사랑했는 데 있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창조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을 사랑하느냐, 어떤 사람이 내 사랑을 받을 수 있느냐가 아니고 사랑을 받을 만한 대상으로 만듭니다. 그것은 창조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 그것만이 이유입니다.

또한 그 사랑은 행동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랑하셨습니다. 높은데 계셔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몸소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자기 생명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아무것도 되돌려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죽음으로 끝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켰습니다. 이것이 아가페의 정의입니다.

간혹 우리는 물질을 줄 수가 있습니다. 얼마의 선물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는 것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시간은 내 생명의 일부를 떼어 주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시간을 주는 것이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생명을 준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그 말씀을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고 그대로 실행하여 목숨을 내주었습니다.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어머니가 딸 셋을 데리고 혼자 살았습니다. 거기에다 고아원에서 양녀 하나를 더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 애를 동생으로 알고 너희들이 같이 사랑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낯선 곳에 와서 계속 웁니다. 언니들이 이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를 위해서 인형도 갖다 주고,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옷도 갖다 입히고 하며 별 방법을 다 썼지만 이 어린아이는 계속 웁니다. 사흘이나 우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제일 큰 언니 되는 아이가 너무 답답해서 "너 왜 우냐" 하면서 같이 붙들고 울었습니다. 한참 울다가 둘이 쓰러져 잤는데 그 다음부터는 안 울더랍니다. 문제는 나와 함께 울어 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사랑은 감상이 아니요 추상적 이론도 아닙니다. 사랑은 그대로가 행동입니다. 이 사랑의 더 중요한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의롭다함입니다. 죄인을 친구로 그리고 의인으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탕자를 영접하는 아버지는 재산을 다 내버리고 돌아오는 천하의 불효한 허랑방탕한 탕자로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아들로 영접했습니다. 죽었다 살아온 아들로 영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귀신 들린지 18년 된 여자,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미치광이 여자를 보시고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간혹 보면 가정 문제로 복잡해 하시는 분들에게 이런 일이 있습니다. 밖에 나갔다가 몇 년 후에 돌아오는 남편을 대할 때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물었더니 "불쌍해서요. 그 인간이 불쌍해서"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까? 또 어떤 분보고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그랬더니 "성경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던데요 뭐" 합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요.

죄인을 사랑하려면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하고 나아가서 의인으로 맞아야 합니다. 죽었다가 산 사람으로, 완전한 의인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맞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 죄인을 의롭다 하기 위하여 그 댓가를 내가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하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병도 고치셨고 먹을 것도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가장 귀중한 것은 죄인도 영접해 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끝가지 사랑한 것도 추한 여자로 사랑한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딸로 사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사랑 그것이 귀중합니다.

어느 고아원에서 구호 물자 온 것을 갖다가 아이들을 입히려고 구호물자 열 상자를 뜯었는데 일곱 벌밖에는 쓸 만한 옷이 없더랍니다. 이것이 사랑입니까? 고아원에 있는 자녀를 고아로 불쌍히 여기려면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 딸처럼 내 딸에게 입히는 옷과 같은 옷을 주려거든 주고, 내 딸에게 입힐 수 없어서 줄 수 있는 옷이라면 아예 주지 마세요. 그 옷 없이 얼어 죽어도 그것이 낫고, 그대로 굶어 죽어도 그 편이 낫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감상이 아닙니다. 구제는 이런 감상으로 도덕적 향락주의를 즐기는 사람들의 유희가 아니란 말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속 깊이에서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아들 딸로 그리고 내 아들 딸로 대할 수 있는 마음이라야만 사랑이요, 죄인을 의인으로 그리고 더러운 자를 성결한 자로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 사랑의 승리를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그는 그 사랑 속에서 큰 기쁨을 얻었습니다. 요한복음 4:32,34에 보면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 그는 배고픔도 몰랐고 목마름도 다 잊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피곤이 없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2:23,24에 보면 십자가를 앞에 놓고 하시는 말씀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이 젊어서 천하를 얻는 군왕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었느냐고 물을 때에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원수를 사랑해서 친구로 썼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서 친구로 쓸 수 있는 자라야 천하를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그 사랑을 돌려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을 받았으면 이제는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는 중에 이 열매를 얻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가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확신과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동기입니다. 받은 사랑을 모르는 자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강권된 그런 생으로 평생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정말 사랑하고 있는가 한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씨름을 해 보십시다. 첫째, 사랑은 힘입니다. 만약 피곤했다면 사랑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못 받은 원망이 있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전체입니다. 아쉬움을 가졌다면 그것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존경입니다. 상대방의 약점이 눈에 보이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재적인 가능성과 그 무한한 미래를 바라보며 항상 존경하게 되는 것만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생명이요 성장입니다. 그런고로 다했다고 하는 완성은 없습니다. 사랑은 일치감입니다. 저를 따로 보는 것이 아니고 저와 나를 하나로 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제 들어봅시다. 정말 내가 사랑했느냐고.

사랑이 변질되었습니다. 사랑은 병들었습니다. 이제 치료해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피곤이 있고 실망이 있고 낙심이 있는 이유가 있다면 오직 그것은 하나, 사랑이 없기 때문이요 또는 사랑이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내 사랑의 진실을 물으며 회개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적인 사랑의 증거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영력, 사랑의 영, 사랑의 힘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의 힘을 얻을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기도 : 사랑에 목말라 하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많은 사랑을 듣고 보고, 또 사랑하노라 했지만 사랑의 근본이신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사랑을 전혀 모르고 살아 왔습니다. 이제 기도하오니 사랑의 뜻을 알게 하시고, 사랑의 뜻을 새롭게 하게 하시고 그리고 새로운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 또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당신의 귀한 자녀들이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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