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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은혜의 자리 (1)

by 【고동엽】 2024. 11. 18.

 은혜의 자리 (1)

 

 

 

 

                                     왕상 19:1-8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일어나 먹

 

                      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보면 너무나 거룩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와 화복을 주관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접근하기에 하나님은 너무나 크고 원대하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율법서를 큰 소리로 읽다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부르지 못하고 그냥 뛰어넘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에게는 또 어머니 같은 모성의 속성도 지니십니다. 한없이 심판하고 호령만 하시는 그런 권위적인 하나님만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다감하시고 다정하시고 부드러우신 하나님입니다. 용서를 하되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고 강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은 언제든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를 보십시오. 집나간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병들어 집에 돌아왔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내쫒고 싶었지만 그런데 마음과 몸은 이미 버선발로 뛰어나가 아들을 맞아들입니다. 그 이야기에서 탕자 아버지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모성적 속성을 소개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보게 됩니다.  

 

 

 

 

 “참새 한 마리에도 관심”

 

 

 

 

 

씨 중의 가장 작은 씨는 겨자씨입니다. 성경은 겨자씨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개합니다. 새 중의 가장 작은 새는 참새입니다. 그래서 참새는 사람들의 안중에도 없습니다. 가장 작다는 표현을 우리는 “새 발의 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중에는 그 참새 한 마리의 존재도 귀히 여기시고 계획을 하시고 먹이십니다( 10:29). 참새가 죽고 사는 문제는 사람들에게는 안중에도 없으나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 말은 우리의 하찮은 일과 작은 고민들도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 나의 고민, 나의 애환을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은밀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한나를 보십시오. 아무도 없는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음성을 듣지 못했지만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가 팔리고 땅에 떨어지는 문제까지도 관여하십니다.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다”

 

 

 

 

 여기 “세신바 되었다”는 말은 완료형으로 말씀했습니다. 그 말은 “이미 옛날에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머리털은 숫자가 많습니다. 많기 때문에 하루에 보통 50여개씩 빠집니다. 사람들은 빠지는 머리털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빠지는 머리칼 까지도 관찰하신다는 말입니다( 10:30). 그 말은 “하나님은 너무나 자상하시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자상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천지창조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자상합니까. 흙에 씨를 뿌리면 식물이 나오고 꽃이 피어오릅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그 꽃이 색색으로 피어오른다는 것입니다. 그 색이 땅속 어디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입니까. 참 오묘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저 흙속에 각종 영양소를 감추어 두셨습니다. 색의 원소들을 뿌려 두시고 생명의 근원들을 숨겨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그렇게 자상하게 세밀하게 신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배고픈 아이 울음소리를 들으심”

 

 

 

 

하나님은 과부의 하나님이시고 고아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권세자들에게 “고아와 과부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이 흘리는 눈물을 반드시 기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그들을 괴롭히면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또 그 말은 우리들이 보이지 않게 아파하는 마음, 혼자 간직해야 하는 아픔 마음을 내가 다 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픈 그 삶을, 그 처지를, 그 눈물을 다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49:15). 그리고 은밀하게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는 그 기도의 내용까지도 들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보면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고독하지 않습니다. 내 배후에는 이 하나님이 계십니다. 얼마나 든든한 빽입니까. 시편은 이런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한 사람들의 간증문이고 신앙 고백문입니다. 시편내용을 보면 한결같이 외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애환을 알고 결국에는 하나님이 다 해결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시는 그 시대마다 하나님의 절묘한 섭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고백한 시입니다. 그리고 오늘 후대의 사람들이 그 시편을 보고 읽고 나의 고백으로 삼는 것입니다.

 

 

 

 

 

 12:42 - 과부의 손에서 떨어진 두 개의 작은 동전의 의미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는 가난한 사람의 상징으로 비유하십니다. 특히 “가난한 과부”는 헬라어 “프토코스”(ptocos) “극빈자”를 의미합니다. 41절에서 말하는 부자 “풀루시오이”(pulusioi)와 대칭되는 계층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 와서 연보통에 동전 두 개를 넣었습니다( 12:42). 그 액수가 두 렙돈이었습니다. 당시 가치중 가장 낮은 액수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200백 원 정도로 석류 한 개를 살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찮게 무시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도 기억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과부의 하나님이시라고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주일날 작은 돈을 헌금할 때 부끄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옛날에는 퍼진 그릇에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때 동전을 낼 때는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내게 가진 것이 많은데 인색하게 드리는 것은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드릴 것이 없다면 몇 푼의 헌금 즉 참새 한 마리 값의 헌금이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내 마음을 다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생활은 나와 사람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깊이 아시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성전 건축헌금을 약정했습니다. 약정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지금 당장 드릴 수 없으니까 기간 내에 드리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명세서를 보니까 어떤 분은 많이 하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능력 있으면 많이 해야 합니다. 두 번도 아니고 우리 생애에 단 한번 하는 것인데 할 수 있으면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5만원을 한분도 있었습니다. 내 삶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면 그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할 수 있으면서도 안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부끄러워 할 일 아닙니다. 성전건축에 내가 동참하고 참여한 것만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것도 없으면 기도로 동참할 수도 있습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여인이 동전 넣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나의 형편도 아실 것입니다. 결코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은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처지,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계획을 다 알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믿고 살면 두 가지 은혜를 입게 됩니다. 하나는 경거망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는 주님 앞에 내가 무슨 경거망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더 겸손하게 되고 더 진지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외롭지 않게 됩니다. 세상에 두려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신앙인들이 용기 있게 행동하였고 처세하였고 신앙을 고백하면서 순교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금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느 가난한 과부가 부끄럽게 동전 하나를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것을 보시는 주님은 그 입장, 그 마음, 그 형편도 다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 나를 잘 아시는 분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병들고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위로와 소망 주시는 하나님

