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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강해
서 론(마태복음 13:1-9)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이 갖는 방대함과 다양함, 그리고 그 난해함이 적지 않지만 성경 전체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사실 앞에 이제는 더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되는 첫 번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두 번째로는 성경의 기록이 성령의 역사로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이 말씀으로 하여금 곧 내게 향한 말씀이 되게 하는 까닭입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두 가지 실제적인 이유에 의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를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는 루터의 말에 의하면 성경은 마치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워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마구간이 있는데 거기에는 구유가 있고 지푸라기도 있으며 강보와 기저귀 등 필요한 것은 다 갖추어 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유는 돌로 만든 것일 수도 있고 나무로 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돌이든 나무든 중요한 것은 바로 아기 예수가 그 위에 누워 있기 때문에 소중한 구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냄새 나던 마구간이 이제는 소중한 마구간이 되는 것입니다. 발아래 짓밟혔던 지푸라기 하나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의 것이라면 이것 역시 굉장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 그 관계된 모든 것들이 다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문학이 있는가 하면 역사와 기록도 있고, 이런 저런 사람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의 이야기까지 실려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을 대하거나 신약을 보거나 간에 성경은 언제든지 중심부에 의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아야 할 중심은 못 본 채 쓸 데 없는 것을 보고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데 있어서도 양화점에 다니는 사람은 구두만 보려 하고, 양복일 하는 사람은 바지저고리에만 시선을 보냅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 한 분이 구두를 만드시는 분인데 1년에 한 번씩 구두를 만들어다 주시고는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구두가 좋지를 않아서 발이 아프고 신기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도 그 분은 그 구두를 신었나 안 신었나 하고 인사할 때마다 구두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이 사람은 내 얼굴은 안보고 구두만 보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어디에서부터 보십니까? 사람은 역시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옷을 보아도 안되고 헤어스타일을 볼 것도 아니며 유행하는 언어처럼 각선미나 보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얼굴, 얼굴 중에서도 특별히 눈을 보아야 합니다. 똑바르게 눈을 못 보겠거든 그를 보았다고 하지도 말 것이며 더는 보려고도 않아야 합니다. 이미 바로 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대할 때는 먼저 중심인 얼굴을 본 후에라야 지엽적인 관심거리가 될 수도 있는 넥타이나 신발 등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중심부터 보고 그 중심에 의해서 지엽적인 면이 관찰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얼굴이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었을 경우는 얼굴을 보고, 보니까 넥타이도 멋있고 뭐든지 마음에 들고 좋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입은 옷까지도 미워지고 나빠집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성경은 반드시 중심부에 의해서 보아야 한다는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사 드리는 장면을 대할 때에도 예수를 보아야 하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이야기, 모리아 산의 긴장과 제물을 보면서도 예수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는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속에서 예수를 만나니까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 하나의 사건마다에서 예수를 찾아야 하고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가 성경을 대하고자 할 때 예수의 얼굴이 가장 밝히 비춰진 부분이 복음서라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의 유기체에 비교하여 한 몸이라고 한다면 얼굴은 바로 복음서인 것입니다.
성경의 얼굴은 복음서인데, 이 얼굴인 복음서부터 보지 않고 지엽적인 것부터 먼저 대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단들은 하나같이 복음서를 소홀히 여깁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느 이단이라도 연구해보면 복음서를 멀리할 뿐만 아니라 "예수 가라사대" 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러고는 요한계시록, 다니엘서, 에스겔서 등에 관심을 쏟으며 분분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모두 이단입니다. 그것은 다음에 보아도 되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골고루 다 보아야 되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이 복음서인 만큼 복음서를 많이 읽고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가라사대"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비록 사도 바울이 방대한 로마서를 썼다 하더라도 복음서에 비할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로마서가 중요한 것이지 로마서가 결코 복음서의 먼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시 한 번 말씀드려서 성경의 중심은 복음서이며, 예수님의 사건과 얼굴이 가장 밝히 비춰지는 곳이 복음서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 외의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성을 증명하는 예언서이고, 사도행전은 복음서의 세계성을 설명하는 책이며, 로마서를 비롯한 서신들은 복음에 대한 변증서인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를 통하여 성경 전체를 종합해 볼 수 있는 까닭에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서 중에서도 더 중요한 부분이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 모두가 하나같이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떠한 기적이나 치유보다도 "예수 가라사대" 라는 말씀입니다. 다 중요한 가운데서도 역시 더욱 중요함이 있음입니다. 이를 우리의 몸에 비유한다면 손가락 하나를 다쳐도 고통스럽고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아파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몸 어느 한 부분도 중요치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서는 오른손을 자를 수도 있고 중요하지만 다리를 끊을 수도 있습니다. 자르고 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은 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목은 자를 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 중요함의 절대성 때문입니다.
