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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의 자세(시편 1편 1절~6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큰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진정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그런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디 한번 진지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한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자신이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사람이라면 정말 행복할 게야' 하고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천만에요.
알고 보면 그 사람도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여건이 아닌 어떤 다른 여건, 곧 내가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어떠한 여건에 들어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가난할 때에 부하기를 바랍니다. 부자가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당장 행복해질 것만 같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만 하면 아무 소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처럼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행복이 내게로 다가와 주기를 바라며 기다립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안정, 물질적인 풍요, 사업의 성공, 건강, 장수, 혹은 명예, 지위 등을 행복이라 생각하고 그런 것들이 내 앞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여건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행복의 조건은 환경이나 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여건 속에서도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복'에 대해서 생각할 때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하나는 복된 환경, 혹은 여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복된 사람, 곧 복자(福者)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개념을 분명히 정리하여 복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쉬운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겨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겨울이 좋다. 흰 눈을 볼 수도 있고, 사람을 강하고 진지하게 만들어 주니 겨울이 좋다." 봄이 오면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따뜻하니 봄은 봄대로 좋다." 여름, 가을에 대해서도 물어 봅시다. "초목이 우거지고 활기에 넘치는 여름은 또 그 나름대로 시원해서 좋다. 하지만 가을도 좋다. 가을은 우리들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 주니까……" 이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춥고 게을러져서 싫다.
여름이 되면 덥고 땀이 나서 싫다. 가을이 되면 처량하고 허무해져서 싫다. 봄이 되면 꽃샘바람이 싫고 노곤해서 싫다" 하고'싫다' '싫다'소리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겨울이면 '아, 어서 여름이 되었으면……' 하고, 여름이면 '아, 어서 겨울이 되었으면……' 하는, 어디에 갖다놓아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새해가 없습니다. 행복도 없습니다. 가난할 때에는 자나깨나 돈만 생각하고, 돈만 있으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하더니 부자가 되고 나니까 '가난할 때 그때가 좋았는데……' 하고 앉아 있습니다. 또 총각 때에는 결혼해 달라고 죽자 사자 쫓아다니다가 결혼하고 나니 "총각 때가 좋았어" 합니다. 답답한 사람들 아닙니까? 어느 때, 어느 장소에 처해도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행복해질 수 있는 여건이 따로 있습니까? 행복한 사람은 여건에 관계없이 항상 행복합니다. 일이 생기면 기회가 주어졌다고 좋아합니다. 고독하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좋아하고, 건강하면 일할 수 있다고, 병들면 조용히 기도할 수 있다고 좋아합니다. 하는 일이 순탄하면 만사를 형통케 해주심에 대하여, 역경에 처하면 자신을 단련시키고 정화시켜 주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복음의 길이 열리면 하나님의 일 하니 좋고, 다치고 고난 당하고 순교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처해 있는 환경, 여건과는 아무상관도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여러분에게 복의 개념을 진지하게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막연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나는 부동자세(不動姿勢)로 있으면서 복된 세상이 내 앞에 열려지기를 바라는 망상은 이제 더는 하지 맙시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에덴 동산처럼 좋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파라다이스---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복된 사람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파라다이스 로스트(Paradise Lost:실락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또 한 사람,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억울하게 형님들의 미움을 받고 노예로 팔려 갑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지요, 누명을 뒤집어쓰지요, 감옥에 들어가지요…… 갖가지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결코 복된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어디를 가나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애굽이라는 큰 나라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어떤 것을 원하고 계십니까? 이 새해가 어떤 해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이 상대방을 향하여 "복 많이 받으세요" 할 때에, 혹은 "제게 복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때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은 어떠합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의 개념은 첫째, '영원한 것'입니다. 물론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함하고 있지만 이 '영원성'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의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원은 차치물론(且置勿論)하고 현재만을 생각합니다마는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영원한 것을 우선으로 보시고, 그 속에서 현재적인 축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은 전체적인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다 포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우선순위(優先順位)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물질적인 것, 세속적인 것이 주어집니다. 셋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은 개인과 전체를 다 포함합니다마는 먼저 개인부터, 개인도 육신보다는 영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람된 영혼부터이고, 그 다음이 전체로 향하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한편, 성경이 말씀하는 복에 대해서 성경학자들 간에 오래오래 풀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논쟁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이냐, 곧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조건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을 읽어 가노라면 어느 때에는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에는 저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천 년 가까이 이것이 논쟁거리가 되어온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를 살핀다면 복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복된 사람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복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이다" 라고 복의 근거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두는 축복관이 있는가 하면, "복은 행위에 대한 보상(補償)이다. 상선벌악(賞善罰惡)과 같이 조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런고로 복된 운명, 복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복된 길을 가면 복을 받고, 저주의 길을 가면 저주를 받는 것이지 결코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상식적으로 말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견해를 종합하여 좀더 성서에 근거한 결론을 내려보기로 합시다.
