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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증거(요 4:27~42)
계속해서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대단히 드라마틱한 데가 있습니다. 단순히 물을 길러 나왔다가 뜻하지 않게 주님을 만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만남이란 의외로 어려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해 주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만남은 눈과 눈이 마주치며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인격과 인격이 만나기 때문입니다.
서로 보지 않을 때는 할 말이 많았고 오해도 있었지만 일단 만나고 보면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입니다.
편지나 전화는 가끔 오해를 만들기도 합니다. 인격의 만남 없이 말만 하는 데서 오는 부작용입니다. 더욱이 소문이라는 것은 몇 사람을 거쳐서 들려오는 것이기에 더욱 오해가 많아집니다. 필자는 직접 하는 이야기가 아니면 안 듣기로 작정했습니다. 원래 언어란 언언 자체의 한계성 때문에 정확한 전달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격과 인격이 마주치고 얼굴과 얼굴을 서로 대하면 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멀리서는 비밀을 지킬 수 있어도 눈을 쳐다보면 비밀을 지키지 못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마음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비밀을 가진 사람은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옆으로 비스듬히 눈을 뜨는 사람은 무엇인가 비밀을 가졌다고 해도 가히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생전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몇 마디 대화 중에 그녀의 마음 문은 활짝 열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데려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솔직하게 남편이 없다고 진실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역시 만남에서 이런 진실을 찾게 됩니다. 다음으로, 그녀는 예배할 곳을 찾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예배한 제사를 의미합니다. 제사는 곧 속죄제로, 어떻게 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녀의 질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디서 제사를 드려야 근본적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그녀의 진실을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진정으로 죄 사함의 은사를 구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다음은, 자기와 마주하고 있는 유대인이 메시야인 것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감격했고 그 감격 속에서 자기를 찾습니다. 잃어 버렸던 자기를 다시 찾고 자기 존재를 알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 존재를 찾은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갔다(요 4:28)고 했습니다. 우물가에서 동네까지 약 10리 길인데 물 동이를 버려두고 갔다는 장면이 정말 아름답게 생각이 됩니다. 먼 길을 물 길러 나왔다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가면 어찌하겠다는 것입니까? 이 여인은 물동이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버리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녀는 물보다는 전도가 더 중요하다는 지혜를 깨달은 것입니다. 사실, 전도하러 갔다기 보다는 자랑하러 갔던 것 같습니다. "나는 예수를 만났다, 온 동네 사람들은 나를 시시하게 보지만 나는 예수를 만났다"라고 말하고 싶어서 동네로 뛰어가는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참 귀중한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나를 따르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물을 버려두고 좇았습니다. 보다 중요한 일을 위해서는 보다 덜 중요한 일을 버려야 합니다. 버린다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귀한 밭을 사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다 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밭을 사기 위해 모든 소유를 파는 것이므로 판다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 바로 예수를 믿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새로 사는 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나머지를 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 버릴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진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정은 긍정을 위해 버리는 것이며, 다른 것을 소유했기에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알기에 십자가를 지는 일이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가장 소중한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문제입니다. 보다 더 소중한 가치관을 가지게 되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자연히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신앙적이고 영적인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증거를 합니다.
증거하는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 4:29). 이 말을 풀이하면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다 말한 사람을 와 보라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나를 알아 주는 분을 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나를 아는 분, 즉 나를 안다는 것이 이렇게 고마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동네로 들어가서 "와서 보라" (come and see)고 기쁨에 넘쳐 외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만 "come and see"가 세 번이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9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 주님께서는 와 보라고 하셨고, 빌립이 나다니엘에게 전도할 때 나다니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반문하니 "와서 보라"고 빌립이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4:29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와 보라"고 증거 합니다.
