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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열왕기상 19장 1절~10절)

by 【고동엽】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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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열왕기상 19110)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참으로 고독해하는 사람 엘리야를 만납니다. 그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오직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몹시도 고독해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살고 싶은 본능이 있는 한편으로 죽고 싶은 본능도 있다고 합니다.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죽으려하는 의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오늘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주 재미있는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아합과 그의 왕후 이세벨이 대노하여 지금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까지 합니다. 이 사실을 통보받은 엘리야는 살기 위하여---성경에 씌어 있는 대로 분명히 '생명을 위하여' 도망합니다. 멀리멀리 도망합니다. 그런데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자 이번에는 죽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살기 위하여 도망해 놓고, 이제 살게 되니까 죽고 싶어하는 이 심리가 말입니다.

사람들은 죽고 싶어하기는 하지만 죽임을 당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임 당하지 않으려고 도망 도망하며 갖은 애를 다 쓰고 발악하지만, 정작 안전하게 혼자 남았을 때에는 죽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기는 하나, 죽임 당하기는 싫다--이같은 인간의 모습을 엘리야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다이나마이트의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한테는 '백만장자 부랑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엄청난 사업을 경영하면서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는 대부호였지만 그에게는 집도 가정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내도 자식도 없이 고독한 만년을 보내다 쓸쓸히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고독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너무도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간들은 평생을 통하여 그리 여유 만만한 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기, 그렇게 절박한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는 죽임 당할까봐 걱정인 때가 있는가하면, 또 언제는 죽고 싶어서 걱정입니다. 이래저래 생명을 경각(頃刻)에 두고, 그 긴장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로뎀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말도 되지 않는 억지 소원을 아룁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한 마디로 말해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죽고 싶을 만큼 고독해 합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소설가 헤밍웨이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써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 나는 전기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심히 고독하다……' 그는 훌륭한 소설로 뭇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높은 명성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실존적 고민, 이 고독 하나를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고독' 하면 먼저 육체적인 고독을 생각하게 됩니다. 병든다는 것은 고독입니다. 건강한 때에는 내가 나를 생각해도 내가 꼭 필요한 것 같고, 다른 사람한테도 내가 필요한 존재인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면, 그것도 중한 병이거나 장기(長期) 환자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쓸모가 없구나, 모든 사람에게 귀찮은 존재로구나, 아주 지겨운 존재로구나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인하고 고독하게 됩니다. 또한 늙는다는 것도 고독입니다. 무의무탁(無依無托)한 노인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반기는 사람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았는데 나이 들어감에 따라 차츰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듯이 느껴집니다.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다음은 정신적인 고독입니다. 무지함과 무능함을 느낄 때, 특히 나의 실패를 시인해야 할 때---나는 인생을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가만히 돌이켜보니 전부가 실패요, 완전한 실패임을 시인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독이 밀려옵니다. 아무도 나를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강제로 엄마 젖을 떼게 된 어린 아기가 부모로부터 배신감을 느끼는 것과도 같습니다. 대화를 상실하고, 한계를 느끼고, 자폐증 환자처럼 자기 혼자만의 노예가 되면서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이와 같은 정신적 미아, 정신적 고아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지성인들 사이에 많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통계로 보면 의외로 보통사람들보다 지식층이나 지도층에서의 발생 건수가 훨씬 높다고 합니다. 미국 연합통신사의 보도에 따르면 남을 살리기 위해, 남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애쓰는 의사들, 특히 정신과 의사들 중에 자살하는 예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직업별로 볼 때 의사의 자살율이 가장 높다는 것입니다. 의사---경제적으로는 거의 문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뭇 사람의 존경을 받습니다.

