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은 양 비유(누가복음 15:3-7)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로 돌아가기

은 양 비유(누가복음 15:3-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한 마리 양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게되는 이 잃은 양 비유는 많은 사람들이 일컬어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그 많은 비유의 말씀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우리들의 귀에 가장 익숙하고 아름다운 복음적 비유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비유가 이처럼 귀하게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몇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의 사랑의 그 깊은 뜻을 계시해주는데 있어서 가장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 비유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가는 목자, 그것은 곧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갖은 고생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찾아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적인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도 그 목자는 바로 나라는 의미로 말씀하고 계시는 줄 압니다. 이와 같은 의미들이 있기에 이 비유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높고 귀한 사랑을 그려 보이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모두가 다 아는 익숙한 소재를 들어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비유란 다른 이야기와는 달라서 그 말씀의 소재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언제나 비유는 듣는 이 모두가 다 알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고아로 자란 사람이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계시해주는 이 비유는 모든 사람이 다같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이 잃은 양의 비유는 누구나 다 아는 것이요, 특별히 2천여 년 전의 유대 사람에게는 전부가 잘 아는 그들의 생활 현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는 척은 하지만 양도, 목자도 잘 모릅니다. 그저 들은 것으로 짐작을 할 뿐,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험을 통하여 아는 것만큼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한 소재를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좋은 비유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말이란 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그 하는 기회가 좋아야합니다. 그 때문에 같은 말이지만 아침에 하는 말이 다르고, 저녁에 하는 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말이라도 어느 순간에 하느냐에 따라 그 반응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중요하고 적절한 계기에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계기가 어떠했는가는 15 : 12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 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이것이 바로 기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죄인과 세리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저들을 멸시하였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저들을 아예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영접하실 뿐만 아니라 함께 식사도 하시고 그러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처신을 이들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본문에 기록된 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원망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말하는 것이나 그 가르치는 것을 보면 지혜가 많고 훌륭한 분인데 하필이면 왜 저런 사람들하고 친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쩌자고 저런 사람들을 영접하며 함께 어울려 다니는지 이것이 못마땅하여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원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내 이야기를 좀 들어보라시며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됩니다. 참으로 좋은 기회에 가장 적절한 소재로서 이 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 당시 사람들의 성분을 한 번 생각해보면, 일반적으로 볼 때에 종교인이 있고 비종교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물론 양쪽 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지만 그러나 저들은 엄격히 이 둘을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전문적인 종교인이요, 하나는 보통의 평범한, 요즈음 말로 표현한다면 민중 계층의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전문적인 종교인들이 신앙 생활의 규범과 율법을 너무도 까다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이 법대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좌우간 안식일에 대한 것만도 917가지 규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는 불을 켠 대로였으면 끄면 안 된다, 꺼 있었으면 켜면 안 된다, 또한 옷고름이 풀어진 채라도 매지 말라, 매었으면 풀지 말라는 등 하여간 이처럼 까다로운 항목들을 많이 만들어 가지고는 이대로 지켜야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함은 물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해야하고 갖가지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그러다가보면 먹는 것, 입는 것을 비롯하여 기거 동작 전부가 미슈나(Mishnah)라고 하는 율법에 매이게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이 거미줄 같은 율법의 생활을 할 수가 없어서 조금 하다가는 그만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저 안식일이나 지킬 정도에서 그치고 그 외의 것은 아무래도 지킬 자신이 없으니 아예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이 율법들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은 이것을 지킴으로 해서 교만해집니다.