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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주께 포로된 사울(사도행전 26:12~18)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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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 포로된 사울(사도행전 26:1218)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려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어느덧 사도행전 강해도 100회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언 2년 동안이나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마는 아직도 상당한 시간을 더 공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우리는 사도 바울의 회심 장면을 다시 한번 보게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일, 그리고 회개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중생한 바로 그 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만 세 번 나옵니다. 같은 사건에 대해서 세 번이나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번째로, 사도행전 9장에서는 누가의 객관적 증거로서 그 당시 되어졌던 일을 사건대로 해설 없이 기록했습니다. 역사적 사실로,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 두 번째는 사도행전 22장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많은 군중 앞에서 시달립니다. 그 때에 천부장의 호위를 받아가며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지난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자기발명을 하는 중에 '내가 경험한 것이 이것입니다, 내가 달라진 이유가 이것입니다, 내가 오늘 핍박받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라며 핵심적으로 자신이 주님을 만난 경험, 그리고 회심을 이야기합니다.

세 번째는 사도행전 26장에 나타난 오늘의 본문말씀입니다.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마지막으로 증거하는 대목입니다. 그가 유대나라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간증인 것입니다. 이 간증과 함께 생사의 문제가 결말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듯 중요한 시간에, 결정적 시간에 다시 한번 그는 이 기회를 복음 전하는 기회로 삼아서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이 체험한 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대하여,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증거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앞의 세 가지 대목을 잘 대조해서 읽어보세요.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 기록한 이 세 대목을 보면 그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더 상세합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보다 세 번째가 더 확실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 의미까지 더 확실하게 설명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사도 바울의 귀한 신앙 간증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 번 기록되었습니다마는 바울은 전도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수백 번, 수천 번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디 가서 말씀하든지 이 말씀은 빼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체험에 대한 간증, 이 중요한 간증은 항상 반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여기에 아이러니가 하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지난날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에 책임자들로부터, 즉 대제사장과 그 권세들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보냄을 받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으로 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위임을 받고"-위임장을 가지고 저 다른 나라에 도망가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오려고 다메섹까지 가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분명히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보냄 받는다는 말은 헬라말로 '아포스톨로스'입니다. 사도라는 말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영어로 Apostle이라 하는데 그 뜻은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띠어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분명한 사명을 띠고 '대제사장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예수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요샛말로 변신을 합니다. 완전히 바꾸어집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대제사장의 사자(使者)가 예수의 사도(使徒)로 변모를 합니다. 완전히 바뀝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얘기입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러 가던 사람이 이제 예수 믿는 사람,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됐으니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180도로 완전히 달라지는 생의 변화를 우리는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포로된 것이라." 오늘의 본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본래 다른 목적으로 가던 사람인데 붙들렸어요 완전히 포로 됐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포로가 됐어요. 이것은 자기 뜻이 아니지요.

자기는 본래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서 체포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지만 이제 완전히 예수의 강권적 능력에 의하여 포로가 됐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내용이 뜻하는 바를 우리는 몇 가지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고 또 이해해야 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이것은 사실입니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꿈이 아니요, 이야기가 아니요, 철학이 아닙니다. 사건입니다.

옛날의 헬라사람들, 철학자들은 말이 많았어요. 설명도 많고 이야기도 많고 설화도 많고 신화도 많고……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사건입니다. 분명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는 이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기독교는 사건적인 종교요, 역사적 종교입니다. 어느 누구의 깨달음이나, 어느 누구의 철학이나 이데올로기……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건입니다. 예수 사건,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 사건을 기초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 교회요,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적 사건에 신앙의 뿌리가 있습니다. 믿거나말거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실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리 생각했고, 남들도 이리저리 생각했지만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신 것입니다, 나의 어떤 자격을 보신 것도 아니고, 인물을 보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스스로 친히 강권적으로 역사 하신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때부터 시작해서 내 일생 오늘까지, 내가 이렇게 감옥에서 고생하는 것, 죽거나 살거나 복음 전하는 것, 이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람의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일 뿐입니다'-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울의 의도입니다.