환자들은 의사를 붙잡고 나 좀 살려달라고, 마치 하나님께 매달리듯이 그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정작 의사 본인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어디 가서 선뜻 의논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40세 이전에 죽은 의사들의 사망 원인을 보면 25%가 자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히려 남의 문제에 대해서는 척척 잘 해결해 주는 사람이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의 문제에 부딪히면 어렵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병을 잘 찾아내고 잘 고치기로명성 높은 내과의가 있는데, 하루는 자기 부인이 하도 쿨룩쿨룩하고 기침을 해서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그랬더니 '폐결핵 3' 라는 진단이 나오더랍니다. 이런 아이러니컬한 이야기가 우리들 주위에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유능한데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열등생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느끼는 절망, 허무---이것이 정신적인 고독입니다.

육체적 고독, 정신적 고독과 더불어 영적인 고독이 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욥의 부르짖음(13 : 24)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고독, 하나님께로서 버림받았다고 하는 고독이야말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잃고, 가정을 잃고, 친구를잃고, 명성을 잃고…… 다 잃는다 해도 하나님의 인정(認定)이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마저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

DTXT를 대적으로 여기시니, 하나님마저 나를 외면하시니 이제 견딜 수없다고 욥은 고민과 번뇌로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고독입니다. 이를 별명지어 '가인의 고독' 이라고 합니다. 가인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가인은 고독해 합니다. '나는 어디 가든지 마음을 붙일 수가 없고, 어디서든지 은총 밖으로 쫓겨나므로 살수가 없습니다' 하고 고민합니다(4 : 14). 은총 밖으로 밀려나는 고독, 하나님께로서 버림받는 고독---이것이 가장 절실하고 종말적인 고독입니다.

우리들의 세상사를 볼 때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실패할 때보다 오히려 성공할 때에 사람들이 곧잘 허탈감에 빠지고 고독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로부터 멸시받을 때보다 존경받을 때에 오히려 더욱 고독합니다. 천대를 받을 때에 나는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나를 칭찬할 때, 성공했다고 내게 박수를 보내는 바로 그 순간에 나 자신은 죽고싶을 만큼 고독해집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아합과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쫓아다닐 때에는 36개월 동안 이 굴 저 굴로 피해 다니며 전전긍긍하면서도 훌륭히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인내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멜산에서의 승리 이후 그는 많이 변해 버립니다. 우상을 섬기는 바알의 선지자450인과 홀로 대결하여 대승을 거둔 엘리야입니다. 그는 하늘로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통쾌한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기손 시내로 몰아다 죽게 했습니다. 이처럼 큰 승리를 거두고 나서 이제 고독해 합니다. 그 승리가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줄 알았는데 더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습니다. 낙심하고 탈진한 상태로 되어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하나님, 저 혼자입니다. 홀로 남았습니다. 제 생명을 취해 주십시오!" 4, 10,14절에서 누누이 혼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 혼자뿐이라고 기진맥진 허탈 상태가 됩니다.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순간입니다.