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고는 그대로 못하는 사람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율법을 만들어서 율법주의자가 되고 그 율법을 지킴으로서 교만하여 지키지 못한 자를 멸시하게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 생활이란 어느 한계에서 자칫 잘못되면 하지 않은 것만 못한 엄청난 과오를 낳게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외식주의와 율법주의 그리고 형식주의를 책망하시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지게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까지 이르게되었다 하여도 잘못된 말이 아닐 것같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사는 일반적인 사람들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대단히 멸시했습니다. 심지어는 너절한 낮은 인간들이라는 뜻에서 "땅의 사람"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격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곧 바리새인이라는 말입니다. '바리사이오스'라고 하는 헬라말은 본래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즉 구별되게 잘 믿고, 구별되게 종교 생활을 철저히 하며 거룩하게 산다고 하여 바리새인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바리새인들은 이래야 한다는 입장에서 내세운 소위 거룩한 교훈에 보면, 일반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이러한 규례까지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 몇 가지 예를 들면 "저들에게 돈을 맡기지 말라, 저들을 믿을 수가 없으니까. 저 사람들이 어떠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 증인으로 서주지 말라, 저들은 도대체 신실하지 못하니까. 저들 앞에서는 비밀을 말하지 말라, 그 인격이 시원치가 않아 비밀을 지키지 못하니까. 저들에게 고아를 위탁하지 말라, 처음에는 양자로 키우겠다 하고서는 나중에는 내어버릴테니까. 구제 단체에 회원으로 넣어주지 말라, 저들은 선한 일을 끝까지 못하니까. 저들과 함께 여행을 하지 말라, 언젠가는 손해를 볼테니까. 그뿐 아니라 같이 음식을 나누지 말라. 그 집을 방문하지 말라"는 등 참으로 이만저만 멸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토록 저들이 멸시하는 사람들, 죄인들과 세리를 영접하며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이 저들의 마음에는 대단히 못마땅하여 원망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옛날 그 당시의 목자들은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요즈음처럼 목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풀이 넉넉한 것도 아닙니다. 메마른 사막에서 사막으로 이어지는 중동 지역에서는 어쩌다 자연적으로 조금씩 있는 풀을 찾아 먹이느라 이 곳, 저 곳을 찾아 헤매며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야말로 목자와 양은 사투의 방황을 하게되는데 어떤 때에는 험준한 골짜기를 지나야하고 또 어떤 때에는 맹수를 만나는가 하면 강도를 만나게도 됩니다. 이러한 때의 목자는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채 맹수와 더불어 싸워야하고 강도와도 싸워야합니다. 더욱이 무서운 것은 폭풍과 벼락인데, 이 때에는 자칫하면 많은 양이 죽음을 당하기 때문에 이 대자연의 위험으로부터 저들을 보호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게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목자는 풀이 있는 곳으로 양들을 인도하며, 계속해서 다음 초장을 찾아 위험한 길을 생명을 걸고 양들을 보호하며 안내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지내는 가운데 양과 목자는 대단히 가까워지고 아주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백 마리의 양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를 경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아흔 아홉 마리는 그대로 있으니 "그까짓 한 마리쯤은 없어져보았댔자"하며 갈 길만 재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 목자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한 마리를 생각하며 아흔 아홉 마리를 그대로 들에다 두고 찾아 나섭니다. 이 목자가 이렇게 찾아 나서는 것은 그 양 한 마리의 값이 귀하거나 손해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가 아닙니다. 이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다가 대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첫째 이유는 그 양의 생명 때문입니다. "저 양 한 마리가 그만 죽겠구나! 어디선가 맹수에 찢겨 죽겠지! 무참하게 낭떠러지에라도 떨어졌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다가 죽을꼬!" 하는, 오직 생명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결코 경제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어디까지나 양의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이유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지금 이 목자는 양이 처할 수 있는 갖가지의 위험과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상상하며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반드시 도와야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언제나 상대편을 먼저 생각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언젠가 한 번 우리 교회에서 4천여 명의 소록도 나환자들을 위해 3백만 원어치의 과자를 선물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렸었는가 하면 그들로부터 과자가 먹고싶다는 연락을 받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과자가 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나환자라도 밥은 먹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있어서 낙이 무엇이겠습니까? 잘 보이기를 합니까, 잘 들리기를 합니까, 아니면 운동을 할 것입니까? 아무런 낙이 없습니다. 그저 낙이라고는 이 혀끝에 있는 감각뿐입니다. 먹는 재미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와서 단 음식 한 쪽 먹는다고 당뇨병 걱정할 것도 아니고 더 이상 무서워할 병이 남아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좋은 옷, 화려한 장신구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저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이 작은 사탕 한 알이 최고의 값진 위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의 생각에 그분들에게 실컷 한 번 과자를 대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과자만 몽땅 3백만 원 어치를 사 보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분의 입장에서, 지금 그분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더욱 중요한 것은 양은 제 발로 찾아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돌아올 능력이 없으니 내가 도우지 않으면 저는 죽는 것입니다. 이는 결정적인 사건이요 보나 마나한 결과입니다. 이 양이라는 동물은 순하기도 하지만 멍청합니다. 그래서 갔던 길도 돌아오지 못하고 제 집도 못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이 목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저에게 가지 않으면 저는 내게로 올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은 없습니다. 