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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가 산의 모세(신명기 3장 23절~29절)
사람들은 나름대로 좋아하는 계절이 있습니다. 더러는 봄을 좋아하고 더러는 여름을 좋아하는가 하면, 가을, 겨울, 이렇게 계절이 가진 특징에 따라 사람마다 좋아하는 계절이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계절에만 평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계절은 철따라 지나가니, 좋아하는 계절을 맞기도 하고 부득이 싫어하는 계절을 맞기도 합니다. 인생에도 4계절이 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희망에 부푸는 봄과 같은 계절이 있는가 하면 쓸쓸히 낙엽지는 가을과 같은 계절도 있습니다. 씨뿌리는 봄과 같은 계절도 중요합니다마는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의 가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여름 동안 땀흘리며 힘에 겹도록 수고했는데, 추수의 가을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젊었을 때에는 좀 고생을 했다 하더라도 풍성한 가을이 기다리고 있어 좋은 장년, 좋은 노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생입니까? 힘껏 수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말이 시원찮게 끝난다면 그 동안의 수고, 그 동안의 노력이 다 헛것이며 심지어는 그 출발점(동기)마저 의심받고 비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유감스럽고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을 가끔 만납니다. 그 하나가 솔로몬의 종말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사람으로 21세에 왕이 되어 영광스럽게 천하를 다스린 사람입니다. 그의 생애는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종말은 지혜의 왕답지 않게 시원한 기록 하나 없이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얼마나 유감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또 한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모세의 죽음입니다. 60만 군중이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인데 그 종말이 어찌 그렇게도 섭섭하게 끝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생을 다시 한번 모세의 종말에 조명해 보라는 경고의 말씀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모세의 일생을 살펴보면, 처음 40년 간은 바로의 궁전에서 애굽의 문물을 익히며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기르게 됩니다. 그 다음 40년은 미디안 광야로 쫓겨가서 이드로의 양을 치며 처가살이하는 가운데 겸손과 인내와 지구력과 경건을 배웁니다. 그리고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구원의 큰 역사를 이룹니다. 성숙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노숙한 인간으로서의 생애였습니다. 80년 동안의 긴 훈련 끝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이었으니 말입니다. 60만 군중을 이끌고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나아갈 때에 그가 겪은 고난과 어려움을 어찌 말로 다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 과정을 종합하면, 첫째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기적이요, 은총입니다. 어는 것 하나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사건이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에서부터 광야를 헤맬 때의 모든 일이 다 기적입니다. 일백 퍼센트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는 모험적이며 철저한 그의 신앙과 순종입니다. 그를 통해 이루어진 모든 기적이 어느 것 하나도 인간의 상식으로 납득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으로 순종하고 견디어 구 속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모세도 자신이 없어 이리저리 피하려고 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강권으로 끝내 순종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열 가지 재앙을 내 릴 때나,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때나, 또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낼 때, 그리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있어서 백성들이 우러러볼 수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그는 이처럼 영광의 순간들을 가졌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물이 없다고, 식량이나 고기가 떨어졌다고 백성들로부터 때마다 원망을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부터 애굽에 공동묘지가 없어서 이리로 인도했느냐며 자기를 때려죽이겠다고 덤벼드는 모욕까지 받았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해서 모세가 지도자로서 40년 동안 겪은 고난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더욱 유감스럽게도, 이 고난 뒤에라도 가나안을 정복하고 축복을 나눌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모세가 40 일 40 야를 하나님과 동행하고 계시를 받고 있을 때에, 백성들은 그 동안을 참지 못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목이 곧아 구제 불능이다. 내 이제 이 백성을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지만 모세는 넙죽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정히 이 백성을 용서하지 않고 진멸하시려거든 제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주소서. 이 백성이 망하고 죽는 것을 보면서 저 혼자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라고 간절히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긍휼히 여기시고 진노를 거두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백성들은 죄가 많아 다 망하게 되더라도 모세만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던 하나님이건마는, 이제 와서는 백성들이 다 요단강을 건너는데 모세만은 건너지 못하고 비스가 산언덕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습니다. 이 얼마나 유감된 일입니까? 얼마나 섭섭한 일입니까? 모세는 산의 사람입니다.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시내 산에서 계명과 계시를 받았으며 느보 산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뼈아픈 기도 장면입니다.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지만 하나님은 고개를 저으십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잘라서 말씀하십니다. 아쉽게도 모세의 생은 여기서 끝납니다. 모세가 120세나 되었으니 기진맥진해서 더는 기력이 없어 끝이 났다 해도 서운한 일인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민수기 20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는 이야기가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은 그 곳이 물이 없고 악한 땅이라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심히 큰 원망으로 불평하며 대들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고, 하나님은 반석을 치라고 지시를 하십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혈기를 부리면서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습니다. 물을 내어 온 백성이 마셨습니다마는, 그러나 마침내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 20: 12)"---너희는 나를 믿지 아니했다고 불신의 죄를 말씀하십니다.