'복 받을 행위'보다 먼저 '복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 자체의 여건이나 행위 여하에 따라 하나님이 복을 내리신다면 복 받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조건에 관계없이 먼저 복을 받고 그 다음에 복 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여기 한 어린아이가 태어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키워 봐서 인물도 잘나고 공부도 잘하고 쓸만하면 그때에야 이 아이를 호적에 올리겠습니까? 키워 봐서 시원치 않으면 내 자식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아니지요. 일단 아이가 태어났으면 먼저 호적에 올리고 그 다음에 복된 자녀로 키워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말씀하시고 그 안에서 복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윤리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이라는 것은 세 가지 조건하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 행복하고, 일거리가 있을 때에 행복하고, 바라는 소망이 분명할 때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에서 진정한 사랑의 대상을 찾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 있는 일을 찾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참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우리들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적용시켜 봅시다. 여러분, 금년에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한 말을 하세요. 그러면 친절 속에 있는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밉고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용서하세요. 금년에는 아예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아 봅시다. 용서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은 사랑 받지 못해서 안달하고 불평 불만했지요? 금년에는 사랑 받을 생각 말고 사랑하기로 결단해 보세요. 사랑 속에 있는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만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거역하는 자세로 살아왔습니까? 금년에는 복된 사람으로 살기 위해 순종해 봅시다. 순종하는 것만큼 그 속에 있는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혹 명예니 체면이니 하면서 그 몇 푼 안 되는 품위 유지하느라고 교만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다 벗어버리고 겸손하게 살아 보세요.
겸손만큼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없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그 마음속에 불행감이 있다면 그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한사람은 자기를 크게 보기 때문에 주어진 여건에 만족지 못하고, 그래서 늘 불행한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십시오. 다른 사람들과 불화하고, 남에게 불친절하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불순종하고 교만한 동안에는 그 누구도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무엇을 가졌다고 해서, 지위가 높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의 전유물(專有物)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복을 누릴 수 있고 복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임금님이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길 한복판에 큰 돌덩이 하나를 갖다놓았습니다. 그리고 나무 뒤에 숨어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지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길 한복판에 놓인 돌을 보고 "웬 나쁜 녀석이 길 복판에다 돌을 갖다놓았담!" 하고 투덜거리면서 비켜갑니다. 요리 피하고 조리 피하면서 지나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돌에 채여 넘어질 뻔하자 고래고래 욕을 하고 원망을 하면서 지나갑니다. 그런데 마침 한 채소 장수 할아버지가 수레를 끌고 오다 그 돌을 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수레를 세워 놓고 낑낑거리며 돌을 한옆으로 치웁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힘겹게 돌을 옮겨 놓고 보니 그 돌 밑에 금은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게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글이 적힌 편지 한 장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돌을 옮기는 사람에게 이 금은 보화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금년을 어떻게 살아가실 작정입니까? 살살 피해 가며 기회주의자처럼 살 것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 저 사람 원망하며 살 것입니까? 금년에는 그러지 맙시다. 옮겨 놓으면서 삽시다. 그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부동자세로 서서 누가 나에게 복을 갖다주기를 바라고, 복된 여건이 와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설령 파라다이스에 들어간다 해도 실락원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십시오. "복 받는 길이 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요점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두 번 세 번 읽다 보면 내가 복 있는 사람인지 복 없는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진정한 복자의 모델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 모두 이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봅시다.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복 있는 사람의 환경이 전혀 복스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 생각 같아서는 복된 사람의 환경이란, 악인도 없고 죄인도 없고 유혹도 없고 교만한 사람도 없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복된 사람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사람들 속에 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된 환경이 아닙니다. 유혹도 없고 죄도 없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시편 1편 1~6절 말씀은 복되지 못한 환경에서 어떻게 복된 사람으로 살아가는지 그 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좇지 않는다는 것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과 함께 동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인'이란 불 신앙의 삶을 가리킵니다.