세 번째는 'I have no choice.'-'내게 자유가 없습니다. 나도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읽으신 본문 다음의 19절을 보십시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내게서 정말로 자유가 없습니다, 라는 얘기입니다. 가만히 보면 주님께서는 바울의 의견을 묻지 않으십니다.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일어나 다메섹으로 가라"-그것으로 끝이에요. 도대체 아무의견도 묻지 않으십니다. 언제가 누가 이런 얘기해서 웃은 적이 있어요. 모세 홍해를 건너가는데, 건너가기 전에 모여 가지고 갈까 말까 회의를 했더라면 못 건너갈 뻔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명령 앞에 인간의 의견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그만인 거예요. 바울은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내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내 의견을 물어 보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대로 따르는 길 밖에는 없었습니다'-이것이 바울의 신앙이요, 바울의 고백입니다.

네 번째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 당신도 이런 경험을 했다면 이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하는 숨은 뜻이 여기에 있어요. 내가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듯 극악무도하던 내가 이렇게됐습니다. 당신도 이런 경험을 했다면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이오, 누구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렇게 긴 이야기를 다시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오늘의 본문 끝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내가 경험한 일은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나타나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 하신 것은 나 하나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온 이방사람, 온 인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직선적으로 말하면 내가 이런 계시를 경험한 것도 어쩌면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게 이런 역사가 있은 것입니다. Once for all-모든 사람을 위하여,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사건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건은 사도 바울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확실한 경륜과 목적이 있기에 되어진 일입니다-바울은 이것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이렇게 포로된 사실에 대하여 늘 자부를 하고있습니다. 빌립보서 312절에 보면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잡힌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갈라디아서 115절에 보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벌써 어머니의 태로부터 예정하시고 확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저 다메섹 사건은 은혜로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왜요, 나는 예수를 핍박했거든요, 그런데 은혜로 나를 부르사 내가 주의사람 되고, 주의 종이 된 것입니다, 라는 깊은 자기 정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이 같은 자기의식-이것이 그의 신앙이요, 전도 열의요, 사명감이요, 생명력인 것입니다.

다시 사도 바울은 오늘 이 시간에 그 사건을, 그 역사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때가 정오나 되어(12, 13)." '내가 다메섹으로 가다가 정오에'-한번 생각해 볼만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이스라엘 쪽은 사막이고 또 덥기 때문에 낮에 여행을 못합니다. 정오에 여행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주로 아침이나 저녁에 여행합니다. 그리고 낮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쉽니다.

너무 뜨겁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사건의 시간이 정오입니다.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몹시도 서둘렀다는 뜻입니다. 이는 바울이 얼마나 극렬분자였던가를 말해줍니다. 그는 극성스러운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여행하지 않을 때, 그 뜨거운 때를 무릅쓰고 다메섹으로 재촉해서 가고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악질'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 먼길을, 그 사막 길을 대낮에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을 쓰고 있는, 그런 장면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어요. '정오'라는 말은 바울이 얼마나 극악한 사람인가, 얼마나 서둘렀는가를 말해주지만 이에 반하여 오늘날우리는 신학적 의미로 이 정오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정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밤이 아니예요. 잠자는 시간이 아니예요. 바울이 예수를 만난 것이 밤에, 비몽사몽간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밤에 그랬더라면 '꿈을 꿨나'하지 않겠어요? 명상이 아니요, 환상이 아니요, 환각 작용이 아닙니다. 정오요 대낮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밤중에 기도하기는 기도하는데 엎드려 가지고 졸다가 자다가, 이러다가 무엇 하나 보고서는 ', 계시 받았다'하고 돌아가기 쉬운데 그실 그렇지 않아요. 밤에 있었던 이야기도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마는 성경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중요한 계시들은 전부 낮에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것도 낮에 이루어진 일이고,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는 것도 아침에 이루어집니다. 저는 그 점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밤에 보는 것은 아무래도 약간 수상해요. 낮에 보는 것이 믿을만한 진짜입니다. 게다가 이 사건은 '정오에' 이루어진 것이니까 분명한 거예요. 좀더 확실한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로'정오'는 대단히 좋은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14)"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건은 공통적, 공동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 장면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공동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13)"-이것은 공동적인 것이지요. 다같이 본 거예요. 다같이 쓰러졌어요.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14)"-이게 또한 중요한 거예요. 환상이야 혼자서 보지 다 함께 보나요? 그런 의미에서"우리가"라는 말은 그 사건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을 더욱 웅변하고있는 것입니다. 해보다 밝은 빛이 내려와서 우리가 다 당에 엎드러졌다-'우리가''가던 일행 전부가'라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함께 경험한 게 있고 개별적으로 경험한 게 있어요. 이 문제에 대해서 9장에서는 '저들은 소리만 듣고 보지는 못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못 봤다는 얘기입니다. 229절에서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라고 말씀합니다. 빛은 다같이 보았지만 "사울아"하시는 소리는 사울만 들었어요. 그도 그럴것이 "사울아"하시는 소리를 꼭 다른 사람이 들을 이유도 없지요. 그러니까 어느 부분에서는 공동적으로 경험을 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전적으로 개인적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도 바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우리가 공동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지명돼서 개별적으로, 지극히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게 있어요. 신비로운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께서는 히브리말로 "사울아 사울아(14)"하고 부르셨습니다.

