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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뜻(요 7:1~9)
이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느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이 책의 서론에서 요한복음의 여러 가지 특징은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중에서 이 본문과 관계있는 특징은, 저자인 사도 요한이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일하신 예수님의 기사를 강조해서 다루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가 메시야라면 갈릴리 촌의 바닷가에서 주로 복음을 전파하여서는 어찌 하나님의 메시야적인 구원의 역사가 전해질 수 있겠느냐고 반론을 제기했다는 것입니다. 소위 예수께서 메시야 되심에 증거중의 하나가 예루살렘에서 일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사도 요한은 변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문맥 중에 나타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보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이 많다"고 집중적으로 그곳에서 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수도이면서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갈릴리 촌에서 가끔 일하실 수밖에 없었는가를 사도 요한은 예수님 편에서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너희들이 돌로 쳐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만 머무를 수가 없었다는 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에 대한 설명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요 7 : 1). 유대란 예루살렘 근방을 말하며 갈릴리는 북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타나듯이 예수께서 예루살렘 근방에서 일하시지 못한 것은 유대인들이 따라다니며 책잡아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부득이 갈릴리로 가실 수밖에 없었다고 사도 요한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본문 2절에 보면 초막절이 되었습니다. 초막절은 유대 사람들의 큰 절기(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가운데 하나로써 장막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장막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40년 동안 고생하던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로써, 온 식구들이 광야에 나가 천막을 치고 뜨거운 사막에서 일 주일 동안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토론하며, 예배드리고, 기도 시간을 갖는 등 철저한 종교의식을 지닌 중요한 행사입니다. 이 초막절에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야 하는데 일반 사람들과 함께 가시지 않고 조금 뒤에 가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6장에서 본 대로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자 그들은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했고 그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으므로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보다 조금 뒤에 올라가셨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5절에 아주 심각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7:5). 예수님의 형제로는 야고보, 요셉, 시몬 등 여러 명이 있는데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단순히 동생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이 말은 상당히 의미 있는 말입니다. 그러면, 과연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가끔 심방을 다녀보면 한 가정에서 아내는 믿고 남편은 믿지 않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필자는 그 부인에게 "남편에게 전도해 보았습니까?" 하고 질문하면 흔히 대답하기를 "저 사람은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믿는 사람보다는 나아요"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비교적 거짓말을 적게 하고, 가정에 착실하며, 늦게 들어오지 않는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믿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과 예수믿는 것과는 다르단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문맥을 훑어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 분의 뜻을 다 알았던 것은 아닌 듯 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형제들도 믿지 않았다고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은 보통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한이 이 복음을 기록할 당시에는 믿음에 대한 문제를 정리한, 즉 상당한 신학이 형성된 후이므로 그의 지적은 분명하고 뚜렷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대략 주후 90년 내지 100년 정도에서 기록되었으리라고 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상당한 근거가 있는 이론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요한복음이 신약성서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벌써 노스틱주의의 이단이 나돌고 있었으므로 노스틱주의를 상대로 변증하면서 요한복음을 기록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신앙의 교리와 내용이 체계화된 다음에 기록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이에 비해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모든 사실을 기록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신학이 형성되지 않았음이 드러나고 단지 사실 그대로만 편집해서 기록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편집 자체가 상당히 신학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신학이 정리가 되어 있었으므로 사도 요한은 지금 신앙의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예수의 형제들이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사도 요한이 나타난다면 아마 똑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은 있으나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긍정한다, 인정한다, 혹은 의지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인격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은 우선 그의 존재와 진실을 믿고, 그리고 그와 나와의 관계를 믿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의 능력과 지혜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초보 운전자가 있습니다. 나는 그를 믿지만 그러나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사람은 참으로 진실하고 믿을만 하지만 그의 운전 기술은 믿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온전하게 그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믿는다는 것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옳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새 서로 믿는다고 하면서 싸우는 일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믿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가 하는 말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모든 것까지 다 옳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나를 그 쪽으로 위탁해서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당신이 옳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가령 남편이 직장 상사로부터 걱정을 듣고 집으로 와서, 상사를 욕하며 괜히 나만 못살게 군다고 불평을 했다고 합시다. 이 때 아내들은 어떤 말로써 남편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아내는 대꾸하기를 "당신이 잘못해 놓고 괜히 상사에게 불만이에요. 앞으로 밖에서 생긴 일을 가지고 집에까지 연장시키지 말아요"하며 남편에게 면박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부는 서로 타인이며 믿음이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당신 회사 상사가 잘못 판단한 것 같아요. 난 당신 말이 옳다는 것을 믿어요"라고 옆에서 부추겨 주면 얼마나 살 맛이 나겠습니까? 단 며칠을 살아도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을 믿어야 합니다. 설사 그의 행동이나 의견이 납득이 안 가도 우선 믿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저 깊숙이 들어 있는 그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뜻을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옳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 당신이 하는 처사가 옳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나는 건강해야 될 사람인데 왜 병들게 하십니까 하며 반항을 하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으로 상대방이 100% 다 옳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소 내게 불만이 있고 아픔이 있어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의견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굽혀 보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믿음과는 정반대의 길임을 알아야겠습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3-5). 초막절이 가까와 오니 열 두 살 이상의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듭니다. 형제들의 생각으로는 수십만 명이 모여드는 좋은 기회이니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를 시골에서 묻혀 있게 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깜짝 놀라도록 기적을 보여 주자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오천 명보다는 수십만 명을 먹이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환자들을 고치고, 말씀도 전하자는 제의입니다. 이 형제들이 과연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입니까? 여기서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은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고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의 곁에 가기만 해도 병자가 고침을 받고 그의 곁에 가면 무슨 문제든 해결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믿고 있었으면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믿었으면 믿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인데, 사도 요한은 안 믿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가 메시야인 것도 믿었습니다.