둘째,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 짓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서성대거나 머뭇거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서 있다가는 자신도 곧 죄에 빠지게 되니까요. '죄인'은 현행범(現行犯)을 지칭합니다.
셋째,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는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으로, 아주 경직된 죄인, 혹은 완악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은 이 교만하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이 수군대고 있는 자리에 쓸데없이 들어가 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멍청히 앉아 있다가 그대로 죄인이 되어 버리는 그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길입니다. 나쁜 사람들이 수군대고 있는 자리에 떡 들어가 앉아 화해를 시켜 보겠다, 들어보고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겠다…… 하다가는 자신까지 다치기 십상입니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복된 사람으로 살려거든 깨끗하게 사십시오. 그것이 복된 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수군수군하는 소리를 듣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명절이나 주말에 시간 여유가 생기면 주로 무엇을 하며 즐깁니까? 그런데 우리는 영 놀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다가도 놀 때만 되면 아주 난장판이 됩니다. 여가가 생기면 뭐합니까? 이상한 도박이나 하고 못된 궁리들이나 하니 도무지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6․25때 일입니다. 이북에서 피난 나와 가지고 군대에 들어가기 전 몇 달 동안 저는 피난민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난 나온 어른들의 꼴 좀 보십시오. 양반님들이 모여서 어디 할 일이 있나요? 그러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저 장기만 두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한심하게 여겼던지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호통을 치시더군요. "여보세요들, 이게 뭐하는 겁니까! 우리가 잡아먹는 사람들 무서워서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예까지 왔는데 여기서도 또 장기 둔답시고 장군이니 멍군이니 서로 잡아먹을 궁리나 하고 있으니 어디 되겠습니까? 좀 큰 생각을 가집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아예 장기판 가까이에는 가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모여 앉아 장기 두던 습관을 버렸습니다. 장기가 좋으냐 나쁘냐를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것 하고 앉아 있는 동안에 사람만 못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화투장 쥐고 있는 동안에 성격 다 버립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즐기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인하여 즐거워합니까? 좀 근사한 것을 즐깁시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이 어른 흉내 내는 것을 보고 마구 나무라며 말합니다. "너희들은 그러면 못써!" 하고요. 자기네는 실컷 즐기고 좋아하면서 왜 아이들은 안 되는 것입니까? 그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 되는 것 아닙니까? 아이들한테 해로운 오락은 어른들한테도 해롭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른들한테 좋은 것은 아이들한테도 좋아야 합니다. 내게 좋으니 너희들도 해보아라하고 정정당당히 말못하고 쉬쉬하며 숨기는 오락이라면 거기에는 틀림없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즐거움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배우는 것, 듣는 것, 행하는 것---내 즐거움이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악한 길은 어떠한 모양이건 버리고, 흉내도 내지 맙시다. 그리고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시다. 바로 여기에 복된 사람의 길이 있으며 이 길만이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길로 걸어갈 때에야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항상 푸를 것입니다.