어째서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심판을 믿으며, 사랑과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만약 모세가 불신앙의 사람이라면 이 세상 누구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분명히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그를 향하여 '너는 나를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다시 전후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했고 모세를 때려 죽이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그들은 홍해를 건넜고 만나를 먹는 기적을 매일 경험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순간 순간이 기적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잠깐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세에게 도전하니 모세도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그리하여 원망하는 백성들을 그도 함께 원망하게 됩니다. "패역한 너희여,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저주를 합니다. 언제는 모세가 자기 힘으로 물을 내었습니까? 지금 그는 자기 페이스를 잃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석을 두 번 쳤던 것입니다. 이 순간이 바로 불 신앙의 순간입니다. 원망을 들었다고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미움받는다고 미워해서도 안 됩니다. 절망하는 사람들 속에서 같이 절망하겠습니까? 내가 빼앗겼다고 나도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저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세는 너무 지쳐서 그만 불 신앙의 행위를 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과 비교해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행동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 가에 왔을 때, 그들은 열두 사람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냅니다. 그 대표들이 다녀와서 그중 열 명은 절망적인 보고를 합니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백성들이 장대해서 자신들은 그에 비하여 메뚜기 같고 그 성은 하늘에 닿았으니 어찌 쳐들어가겠느냐고 과장해서 보고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이제 죽었다고 울고불고 야단하며 원망을 합니다. 이때 유독히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옷을 찢고 통분해하며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낙심하느냐, 걱정하지 말고 "건너가자"고 외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말했습니다. 결국, 나이 많은 사람 중에서는 이 두 사람만 요단 강을 건너가게 됩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절망하는 사람과 함께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신 세대에 함께 있으나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답게'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 감정을 혼합해서 혈기로 반석을 내리쳤습니다. 하나님이 치라고 하시니 쳤고 물도 나왔으며 백성들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자기 인기, 자기 체면, 자기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어 혈기를 부렸던 것입니다. 모세가 40세 전후일 때 애굽에서 앞 뒤 사정을 살필 겨를도 없이 애굽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대단한 혈기의 사람입니다. 그뿐입니까?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나님이 친히 새겨 주신 돌비석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우상 섬기는 것을 보자, 눈에 불이 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돌판을 앞 뒤 생각도 없이 내던집니다. 조금만 여유를 되찾아서 다른 돌과 바꾸어서 던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모세에게는 그런 침착함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120세가 된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일답게 처리하지 못하고 자기 성질대로 반석을 두 번 내리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사람이 철나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120세가 되었어도 이런 실수를 하게 되니 도대체 몇 살이나 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답답하고 힘든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원망하는 백성만 보았지 백성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을 거역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민 10:24). 모세는 순종의 사람입니다 마는 이 시간에는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은 그가 어떤 이로 화를 내는 가로 드러납니다. 대체로 분노는 인간 편에서 하는 비난 섞인 판단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분노는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이 주권을 모독하는 것으로, 불신앙입니다. 자기 존재, 자기 교만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하느라고 그렇게도 애를 썼지만 온유하지 못했기에 땅을 차지하는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주권을 얻지 못합니다. 온유한 자만이 최종 승리자요 왕권을 얻기 때문입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며 그를 강경케 하라. 그가 이스라엘을 인도할 것이니라"고 약속하시고, 이것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모세가 실수했다고 하나님의 일이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있고 하나님의 사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실패했다고 하나님도 실패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다 이루십니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하고, 이 길이 아니면 저 길을 통하며, 이 때가 아니면 저 때를 통하여서 다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아니면 저 방법으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모세는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에 엘리야와 모세 두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모세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요단 강을 건너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 대열에 끼지를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으니 천당에는 갈 것입니다. 그러나 수고에 대한 추수는 각기 다를 것입니다. 수고하고 땀흘린 열매가 있지 않겠습니까? 민주화를 위해 수고했다면 민주화된 나라에 사는 영광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멀리서 바라만 보고 끝나는 유감스러운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일찍이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즉 다른 사람은 다 요단 강을 건너서 복되게 해 놓고, 자신은 실격자가 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주변에 이런 유감스러운 사건들이 더러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해 놓고 끝에 가서는 불신앙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주고 사랑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사랑해야지, 어째서 원망과 불평으로 끝내고 맙니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면 사랑으로 끝낼 것이지 어찌하여 자기 사랑에 빠지느냐는 말입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은혜의 날에 요단 강을 건너가서 가나안을 차지하는 축복의 시간에 동참하지 못할까 하는 걱정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날, 최종 승리에 동참하는 그 영광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비스가 산의 모세(신명기 3장 23절~29절)
