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열 처녀 비유(마태복음 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중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쌔,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쌔, 미련한 자들이 슬기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을 이름하여 마태복음의 종말론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귀한 말씀 중 특별히 세상 끝에 되어질 일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말씀들은 어느 때에 읽어보아도 두렵고 무서운 말씀이며, 현실에 안주하며 살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는 임박한 심판을 의식케 하는 크나큰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따금 신앙에 회의가 생기거나 신앙생활이 나태해질 때에는 마태복음 24-25장을 여러 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마음에 새로운 경각심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여기에는 세상 끝에 되어질 일을 배경으로 대단히 냉혹하고 분명한 심판적 경고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마지막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구원 얻는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 영원한 축복을 누릴 사람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사람으로 분명하게 갈라지고 맙니다. 한 쪽에는 영원한 큰 기쁨이 있고, 한 쪽에는 영원한 슬픔만이 있습니다.
이미 가라지 비유를 통해 알고있는 바대로 이 세상에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함께 섞여 살고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악한 사람이 더 잘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가하면 선한 사람이 계속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기도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모순과 부조리와 혼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속단할 수 있는 이 세상살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는 그 분명한 본색을 드러내고 각자의 길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열 처녀 비유의 그 의도와 동기를 말한다면 이는 심판적인 경고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위선자와 불 신앙의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다 된 것 같지만 그 속에 조심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시험지를 받아든 수험생의 손끝이 조심스럽듯, 내가 무엇을 하든지 인생살이 전부가 조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에나 인간은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조심해야될 것은 다름 아닌 위선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갖추고 다 잘된 것 같은데 속이 잘못되어 내실이 없을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나 행복,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라는 거창한 형식은 갖추었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내용이 없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근사한 집에서 넉넉한 생활을 하며 남 보기에는 부러울 만큼 훌륭하게 잘 사는 것 같지만 집안 분위기는 밤 낮 싸움만 하고있으니 행복하고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학벌도 좋고 외모나 직장도 근사한데 진실하지를 못합니다. 이는 속이 비고 가장 중요한 것이 상실된 인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내용이 없고, 속이 비거나 잘못된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은 비었는데 겉만 가꾸어진 외식주의, 형식주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어떠한 내용이 있을 때에는 그 내용에 합당한 형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래 가면서 잠깐 조심하지 않으면 어느 사이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지는 것을 보게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좋은 예로서 선물을 들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위하는 마음이 있기에 진정으로 정성을 담아서 선물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선물을 주고, 주고, 또 주는 가운데 선물이라는 형식은 습관처럼 되어졌지만 사랑의 마음이 빠져나갔다면 거기에 문제가 있고 그 선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을 조심해야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세상 끝 날에 있을 심판을 두고 이러한 불 신앙과 위선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주신 열 처녀의 비유는 어느 때 보아도 낯선 감이 없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합동 결혼식을 연상케할 정도로 신랑을 맞을 처녀가 열이나 등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합동 결혼식이 아니며 일부다처적인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시집가는 처녀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잔치 형태가 대단하고 특이해서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를 하게되는데, 특별히 신부의 처녀 친구들이 초대를 받아 함께 즐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낯선 풍속이지만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식은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그 몇 가지 요점을 들어보면 우리 풍속과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다른 점은 결혼식을 저녁에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낮에 하고 저녁에는 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례로서 항상 권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결혼식은 예배시간에 할 것과 그것도 저녁 예배에 했으면 하는 부탁입니다. 그러나 꼭 낮에 하겠다니 도리가 없고 그만큼 전통적인 풍속을 바꾼다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결혼식을 저녁에 하는 이유는 그 사람들의 시간 개념과 관계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대로 하면 저녁이 하루해의 시작이 되고, 해가 지면 다음 날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저녁에 결혼식을 하는 것이 그 날의 시작에 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이유에서 그들의 결혼식은 밤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족 개념이 우리와는 다릅니다. 특별히 1907년 이후에 와서는 기부츠(Kibbutz)라는 공동체가 생김으로 우리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어렸을 때부터 친형제가 아닌 남․여 어린이를 몇 명씩 한 방에 넣어 키우기 시작하여, 18세가 될 때까지 계속 함께 생활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함께 섞여 자라면서도 아무런 사고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처음부터 오빠, 동생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에 남남이지만 그 안에서는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핏줄이 이어져야 형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단순한 혈통만을 생각지 않아 그 가족개념의 폭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마을이면 그저 한 가정, 한 가족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사람이 결혼을 하게되면 온 동리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좌우간 1주일 동안 잔치를 해야된다면 그야말로 동네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풍속은 우리 나라에도 있어서, 여기 저기서 먹고는 게다가 싸 가지고 까지 가는가하면 한 모퉁이에는 거지 잔치까지 시중을 들어야했던 것입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며칠이고 간에 함께 먹으며 잔치를 하는 것이었는데 2천여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열 가족만 모이면 회당을 하나 짓습니다. 