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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를 향한 증거(디모데전서 6장 11절~16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무지 몽매(無知夢昧)한 흑인들을 위해의료 선교를 펼치다 죽은, 의사요 철학자요 음악가요 신학자였던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웃지 못할 이야기 한 토막을 전해 줍니다.
어느 날 그는 한 식인종 추장과 함께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슈바이처 박사는 당시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던 세계대전까지 화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박사의 전쟁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식인종 추장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전쟁이 나면 한 열 사람 정도 죽습니까?" 박사가 "열 사람이라니요. 백 사람 천 사람…… 당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죽는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 식인종 추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더랍니다. "백인들은 사람 고기를 먹지도 않는다면서 그렇게 많이 죽여서 다 무엇에 쓸꼬……"
여러분, 누가 이 식인종의 의문을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왜 우리는 식인종들처럼 사람을 잡아먹을 것도 아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여야 하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싸움이라는 것은 절대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필수적인 현상입니다. 내 것만이 옳고 내 의견만이 절대적이라는 이 극단적인 생활 양식이 싸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중간도 없고, 양보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의견만을 절대화시키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너도 나도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고 꺾으려고만 듭니다. 그래서 싸움이 일어나고 살생(殺生)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슬픈 것은, 싸움이란 어디까지나 승리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격동적인 과정이지만 아무 소득 없이 끝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승리 없는 싸움이 난무합니다.
온통 물리고 찢긴 상처투성이의 패자들뿐입니다. 여러분, 승리한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까? 순간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며칠만 지나 보십시오. 이겼다는 사람이나 졌다는 사람이나 모두가 패자입니다. 승리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 더 깊은 차원에서 이문제의 해답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역사 속에 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전쟁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인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쟁과 고난의 연속'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 나라 역사를 보더라도 싸우는 이야기뿐입니다. 구약성경도 역시 거의 전부가 싸우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전쟁의 역사 속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까? 무엇을 계시하시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즉, 우리가 보기에는 싸움이요, 전쟁 같아 보이지만, 그리고 모든 것이 패배뿐인 것 같으나 그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와 심판과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성경에서 이해하기 힘든 엄청난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보십시오. 어린아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짐승까지 모조리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언뜻 보기에는 너무 잔인한 명령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추악하고 가증스러운 여리고 성의 죄악을 묵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당신의 정의를 실현시키신 것입니다. 아간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을 어겼을 때에 이스라엘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민족이 수난을 겪어야 했던 사건(수7:1-26)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사람의 희생을 묵과하시지 않습니다. 무고(無辜)한사람의 피 흘리는 것을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의인의 희생을 절대로 눈감아 주시지 않습니다. 형한테 억울하게 맞아죽은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벨을 도로 살려 주셨나요? 그를 부활시키셨나요? 아닙니다.
그러나 아벨의 피가 하늘에 호소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가인에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신앙적 역사관을 분명히 가져야 하겠습니다. 신앙적 역사관이란, 우리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목적이 있고, 하나님의 교과 과정이 있으며 계시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볼 줄 아는 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에 그분이 일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왜 이렇게 침묵하시는가?" 할 때에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방종하며 절망할 때에 그분의 역사를 똑똑히 바라보면서 옷깃을 여미고 경건하게 새로운 신앙을 찾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선한 목적을 위해서 악한 방법이 정당화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목적에 따라 수단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적에 악한 방법---이것은 사단의 시험입니다. 우리는 곧잘 이 시험에 빠지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을 내려오실 때에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전개됩니다. 제사장의 무리를 데려온 가룟 유다가 예수님 앞에 와서 안녕하시냐고 눈웃음치며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체포되십니다.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라도 좀 나서서 예수님을 변호하고 잡아가지 못하게 말렸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진리와 의인을 위하여 칼을 휘두른 베드로의 행위를 꾸짖으면서 말씀하십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 : 52)." 요샛말로 하면, 폭력을 쓰는 자는 폭력으로 망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 취한 행동일지라도 악한 방법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악한 목적을 위해 선한 방법을 동원시키는 경우도 종종 눈에 뜁니다. 