엘리야는 왜 고독해 합니까! 첫째, 자기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써 보았고, 민족을 구하려고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이제는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 비교 심리 때문입니다.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아브라함 같은, 모세 같은, 이삭 같은, 요셉 같은 인물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에 미치지 못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하고 실패를 시인합니다. 그와 동시에 또 자기를 과장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나만 열심히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버렸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배반했습니다, 모두 우상을 섬겼습니다, 나뿐입니다, 나만 특별히 주님을 섬기려 애쓰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고독도 과장합니다. 자기의도 과장합니다. 자기 능력도 너무 크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이 무너지니 스스로 절망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적의 위협과 상황의 위기감을 과장합니다. 내 생명을 찾습니다, 이제 나까지 죽으면 모든 의로운 일이 끝나 버리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못마땅해합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 모양으로 내버려두십니까? 왜 저 괘씸하고 요사스러운 아합과 이세벨을 저대로 두고 보십니까? 왜 정세를 이렇게 보고만 계십니까?---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체적인 역사에 대하여 영 못마땅해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여주세요" 하고 억지를 부립니다. 예사로 못마땅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크고 넓은 뜻 앞에서 나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쓸모 없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목적 상실이요, 목적 부인입니다.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지조차 모릅니다. 오늘에 와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스스로 부인합니다. 그래서 죽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고독과 탈진 상태에 있는 엘리야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 : 18)." 얼마나 여유 있는 말씀입니까? 엘리야의 투정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입니다. "엘리야, 혼자라고? 천만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가 7천이나 남아 있다!" 7천은 특별한 의미 있는 숫자입니다. ''은 완전숫자요, '''가정'을 의미합니다. 네가 모르는 가운데 이미 너 혼자가 아니다, 네가 모르는 가운데 칠천이 남아 있다---보이지 않는 그곳에, 내가 미처 모르고 있는 때에, 아니 몰라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바로 이때,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신 일은 변함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네 동지가 칠천이다, 네가 모르는 하나님의 사람이 칠천이다---그러니 절대로 고독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못 만났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모른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어딘가에 다 있습니다. 단지 내가 모르고 있을 뿐, 하나님의 사람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진리 편에 설 때에 오는 고독은 외형뿐입니다. 그 깊은 속은 절대로 고독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의롭게만 살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바르게만 살려고 애써 보십시오. 절대로 고독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쓰는 말처럼 귀인(貴人)이 나타나 줄 것입니다. 어디에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있어서 우리들의 동지가 되어 줄 것입니다. 절대로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고독은 죄입니다. 또한 외로워하지 말 것은 후계자가 있다는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혼자라고 낙심하는 엘리야에게 저 소 모는 농사꾼 엘리사를 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자기 중심적인 생각은 금물입니다. 내가 성공해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내가 반대하고 내가 절망하면 하나님의 일도 내 생애 안에서끝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마십시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스갯소리로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개짖는다고 해서 기차가 멎습니까? 쓸데없는 생각일랑 그만둡시다. 우리가 여기 앉아, 되느니 안 되느니 그런 시비 벌이지 맙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장애가 나타나더라도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선지가 된 것은 자기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함께 하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그가 큰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자기 마음대로 되느니 안 되느니 평가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19 : 16)." 네가 못하겠다고? 그만두거라. 후계자가 있느니라.

엘리사가 할 것이다---네가 정 못하겠다면 네 생애는 여기서 끝날 것이지만 저 후계자 엘리사가 너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엘리사가 큰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젊은 날에는 그처럼 활기차고 열심이었던 분들이 나아 들어감에 따라 어느 새 말세론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말끝마다 '말세, 말세' 합니다. 문제는 이 말세론이 성경에 근거한 종말론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노력 없이 늙고 쇠약해져 가는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니 세상도 하나님의 역사도 그렇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착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까지나 끊임없이,힘있게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나는 끝나도 하나님의 역사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후계자를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현재 해야 할 일이 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아둔할 때가 있습니다. 닫힌 문 열어달라고 두드리다가 세월 다 보내는 것 말입니다. 닫힌 문은 기다리고, 열린문으로 들어가십시오. 할 수 없는 일하게 해 달라고 울부짖기 전에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으십시오. 가능한 것을 극대화하십시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해 달라고 울부짖기 전에 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기다립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가능한 것은 시시해 안 하고, 불가능한 것은 못해서 못하고, 결국 아무 것도 못합니다. 오늘 내가 할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마다합니까? 중공 선교, 소련 선교, 북한 선교-----물론 이것도 중요하지만 바로 이웃에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친척 중에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친구가 아직 성경을 모릅니다. 나 자신이 지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내 주위에 할 일이 태산같은데 무슨 큰 일에 손을 대겠다는 것입니까? 주님은 엘리야에게 하셨듯이 오늘 여기에서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왜 고독해 하느냐? 오늘 해야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부인하기 때문에,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낙심과 우울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몇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홀로 있지 말라---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에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고, 혼자 있고 싶다고생각하는 것, 이것은 병입니다. 혼자 있지 마십시오. 오히려 문제가 있을 때에는 더욱 열심히 성도와 교제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십시오.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을 한번 넓혀 보십시오.