"와 보라" 기독교는 와서 보는 종교입니다. 복잡하게 어려운 말로 전도할 것이 아니라 한번만 와서 보라고 간단하게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와서 보고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본문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깨닫거나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와서 보는, 즉 체험을 말하고 실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대로가 사실이므로 누구나 나와 같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나처럼 열심히 될 수가 있고, 나처럼 미칠 수가 있습니다. "와 보라"는 것은 주관적인 인식의 문제가 아니고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이 진리를 받는 순간 다같이 이렇게 될 수 있는 실제적인 종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와서 보라고 외치며 이어서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감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받은 은혜는 흔히 병을 고쳤거나, 죽었다가 다시 살았거나, 장님이 눈을 떴다거나 하는 은혜와는 다른 은혜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주님이 말씀했다고 해서 받은 은혜로써, 즉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 그것으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어떤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와서 보라고 전도할 때에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되겠습니 까? 예수와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나의 사업이 부진했는데, 예수 믿음으로 성공했다고 말하겠습니까? 이런 종류의 이야기로는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말하기를,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다 말한 그 분은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히브리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표현으로 긍정을 강조하는 것은 히브리적인 독특한 문법입니다. 가령, 빨간 색이 있으면 이것은 '빨간 색이 아니냐'라고 해서 빨갛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도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는 말은 "그리스도다"라는 말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사마리아 여인의 신앙이 점점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인식은, 낯설고 교만한 유대인의 남자라는 인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인 그가 왜 이방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가"하고 다소 저항감을 가졌습니다. 두번째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겠다고 말하는 이상한 남자라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마디 더 이야기하는 가운데 발전하여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즉 보통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구나 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다, 메시야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만나면 점점 신앙이 발전해야 합니다. 점점 인식이 깊어져야 합니다.
필자는 가끔 약혼주례를 할 때마다 당부하기를 "약혼하는 오늘부터 시작해서 사랑을 한다고 생각지 말고 일생동안 사랑을 배운다고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사랑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부터 배우고 익히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궁무진한 진리로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고 오묘하므로 계속 배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모릅니다. 배우고 또 배우고, 익히고 또 익혀서 시간이 거듭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성경을 보고 또 보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더 깊이, 더 가까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에게 나를 맡긴다는 사실입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나의 지나간 부끄러운 과거를 아는 사람 앞에서는 도망가기 쉽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께서 "네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실 때 창피하고 원망스럽기도 해서 도망갈 수도 있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입니까? 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내 부족과 약한 점을 아는 사람으로부터 도피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도피한다는 것은 내 허물을 감추는 것이므로 회개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회개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아는 사람에게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나의 실수에서부터 저 밑바닥까지 다 아는 그 사람은 나의 애인이요 믿음이요 진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가 감추고 싶은 사실을 주님이 말씀하실 때 오히려 그것을 신앙의 동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부끄러움이 없어졌습니다. 정말로 예수님 앞에서 깨끗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나를 아는 자에게 나의 모든 것을 다 보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가서 그렇게도 만나기 싫었던 이웃들을 반갑게 만나고 전합니다. 이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께 물 한 그릇도 줄 수 없는 자기 콤플렉스가 가득한 여인이었지만, 불과 몇 시간 만에 깨끗이 해소되고 전혀 다른 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믿는 순간부터 나의 과거와 나는 상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부끄러운 자기 과거 때문에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사막지대에서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만나자마자 구원의 대상임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주님을 알고 난 후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소문을 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지난날의 부끄러운 과거에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 잊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남편이 여섯이라면 어떻고 열이라면 어떻습니까? 회개한 죄에 대해서는 어떤 소문이 나도 두려워하거나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눈치만 보고 왔다갔다 하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만나기 싫었던 이웃들이 이제 반가워졌습니다. 그래서, 내 과거를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고 오히려 소리지르며 다니는 것입니다. 사람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도 멀어진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반가워하고 심지어는 원수까지 반가워져야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믿는다고 하면서 소외감을 느끼면 잘못된 것입니다.
구약의 욥기에서 보면, 욥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친구들이 와서 위로를 합니다. 일주일 동안 줄곧 그의 고난을 지켜보다가 일주일 후에야 위로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친구들의 위로에 대해 "너희들이 나를 조롱하는구나"라고 말하며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너무 어려운 시험 속에 있는 욥이었기에 친구들의 위로가 조롱으로 들린 것입니다. 이 쪽에서는 위로하기 위해 말했지만 받는 쪽에서 비뚤어지게 오해를 하면 무슨 말이든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문제는 내 마음의 갈등 때문에 위로를 위로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내 마음에 충만하다면 다소 어려운 일이 있어도 쉽게 넘어설 수 있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좋은 사람이 많고 반가운 사람이 많습니까? 그러면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은 없고 미운 사람만 많다고 생각되면 회개해야 합니다. 내 마음과 자세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갈등이 심한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모든 사람이 반가워서 소문을 냈습니 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문제 노출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에 대한 윤리관계까지 달라졌습니다.