그리고 이 회당을 중심 하여 하나의 큰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중 누구의 집 자녀가 시집이나 장가를 가게되면 내 자녀가 아니라 하더라도 곧 내 자식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생각하여 온 동리가 1주일씩이나 큰 잔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엮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올린 신랑 신부는 잔치가 계속되는 1주일 동안 왕과 왕후 같은 특별한 대우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비단 옷을 입고 호사스러운 가운데 특별히 신부의 친구들과 더불어 1주일간을 즐겁고 소중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네처럼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주인공인 신랑 신부는 신혼여행 간답시고 훌쩍 떠나버리고 축하객은 부담스러웠던 한가지 일이 끝난 기분으로 뿔뿔이 흩어져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1주일 동안 여행이라는 것 없이 모두가 함께 즐기고 같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 1주간과 신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는 그들의 풍속에도 잘 나타나있지만 성서 속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 신명기 24 : 5에 보면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이 나더라도 군대에도 가지 않을 만큼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오직 가정에서 아내와 즐기라는 것이 아예 법으로 주여져 있는 준수사항입니다. 결혼 1년을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첫 한 주간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참으로 굉장한 마을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친구들을 다 모으는데 동리가 조금 클 경우에는 지금도 60명까지의 많은 친구들이 모여서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물을 갖춘 준비를 다 해놓았다 하더라도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함께 와 신랑집에 들어서기까지는 무슨 일을 하여도 잔치가 아닙니다. 신부와 신랑이 들어섬으로 비로소 완전한 잔치가 시작되고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밤에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가 문간에 들어서게 되면 그 시로 대문을 닫아버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도둑과 강도가 많고 특별히 신부를 훔쳐 가는 강도까지 있었기 때문에 잔치하는 동안은 무슨 실수라도 있을까하여 문을 꼭 잠그고 집안에서만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준비하지 못한 이 처녀들이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밤이므로 안에서는 누가 들어오고 안 들어온 것을 모른 채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 풍속을 생각해보는 가운데 우리와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또한 이 열 차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가장 중요한 요점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여러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청소를 하며 분위기를 살릴 치장을 하는가하면 얼굴을 손질하고 몸치장을 하는 등 갖가지의 준비를 다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특별히 신랑을 맞을 처녀들에게 있어서는 자기 손에 등불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등불을 준비해서 하나씩 들고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춤을 추며 즐기는 순서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 등을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옷을 잘 입고 화장을 잘 하며 목욕재계하였다 하더라도 이 등불을 준비하지 못하면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장가가는 총각이라 할지라도 남자들은 직장에 출근했다가 시간 되어 결혼식장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여성들은 준비하는 것이 많고 복잡한 것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알려진 바가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풍속은 이스라엘에도 마찬가지여서 결혼식이 있는 날의 신부는 아침부터 친구들과 함께 하루 종일 목욕을 하며 몸치장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비단 옷에 몸치장을 곱게 하고 될 수 있으면 많은 보화의 장신구로 가꾸어 신랑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지극한 정성을 드리며 여러 가지로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는 무엇보다도 등불을 준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등불을 반드시 준비하되 완전하게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자세히 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가 다같이 등불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마는 옷도 다 잘 입었고 얼굴과 머리 단장도 곱게 했습니다. 필요한 등불도 준비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눈에 보이는 것, 우선 필요한 것은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은 소홀히 하였습니다. 등불을 밝힘으로 소모되는 기름을 계속 채워져야 하는 기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등은 들었는데 그 속에 진작 필요한 기름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문제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소홀히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미련한 자들은 기름이 없었고 슬기로운 자는 기름까지 준비하였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중요한 요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욱 문제를 가중시킨 것은 신랑이 더디 왔다는 것입니다. 시계도 없는 시절에 길은 멀고 도착해야할 즈음에 도착하지 않으니 모두가 문간을 향해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기다림이 길어지니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느라 이미 피곤해진 몸들인지라 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재미있게도 "다 졸며 잘쌔" 하였습니다. 하여튼 미련한 처녀도 졸고 슬기로운 처녀도 똑같이 졸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슬기로운 처녀는 완전한 준비를 갖추고 졸았으나 미련한 처녀는 아직 준비할 것이 남아있는데도 졸았습니다.
지치면 졸 수도 있고 잠들 수도 있겠지만, 갖추어야할 것이 아직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졸고 잤으니 이들의 행위는 미련한 것이며 그러기에 봉변을 당하게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할 요점은 형식적으로는 완전한 준비가 갖추어진 것 같으나 내실이 없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그냥 지나치기 쉬우나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기름을 믿음, 성령 등 여러 모양으로 해석을 합니다마는 어쨌든 그 의도는 외식주의를 배제하자는 것입니다. 이 외식주의! 겉으로는 잘 믿는 것 같으나 마음 깊은 곳에 믿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결정적인 시간에 서게되면 모든 것이 탄로 나고 맙니다. 시험을 당하고 실패를 당할 때에 보면 압니다.