'이것은 아무도 이해 못할 것'이라고 단정짓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면 점점 더 깊은 함정에 빠져 들어갈 뿐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라---'나밖에 모르는 일'이란 없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도 다 겪은 이야기입니다. 나는 사랑에 실패해서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심각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어깨를 툭툭 쳐주면서 별일 아니라고 미소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경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들도 나처럼 누군가를 끔찍이 사랑해 봤고, 나처럼 실패도 해봤으며, 또 아무 일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건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것 중에서 하나를 겪는 것이지, 나한테만 특별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아주 보편적인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시시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고로 마음을 넓혀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도움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노래하고 음악을 즐기라---루터다운 이야기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라---못 이룬 소원 때문에 울부짖지 말고 이미 받은 은혜를 하나하나 헤아려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십시오. 그 감사로 고독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말씀의 능력과 그 깊이를 의존하라------말씀의 능력을 깊이 상고하는 가운데에 영감된 사례가 많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이야기, 모세 이야기……모든 사건 하나 하나를 깊이 음미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늘 가까이하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성령의 임재를 재체험하라---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가 내 마음을 움직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 말씀으로 돌아옵시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굴 속에 들어가 있는 엘리야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말씀을 두고 "How are you?"라기보다 "Wh-ere are you?"의 뜻이 아니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듯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어떠냐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 네 현주소가 어디냐? 네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냐? 로뎀나무 아래에서, 호렙산 굴속에서 죽기를 기다리는, 이처럼 멍청한 행동을 하고 있을 때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 나이 50이 넘으면 1년이 새롭다. 60이 넘으면 한 달이 새롭고, 70이 넘으면 하루가 새롭다.

그러나 80이 넘으면 한 시간이 새롭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해야 할 일이 많고 얼마나 급히 해야 할 일들이 많은 때입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혹 멍청하게 앉아서 죽고 싶다 살고 싶다소리를 밥먹듯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기 이렇게 무기력한 상태, 탈진 상태에 빠져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영적인 침체요, 정신적인 고독이요, 육체적인 허약함입니다. 여기 프랑스 철학자 라메트리(Lamettrie)의아주 재미있는 한마디의 말이 있습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깊이 음미해야 할 말입니다. '나는 할 일이 많아서 자러 가야 되겠다.'할 일이 많은 고로 쉬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이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함정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큰 시험입니다. 스스로를 과장하며 교만하지 맙시다. 나 하나로 인해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것처럼, 나라가 세워지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처럼 쓸데없는 과장을 하지 맙시다.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많은 위기를 모면케 해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여기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를 너무 과장하지 맙시다.

현실을 과장하지도 맙시다. 현실 과장은 불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자기 절망은 은혜를 배신하는 죄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우리가 받은 바 은혜가 엄청나게 큰데, 오늘 이것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아원에서 자라 형무소를 제 집안방 드나들듯 하던 청년 하나가 어느 날 제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비판의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요지는 '부모가 나를 낳아서 내다버렸다, 인정도 사랑도 없는 망할 세상이다, 교회에도 사랑이 없다, 전부가 몰인정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와 함께 가만히 생각해 보자 하고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자네는 지금까지 어떻게 먹고살았는가? 농사지은 적도 없을 텐데……" "뭐 이럭저럭 먹고살았지요." "어렸을 때에는 자네 혼자 우유를 만들어 먹었나? 기저귀는 또 어땠는가? 자네 혼자 갈아 찼나?" "누군가가 해주었겠죠.""그렇다면 생각해 보게. 다른 사람들은 자기 부모한테서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자네는 자네를 낳지도 않은 누군가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네를 키워 준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야말로 정말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야." 이야기가 이쯤 되자 청년은 무릎을 꿇고 울면서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사랑밖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를 그만두시고 우리의 죄대로 심판하신다면 우리가 몇 시간이나 더 살 것 같습니까?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참으로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받고 우리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그 사랑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요, 깨달음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절망할 것도, 고독할 것도 없습니다. 고독은 죄요, 절망은 불 신앙입니다. 배신행위입니다. 이제 탈진 상태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분명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흐르는 물은 썩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16 : 32)." 우리도 이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다시 확인하면서 무기력과 탈진을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오늘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열왕기상 19110)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참으로 고독해하는 사람 엘리야를 만납니다. 그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오직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몹시도 고독해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살고 싶은 본능이 있는 한편으로 죽고 싶은 본능도 있다고 합니다.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죽으려하는 의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오늘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주 재미있는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아합과 그의 왕후 이세벨이 대노하여 지금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까지 합니다. 이 사실을 통보받은 엘리야는 살기 위하여---성경에 씌어 있는 대로 분명히 '생명을 위하여' 도망합니다. 멀리멀리 도망합니다. 그런데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자 이번에는 죽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살기 위하여 도망해 놓고, 이제 살게 되니까 죽고 싶어하는 이 심리가 말입니다.