이것은 위선자가 즐겨 사용하는 교활한 수단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선한 목적과 선한 방법만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론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 6:11-12)." 싸우라, 취하라---이것은 소극적인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을 향하여, 불의를 향하여, 그리고 악을 향하여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라는 명령입니다. '피하라', '도망하라', '타협하라'가 아닙니다. '싸우라!'---적극적인 자세,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그러한 긍정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동기도, 과정도, 결과도 그 질에서 선한 싸움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싸움, 믿음을 위한 싸움, 믿음으로 싸우는 싸움---본문 말씀을 보면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로써 싸우라고 합니다. 어떤 분의 어록집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무기 없는 전쟁이 정치요, 무기를 든 정치는 전쟁이다." 정치는 하나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칼을 들었느냐 들지 않았느냐 하는 데에 정치와 전쟁의 차이가 있습니다. 칼을 들면 전쟁이요, 칼 없이 싸우면 정치인 것입니다. 자, 우리가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싸움은 어떠한 싸움입니까? 칼을 들었습니까, 들지 않았습니까? 목적과 동기, 방법이 다 선한 싸움입니까? 누구를 위한 싸움이며, 누구와 싸우고 있습니까? 또한 싸움과 승리에 대한 개념 정리는 분명히 되어 있습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변경시키지 말라고, 또한 수단이 목적을 배신하는 행위가 있어서도 안 된다고 말입니다. 시종여일(始縱如一)하게 이 진리에 입각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요즘 와서 특별히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고생한 이야기가 늘 마음에 걸립니다. 주지(周知)하다시피,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한 신실한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당시 그는 헤롯왕의 불의를 탓하고 비난하다가 진리를 위해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이제 감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마음은 점점 약해져 갔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성경에 근거하여 한번 추리해 보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은 고민에 빠집니다. 고민에 빠진 나머지 그는 이렇게까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분명히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리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고 그분을 증거 했는데, 메시야가 오신 것이 분명한데, 왜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일까? 내가 의를 위하여 감옥에 갇혔으면 예수님이 와서 옥문을 열어 주셔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한번쯤 방문이라도 해주셔야 할 것 아닌가! 찾아와서 따뜻한 위로의 말씀이라도 한마디 해주시면 좋으련만 어찌하여 메시야는 아무 말씀도 없으실까?' 세례 요한은 견디다못해 사람을 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겠다고 하신 메시야가 당신이 맞느냐고 예수님께 어이없는 질문을 하게 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 : 3)".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에는 세례 요한이 기대하는 말한 마디가 빠져 있습니다. "내일 아침 네게 찾아가마!" 하는 말씀이 빠진 것이지요.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가서 옥문을 열어주마!" 그런 말씀을 해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요한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아마도 세례 요한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저리도 엉뚱한 말씀만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앉은뱅이나 소경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은 내가 이 옥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더 급한 일 아닌가! 의를 위해 아무 죄 없이 희생되는 나부터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그러나 세례 요한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 아닌 다른 사람이 살아나고, 너 아닌 다른 사람이 눈을 뜨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네가 꼭 감옥에서 나와야만 되겠느냐? 내가 너더러 감옥에서 죽으라 해도, 너는 감옥에서 죽는 것이 내 뜻이라고 해도, 너는 결코 실족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 흑인들의 인권 옹호를 위해 일생을 바친 마틴 루터 킹(MartinLuther King) 목사님은 감옥에서 숱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하기를, 감옥 속에서 당하는 갖은 수모와 멸시보다감옥 밖의 끔찍한 침묵이 훨씬 더 괴로웠다고 했습니다. 그가 버킹엄 감옥에서 남긴 이 말은 유명합니다. "버킹엄 감옥의 비극은 악인들의 잔인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인(善人)들의 침묵에 있다"---내가 감옥에서 고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감옥 밖이 어째서 이렇게 조용한가, 왜 선한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흑인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백인들과의 싸움보다 더 크고 괴로운 싸움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싸움을 싸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본인 스스로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하는데 눈에 보이는 결과가신통치 않을 때, 하나님도 의인들도 모두 침묵만 지키고 여러분을 외롭게 방치해 두는 것만 같을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때에 옛사람과 새 사람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자꾸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합니다. 인간적인 정욕과 교만을 부채질합니다.
우리는 의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싸움에 승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악한 정욕과 자존심과 교만함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이 싸움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싸움입니다.
싸움에 패하는 자는 노예가 됩니다. 승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승리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승리는 물리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돈은 벌었으나 양심에 패했습니다. 출세는 했으나 인격에 패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승리한 것 같으나 신앙적으로는 완전히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승리한 것입니까, 패한 것입니까? 우리는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그 승리의 뜻을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는 영원한 것이요, 종말론적인 것이요, 그리고 평화적인 것입니다.