역경에 부딪치고 모욕이 있어질 때에 보면 그 믿음의 진실성 여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 그 굉장한 외형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내면이 갖추어지고 속엣 것이 채워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 없이 형식적이고 외형적으로 꾸민 신앙은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형식을 두고 말한다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직분을 맡는 모두가 다 외형적인 질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이것 자체가 중요하거나 표준이 될 수 없으며 언제나 내실 있는, 속에 열매가 맺혀있는 진실된 신앙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야할 중요한 요점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빌어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신랑을 맞으라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리며 일어나 등불을 들고 나가게 됩니다. 이 때에 기름이 채워진 등의 불빛은 환하게 켜졌지만, 이미 기름이 다 타버리고 없는 등에는 그 불빛이 꺼져가고 있으니 그때에는 당황한 미련한 다섯 처녀가 하는 말이 "너희 기름을 좀 나누어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그러나 대단히 박절한 대답으로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합니다.
이미 신랑은 도착하고 밤도 깊었지만 기름이 없는 처녀들로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기에 기름을 사러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여 기름을 사왔더니 잔치집 문은 굳게 닫혔고 "주여, 주여" 부르며 아무리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알아야할 것은 진작 깨달았어야했다는 것입니다. 기다리며 졸고있을 시간이 있었다면 준비할 시간도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좀더 일찍 깨달았으면 문제가 없었는데 막상 깨달았어야할 시간에는 계속 졸고만 있었으니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졸더라도 갖출 것은 다 준비해놓고 졸아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갖출 것이 남아있고 시간도 넉넉한데 이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시간이 중요합니다. 뒤늦게 깨닫는 깨달음이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문 닫힌 다음, 이제 와서 깨달았으니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안타깝지만 이미 끝난 일이요, 소용없는 짓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빌어보려고 하지만 나누어주지를 않습니다. 이는 내 믿음은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부인을 둔 믿지 않는 남편 되는 이들이 잘하는 말에 "아내 치맛자락 잡고 천당 갈 것이요"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천당 가는 티켓(ticket)은 하나 가지고 둘은 못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자기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나라 어느 신학대학 학장 아들이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그는 신학대학을 나온 목사입니다. 그런데 미국인 한 학생이 그들 특유의 솔직한 생각에서 이 목사에게 질문하기를 "당신 예수 믿습니까? 그리고 구원은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답을 "내 아버지가 신학대학 학장입니다"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하는 말이 "당신 아버지가 하는 신학대학 학장과 당신이 예수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며 정색을 하기에 큰 망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내 신앙은 어디까지나 내 신앙입니다. 나의 구원은 나의 구원일 뿐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문제입니다.
나의 영혼의 문제, 나의 생명의 문제, 진리와 나와의 문제, 나의 구원의 문제, 이 모두는 누구의 것에서도 빌어올 수 없고 나누어 가질 수도 없는 각자의 문제요 나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개인적인 만남, 개인적인 깨달음, 개인적인 신앙, 개인적인 구원의 문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주로 영접함으로써만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주어진 말씀이 경고의 말씀입니다. "신랑이 오므로 준비된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여기서 문이 닫힌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이 닫히기 전에, 졸음이 오기 전에, 인생의 황혼기가 되기 전에, 건강하고 눈이 밝으며 총명이 흐려지지 않았을 때에 준비할 것을 준비하고 일할 것을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다려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혹 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졸면서도 믿음만은 꼭 붙들어야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문은 닫힌지라." 문이 닫힌 이후에 와서 애타게 부르짖어도 소용없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말고 슬기로운 처녀가 되기를 원하시어 오늘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입니다. 우리는 그의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준비하고, 믿음과 소망을 준비하여, 신랑과 함께 지낼 수 있는 큰 기쁨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잔치 집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 영광스러운 신랑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며, 믿음과 소망을 이야기하는 황홀한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는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그의 기쁨에 있지 그의 눈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 그의 신부가 된 영광의 기쁨!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신부의 덕을 준비하여야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좋은 아내, 사랑 받는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목사 따님 한 분이 있습니다. 그는 남자 형제들이 목사의 아들이면서도 목사가 되지 않자 자기는 목사가 될 수는 없지만 목사 부인이라도 되어야겠다며 이화여대 1학년 때부터 아예 공개적으로 목사 부인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는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주보를 모으고 스크랩을 하는 등 완벽한 준비를 해가며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졸업할 즈음에 감리교 목사를 만나 목사 사모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장에 누구라는 명확한 대상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목사 부인이 될 것이니 거기에 맞는 준비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이라면 이는 보통 신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정결을 준비하고, 참사랑을 준비하고, 믿음과 진실을 준비할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 준비할 것은 바로 웃는 얼굴입니다. 신부의 얼굴은 기쁨에 웃어야하고, 그 웃는 모습이 예뻐야 합니다. 언제 보아도 초조하고 궁상맞은 표정을 가지고는 신랑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기회가 주어져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문이 닫혀지고 나로부터 이 기회가 거두어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기름 준비는 지금 해야합니다. 확실한 믿음을 준비하여 기다림으로, 주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비유 강해(마태복음 13:1-9) (0) | 2024.03.19 |
---|---|
열매 없는 무화과(누가복음 13:6-9) (0) | 2024.03.19 |
어리석은 부자(누가복음 12:16-21) (0) | 2024.03.19 |
악한 농부(누가복음 20:9-19) (0) | 2024.03.19 |
의에 목마른 자(마 5:6)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