사람들은 나름대로 좋아하는 계절이 있습니다. 더러는 봄을 좋아하고 더러는 여름을 좋아하는가 하면, 가을, 겨울, 이렇게 계절이 가진 특징에 따라 사람마다 좋아하는 계절이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계절에만 평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계절은 철따라 지나가니, 좋아하는 계절을 맞기도 하고 부득이 싫어하는 계절을 맞기도 합니다. 인생에도 4계절이 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희망에 부푸는 봄과 같은 계절이 있는가 하면 쓸쓸히 낙엽지는 가을과 같은 계절도 있습니다. 씨뿌리는 봄과 같은 계절도 중요합니다마는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의 가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여름 동안 땀흘리며 힘에 겹도록 수고했는데, 추수의 가을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젊었을 때에는 좀 고생을 했다 하더라도 풍성한 가을이 기다리고 있어 좋은 장년, 좋은 노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생입니까? 힘껏 수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말이 시원찮게 끝난다면 그 동안의 수고, 그 동안의 노력이 다 헛것이며 심지어는 그 출발점(동기)마저 의심받고 비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유감스럽고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을 가끔 만납니다. 그 하나가 솔로몬의 종말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사람으로 21세에 왕이 되어 영광스럽게 천하를 다스린 사람입니다. 그의 생애는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종말은 지혜의 왕답지 않게 시원한 기록 하나 없이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얼마나 유감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또 한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모세의 죽음입니다. 60만 군중이 이끌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인데 그 종말이 어찌 그렇게도 섭섭하게 끝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생을 다시 한번 모세의 종말에 조명해 보라는 경고의 말씀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모세의 일생을 살펴보면, 처음 40년 간은 바로의 궁전에서 애굽의 문물을 익히며 지도자로서의 소양을 기르게 됩니다. 그 다음 40년은 미디안 광야로 쫓겨가서 이드로의 양을 치며 처가살이하는 가운데 겸손과 인내와 지구력과 경건을 배웁니다. 그리고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구원의 큰 역사를 이룹니다. 성숙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노숙한 인간으로서의 생애였습니다. 80년 동안의 긴 훈련 끝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이었으니 말입니다. 60만 군중을 이끌고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나아갈 때에 그가 겪은 고난과 어려움을 어찌 말로 다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 과정을 종합하면, 첫째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기적이요, 은총입니다. 어는 것 하나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사건이 없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에서부터 광야를 헤맬 때의 모든 일이 다 기적입니다. 일백 퍼센트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는 모험적이며 철저한 그의 신앙과 순종입니다. 그를 통해 이루어진 모든 기적이 어느 것 하나도 인간의 상식으로 납득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으로 순종하고 견디어 구 속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모세도 자신이 없어 이리저리 피하려고 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강권으로 끝내 순종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열 가지 재앙을 내 릴 때나,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때나, 또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낼 때, 그리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있어서 백성들이 우러러볼 수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그는 이처럼 영광의 순간들을 가졌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물이 없다고, 식량이나 고기가 떨어졌다고 백성들로부터 때마다 원망을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부터 애굽에 공동묘지가 없어서 이리로 인도했느냐며 자기를 때려죽이겠다고 덤벼드는 모욕까지 받았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해서 모세가 지도자로서 40년 동안 겪은 고난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더욱 유감스럽게도, 이 고난 뒤에라도 가나안을 정복하고 축복을 나눌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모세가 40 일 40 야를 하나님과 동행하고 계시를 받고 있을 때에, 백성들은 그 동안을 참지 못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목이 곧아 구제 불능이다. 내 이제 이 백성을 진멸하고 너와 네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지만 모세는 넙죽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정히 이 백성을 용서하지 않고 진멸하시려거든 제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주소서. 이 백성이 망하고 죽는 것을 보면서 저 혼자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라고 간절히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긍휼히 여기시고 진노를 거두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백성들은 죄가 많아 다 망하게 되더라도 모세만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시던 하나님이건마는, 이제 와서는 백성들이 다 요단강을 건너는데 모세만은 건너지 못하고 비스가 산언덕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습니다. 이 얼마나 유감된 일입니까? 얼마나 섭섭한 일입니까? 모세는 산의 사람입니다.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시내 산에서 계명과 계시를 받았으며 느보 산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뼈아픈 기도 장면입니다.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지만 하나님은 고개를 저으십니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고 잘라서 말씀하십니다. 아쉽게도 모세의 생은 여기서 끝납니다. 모세가 120세나 되었으니 기진맥진해서 더는 기력이 없어 끝이 났다 해도 서운한 일인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민수기 20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는 이야기가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은 그 곳이 물이 없고 악한 땅이라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심히 큰 원망으로 불평하며 대들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고, 하나님은 반석을 치라고 지시를 하십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혈기를 부리면서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쳤습니다. 물을 내어 온 백성이 마셨습니다마는, 그러나 마침내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 20: 12)"---너희는 나를 믿지 아니했다고 불신의 죄를 말씀하십니다.