막연한 새해를 맞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주제서 복 있는 사람의 길을 보증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복 있는 사람의 자세(시편 1편 1절~6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큰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진정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그런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디 한번 진지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한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자신이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사람이라면 정말 행복할 게야' 하고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천만에요.
알고 보면 그 사람도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여건이 아닌 어떤 다른 여건, 곧 내가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어떠한 여건에 들어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가난할 때에 부하기를 바랍니다. 부자가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당장 행복해질 것만 같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만 하면 아무 소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처럼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행복이 내게로 다가와 주기를 바라며 기다립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안정, 물질적인 풍요, 사업의 성공, 건강, 장수, 혹은 명예, 지위 등을 행복이라 생각하고 그런 것들이 내 앞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여건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행복의 조건은 환경이나 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여건 속에서도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복'에 대해서 생각할 때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하나는 복된 환경, 혹은 여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복된 사람, 곧 복자(福者)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개념을 분명히 정리하여 복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쉬운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겨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겨울이 좋다. 흰 눈을 볼 수도 있고, 사람을 강하고 진지하게 만들어 주니 겨울이 좋다." 봄이 오면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피고 따뜻하니 봄은 봄대로 좋다." 여름, 가을에 대해서도 물어 봅시다. "초목이 우거지고 활기에 넘치는 여름은 또 그 나름대로 시원해서 좋다. 하지만 가을도 좋다. 가을은 우리들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 주니까……" 이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춥고 게을러져서 싫다.
여름이 되면 덥고 땀이 나서 싫다. 가을이 되면 처량하고 허무해져서 싫다. 봄이 되면 꽃샘바람이 싫고 노곤해서 싫다" 하고'싫다' '싫다'소리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겨울이면 '아, 어서 여름이 되었으면……' 하고, 여름이면 '아, 어서 겨울이 되었으면……' 하는, 어디에 갖다놓아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새해가 없습니다. 행복도 없습니다. 가난할 때에는 자나깨나 돈만 생각하고, 돈만 있으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하더니 부자가 되고 나니까 '가난할 때 그때가 좋았는데……' 하고 앉아 있습니다. 또 총각 때에는 결혼해 달라고 죽자 사자 쫓아다니다가 결혼하고 나니 "총각 때가 좋았어" 합니다. 답답한 사람들 아닙니까? 어느 때, 어느 장소에 처해도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행복해질 수 있는 여건이 따로 있습니까? 행복한 사람은 여건에 관계없이 항상 행복합니다. 일이 생기면 기회가 주어졌다고 좋아합니다. 고독하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좋아하고, 건강하면 일할 수 있다고, 병들면 조용히 기도할 수 있다고 좋아합니다. 하는 일이 순탄하면 만사를 형통케 해주심에 대하여, 역경에 처하면 자신을 단련시키고 정화시켜 주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복음의 길이 열리면 하나님의 일 하니 좋고, 다치고 고난 당하고 순교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처해 있는 환경, 여건과는 아무상관도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여러분에게 복의 개념을 진지하게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막연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나는 부동자세(不動姿勢)로 있으면서 복된 세상이 내 앞에 열려지기를 바라는 망상은 이제 더는 하지 맙시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에덴 동산처럼 좋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복된 파라다이스---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복된 사람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파라다이스 로스트(Paradise Lost:실락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또 한 사람,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억울하게 형님들의 미움을 받고 노예로 팔려 갑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지요, 누명을 뒤집어쓰지요, 감옥에 들어가지요…… 갖가지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결코 복된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어디를 가나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애굽이라는 큰 나라의 총리대신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어떤 것을 원하고 계십니까? 이 새해가 어떤 해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여러분이 상대방을 향하여 "복 많이 받으세요" 할 때에, 혹은 "제게 복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때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은 어떠합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의 개념은 첫째, '영원한 것'입니다. 물론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함하고 있지만 이 '영원성'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의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원은 차치물론(且置勿論)하고 현재만을 생각합니다마는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영원한 것을 우선으로 보시고, 그 속에서 현재적인 축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은 전체적인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다 포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우선순위(優先順位)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물질적인 것, 세속적인 것이 주어집니다. 셋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은 개인과 전체를 다 포함합니다마는 먼저 개인부터, 개인도 육신보다는 영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람된 영혼부터이고, 그 다음이 전체로 향하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한편, 성경이 말씀하는 복에 대해서 성경학자들 간에 오래오래 풀지 못하고 있는 하나의 논쟁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이냐, 곧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조건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을 읽어 가노라면 어느 때에는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에는 저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천 년 가까이 이것이 논쟁거리가 되어온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를 살핀다면 복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복된 사람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복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이다" 라고 복의 근거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두는 축복관이 있는가 하면, "복은 행위에 대한 보상(補償)이다. 상선벌악(賞善罰惡)과 같이 조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런고로 복된 운명, 복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복된 길을 가면 복을 받고, 저주의 길을 가면 저주를 받는 것이지 결코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상식적으로 말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견해를 종합하여 좀더 성서에 근거한 결론을 내려보기로 합시다.