다시 원수 맺을 일이 없는, 다시 후회할 일이 없는 참된 샬롬, 곧 참된 평화가 진정한 승리인 것입니다. "영생을 취하라(딤전 6:2)"---이 말씀 속에 참 승리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어려운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갖가지 어지럼증 나는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세상을 이길 수 있을까요? 이제 그 해답을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찾아봅시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딤전 6:13)"---저는 근자에 이 말씀을 여러 번 읽으면서 마음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이분이 나약한 분입니까, 강한 분입니까? 승자입니까, 패자입니까? 빌라도는 도저히 그분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요한복음 19장 5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영어로는"Behold the man!"인데, 예수님의 일생을 여기에다 초점을 맞추고 기록한 분들이 많습니다. 비홀드 더 맨, 이 사람 보아라---빌라도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며 죽은 자를 살렸다는데,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고 인기도 상당히 얻은 사람이라는데, 왜 말없이 죽어가려 하는가, 왜 어리석게 죽어 가느냐 하는 말입니다. 왜 단 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그대로 죽어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속에 역사의 해답이 있습니다. 그분은 저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빌라도 앞에 서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말이 없으십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하고 비아냥거리는데도 대답이 없으십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에 담겨 있는 놀라운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사랑이 있고 긍휼이 있고 침묵이 있으나, 거기에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 부활의 능력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느 화가의 화실을 찾아온 방문객이 거기에 있는 많은 작품들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많은 그림들 중에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최고의 걸작품은 어느 것입니까?" 그러자 화가는 대답하기를 "다음에 그리는 그림입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 버리면 그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 작품입니다. 다음에 그리는 그림이 최고의 걸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계십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 :33)."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 : 20)." 우리는 승리를 보장받았고 약속 받았으며, 그 약속 안에 성령과 말씀의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이 능력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받은 승리를 향하여 오늘도 묵묵히 인내하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미움을 받는다고 세상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빼앗겼다고 남의 것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끝까지 사랑과 진실과 온유를 따라서 주님의 승리에 연합할 때에야 우리에게 최종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빌라도를 향한 증거(디모데전서 6장 11절~16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무지 몽매(無知夢昧)한 흑인들을 위해의료 선교를 펼치다 죽은, 의사요 철학자요 음악가요 신학자였던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박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웃지 못할 이야기 한 토막을 전해 줍니다.
어느 날 그는 한 식인종 추장과 함께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슈바이처 박사는 당시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던 세계대전까지 화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박사의 전쟁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식인종 추장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전쟁이 나면 한 열 사람 정도 죽습니까?" 박사가 "열 사람이라니요. 백 사람 천 사람…… 당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죽는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 식인종 추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더랍니다. "백인들은 사람 고기를 먹지도 않는다면서 그렇게 많이 죽여서 다 무엇에 쓸꼬……"
여러분, 누가 이 식인종의 의문을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왜 우리는 식인종들처럼 사람을 잡아먹을 것도 아니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여야 하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싸움이라는 것은 절대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필수적인 현상입니다. 내 것만이 옳고 내 의견만이 절대적이라는 이 극단적인 생활 양식이 싸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중간도 없고, 양보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의견만을 절대화시키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너도 나도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고 꺾으려고만 듭니다. 그래서 싸움이 일어나고 살생(殺生)이 빚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슬픈 것은, 싸움이란 어디까지나 승리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격동적인 과정이지만 아무 소득 없이 끝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승리 없는 싸움이 난무합니다.
온통 물리고 찢긴 상처투성이의 패자들뿐입니다. 여러분, 승리한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까? 순간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며칠만 지나 보십시오. 이겼다는 사람이나 졌다는 사람이나 모두가 패자입니다. 승리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 더 깊은 차원에서 이문제의 해답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역사 속에 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전쟁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인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전쟁과 고난의 연속'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 나라 역사를 보더라도 싸우는 이야기뿐입니다. 구약성경도 역시 거의 전부가 싸우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전쟁의 역사 속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까? 무엇을 계시하시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즉, 우리가 보기에는 싸움이요, 전쟁 같아 보이지만, 그리고 모든 것이 패배뿐인 것 같으나 그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와 심판과 역사를 이루어 가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성경에서 이해하기 힘든 엄청난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보십시오. 어린아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짐승까지 모조리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언뜻 보기에는 너무 잔인한 명령인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公義)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추악하고 가증스러운 여리고 성의 죄악을 묵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당신의 정의를 실현시키신 것입니다. 아간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을 어겼을 때에 이스라엘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민족이 수난을 겪어야 했던 사건(수7:1-26)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사람의 희생을 묵과하시지 않습니다. 무고(無辜)한사람의 피 흘리는 것을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의인의 희생을 절대로 눈감아 주시지 않습니다. 형한테 억울하게 맞아죽은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벨을 도로 살려 주셨나요? 그를 부활시키셨나요? 아닙니다.