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요,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지금 목자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가 지금 불쌍한 처지에 있을 뿐더러 내가 가지 않으면 저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생각할 문제는 이 양이 유독 혼자서만 왜 길을 잃었나 하는 점입니다.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첫째, 이 양이 멍청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 큰 대열에서 떨어졌다면 이것은 어리석다기보다는 멍청한 소치란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유혹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유혹에 빠져서 목자와 그 많은 다른 양들이 가는 것을 몰랐습니다. 풀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는데 아무리 맛있는 풀을 먹고있다 하더라도 목자가 "가자" 하면 가야되는 것입니다. 또한 "안 된다"고 하면 가지 말아야하고 먹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저기 좋은 풀, 맛있는 풀이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독초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얼마 전에도 제주도에서 사슴을 놓아먹이다가 고사리를 먹고 죽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좌우간 독초를 분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풀이 좀 빈약하더라도 목자가 지시하면서 먹으라는 대로 먹어야지, 저기도 좋은 것이 있고 여기도 좋은 것이 있다면서 마음대로 먹어 치우다가는 독초를 먹겠으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은혜를 사모한답시고 이상한 데를 찾아다니며 마음을 들뜨게 하곤 하는데 이는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거기에는 좋은 말씀도 많지만 위험이 있고, 여기에는 재미가 없고 불편해도 안전합니다. 저기에는 무엇이 있는 것처럼 희한하게 보이지만 거기에 위험한 독소가 있고 함정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위험한 일을 버리고 다소 불편하더라도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안전한 길을 갈 것입니다. 사실 이리 가라, 저리 가라는 안내가 단조롭기도 하고 때로는 거추장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안전한 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양은 이런 저런 유혹에 끌려 한눈을 팔다가 그만 대열에서 이탈하게되어 길을 잃고맙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도취에서 향락을 찾았습니다마는 거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목자의 인도보다 세상 즐거움을 더 좋아하며 따라갔더니 헤어나지 못할 독소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목자의 마음과 그 태도입니다.

만약 목자가 생각하기를 "네가 잘못했으니 그렇게 벌을 받아야 옳지 않느냐? 인과보응이다" 하고 만다면 그의 생명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목자는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저를 원망하거나 심판하지 않습니다. 오직 초조한 마음으로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험준한 골짜기를 뒤지며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찾은 즉 너무도 즐거워서 본문에 의하면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하는 말이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하며 목자의 충만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마는, 여기에서 이 기쁨의 잔치를 할 때에 무엇을 먹었겠습니까? 별 수 없이 그들의 주식에 속하는 양고기를 먹었을터이고보면 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고 가만히 잘 있던 양 한 마리를 잡아먹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멍청해서 길을 잃었던 시시한 양 한 마리 찾은 기쁨에 양 한 마리 값이 지불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이렇게 즐거우니 여타의 것은 많고 적고간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이와 비슷한 재미있는 한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소 건강할 때 건강의 감사 헌금을 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꼭 병원에 입원을 했다 나와야 냅니다. 그것도 죽을 뻔하고 나와서 입원비가 모자라 빚까지 내었는데도, 거기에다 감사 헌금까지 드리는 것입니다. 보세요! 이것은 경제적으로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있다, 없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감격이 되면 집이라도 팔 수 있습니다.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는데 여기에 무슨 타산이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따지고 계산할 것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습니다. 적어도 "다 없어져도 좋아! 나는 즐거우니까!"하는 이 정도의 감격이라면 정말 멋진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일생 중에 이러한 경험을 한 번도 못해보았다면 그가 누구든 그 동안 살아온 것은 헛산 것이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한 번의 순수한 기쁨, 그 감격도 맛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까? "이제는 이대로 죽어도 좋아! 다 주어도 좋아! 다 바쳐도 좋아!" 하는 이러한 즐거움 말입니다. 이처럼 어떠한 타산이나 이기주의적 생각을 다 잊어버리고 즐거워하는 기쁨, 그것이 바로 목자의 감격이요 목자의 기쁨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 비유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먼저는 하나님은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멀리서 팔짱을 끼시고 불쌍한 인간들이 언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다. 찾아가시는 하나님! 찾기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기다리는 아버지로 묘사되어 기다리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지만, 그러나 본 비유에서의 목자는 찾아갔습니다. 학자들이 연구한 것을 모아보면, 탕자 비유 하나만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그 외의 모든 비유는 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란 그저 감상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정도 가지고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화해를 원하신다면 내가 친히 화해하러 가야지 화해가 오기를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찾아가세요. 찾아가서 손을 잡으세요! 기다리는 마음 정도 가지고는 안됩니다. 먼저 찾아가며 그에 따라서 행동하여야 합니다. 행동 중에는 많은 희생이 따릅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명예를 버려야 합니다.