성경 66권은 한 절도 빼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더욱 중요한 말씀은 "예수 가라사대"입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예수 가라사대"는 모두 빨간 글자로 하여 다른 부분의 검정 글씨와 구분되게 한 영어성경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도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곧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비유로 말씀하셨고 천국에 대한 설명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비유는 가장 중요한 말씀 중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비유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곧 예수를 바로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가장 중요한 중심부가 예수님의 비유라는 일관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비유를 대하며 공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3:34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먼저 예수님께서는 왜 비유라는 방법을 통하여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는,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단히 쉬운 이야기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안한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되기 위해서는 말하는 자는 듣는 자의 편에서 하여야 하고 듣는 자는 말하는 자의 편에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가정에 어린애 하나가 있으면 온 집안 식구의 말이 어린아이처럼 되고 맙니다. 그래서는 엄마 아빠, 맘마 하다가 자기 남편을 보고도 아빠라고 하잖아요? 이것이 철없는 짓입니다. 말하려면 차라리 똑바로 아버지라고 하든지 해야지 왜 이렇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쓰는 말을 같이 쓰다보니까 전부 어린아이가 되어버립니다. 그러기에 가정에 어린아이가 하나 있으면 전체가 어린애가 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가 알아듣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그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낮추어서 하게되니 다 같아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말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듣는 자를 소중히 여기어야 합니다. 자주 하는 이야기이지만 비유 서론에서는 매우 중요한 예가 되겠기에, 개와 고양이 이야기를 한 번 더 상기해봅니다. 개와 고양이는 서로 만날 때마다 싸웁니다. 싸우는 이유는 결코 마음이 나빠서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의 신호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호가 다르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족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신호가 어떻게 다른가를 보면, 개는 기분이 좋을 때는 꼬리를 올립니다. 그리고 흔듭니다. 개는 입으로 웃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개라 할지라도 개가 웃으면 얼마나 징그럽겠습니까? 개는 입으로 웃는 대신 꼬리로 웃습니다. 꼬리를 위로 흔들면 기분이 좋다는 뜻입니다. 꼬리를 들고 짖는 개는 그 발음이 좀 이상해서 그렇지 반갑다는 소리입니다. 개의 말귀를 알아들으려면 꼬리만 보면 됩니다. 기분이 꼬리에 달렸기에 꼬리가 내려가면 기분이 나쁘다는 뜻입니다. 꼬리가 두 발 사이로 하여 속으로 들어가면 임전 태세로서 "이제는 물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개처럼 꼬리가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저녁에 들어오는 남편의 기분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꼬리를 들고 들어오면 "아, 기분이 좋구나!"로 될 터이고, 내리고 들어오는 날에는 "아, 기분이 좋지 않으니 요주의!"라고 하면 되겠는데 사람은 이같은 꼬리가 없어서 거짓말을 잘합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 얼굴빛이 중요하고 또한 그 얼굴빛을 읽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때문에 마음을 알아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어떤가 하면 꼭 반대의 신호를 가졌습니다.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밑으로 내려갑니다. 싸울 때엔 "야옹"하는 소리에 앞서 꼬리가 위로 올라갑니다. 이렇다면 이 두 짐승이 서로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개가 기분이 좋아서 고양이에게 아이 러브 유(I love you)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개의 꼬리는 위로 올라갑니다. 그것을 보고 고양이는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고양이 왈, "왜 나만 보면 싸우자느냐?"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음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신호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래부터 다른 종자라는 것을 모르고 같은 줄로 아는데 결단코 그렇지를 않습니다. 달라도 상당히 다릅니다. 그러고 보면 남녀간에도 신호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서로가 통하고 하나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중요한 원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 이치는 간단한데 그렇게도 실천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 원리인즉, 나의 신호를 버리고 상대방의 신호를 택하는 것입니다. 개로서는 기분이 좋을 때에 꼬리를 올리는 법이지만, 고양이를 위해서는 꼬리를 낮추고 만나야 합니다. 모든 가정이 이것에만 정통하면 만사가 편안해질 것입니다. 나의 신호를 버리고 저의 신호를 택하는 거기에 이야기가 통하고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대화가 안된다고 하면서 대화의 채널을 맞출 수가 없다면 이는 끝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채널을 맞추지 않으면 문제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사람과 더불어 이야기하자니 사람의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들이 아는 말, 경험하는 것, 저들이 사는 세계를 말해야 합니다. 뜬구름 같은 이야기는 할 수도 없겠고 하늘나라를 설명한 대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기 세계, 자기가 경험한 세계 외의 이야기는 전혀 통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 때문에 하늘의 이야기를 땅에서 말하려고 할 때에 땅의 이야기를 들어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원한 이야기를 시간적인 것으로 말씀하고, 초월적인 것을 내재적인 것으로, 경험 못한 사건을 이미 저들이 경험한 것으로 말씀하게 됩니다. 