그러나 아벨의 피가 하늘에 호소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가인에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신앙적 역사관을 분명히 가져야 하겠습니다. 신앙적 역사관이란, 우리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목적이 있고, 하나님의 교과 과정이 있으며 계시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볼 줄 아는 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에 그분이 일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왜 이렇게 침묵하시는가?" 할 때에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방종하며 절망할 때에 그분의 역사를 똑똑히 바라보면서 옷깃을 여미고 경건하게 새로운 신앙을 찾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선한 목적을 위해서 악한 방법이 정당화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목적에 따라 수단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적에 악한 방법---이것은 사단의 시험입니다. 우리는 곧잘 이 시험에 빠지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을 내려오실 때에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전개됩니다. 제사장의 무리를 데려온 가룟 유다가 예수님 앞에 와서 안녕하시냐고 눈웃음치며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체포되십니다.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라도 좀 나서서 예수님을 변호하고 잡아가지 못하게 말렸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진리와 의인을 위하여 칼을 휘두른 베드로의 행위를 꾸짖으면서 말씀하십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 : 52)." 요샛말로 하면, 폭력을 쓰는 자는 폭력으로 망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 취한 행동일지라도 악한 방법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악한 목적을 위해 선한 방법을 동원시키는 경우도 종종 눈에 뜁니다. 이것은 위선자가 즐겨 사용하는 교활한 수단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선한 목적과 선한 방법만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론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 6:11-12)." 싸우라, 취하라---이것은 소극적인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을 향하여, 불의를 향하여, 그리고 악을 향하여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라는 명령입니다. '피하라', '도망하라', '타협하라'가 아닙니다. '싸우라!'---적극적인 자세,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그러한 긍정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동기도, 과정도, 결과도 그 질에서 선한 싸움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싸움, 믿음을 위한 싸움, 믿음으로 싸우는 싸움---본문 말씀을 보면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로써 싸우라고 합니다. 어떤 분의 어록집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무기 없는 전쟁이 정치요, 무기를 든 정치는 전쟁이다." 정치는 하나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칼을 들었느냐 들지 않았느냐 하는 데에 정치와 전쟁의 차이가 있습니다. 칼을 들면 전쟁이요, 칼 없이 싸우면 정치인 것입니다. 자, 우리가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싸움은 어떠한 싸움입니까? 칼을 들었습니까, 들지 않았습니까? 목적과 동기, 방법이 다 선한 싸움입니까? 누구를 위한 싸움이며, 누구와 싸우고 있습니까? 또한 싸움과 승리에 대한 개념 정리는 분명히 되어 있습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변경시키지 말라고, 또한 수단이 목적을 배신하는 행위가 있어서도 안 된다고 말입니다. 시종여일(始縱如一)하게 이 진리에 입각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요즘 와서 특별히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고생한 이야기가 늘 마음에 걸립니다. 주지(周知)하다시피,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한 신실한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당시 그는 헤롯왕의 불의를 탓하고 비난하다가 진리를 위해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이제 감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마음은 점점 약해져 갔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성경에 근거하여 한번 추리해 보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은 고민에 빠집니다. 고민에 빠진 나머지 그는 이렇게까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분명히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리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고 그분을 증거 했는데, 메시야가 오신 것이 분명한데, 왜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일까? 내가 의를 위하여 감옥에 갇혔으면 예수님이 와서 옥문을 열어 주셔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한번쯤 방문이라도 해주셔야 할 것 아닌가! 찾아와서 따뜻한 위로의 말씀이라도 한마디 해주시면 좋으련만 어찌하여 메시야는 아무 말씀도 없으실까?' 세례 요한은 견디다못해 사람을 보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겠다고 하신 메시야가 당신이 맞느냐고 예수님께 어이없는 질문을 하게 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 : 3)".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에는 세례 요한이 기대하는 말한 마디가 빠져 있습니다. "내일 아침 네게 찾아가마!" 하는 말씀이 빠진 것이지요.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가서 옥문을 열어주마!" 그런 말씀을 해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요한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아마도 세례 요한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저리도 엉뚱한 말씀만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앉은뱅이나 소경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은 내가 이 옥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 더 급한 일 아닌가! 