때로는 경제적인 손해를 보게됩니다. 보이게, 보이지 않게 이런 저런 손해를 보면서 그리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희생하면서 구속함을 주어야합니다. 다시 말하면 비판하는 것이 왜 그랬느냐고 잘했다, 잘못했다를 따지거나 말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묻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선 구원하여야 하고 속량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의롭다하시는 저스티파이 러브(Justify Love)입니다.

여기에서 이 목자의 의를 지금 양에게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의 사랑으로 양의 전부를 완전히 덮었습니다. 그저 찾은 것만으로 너무도 반갑고 기뻤기 때문에 책망도, 원망도, 훈계도 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신나게 둘러메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롭다하는 사랑입니다. 이 의롭다하는 사랑으로 의로울 수 없는 양의 모습을 완전히 덮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양은 감히 주인의 기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중요한 복음은 한 마리 양이라는 점입니다. 이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한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다는 것은 사랑은 개인적인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진정 사랑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하나가 지금 필요할까, 안할까? 하는 스스로의 저울질은 다 부질없는 못난 생각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는 다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지금 내가 어려운 처지에 있다면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읽은 책을 통하여 항상 귀하게 생각하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캐시라고 하는 한 젊은 여성이 대학 졸업 후에 연애를 하다가 실패를 하자 집을 나간 후 10년 동안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녀는 방탕한 가운데 창녀가 되었고 알코올 중독에, 마지막에는 아편 중독까지 되었습니다. 그간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니 나이도 먹어 35세쯤 되자 이제는 아무 남자도 거들떠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강가에 나갑니다. 이제 주위를 살피며 막상 투신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강물을 내려다보노라니 거기에 어머니의 얼굴이 비추입니다. 이 때에 그녀는 "죽는 것은 서두를 것이 없다. 10년 동안에 어머니가 얼마나 늙으셨을까! 먼 빛에 숨어 어머니의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죽으리라!"는 생각으로 집을 향하여 갑니다. 무수한 생각들을 머리 속으로 스쳐 보내면서 집에까지 왔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밤인데도 불구하고 온 집이 환하게 앞뒤로 불이 밝혀져 있습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살펴보아도 사람은 없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대문을 조금 밀어보았더니 대문이 열려있습니다. 조금 더 미니까 삑하고 소리가 납니다. 그런데 이 소리가 나자마자 어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오시면서 "캐시냐!" 합니다. 여기서 이 캐시는 꼼짝 못하고 어머니께 붙들렸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니께 물어봅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불을 켜놓으셨으며, 어떻게 내가 올 줄 알고 계셨습니까?"라고 하자 어머니의 대답이 네가 접을 나간 지난 10년 동안 문을 잠근 적도 없고 불을 끈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캐시 자신으로 볼 때는 나 같은 인간은 버려진 것이라고 포기해 왔었는데 그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불을 켜놓고 문을 열어둔 채 10년을 하루같이 기다렸단 말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이 하나,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이미 찢기고 병신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상관이 없습니다. 목자는 이 하나를 사랑합니다. 극히 개인적입니다. 한 인격과 한 인격, 11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를 개별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더구나 멀리 떠나있거나 비참한 상태에 놓였다면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은 그를 더욱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곁길로 갔던 한 마리의 양과 같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 죄인이지만, 이제 주님의 앞에 나와 회개할 때에 주님은 감격하시며 잔치를 베풀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을 보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의 그 감격스러운 기쁨! 주님의 만족하신 즐거움!

이로 인해 하늘 나라에서는 잔치가 베풀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은총이 있고 여기에 구속의 기쁨이 있으며, 이것이 사랑의 복음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