어디까지나 사도 바울이 알아듣기 쉬운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14)"-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바울로서는 대꾸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언제 주님을 핍박했습니까? 나는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지 예수님을 언제 핍박했다고 그러십니까?" 그러나 그가 스데반을 죽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대단히 중요한 말씀이예요.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내 이름으로 복음을 전할 때, 너희를 영접하는 것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너희를 핍박하는 것은 곧 나를 핍박하는 것이니라'-주의 이름으로 일하는 주의 종을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을 핍박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간에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이 관계를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재미있는 말씀이 본문에 또 있어요. 이 말씀은 본문에만 있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 그 시간에도 예수님께는 유머가 있었어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대단히 유머러스해요. 바울은 지금 죽을 지경인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이스라엘사람들은 쉽게 이해합니다. 이 말은 헬라사람들이나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있는 하나의 속담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들의 풍속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소나 어떤 짐승을, 특별히 소나 말 등을 길들여 가지고 처음으로 밭을 갈든가 혹은 달구지에다가 멍에를 매어 가지고 끌고 가든가 할 때, 짐승이 앞에 가고 주인이 뒤에서 갑니다. 그런데 이 짐승이 아직도 길이 덜 들여져서 순하지 않아요. 그래서 주인을 골탕먹이려고 가다가 뒷발질을 해요.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주인은 두 가지로 방법을 씁니다. 하나는 송곳 같은 것을 만들어 뒤에다가 놓아두어서 뒷발질을 하면 딱 찔리게 만듭니다. 몇 번 찔리고 나야 이놈이 정신차려서 뒷발질을 안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흔히는 가시채를, 가시나무가 엉긴 것을 둥그렇게 만들어서 뒷발 뒤편에 묶어놓습니다. 주인을 혼내려고 뒷발질을 하면 영락없이 제가 찔리거든요. 이 말씀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거예요. 이놈아, 내가 너를 붙들었는데 너 왜 뒷발질하느냐, 그 말씀이지요.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알겠습니까?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그렇지 않아요? 뒷발질하면 할수록 저 손해지요. 그러니까 '얘야, 버둥거리지 마라. 내가 너를 잡았다. 고분고분해라, 이놈아' '딴 생각 하지 말고 따라와라. 뒷발질하다가는 네가 당한다'-는 아주 유머러스한 말씀이예요. 그런고로 '행여 뒷발질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를 붙들었으니 그대로 따라와'하고 딱부러지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참 당돌한 사람입니다. 이런 경황에도 반문합니다.