 

 

이 부분이 가장 극적인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일생 중에서 언제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그 질문에 가장 많이 대답한 말이 “실패했을 때, 중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는 대답입니다. 살아가다가 중병에 걸리는 것도 인생의 과정 중에서 실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살면서 실패의 자리, 중병의 자리는 일생에서 가장 어려울 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때가 모두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런 면에서 실패는 또 다른 은총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엘리야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는 일생일대에서 가장 통쾌한 승리를 거두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가 850명과 혼자 싸워서 통쾌하게 승리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승리감에 도취합니다. 그때 악명 높은 바알 선지자의 우두머리요 아합 왕의 왕후인 이세벨로부터 전갈이 왔습니다. “내일 이맘 때 네 목숨도 저들 중 하나같이 만들어 주겠다.” 엘리야는 그 여인의 말 한마디에 순간 급체합니다. 손발이 떨려왔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의 힘이 닿지 않는 55km 떨어진 남왕국 브엘세바로 도망을 갔습니다. 거기 가서 시종을 놔두고 다시 하룻길 되는 거리인 약 백리 길을 더 들어가 광야 한복판으로 가서 거기 로뎀나무 오늘 날로 말하면 싸리나무입니다. 그 나무 밑에 누워 울부짖었습니다. “나는 넉넉하오니 이제 그만 죽여주소서.(19:4)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제 850명과 혼자 싸워 통쾌하게 승리했습니다. 그 싸움은 하나님이 절대 도우심으로 승리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상대방을 이기게 하시고 그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한 여자 이세벨의 오기에 찬 말 한마디에 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만 초죽음이 되어 200리 밖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를 죽여 달라고 넋두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참 무섭습니다. 여자는 평안하고 행복하게 인격적으로 잘 대우해 주어야 합니다. 여자를 화나게 하면 이렇게 됩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를 보시며 모두 여자를 화나게 한 남자들이 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가 혼자 바알의 선지자 850명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하나님이 버티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엘리야가 오늘은 초죽음이 되어 도망하여 나무아래 누워 “날 죽여주소서”하고 넋두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때가 엘리야에게는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한 위기의 때입니다.

 

 이런 때에 처하게 되면 사람은 모두 잠재되어 있던 모든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원망이 나옵니다. 엘리야도 실패하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넉넉하오니 죽여주소서.” 그 말은 이제는 하나님 일 하기가 너무 피곤해 죽겠다는 불평이고 원망입니다. 엊그제 큰소리치며 850명과 홀로 싸울 때 얼마나 당당했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좌절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묘한 데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큰 대상 앞에서는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것에 그만 실패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성 여리고 성은 보기 좋게 이겼습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아이 성에서 그만 실패했습니다. 그런 후에 이 백성들이 얼마나 낙심해서 울부짖었습니까. 때로 역사를 보면 큰 것에 이기고 작은 것에 패배할 때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감람산에서 기도하고 하산할 때 로마 병정들이 와서 예수를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칼을 빼들었습니다. 얼마나 용기가 있습니까. 베드로가 그렇게 용기가 있었는데 한 여종의 말 한마디에 그만 예수를 저주하며 모른다고 맹세까지 하며 무너졌습니다. 또 다윗을 보십시오.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누가 상상이나 한 일입니까. 그때 사울이 “저자가 누구의 자식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용맹스러웠던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여인에게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나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렸습니까. 여기 엘리야를 보십시오. 어제 850:1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세벨이라는 여인 혼자서 도전해 왔는데도 그만 혼비백산해서 200리 길 밖으로 도망가 나무 아래 누워 초죽음이 된 채 눈물을 흘리며 신세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갈 때 이런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다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실패가 주안에서 주어졌을 때는 그 실패도 은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나는 때이고 은혜 입는 때이고 회복의 때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실패도 중병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실패의 자리로 찾아오시고 중병 때에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공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저 혼자 잘나서 성공한 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궁중에서 왕자로 살아갈 때 얼마나 기고만장 했겠습니까. 모세가 혼자 거드름을 떨다 사람을 죽입니다. 모세가 어느 날 졸지에 살인자가 되고 바로가 모세를 호출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 길로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그로부터 40년간을 광야에서 망명생활을 합니다. 갑자기 초라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고민이 얼마나 컷겠습니까? 모세는 그 40년 동안 자만과 교만과 거드름 떨던 것들이 다 부서지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40년 되던 어느 날 호렙산으로 올라가 외쳤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모세는 비로소 그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면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고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 있는 곳은 신령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 그 말은 무릎을 꿇으란 말입니다. 겸손 하라는 말이고 순종하라는 말이고 자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너는 당장 애굽으로 가서 고난 받는 네 백성을 구원하라.” 모세가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고 항복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갈 길을 안내하시고 할일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실패의 자리, 중병의 자리가 은혜의 자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위인들을 보면 한결같이 이 실패의 자리와 중병의 자리를 경험했습니다. 또 성공자들을 보면 한결같이 이 실패를 경험하고 중병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실패하고 중병에 걸리면 되느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 실패의 자리에서 눈물과 참회와 항복을 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합동해서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실패와 중병과 가난과 무능이라는 자본을 통해서 반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를 소중함을 아십니다. 고아의 눈물 한 방울의 의미도 아십니다. 과부의 동전 하나에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리고 실패와 넘어짐과 중병을 통해서 다가오시고 위로하시고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는 실패도 중병도 가난도 때로 은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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