'복 받을 행위'보다 먼저 '복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 자체의 여건이나 행위 여하에 따라 하나님이 복을 내리신다면 복 받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조건에 관계없이 먼저 복을 받고 그 다음에 복 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여기 한 어린아이가 태어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키워 봐서 인물도 잘나고 공부도 잘하고 쓸만하면 그때에야 이 아이를 호적에 올리겠습니까? 키워 봐서 시원치 않으면 내 자식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아니지요. 일단 아이가 태어났으면 먼저 호적에 올리고 그 다음에 복된 자녀로 키워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말씀하시고 그 안에서 복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윤리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이라는 것은 세 가지 조건하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 행복하고, 일거리가 있을 때에 행복하고, 바라는 소망이 분명할 때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에서 진정한 사랑의 대상을 찾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 있는 일을 찾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참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우리들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적용시켜 봅시다. 여러분, 금년에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한 말을 하세요. 그러면 친절 속에 있는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밉고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용서하세요. 금년에는 아예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아 봅시다. 용서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은 사랑 받지 못해서 안달하고 불평 불만했지요? 금년에는 사랑 받을 생각 말고 사랑하기로 결단해 보세요. 사랑 속에 있는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만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거역하는 자세로 살아왔습니까? 금년에는 복된 사람으로 살기 위해 순종해 봅시다. 순종하는 것만큼 그 속에 있는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혹 명예니 체면이니 하면서 그 몇 푼 안 되는 품위 유지하느라고 교만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제 다 벗어버리고 겸손하게 살아 보세요.
겸손만큼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없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그 마음속에 불행감이 있다면 그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한사람은 자기를 크게 보기 때문에 주어진 여건에 만족지 못하고, 그래서 늘 불행한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십시오. 다른 사람들과 불화하고, 남에게 불친절하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불순종하고 교만한 동안에는 그 누구도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무엇을 가졌다고 해서, 지위가 높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의 전유물(專有物)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복을 누릴 수 있고 복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임금님이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길 한복판에 큰 돌덩이 하나를 갖다놓았습니다. 그리고 나무 뒤에 숨어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지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길 한복판에 놓인 돌을 보고 "웬 나쁜 녀석이 길 복판에다 돌을 갖다놓았담!" 하고 투덜거리면서 비켜갑니다. 요리 피하고 조리 피하면서 지나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돌에 채여 넘어질 뻔하자 고래고래 욕을 하고 원망을 하면서 지나갑니다. 그런데 마침 한 채소 장수 할아버지가 수레를 끌고 오다 그 돌을 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수레를 세워 놓고 낑낑거리며 돌을 한옆으로 치웁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힘겹게 돌을 옮겨 놓고 보니 그 돌 밑에 금은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게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글이 적힌 편지 한 장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돌을 옮기는 사람에게 이 금은 보화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금년을 어떻게 살아가실 작정입니까? 살살 피해 가며 기회주의자처럼 살 것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 저 사람 원망하며 살 것입니까? 금년에는 그러지 맙시다. 옮겨 놓으면서 삽시다. 그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부동자세로 서서 누가 나에게 복을 갖다주기를 바라고, 복된 여건이 와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설령 파라다이스에 들어간다 해도 실락원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십시오. "복 받는 길이 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요점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두 번 세 번 읽다 보면 내가 복 있는 사람인지 복 없는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진정한 복자의 모델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 모두 이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봅시다.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복 있는 사람의 환경이 전혀 복스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 생각 같아서는 복된 사람의 환경이란, 악인도 없고 죄인도 없고 유혹도 없고 교만한 사람도 없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복된 사람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사람들 속에 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된 환경이 아닙니다. 유혹도 없고 죄도 없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시편 1편 1~6절 말씀은 복되지 못한 환경에서 어떻게 복된 사람으로 살아가는지 그 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좇지 않는다는 것은 따라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과 함께 동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인'이란 불 신앙의 삶을 가리킵니다.