즉, 메시야 대망사상으로 예수를 보았습니다. 자기들 친 형님이지만 보통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분명히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메시야란 굉장히 정치적인 용어로써 일차적으로는 유대나라 왕을 말합니다. 옛날 솔로몬이나 다윗 왕, 또는 모세와 같은 분으로 위대한 지도자가 군림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시기와 방법의 문제였습니다. 언젠가는 분명히 유대나라를 회복하실 터인데 그때가 이왕이면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 예수님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이 되어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니 예수님도 빨리 가셔서 한번 번쩍하게 보여 주자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훌륭한 믿음인 것 같은데, 사도 요한은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한의 비판이요, 판결입니다.
예수님의 등을 밀어서 예루살렘 길을 재촉하는 것에는 나름대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유대나라의 왕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도 있지만, 또 하나의 의도는 형님이 왕으로 출세하면 덕분에 형제들도 좀 덕을 보자는 것입니다. 상당한 자리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를 내세워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부탁을 예수님께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형제가 중요한 자리를 다 차지하겠다면, 수제자 베드로는 빼라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정말 자기 욕심에 어두워 눈치 없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사람 안 되는 제자들끼리도 서로 시기, 질투하여 미워했습니다. 사람의 질투란 무서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중의 한 멤버로서도 만족할 수 있었는데 제일 윗 자리까지 탐하는 것을 보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이렇게 제자들끼리 서로 자리다툼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들대로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너희들이 암만 그래도 우리는 형제야, 예수님이 출세하면 너희들보다는 우리가 먼저야"라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본 것처럼 예수님의 길을 재촉하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세요. 이렇게 초야에 묻혀 있어서야 되겠습니까?"하고 등을 밀었습니다.
물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사도 요한은 비판합니다.
저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사도 요한이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본문 4절에 보면 "나타나기를 원하면서"의 뜻은 인기를 말하는데 인기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4:1 이하에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인도해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합니다. 뛰어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서, 야, 굉장하다, 놀랍다고 하며 당장 인기가 높아지고 인기가 높아지면 메시야가 될 것이니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주여, 믿습니다" 하고 뛰어내렸으면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한 마디 하시고 돌아서는 것이 오히려 비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니, 오히려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믿음입니다. 뛰어내린다는 것은 종교적인 허영으로서 무서운 것입니다.
믿음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형제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길을 재촉하는 것과 마귀가 유혹하여 예수님께 뛰어내리라는 것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리라"(요 7:6)고 하시며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형제들이 이렇게 형님 마음을 몰랐으니 예수를 믿지 아니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깊은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습니까?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 혹은 사도 요한이 지적하는 믿음이란 십자가 중심의 신앙입니다.
십자가를 제쳐놓고서는 바른 신앙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안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요한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것은 마귀도 하고 있는 일입니다. 마귀에게도 그런 신앙은 있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신앙은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다시 한 마디로 압축하면, "믿음이란 고난의 메시야를 믿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실망하여 가는 도중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유대나라를 회복하실 메시야를 고대하였는데,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가신 주님을 볼 때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에게 성경에서 메시야가 고난을 받을 것임을 기록하고 있는데 왜 실망을 하느냐고 십자가 없는 메시야를 기대하는 그들의 신앙에 대해 개탄하고 계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 십자가를 부인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십자가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어 있고 그 속에 충분한 하나님의 축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 십자가의 신앙의 의미를 알았으면 그 의미를 따라가는 또 하나의 신앙이 있어야겠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가는 길에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동행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데 형제들과 제자들은 임금의 보좌관을 노리며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을 함께 하는 데 진정한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그 십자가 앞에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위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와 함께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했습니다. 밀알 하나가 썩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중요한 말씀과 같이 주님과 함께 우리는 썩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과 함께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함께 죽으면 함께 사는 것으로 한 운명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너희 때는 항상 있지만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주님은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하여 굳게 결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할 바로 그때, 즉 주님의 때에 나도 함께 가야 합니다. 이 길을 기피하거나 너무 서둘러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때와 장소가 주님의 손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때를 정하고 환경을 정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 시간 그 길에 나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길입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끝까지 따라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한 때는 십자가를 지시려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의 때는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때에 나를 맞추어 그 분에게 위탁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기도의 응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누군가가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좋다, 그대로 하라"는 응답이며, 둘째는 "아니다", 그리고 세째는 "기다려라"는 응답입니다. 나의 소원은 이것입니다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래라"고 대답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니다"라고 하실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나는 달라고 구했는데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나는 가겠다고 기도했는데 가지말라고 하셨어도 그것도 사랑의 응답입니다. 기다리라고 하시면 얼마든지 기다려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침묵 속에서도 응답이 있고, 십자가 안에도 응답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응답아닌 것이 없습니다. 내게로 향하신 모든 응답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진정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으므로 우리는 신앙의 참 의미를 깨닫고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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