못본 사람에겐 본 것을 들어서 설명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전혀 모르는 세계를 설명하시기 위하여 이미 아는 이야기들을 들추어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비유요, 비유의 원천이 여기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효과적 대화 기술이며, 효과적 교육이요, 효과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의 인간 경험, 그 현실, 그 현재의 것, 누구나 다 아는 것, 평범한 것, 아주 평범한 것, 바로 그것들을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비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 소재 또한 참으로 자유자재롭습니다. 꽃을 보면 "자, 꽃을 보라", 새를 보면 "자, 새를 보라", 들녘을 향해서는 "자, 저 씨 뿌리는 것을 보라." 바로 그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듣는 대로 소재를 삼아 그 속에 전할 말씀을 담아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알게 하기 위해서, 보다 잘 알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비유의 방법을 썼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알게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또 모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3:14를 보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는 알게 하고 마음이 완악한 자에게는 모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비유란 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여우가 무엇입니까? 왜? 누구를 가리키는 여우입니까? 이것은 비유입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봅니다. 헤롯왕의 별명이 여우인데 어려울 게 없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헤롯 왕에게 가서 말하려고 하면은 정치적인 문제에 걸리게 됩니다. 따라서 시끄러워집니다. 그러나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그럼에도 책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비유란 이처럼 언제나 은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책 잡고자 하고 올무를 씌우려는 원수들에게는 이 비유는 약이 됩니다. 그들은 결국 끝까지 알아듣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다시 한 번 심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알아듣고자 하는자 에게는 알게 하기 위함이고 마음이 삐뚤어지고 완악한 자에게는 모르게 하기 위함이라는 그 자체가 심판인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의하면 "천국의 비유를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허락되어 알게 되지만 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고 모르게 될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16-17절에서는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적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음 세 번째 이유는 진리를 구체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진리를 추상화하기를 좋아합니다. 되도록 어려운 말로, 둥둥 뜬 이야기로, 하늘의 이야기로, 신화적인 이야기로, 철학적인 이야기로 추상화하려 합니다. 그리고서는 보통 사람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면 "자네는 몰라"라는 식으로 유식한 체합니다. 그러나 사실 진리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생활 그 자체가 진리인 것입니다. 어른과 아이의 간격도 없이 그 누구라도 받아들여지고 알 수 있어야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진리는 아주 쉬운 것이고 쉬워야 진리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로저스라는 유명한 교수는 교회학교에서 수십 년 동안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의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유명한 신학박사이고 명교수인데도 한 해도 쉬지 않고 교회 학교의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저 아이들이 못 알아듣는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저 아이들이 못 알아듣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대체로 교만한 사람들이 진리를 이상하게 추상화하면서 얽혀 놓고 아리송하게 만들어 자기만 잘난척하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 손, 우리 생활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매일 손으로 만지고 시시각각 몸으로 부딪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진리는 멀고, 높게 그리고 하늘의 이야기로 말씀하시지 않고 아주 쉬운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보여지는 이야기, 매일같이 경험하는 이야기 속에서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이해하고 현실 안에서 진리와 함께 살기를 바라는 그런 의도가 여기 포함되고 있습니다. 철학을 전공하고 학, 박사가 되어야 논할 수 있는 이야기 거리가 결코 진리는 아니란 말씀입니다. 사는 자체가 지혜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로는,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이란 역시 재미가 좀 있어야 합니다. 설교를 하더라도 우선 졸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비몽사몽간에 은혜 받는 것은 아니니까 좌우간 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설교자나 가르치는 사람은 일단은 듣도록 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조는 것을 이쪽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말했길래 졸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미있게 말하여 우선 관심을 갖도록 해야함이 중요합니다. 관심이 있고 매력에 끌려야 듣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안 듣는 것입니다. 그저 들어줄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재미있게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란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 그림은 선명하고 구체적일수록 좋습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친절하고 재미있게 구사해 나갈 때 듣는 사람은 그림의 손길처럼 따라가면서 흥미 있게 듣게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인천을 다녀온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 "나 인천 왕복했오"하면 간단히 유식한 말 한 마디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 가지고서야 무슨 재미와 관심을 갖게 하겠습니까? 표현을 달리 하여 "터미널에서 차표를 사 가지고 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에는 곱게 늙은 칠순 노인이 앉았고 차창에는 무엇 무엇이 지나가는데 어디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더라.