둘째,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 짓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서성대거나 머뭇거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서 있다가는 자신도 곧 죄에 빠지게 되니까요. '죄인'은 현행범(現行犯)을 지칭합니다.
셋째,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는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으로, 아주 경직된 죄인, 혹은 완악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은 이 교만하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이 수군대고 있는 자리에 쓸데없이 들어가 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멍청히 앉아 있다가 그대로 죄인이 되어 버리는 그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길입니다. 나쁜 사람들이 수군대고 있는 자리에 떡 들어가 앉아 화해를 시켜 보겠다, 들어보고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겠다…… 하다가는 자신까지 다치기 십상입니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복된 사람으로 살려거든 깨끗하게 사십시오. 그것이 복된 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수군수군하는 소리를 듣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명절이나 주말에 시간 여유가 생기면 주로 무엇을 하며 즐깁니까? 그런데 우리는 영 놀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다가도 놀 때만 되면 아주 난장판이 됩니다. 여가가 생기면 뭐합니까? 이상한 도박이나 하고 못된 궁리들이나 하니 도무지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6․25때 일입니다. 이북에서 피난 나와 가지고 군대에 들어가기 전 몇 달 동안 저는 피난민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난 나온 어른들의 꼴 좀 보십시오. 양반님들이 모여서 어디 할 일이 있나요? 그러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저 장기만 두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한심하게 여겼던지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호통을 치시더군요. "여보세요들, 이게 뭐하는 겁니까! 우리가 잡아먹는 사람들 무서워서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예까지 왔는데 여기서도 또 장기 둔답시고 장군이니 멍군이니 서로 잡아먹을 궁리나 하고 있으니 어디 되겠습니까? 좀 큰 생각을 가집시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아예 장기판 가까이에는 가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모여 앉아 장기 두던 습관을 버렸습니다. 장기가 좋으냐 나쁘냐를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것 하고 앉아 있는 동안에 사람만 못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화투장 쥐고 있는 동안에 성격 다 버립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즐기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인하여 즐거워합니까? 좀 근사한 것을 즐깁시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이 어른 흉내 내는 것을 보고 마구 나무라며 말합니다. "너희들은 그러면 못써!" 하고요. 자기네는 실컷 즐기고 좋아하면서 왜 아이들은 안 되는 것입니까? 그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 되는 것 아닙니까? 아이들한테 해로운 오락은 어른들한테도 해롭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른들한테 좋은 것은 아이들한테도 좋아야 합니다. 내게 좋으니 너희들도 해보아라하고 정정당당히 말못하고 쉬쉬하며 숨기는 오락이라면 거기에는 틀림없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즐거움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배우는 것, 듣는 것, 행하는 것---내 즐거움이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악한 길은 어떠한 모양이건 버리고, 흉내도 내지 맙시다. 그리고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시다. 바로 여기에 복된 사람의 길이 있으며 이 길만이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길로 걸어갈 때에야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항상 푸를 것입니다.
막연한 새해를 맞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주제서 복 있는 사람의 길을 보증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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