의를 위해 아무 죄 없이 희생되는 나부터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그러나 세례 요한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 아닌 다른 사람이 살아나고, 너 아닌 다른 사람이 눈을 뜨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네가 꼭 감옥에서 나와야만 되겠느냐? 내가 너더러 감옥에서 죽으라 해도, 너는 감옥에서 죽는 것이 내 뜻이라고 해도, 너는 결코 실족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 흑인들의 인권 옹호를 위해 일생을 바친 마틴 루터 킹(MartinLuther King) 목사님은 감옥에서 숱한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하기를, 감옥 속에서 당하는 갖은 수모와 멸시보다감옥 밖의 끔찍한 침묵이 훨씬 더 괴로웠다고 했습니다. 그가 버킹엄 감옥에서 남긴 이 말은 유명합니다. "버킹엄 감옥의 비극은 악인들의 잔인한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인(善人)들의 침묵에 있다"---내가 감옥에서 고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감옥 밖이 어째서 이렇게 조용한가, 왜 선한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흑인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백인들과의 싸움보다 더 크고 괴로운 싸움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싸움을 싸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본인 스스로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하는데 눈에 보이는 결과가신통치 않을 때, 하나님도 의인들도 모두 침묵만 지키고 여러분을 외롭게 방치해 두는 것만 같을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때에 옛사람과 새 사람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자꾸만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합니다. 인간적인 정욕과 교만을 부채질합니다.
우리는 의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싸움에 승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악한 정욕과 자존심과 교만함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이 싸움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싸움입니다.
싸움에 패하는 자는 노예가 됩니다. 승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승리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승리는 물리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돈은 벌었으나 양심에 패했습니다. 출세는 했으나 인격에 패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승리한 것 같으나 신앙적으로는 완전히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승리한 것입니까, 패한 것입니까? 우리는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그 승리의 뜻을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는 영원한 것이요, 종말론적인 것이요, 그리고 평화적인 것입니다.
다시 원수 맺을 일이 없는, 다시 후회할 일이 없는 참된 샬롬, 곧 참된 평화가 진정한 승리인 것입니다. "영생을 취하라(딤전 6:2)"---이 말씀 속에 참 승리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어려운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갖가지 어지럼증 나는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세상을 이길 수 있을까요? 이제 그 해답을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찾아봅시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딤전 6:13)"---저는 근자에 이 말씀을 여러 번 읽으면서 마음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이분이 나약한 분입니까, 강한 분입니까? 승자입니까, 패자입니까? 빌라도는 도저히 그분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요한복음 19장 5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영어로는"Behold the man!"인데, 예수님의 일생을 여기에다 초점을 맞추고 기록한 분들이 많습니다. 비홀드 더 맨, 이 사람 보아라---빌라도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며 죽은 자를 살렸다는데,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고 인기도 상당히 얻은 사람이라는데, 왜 말없이 죽어가려 하는가, 왜 어리석게 죽어 가느냐 하는 말입니다. 왜 단 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그대로 죽어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속에 역사의 해답이 있습니다. 그분은 저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빌라도 앞에 서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말이 없으십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하고 비아냥거리는데도 대답이 없으십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에 담겨 있는 놀라운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사랑이 있고 긍휼이 있고 침묵이 있으나, 거기에 무한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 부활의 능력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느 화가의 화실을 찾아온 방문객이 거기에 있는 많은 작품들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많은 그림들 중에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최고의 걸작품은 어느 것입니까?" 그러자 화가는 대답하기를 "다음에 그리는 그림입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 버리면 그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 작품입니다. 다음에 그리는 그림이 최고의 걸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계십니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 :33)."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 : 20)." 우리는 승리를 보장받았고 약속 받았으며, 그 약속 안에 성령과 말씀의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이 능력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받은 승리를 향하여 오늘도 묵묵히 인내하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미움을 받는다고 세상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빼앗겼다고 남의 것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끝까지 사랑과 진실과 온유를 따라서 주님의 승리에 연합할 때에야 우리에게 최종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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