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가야 할 길
눅 14:25-27,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 오늘부터 시작해서 한 주간동안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2천 년 전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그날 참 예수님은 군중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춤을 추며 환호하고 영접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내일 월요일은 성전을 척결하신 날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서 짐승 떼와 장사꾼들을 모두 몰아내고 정화시키고 화가 나신 예수님은 나가시다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당시 제사장들에게 퍼붓고 싶었던 분노를 그 무화과나무에 쏟아 부으십니다. 그래서 그날 죄 없는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시들어 말라 죽었던 것입니다.
화요일은 감람산에 올라가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날입니다. 그리고 수요일은 침묵의 날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3년 만에 하루를 안식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셨다는 날입니다. 목요일은 번민의 날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을 남기시고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산에 올라가 밤새도록 기도하셨던 날입니다. 그리고 금요일은 수난의 날입니다. 오는 금요일 오전 9시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 마침내 무덤에 묻히십니다. 오는 토요일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보내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이 비애의 날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날 아침 일찍이 예수님은 생전에 말씀하시던 대로 부활하십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이 부활주일입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소수의 사람들이 나가 세상에 예수의 부활을 전함으로서 오늘 기독교가 세상에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복음이 120년 전 우리나라에 까지 전파되어 마침내 오늘 우리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120년 만에 우리나라는 기독교 국가처럼 부흥했습니다. 그리고 전 국민의 1/4정도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적입니다. 기독교인은 수도 중요하지만 예수의 제자화 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자기의 몫을 다 하는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제자의 길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이런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한마디로 말해서 섬김의 삶입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삶은 섬기는 삶입니다. 이 섬기는 삶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모양도 있습니다. 맛도 있습니다. 그곳에 개혁도 일어납니다. 변화도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섬김의 삶을 살았던 가장 좋은 모델은 뭐니 뭐니 해도 예수님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철두철미하게 섬기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시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그 시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가난한 집안을 골라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교훈의 내용을 보면 하나같이 섬김의 교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 중 핵심이라고 하는 산상수훈을 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잘 사는 방법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어떻게 하면 잘 섬기고 잘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교훈만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돌아다닐 때 만나는 사람들 마다 지극한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한사람도 왔다가 그냥 돌아간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격려하셨고 위로하셨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하며 탄식하며 기도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진리를 외면하고 그날그날 생각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남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무덤에 묻히면 모든 것이 끝장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침내 그가 생전에 그렇게 장담하던 대로 살아나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 모습입니다. 이 예수님의 생애의 모습 속에 가득 들어 있는 것은 오직 섬김이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그 유명한 교훈을 통해서 이 땅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섬김의 삶을 강조하셨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제자가 가야 할 길이 있고 삶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 길과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이 시대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하고 발휘하여야 할 길이고 내용이고 원리입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3가지 원리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부정
본문 26절을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헌신한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제물로 드렸고 철저하게 희생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냉정하리만치 부모와 형제들과 자기 목숨까지도 철저하게 부정한 모델입니다. 밖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서 찾고 있을 때 누군가 밖에 형제들이 와 있다고 말 하자 정색을 하면서 “누가 내 부모이며 내 형제들인가” 하고 반문하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내 부모요 내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십자가에 달려야 하고 죽으면 3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했습니다. 이상은 예수께서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신 말씀들입니다. 그러면서 말씀 하시기를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 자기 극복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자기부터 극복해야 하고 자기를 지양하고 부정해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이 점이 가장 어려운 조건입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축소하는데 는 큰 수양이 필요합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자기부정의 극치를 이룬 사람이 소개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 압둘 라흐만이라는 사람이 회교도로 있다가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 사회에서 이것은 굉장히 큰 모험입니다. 이 문제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가문의 차원도 넘어 때로 생명을 포기해야 하는 모험과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와 어머니가 당국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구속을 당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회교도법에 의해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그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그를 사형시키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영국과 서방세계가 사형시키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사형시키지 않는 대신 이 사람을 추방하여 서방세계에 무사하게 망명하게 되었던 일이 지난 주간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당당하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는 초연하게 죽을 각오를 하고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과 비교해 집니다.