사람들은 죽고 싶어하기는 하지만 죽임을 당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임 당하지 않으려고 도망 도망하며 갖은 애를 다 쓰고 발악하지만, 정작 안전하게 혼자 남았을 때에는 죽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기는 하나, 죽임 당하기는 싫다--이같은 인간의 모습을 엘리야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다이나마이트의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한테는 '백만장자 부랑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엄청난 사업을 경영하면서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는 대부호였지만 그에게는 집도 가정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내도 자식도 없이 고독한 만년을 보내다 쓸쓸히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고독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너무도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간들은 평생을 통하여 그리 여유 만만한 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기, 그렇게 절박한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는 죽임 당할까봐 걱정인 때가 있는가하면, 또 언제는 죽고 싶어서 걱정입니다. 이래저래 생명을 경각(頃刻)에 두고, 그 긴장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로뎀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말도 되지 않는 억지 소원을 아룁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한 마디로 말해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죽고 싶을 만큼 고독해 합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소설가 헤밍웨이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써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 나는 전기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심히 고독하다……' 그는 훌륭한 소설로 뭇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높은 명성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실존적 고민, 이 고독 하나를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고독' 하면 먼저 육체적인 고독을 생각하게 됩니다. 병든다는 것은 고독입니다. 건강한 때에는 내가 나를 생각해도 내가 꼭 필요한 것 같고, 다른 사람한테도 내가 필요한 존재인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면, 그것도 중한 병이거나 장기(長期) 환자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쓸모가 없구나, 모든 사람에게 귀찮은 존재로구나, 아주 지겨운 존재로구나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인하고 고독하게 됩니다. 또한 늙는다는 것도 고독입니다. 무의무탁(無依無托)한 노인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반기는 사람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았는데 나이 들어감에 따라 차츰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듯이 느껴집니다.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다음은 정신적인 고독입니다. 무지함과 무능함을 느낄 때, 특히 나의 실패를 시인해야 할 때---나는 인생을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가만히 돌이켜보니 전부가 실패요, 완전한 실패임을 시인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독이 밀려옵니다. 아무도 나를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강제로 엄마 젖을 떼게 된 어린 아기가 부모로부터 배신감을 느끼는 것과도 같습니다. 대화를 상실하고, 한계를 느끼고, 자폐증 환자처럼 자기 혼자만의 노예가 되면서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이와 같은 정신적 미아, 정신적 고아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지성인들 사이에 많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통계로 보면 의외로 보통사람들보다 지식층이나 지도층에서의 발생 건수가 훨씬 높다고 합니다. 미국 연합통신사의 보도에 따르면 남을 살리기 위해, 남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애쓰는 의사들, 특히 정신과 의사들 중에 자살하는 예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직업별로 볼 때 의사의 자살율이 가장 높다는 것입니다. 의사---경제적으로는 거의 문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뭇 사람의 존경을 받습니다.

환자들은 의사를 붙잡고 나 좀 살려달라고, 마치 하나님께 매달리듯이 그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정작 의사 본인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어디 가서 선뜻 의논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40세 이전에 죽은 의사들의 사망 원인을 보면 25%가 자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히려 남의 문제에 대해서는 척척 잘 해결해 주는 사람이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의 문제에 부딪히면 어렵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병을 잘 찾아내고 잘 고치기로명성 높은 내과의가 있는데, 하루는 자기 부인이 하도 쿨룩쿨룩하고 기침을 해서 병원에 데려갔습니다. 그랬더니 '폐결핵 3' 라는 진단이 나오더랍니다. 이런 아이러니컬한 이야기가 우리들 주위에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유능한데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열등생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느끼는 절망, 허무---이것이 정신적인 고독입니다.