"주여 뉘시니이까(15)"-'아무튼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 말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15)"--끝입니다. 여기에 다른 질문은 더 필요치 않아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 내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죽으신 줄로만 알았는데 부활하셨어요.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나셨어요. 나를 부르시고 계셔요. 더는 확인할 것도, 들어야 할 것도, 바랄 것도 있을 수 없어요. 그것으로 '상황 끝'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때부터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여 뉘시니이까"-이렇게 확인하는 용기를 보면 바울이라는 사람,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 경황이면 우리는 확인 같은 것을 해볼 엄두조차 못내는 게 보통입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소리인지, 천사의 소리인지, 사단의 소리인지 마귀의 소리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고, 신비는 신비다, 하고 돌려버리는데, 그럴 것이 아닙니다. 확인하는 제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이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1)"-신령한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신령한 것, 다시 말하면 좀 이상한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가려고 하지 마세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뭐 이상한 것을 보았다, 불이 번쩍한다, 탁 대면 쓰러진다……그러면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게 어떻다는 말입니까? 정신 좀 차리세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물으세요. 확인하세요. 성령적이냐, 신학적이냐, 복음적이냐, 교회에 덕이 되느냐-딱부러지게 물어야 됩니다. 그냥 멍청하게 넘어가지 마세요. '주여 뉘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알았습니다'-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굉장한 신학적 질문입니다. 또한 굉장한, 확실한 신학적 대답입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여기 있다. 내가 너를 이방에 보낸다. 사환으로, 증인으로'-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17절로 18절에 바울의 구원관이 있습니다.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면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17)"--먼저 구원받은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보냄을 받아야합니다. 보냄 받지 않고는 전할 수가 없어요. 바울은 로마서 1014,15절에서 말씀합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보냄을 받아야 합니다. 보냄 받은 자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18)" 돌아가게(transforming) 하고--여기에 중생(conversing)케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생각을 돌리고 ,뜻을 돌리고, 생의 의미를 바꾸고-그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18)." '죄 사함 얻고'-예수 믿는 목적이 여기에 있어요. 예수 믿는 목적은 죄 사함 받는 데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믿어 거룩하게 되어'--성화, 믿어서 거룩하게 되고, 믿어서 구원받습니다. 확실한 구원론입니다. 그리고 "기업을 얻게 하리라(18)"-이것은 하늘나라의 기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구원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바울에게 명하신 구원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16)." 9장에 보면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이제 앞으로 할 일을 네게 말할 자가 있으리라'하십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보내십니다. 굉장한 일입니다. 바울의 의견은 전혀 묻지 않으셨어요. 오로지 명령만 하십니다. '네 발로 일어서라, 다메섹으로 가라, 너는 앞으로 복음을 전할 사환과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리하여 바울은 오직 주님만을 높이고, 오직 주님의 사환으로만, 오직 주님의 사람으로만 평생을 살아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가서 평생토록 온 정신과 마음을 다해서 선교사 사역을 했습니다. 어느덧 나이가 많아서 은퇴한 선교사 내외는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비행기를 탄 선교사 내외는, 드디어 본국의 선교본부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 비행기문으로 내려다보니 거기에 군악대가 와서 죽 서 있고, 비행기 트랩서부터 입구까지 빨간 카페트가깔 리고, 꽃다발을 갖다놓는 등 사람들이 환영식 준비를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내심 '내가 온다니까 이렇게 준비했나보다. 내가 일생동안 아프리카에서 수고했더니 이렇게 환영을 해주는구나. 고맙기도 해라'하고 굉장히 영광스럽게 내리려는 찰나에 이런 기내 방송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수상님이 돌아오시는 날입니다. 여러 손님들은 수상님이 내릴 대까지 내리지 마시고 잠깐 기다리세요." 그러니까 수상 행차를 영접하느라고 준비해놓은 것을 자기 영접하는 줄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좋았다가 말았지요. 선교사는 하나님께 원망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렇게 평생 선교사로 수고하고 돌아오지만 아무도 환영하지를 않는데 일개 수상은 돌아온다고 저렇게 굉장한 환영을 하는군요. 이것 참 불공평합니다.' 그랬더니 당장 하나님께로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저렇듯 사람들과 군악대가 환영하는 것이 그렇게도 부러우냐?' 선교사는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다시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쳐다본 선교사의 눈에 그대로 환상이 보이는데, 하늘의 천사들이 눈부시게 환영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의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사람으로부터 받는 대접에는 신경쓰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일평생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많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 그는 복음만을 전하고, 주님만을 전하고, 그 당시로 말하면 이름도 빛도 없이 로마감옥에서 죽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영광은 오직 하늘에 있을 뿐입니다. 칭찬도 하늘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십니다. 12제자가 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와 '우리가 나가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우리가 나가서 이런저런 일을 했습니다'하고 자랑을 할 때에 '귀신이 나갔다고 기뻐하지 말고, 병자가 나았다고 기뻐하지 마라. 너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도하라. 그 한 가지만 생각해라'하십니다.

이제 본문의 중요한 결론인 바울의 고백을 봅시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19)"-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거역할 수 있는 성격이 나옵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역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순종하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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