이것이 자기부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때로 우리 목숨이 우상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위협이 오면 우리는 몸을 사립니다. 신앙을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내 목숨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 때로 부모가 우상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 때문에 신앙생활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가 무서워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또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부모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순종하느라고 신앙생활을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이것이 효도인 것 같이 보이고 순종인 것 같이 보이지만 좀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 어리석은 짓입니다. 빨리 부모를 일깨워 신앙의 길에 들어가게 해서 부모로 하여금 구원받고 돌아가시게 해야 그것이 진정한 효도이고 순종이 아닙니까. 그래야 되는데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머뭇거리는 것은 효도도 순종도 아니고 맹목적인 순종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우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자식이 우상인 사람도 있습니다. 자식에게 너무 정성을 쏟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러느라 신앙생활도 아주 형식적으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우상입니다. 또 어떤 분은 잠이 우상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새벽기도 한번 못합니다. 새벽기도 하는데도 자기부정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기도회를 통해서 큰 능력을 입는다는 것보다도 자신을 훈련하고 극복하는데 아주 좋은 훈련이 됩니다. 이 새벽기도회가 힘든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새벽마다 저절로 깨어지지 않아서 시계를 울리게 해 놓고 잠을 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새벽에 조금 늦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깨어 뛰어가다 시피 나가서 성경을 펼치려고 하니까 손에 든 것이 성경책이 아니고 탁상시계를 들고 나왔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이 모두 자기부정의 훈련입니다. 이 자기부정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깊이 있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나 할 것 다 하고 놀 것 다 놀고 잠잘 것 다 자고 제자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처럼 신앙의 길을 가려면 가족들에게는 실격입니다. 부모에게도, 자녀들에게도 모두 실격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제자의 삶을 살고 목회하려면 휴가한번 제대로 갈 시간이 없습니다. 아이들과 충분하게 놀아줄 여유도 없습니다. 목회자가 놀아 줄 것 다 놀아주고 쉴 것 다 쉬고 잠잘 것 다 자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부모와 형제와 자식을 너무 사랑하고 자기 목숨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본문 27절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잠시라도 부정하거나 회피하신 적이 없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내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가 결코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했을 때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 환호했지만 예수님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예정대로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철저하게 지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십자가는 자기가 지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도 이 목회의 길을 가지 않으려고 피해보고 길을 바꾸어 보려고 힘써 보았습니다. 신학교 다니다가 군에 가서 다른 길로 빠져 보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 보았더니 아무 소리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자원입대 신청서를 내 보았더니 받아주지 않아서 그냥 이 길을 갔습니다. 신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잠시 있으면서 이 교사의 길을 계속 가 볼까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때 학교 선생님이 전도사 월급보다 많아서 그런 유혹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 보았더니 또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목사안수 받고 군목으로 군에 가서 3년 근무하고 제대할 때쯤 되니까 장기 근무하라고 종용해 왔습니다. 키도 크고 잘 생기고 군인답게 생겼다고 일반목회 보다 좋을 것이라고 장기 근무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래서 잠시 생각 해 보았습니다. 군에 있으면 안정되고 편하고 좋긴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 길도 내가 갈 길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 길을 여기까지 오는데 유혹도 참 많이 있었습니다.
이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면 때로 평안한 삶이 크게 유혹으로 다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고 다른 길을 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 풍부한 것이 유혹으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난한 길을 버리고 여유 있는 길을 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다 피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지금은 별소리를 다 들어도 피해가는 지혜와 용기도 생겼지만 젊었을 때는 그런 말 한마디가 크게 유혹이 되고 시험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모두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제자가 되려면 자기십자가는 자기가 지라고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모두 회피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자기에게 부여된 책임이나 십자가는 회피하지 말고 자기가 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유를 버리라”
본문 33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소유들을 철저하게 버리셨습니다. 하늘의 보좌도, 영광도, 평안도, 가정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한가하게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아가는 그런 삶에 대해서는 여유조차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 상영된다고 해서 야단입니다. 이 작품을 보면 예수님이 결혼을 하였고 그의 아내는 막달라 마리아이고 지금도 예수님의 자녀들이 생존해 있는데 이런 사실이 지난 2천년동안 숨겨져 왔다는 내용으로 이 영화가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책이 전 세계적으로 4천만권이나 팔렸고 한국에도 이 책이 138주 동안이나 베스트셀러로 화제를 모았는데 이 책이 마침내 영화화되어서 곧 상영된다고 합니다. 예수처럼 철저하게 부정하고 버린 사람도 없습니다.
이 소유는 꼭 물질만은 아닙니다. 취미도 여기에 속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이 취미가 신앙생활의 길을 막고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유혹입니다. 그래서 이 취미 때문에 주일도 지키지 못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럼에도 주일날 다 끊고 예배드리려 나오는 것도 참 존경스러운 일입니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대통령 유세 때 잠시 시간이 남아 그 틈에 골프를 쳤는데 파 쓰리 홀에서 공을 쳤는데 이 공이 날아가서 홀컵 바로 옆에 떨어졌습니다. 그랬더니 참모진들이 홀인원할 것인데 아깝다고 아주 아쉬워했습니다. 그런데 케네디는 오늘 공이 홀컵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말하면서 즉시 골프를 중단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취미생활을 적절히 제어하지 않으면 신앙생활도 발목 잡히고 어느 사람처럼 공직생활도 발목이 잡힙니다.
또 시간도 소유입니다. 시간은 돈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드리러 잠시 왔다가 다름 박질 하여 돌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시간이 조금만 길면 시계를 보느라 야단인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나와서 시간을 투자하고 헌신하는 분들을 보면 참 존경스럽습니다. 그리고 물질은 생명과 같은 소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질을 생명같이 여깁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 물질은 최대의 우상입니다. 그럼에도 11조를 드리는 것을 보면 참 위대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을 요구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측정해 보려면 물질을 가지고 시험해 보면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삶은 그냥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과 마음과 생각을 새로 지음 받아야 합니다. 내 인격과 내 중심이 예수의 정신과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존중하며 살아가야 그것이 제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나는 “주님의 제자인가”를 한번 생각 해 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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