육체적 고독, 정신적 고독과 더불어 영적인 고독이 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욥의 부르짖음(13 : 24)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고독, 하나님께로서 버림받았다고 하는 고독이야말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잃고, 가정을 잃고, 친구를잃고, 명성을 잃고…… 다 잃는다 해도 하나님의 인정(認定)이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마저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

DTXT를 대적으로 여기시니, 하나님마저 나를 외면하시니 이제 견딜 수없다고 욥은 고민과 번뇌로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고독입니다. 이를 별명지어 '가인의 고독' 이라고 합니다. 가인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가인은 고독해 합니다. '나는 어디 가든지 마음을 붙일 수가 없고, 어디서든지 은총 밖으로 쫓겨나므로 살수가 없습니다' 하고 고민합니다(4 : 14). 은총 밖으로 밀려나는 고독, 하나님께로서 버림받는 고독---이것이 가장 절실하고 종말적인 고독입니다.

우리들의 세상사를 볼 때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실패할 때보다 오히려 성공할 때에 사람들이 곧잘 허탈감에 빠지고 고독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로부터 멸시받을 때보다 존경받을 때에 오히려 더욱 고독합니다. 천대를 받을 때에 나는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나를 칭찬할 때, 성공했다고 내게 박수를 보내는 바로 그 순간에 나 자신은 죽고싶을 만큼 고독해집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아합과 이세벨이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쫓아다닐 때에는 36개월 동안 이 굴 저 굴로 피해 다니며 전전긍긍하면서도 훌륭히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인내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멜산에서의 승리 이후 그는 많이 변해 버립니다. 우상을 섬기는 바알의 선지자450인과 홀로 대결하여 대승을 거둔 엘리야입니다. 그는 하늘로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통쾌한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기손 시내로 몰아다 죽게 했습니다. 이처럼 큰 승리를 거두고 나서 이제 고독해 합니다. 그 승리가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줄 알았는데 더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습니다. 낙심하고 탈진한 상태로 되어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하나님, 저 혼자입니다. 홀로 남았습니다. 제 생명을 취해 주십시오!" 4, 10,14절에서 누누이 혼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 혼자뿐이라고 기진맥진 허탈 상태가 됩니다.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순간입니다.