인천에 도착하여 부두에 나가니 공기도 맑고 바람도 참 시원한데 살아있는 것으로 만든 생선회를 먹고 나니 피곤이 싹 가시는 것 같더라. 혼자 먹고 나니 집안 식구들 생각에 큰놈으로 세 마리를 사서 얼음 상자에 넣어 가지고 해질 무렵에 돌아왔다"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선명한 상을 가지고 마치 자신이 행동하는 것처럼 일체감과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으로 말하면 영양가가 얼마나 더 높으냐 하는 것은 그 다음 이야기이고 우선 맛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맛이 있고 맛있게 먹을 만한 분위기가 있어야지, 싫은 것을 억지로 먹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재미있게, 관심 있게 하여 그들 심중에 진리가 심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는, 깊이 생각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저 굳은 마음이다 하면 끝나버릴 말을 "돌밭과 같다"함으로써 "그렇지, 돌밭" 하고 간단히 지나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돌밭은 어떨까? 그것도 밭의 구실을 할까? 어떤 돌들이 어떻게 모여 있을까?" 등 생각이 깊어지게 하고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또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제는 목장에 가서도 예수님을 생각케 하고 양은 물론 푸른 초원만 보아도 목자 예수를 깊이 연상케 합니다. 빛이다, 소금이다, 목자다 하는 말들이 전부 그런 것입니다. 깊이 인상될 뿐더러 두고, 두고 회생하면서 생각하게 하여 그 때마다 이 진리가 점점 더 깊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다음 여섯 번째로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비유는 잊어버리지를 않습니다. "아멘"하면서 받아들인 설교는 다 잊어버려도, 비유로 말한 예화들은 잊어버리지를 않습니다. 설교자는 이 때문에 또 한번 힘이 들고 때론 반복한 후에 작은 수난을 겪게도 됩니다. 아무튼 예화는 오래 오래 기억이 되기에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곱 번째로는, 실천하게 합니다. 단순히 마음으로 깨닫게 할뿐만 아니라 실천하는 가능성까지도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실 때에 보면 율법사에게 다 들려주신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네 의견에는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때에 그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 곧 그 선한 사마리아인을 가리키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의 결론은 간단하게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어떻게 해야 할 것까지를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 비유를 통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까지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유는 진리를 깨닫게 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게 됩니다. 이처럼 비유는 실천 혹은 실현성을 더 가까이 주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여덟 번째로는, 계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3:34~35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창세부터 감추인 것을 비유를 통하여 드러내셨다 함은 여기에 계시적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말함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계시적 의미를 본래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현실 생활 속에서 매일 보고 들으며 삶으로 경험하는 그것들을 소재로 하여 하늘의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유가 성경 말씀의 중심부로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임을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우리들의 자세를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믿음과 존경으로 대하여야만 합니다. 믿음과 존경으로 대할 때에만 마음의 문이 열리면서 이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나의 경험, 곧 자신의 경험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두더쥐를 못 본 사람에게 아무리 두더쥐 설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개처럼 싸우지 말라고 했지만 개가 싸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개가 싸우는 것을 볼 때까지는 소용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경험 속에서만 이해가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같은 경험의 공감대를 이룰 때 비유는 비로소 그 뜻이 전달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밝혀지는 바는 기독교는 결코 명상의 종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를 실감나게 다 알려면 농사꾼도 되어보고, 보석상도 해보고, 물고기도 잡아보아야 합니다. 산에 올라 수십 년간 명상을 하더라도 물고기 비유를 알 리가 없고 농사지어보지 않는 사람이 씨 뿌리는 비유를 실감나게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활 현장에서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쌓으며 수고해본 사람이라야 예수님의 말씀을 실감나게 이해할 수가 있고, 자신과 밀착된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배우게 되어 있지 않은 특별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가 하면 심지어는 강도 이야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장사를 해보고 강도를 만나 보면 실감나게 알아질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비유는 생활 속의 풍부한 경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그와 같은 풍부한 경험 속에 들어가게 될 때에 하나 하나가 자기의 것으로 실감나게 이해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생활 경험을 떠나서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명상적인 사고로 이해될 수 있는 종교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자기 경험을 깊이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시시각각, 하루, 하루의 생활 속에서 보는 것, 듣는 것, 부딪히는 그 모두에 대한 경험을 소중히 여기며 주의 깊게 관찰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현상에 담겨진 의미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만 볼 것이 아니라 속을 보자는 말씀입니다. 세수를 할 때는 얼굴만 씻을 것이 아니라 마음 씻을 생각을 먼저하고, 음식을 대할 때는 영의 양식은 있느냐고 물어 보아야겠습니다. 언제나 영적인 세계, 깊은 세계를 생각하는 지혜가 있어야만 비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비유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말씀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건마다, 경험마다, 모든 현상마다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바로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꽃을 볼 때에는 "하나님이 입히신다", 새를 보면 "하나님이 먹이신다"로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귀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 사건 속에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자세가 될 때에 비로소 비유를 알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만이 비유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생활 그대로가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주시는 비유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보며, 믿음의 귀로 들으며, 믿음의 마음으로 받으면 하나님의 귀한 말씀 그대로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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