어째서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심판을 믿으며, 사랑과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만약 모세가 불신앙의 사람이라면 이 세상 누구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분명히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그를 향하여 '너는 나를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다시 전후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했고 모세를 때려 죽이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그들은 홍해를 건넜고 만나를 먹는 기적을 매일 경험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순간 순간이 기적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잠깐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세에게 도전하니 모세도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그리하여 원망하는 백성들을 그도 함께 원망하게 됩니다. "패역한 너희여,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저주를 합니다. 언제는 모세가 자기 힘으로 물을 내었습니까? 지금 그는 자기 페이스를 잃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석을 두 번 쳤던 것입니다. 이 순간이 바로 불 신앙의 순간입니다. 원망을 들었다고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미움받는다고 미워해서도 안 됩니다. 절망하는 사람들 속에서 같이 절망하겠습니까? 내가 빼앗겼다고 나도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저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세는 너무 지쳐서 그만 불 신앙의 행위를 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과 비교해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행동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 가에 왔을 때, 그들은 열두 사람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냅니다. 그 대표들이 다녀와서 그중 열 명은 절망적인 보고를 합니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백성들이 장대해서 자신들은 그에 비하여 메뚜기 같고 그 성은 하늘에 닿았으니 어찌 쳐들어가겠느냐고 과장해서 보고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이제 죽었다고 울고불고 야단하며 원망을 합니다. 이때 유독히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옷을 찢고 통분해하며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낙심하느냐, 걱정하지 말고 "건너가자"고 외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말했습니다. 결국, 나이 많은 사람 중에서는 이 두 사람만 요단 강을 건너가게 됩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절망하는 사람과 함께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신 세대에 함께 있으나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답게'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 감정을 혼합해서 혈기로 반석을 내리쳤습니다. 하나님이 치라고 하시니 쳤고 물도 나왔으며 백성들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자기 인기, 자기 체면, 자기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어 혈기를 부렸던 것입니다. 모세가 40세 전후일 때 애굽에서 앞 뒤 사정을 살필 겨를도 없이 애굽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대단한 혈기의 사람입니다. 그뿐입니까?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나님이 친히 새겨 주신 돌비석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우상 섬기는 것을 보자, 눈에 불이 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돌판을 앞 뒤 생각도 없이 내던집니다. 조금만 여유를 되찾아서 다른 돌과 바꾸어서 던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모세에게는 그런 침착함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120세가 된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일답게 처리하지 못하고 자기 성질대로 반석을 두 번 내리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사람이 철나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120세가 되었어도 이런 실수를 하게 되니 도대체 몇 살이나 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답답하고 힘든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원망하는 백성만 보았지 백성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을 거역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민 10:24). 모세는 순종의 사람입니다 마는 이 시간에는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은 그가 어떤 이로 화를 내는 가로 드러납니다. 대체로 분노는 인간 편에서 하는 비난 섞인 판단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분노는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이 주권을 모독하는 것으로, 불신앙입니다. 자기 존재, 자기 교만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하느라고 그렇게도 애를 썼지만 온유하지 못했기에 땅을 차지하는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주권을 얻지 못합니다. 온유한 자만이 최종 승리자요 왕권을 얻기 때문입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며 그를 강경케 하라. 그가 이스라엘을 인도할 것이니라"고 약속하시고, 이것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모세가 실수했다고 하나님의 일이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있고 하나님의 사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실패했다고 하나님도 실패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다 이루십니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하고, 이 길이 아니면 저 길을 통하며, 이 때가 아니면 저 때를 통하여서 다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아니면 저 방법으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모세는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에 엘리야와 모세 두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모세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요단 강을 건너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 대열에 끼지를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으니 천당에는 갈 것입니다. 그러나 수고에 대한 추수는 각기 다를 것입니다. 수고하고 땀흘린 열매가 있지 않겠습니까? 민주화를 위해 수고했다면 민주화된 나라에 사는 영광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멀리서 바라만 보고 끝나는 유감스러운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일찍이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즉 다른 사람은 다 요단 강을 건너서 복되게 해 놓고, 자신은 실격자가 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주변에 이런 유감스러운 사건들이 더러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해 놓고 끝에 가서는 불신앙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주고 사랑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사랑해야지, 어째서 원망과 불평으로 끝내고 맙니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면 사랑으로 끝낼 것이지 어찌하여 자기 사랑에 빠지느냐는 말입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은혜의 날에 요단 강을 건너가서 가나안을 차지하는 축복의 시간에 동참하지 못할까 하는 걱정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날, 최종 승리에 동참하는 그 영광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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