엘리야는 왜 고독해 합니까! 첫째, 자기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써 보았고, 민족을 구하려고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이제는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 비교 심리 때문입니다.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아브라함 같은, 모세 같은, 이삭 같은, 요셉 같은 인물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에 미치지 못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하고 실패를 시인합니다. 그와 동시에 또 자기를 과장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나만 열심히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버렸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배반했습니다, 모두 우상을 섬겼습니다, 나뿐입니다, 나만 특별히 주님을 섬기려 애쓰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고독도 과장합니다. 자기의도 과장합니다. 자기 능력도 너무 크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이 무너지니 스스로 절망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적의 위협과 상황의 위기감을 과장합니다. 내 생명을 찾습니다, 이제 나까지 죽으면 모든 의로운 일이 끝나 버리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못마땅해합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 모양으로 내버려두십니까? 왜 저 괘씸하고 요사스러운 아합과 이세벨을 저대로 두고 보십니까? 왜 정세를 이렇게 보고만 계십니까?---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체적인 역사에 대하여 영 못마땅해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여주세요" 하고 억지를 부립니다. 예사로 못마땅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크고 넓은 뜻 앞에서 나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쓸모 없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목적 상실이요, 목적 부인입니다.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지조차 모릅니다. 오늘에 와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스스로 부인합니다. 그래서 죽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고독과 탈진 상태에 있는 엘리야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 : 18)." 얼마나 여유 있는 말씀입니까? 엘리야의 투정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입니다. "엘리야, 혼자라고? 천만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가 7천이나 남아 있다!" 7천은 특별한 의미 있는 숫자입니다. ''은 완전숫자요, '''가정'을 의미합니다. 네가 모르는 가운데 이미 너 혼자가 아니다, 네가 모르는 가운데 칠천이 남아 있다---보이지 않는 그곳에, 내가 미처 모르고 있는 때에, 아니 몰라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바로 이때,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신 일은 변함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네 동지가 칠천이다, 네가 모르는 하나님의 사람이 칠천이다---그러니 절대로 고독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못 만났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모른다고 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어딘가에 다 있습니다. 단지 내가 모르고 있을 뿐, 하나님의 사람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진리 편에 설 때에 오는 고독은 외형뿐입니다. 그 깊은 속은 절대로 고독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의롭게만 살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바르게만 살려고 애써 보십시오. 절대로 고독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우리 나라 사람들이 잘 쓰는 말처럼 귀인(貴人)이 나타나 줄 것입니다. 어디에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있어서 우리들의 동지가 되어 줄 것입니다. 절대로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고독은 죄입니다. 또한 외로워하지 말 것은 후계자가 있다는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혼자라고 낙심하는 엘리야에게 저 소 모는 농사꾼 엘리사를 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자기 중심적인 생각은 금물입니다. 내가 성공해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내가 반대하고 내가 절망하면 하나님의 일도 내 생애 안에서끝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마십시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스갯소리로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개짖는다고 해서 기차가 멎습니까? 쓸데없는 생각일랑 그만둡시다. 우리가 여기 앉아, 되느니 안 되느니 그런 시비 벌이지 맙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장애가 나타나더라도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선지가 된 것은 자기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함께 하시지 않았더라면 어찌 그가 큰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자기 마음대로 되느니 안 되느니 평가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왕상19 : 16)." 네가 못하겠다고? 그만두거라. 후계자가 있느니라.

엘리사가 할 것이다---네가 정 못하겠다면 네 생애는 여기서 끝날 것이지만 저 후계자 엘리사가 너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엘리사가 큰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젊은 날에는 그처럼 활기차고 열심이었던 분들이 나아 들어감에 따라 어느 새 말세론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말끝마다 '말세, 말세' 합니다. 문제는 이 말세론이 성경에 근거한 종말론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노력 없이 늙고 쇠약해져 가는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니 세상도 하나님의 역사도 그렇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착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까지나 끊임없이,힘있게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나는 끝나도 하나님의 역사는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후계자를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현재 해야 할 일이 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아둔할 때가 있습니다. 닫힌 문 열어달라고 두드리다가 세월 다 보내는 것 말입니다. 닫힌 문은 기다리고, 열린문으로 들어가십시오. 할 수 없는 일하게 해 달라고 울부짖기 전에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으십시오. 가능한 것을 극대화하십시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해 달라고 울부짖기 전에 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기다립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가능한 것은 시시해 안 하고, 불가능한 것은 못해서 못하고, 결국 아무 것도 못합니다. 오늘 내가 할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마다합니까? 중공 선교, 소련 선교, 북한 선교-----물론 이것도 중요하지만 바로 이웃에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친척 중에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친구가 아직 성경을 모릅니다. 나 자신이 지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내 주위에 할 일이 태산같은데 무슨 큰 일에 손을 대겠다는 것입니까? 주님은 엘리야에게 하셨듯이 오늘 여기에서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왜 고독해 하느냐? 오늘 해야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부인하기 때문에,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낙심과 우울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몇 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홀로 있지 말라---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에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고, 혼자 있고 싶다고생각하는 것, 이것은 병입니다. 혼자 있지 마십시오. 오히려 문제가 있을 때에는 더욱 열심히 성도와 교제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십시오.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을 한번 넓혀 보십시오.