다음, 예수님은 우물가에 계시고 음식을 장만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방인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유대인의 남자로서 더욱이 메시야이신 그 분이 이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너무 어리둥절하여 아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요 4:27).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을 못하고 이제 준비해 온 음식을 잡수시라고 권합니다. 이 때 예수께서는 "내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고 귀한 말씀을 하십니다. 3년을 예수님과 함께 지낸 제자들이었지만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누가 잡수실 것을 갔다 드렸나"(요 4:33) 하고 서로 바라만 보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설명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쉽게 말하면, 한 사람에게 전도해서 그가 기뻐하는 것을 보니, 배고픈 것이 다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가령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맛있게 음식을 먹으면 자기가 먹은 것처럼 만족하고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불행한 한 여인이 구원을 받았으므로 너무 좋아서 배고픈 생각이 없어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리플레쉬(reflesh) 되었다는 말입니다. 불쌍한 여인의 구원으로 행로에 피곤하시던 몸이 다 회복되고 목마르지도 배고프지도 않으시고 충분히 휴식이 되신 것입니다.
휴식이란 무엇입니까? 편안하게 쉬는 것이 휴식입니까? 휴식의 참 의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휴식이요 선한 일을 하는 것이 휴식입니다. 우리는 가끔 휴식을 위해 조용한 곳으로 떠나고 있지만 진정한 휴식이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휴식의 비법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휴식은, 선 한 일을 함으로써 얻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행로에 피곤하시고 목마르고 시장하신 가운데서도 한 사람을 전도하심으로, 그만 피로는 사라지고 음식을 잡수실 생각이 없어지신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양식도 있고 목마르지도 않으니 일하기에 얼마나 좋은 조건입니까? 건강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함으로 건강해집니다. 하나님의 일은 귀한 것으로 일생 후회하지 않을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일에 동참할 때 우리의 모든 피로는 다 없어지는 훌륭한 휴식법을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제 사마리아 여인의 외침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10리 길을 마다않고 몰려 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손은 벌리시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제자들께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독특한 통찰력(insight)을 보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한 마디 말을 듣고 몰려오는 군중들을 보시면서 지금은 씨 뿌릴 시기나 가꾸는 시기가 아니라, 무르익어 있으므로 추수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며칠씩 전도하거나 설득할 때가 아니라, 말 한마디에 믿음이 생기므로 진정 추수할 때입니다. 요즘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로부터 자주 듣게 되는 원망이 있습니다. 초신자의 말에 의하면 자기 옆집에 집사님이 사시는데, 3년을 이웃하고 살았지만 예수믿으라는 한 마디 말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보니 이렇게 좋은 진리를 진작 듣지 못했음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웃은 다 익은 곡식인데 추수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우리들의 주변에 이와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지 말고 "예수 믿읍시다, 와서 보시오"라고 한 마디씩만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누렇게 익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본문) 주님은 전도를 하시고 사마리아에서 이틀 동안 유하셨습니다(요 4:40). 이 사실은 정말 큰 긍휼이요 사랑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그 땅을 지나 가지도 않는데, 예수님은 이틀을 유하셨다는 데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42절에 보니 섭섭한 말이 있습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러라"(요 4:42). 군중들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당신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고맙소"라고 말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사는커녕 끝까지 업신여깁니다. 우리가 믿은 예수는 너 때문이 아니다라고 고약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전도를 했어도 당신 때문에 예수믿었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듣기란 힘든 일입니다. 믿고 나서는 대부분이 다 자기 스스로 믿었다고 생각하니까요. 수가라는 동네 사람들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당신의 과거는 시원치 않지만 우리들이 당신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정말 좋은 일 했소"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정 이런 말을 하기 싫었다면 가만히 있었어도 괜찮을 것인데, "우리가 믿은 것은 당신 때문이 아니요"라고 얄밉게 말했습니다. 끝까지 이 여인을 멸시하고 무시한 것입니다. 이 여인의 입장에서는 멸시를 받아도 언짢거나 섭섭한 마음은 없어야 합니다. 역시 나는 더러운 여자였으니까 하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 그녀는 진실로 신앙의 여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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