'이것은 아무도 이해 못할 것'이라고 단정짓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면 점점 더 깊은 함정에 빠져 들어갈 뿐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라---'나밖에 모르는 일'이란 없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도 다 겪은 이야기입니다. 나는 사랑에 실패해서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심각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어깨를 툭툭 쳐주면서 별일 아니라고 미소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경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들도 나처럼 누군가를 끔찍이 사랑해 봤고, 나처럼 실패도 해봤으며, 또 아무 일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건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것 중에서 하나를 겪는 것이지, 나한테만 특별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아주 보편적인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시시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고로 마음을 넓혀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도움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노래하고 음악을 즐기라---루터다운 이야기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라---못 이룬 소원 때문에 울부짖지 말고 이미 받은 은혜를 하나하나 헤아려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십시오. 그 감사로 고독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말씀의 능력과 그 깊이를 의존하라------말씀의 능력을 깊이 상고하는 가운데에 영감된 사례가 많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이야기, 모세 이야기……모든 사건 하나 하나를 깊이 음미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늘 가까이하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성령의 임재를 재체험하라---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가 내 마음을 움직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 말씀으로 돌아옵시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굴 속에 들어가 있는 엘리야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말씀을 두고 "How are you?"라기보다 "Wh-ere are you?"의 뜻이 아니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듯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어떠냐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 네 현주소가 어디냐? 네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냐? 로뎀나무 아래에서, 호렙산 굴속에서 죽기를 기다리는, 이처럼 멍청한 행동을 하고 있을 때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 나이 50이 넘으면 1년이 새롭다. 60이 넘으면 한 달이 새롭고, 70이 넘으면 하루가 새롭다.

그러나 80이 넘으면 한 시간이 새롭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해야 할 일이 많고 얼마나 급히 해야 할 일들이 많은 때입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혹 멍청하게 앉아서 죽고 싶다 살고 싶다소리를 밥먹듯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기 이렇게 무기력한 상태, 탈진 상태에 빠져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영적인 침체요, 정신적인 고독이요, 육체적인 허약함입니다. 여기 프랑스 철학자 라메트리(Lamettrie)의아주 재미있는 한마디의 말이 있습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깊이 음미해야 할 말입니다. '나는 할 일이 많아서 자러 가야 되겠다.'할 일이 많은 고로 쉬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이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함정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큰 시험입니다. 스스로를 과장하며 교만하지 맙시다. 나 하나로 인해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 것처럼, 나라가 세워지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처럼 쓸데없는 과장을 하지 맙시다.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많은 위기를 모면케 해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여기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를 너무 과장하지 맙시다.

현실을 과장하지도 맙시다. 현실 과장은 불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자기 절망은 은혜를 배신하는 죄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우리가 받은 바 은혜가 엄청나게 큰데, 오늘 이것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아원에서 자라 형무소를 제 집안방 드나들듯 하던 청년 하나가 어느 날 제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비판의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요지는 '부모가 나를 낳아서 내다버렸다, 인정도 사랑도 없는 망할 세상이다, 교회에도 사랑이 없다, 전부가 몰인정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와 함께 가만히 생각해 보자 하고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자네는 지금까지 어떻게 먹고살았는가? 농사지은 적도 없을 텐데……" "뭐 이럭저럭 먹고살았지요." "어렸을 때에는 자네 혼자 우유를 만들어 먹었나? 기저귀는 또 어땠는가? 자네 혼자 갈아 찼나?" "누군가가 해주었겠죠.""그렇다면 생각해 보게. 다른 사람들은 자기 부모한테서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자네는 자네를 낳지도 않은 누군가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네를 키워 준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야말로 정말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야." 이야기가 이쯤 되자 청년은 무릎을 꿇고 울면서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하나님의 사랑밖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를 그만두시고 우리의 죄대로 심판하신다면 우리가 몇 시간이나 더 살 것 같습니까?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참으로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받고 우리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그 사랑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요, 깨달음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절망할 것도, 고독할 것도 없습니다. 고독은 죄요, 절망은 불 신앙입니다. 배신행위입니다. 이제 탈진 상태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분명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흐르는 물은 썩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16 : 32)." 우리도 이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다시 확인하면서 무기력과 탈진을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오늘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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