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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부자(누가복음 12:16-2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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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부자(누가복음 12:16-21)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중심 주제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있던 사람 중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고있는 한 젊은이를 보게됩니다. 본문에서 몇 절 더 거슬러 올라가 13절부터 보게되면 오늘 예수께서는 왜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되었는가 하는 그 동기와 용의 맥락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데 여기 한 젊은이는 그 하나님의 나라에는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땅의 일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듣는 중에 예수님께 너무나도 엉뚱한 부탁을 해온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부탁의 내용인 즉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하는 것입니다. 그 젊은이가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시고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 무궁무진하며 그 권위가 대단한 분이시니, 저 정도면 고집스러운 우리 형님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기와 형님과는 재산 문제로 싸우고있는 중인데 예수님께서 자기 형님에게 잘 말씀해 주시면 자기 몫의 유산을 나누어주지 않겠는가 하고, 이제 예수님을 재산 나누는 재판관으로 모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다가 기껏 생각한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지금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신다면, 그리고 그 앞에 내가 앉아서 말씀을 듣는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시간이겠습니까? 역사상 한 번뿐이요 일생에 한 번 있는 기회에 가장 귀한 말씀을 듣게되었는데 고작 생각한다는 것이 재산 나누는 문제라면 그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이 사건은 있었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는 먼 옛날의 남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에도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의도와 주제에 따라서 듣지 못하고 자기의 의견과 고집에 집착해서 자기 중심으로 생각해버리고 마는 심령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젊은이는 아마도 그 아버지가 유산 처리를 제대로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 같습니다. 그랬으면 형님이 마땅히 동생 몫을 나누어주어야겠는데 차일피일 날짜만 보내고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만약 아들이 형제뿐이라면 는 형님이 갖고 은 동생이 갖는 것이 정당한 방법인데, 누구한테 부탁을 하여도 욕심 많은 형님의 마음을 설득시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을 보자마자 "! 저러한 분이면 되겠다" 싶어서 예수님께 부탁을 합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재산을 나누는 데 좀 도와주십시오 하는 내용이 아니라, "형님을 명해서"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해달라는 부탁입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잘못된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의 생각은 상관할 바 없이 완전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이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면서 오늘 주신 비유를 말씀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비유에 들어가시기 전에 중요한 격언으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살고 죽고의 그러한 뜻만이 아닙니다. 조금 더 넓게 의역하면, 사람의 행복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소유의 넉넉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부유해도 죽기 직전으로 고민스러운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의 길이 그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 이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시게 되는데, 앞에서도 그랬듯이 말씀의 목적과 주제를 쉽게 파악하기 위하여 본문의 마지막 부분, 즉 결론부터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 후에 다시 돌아와 본문을 보게되면 본뜻을 보다 쉽고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을 보노라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아무 것도 쌓아둔 것이 없는 사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사람! 그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주제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음을 떠나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의 시작으로 돌아가 봅시다. 한 젊은이가 자기 몫의 재산이 돌아올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젊은이의 마음은 재산에 있고 그 재산에 대한 탐심은 곧 부자가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너는 재산으로 인해 부자가 되려고 하는데 굳이 형님이 안주겠다는 재산, 그렇게 달라고 안달할 것 없다. 안주겠다면 그만두고 아예 이 세상적인 것에 대해서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이제 버리고 하나님께 대한 부자가 되어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직접 이 청년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고 보면 180도 전환의 가치관, 인생관을 요구하신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부자"라면 어떤 부자를 말하는 것입니까? 물질로의 부자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신령한 면에서의 부자입니까?

우리의 주변을 보면 물질면에서는 대단한 부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빈곤한 사람이 있습니다. 돈은 많으나 인품이 없으면 그것처럼 목불인견은 없습니다. 정신적인 것은 하루 아침에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도 가슴도 텅텅 비었는데 돈이 많다고 부자랍니다. 그리고는 입만 열면 나오는 것이 천박한 상소리인데 무슨 부자란 말입니까? 비록 초라한 차림을 하고 생활은 어려워도 교양과 인격에 있어서 훌륭하게 부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하기야 가능하다면 둘다 가지면 오죽이야 좋겠습니까만 그게 그렇게도 힘든 것인가봅니다. 그 때문에 옛날부터 청빈낙도(淸貧樂道)라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한 계단 더 올라가 신령한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있어서 부자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영적인 부자입니다. 부자란 어떤 것입니까? 부자란 풍족한 사람이라는 뜻이요, 따라서 만족해하는 사람입니다. 부자는 아쉬워하는 것이 없어야 부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너무 빈 것이 많아서 채우고 채워도 끝이 없답니다. 이를 경계해서 우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족한 줄로 알고 자기가 가진 물건이 제일 좋은 것으로 아는 사람이 제일 큰 부자라고요. 그런가하면 자기가 가진 것을 족한 줄 모르고 시종일관 남의 물건만 좋아하며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가지고 또 가져도 부하지 못할 사람입니다. 음식을 먹어도 자기집 음식이 제일 좋은 것으로 만족해하는 그 사람이 부자입니다. 김치 하나를 먹으면서도 아무개의 집 김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집에서는 김치 하나도 만족하게 못 얻어먹고 다니는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요즈음 자가용 시대를 맞아 어떤 이는 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더 좋은 차를 갖지 못해서 계속 불만입니다. 자가용 없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에서 가지고도 불만이라면 그는 분명 가난한 사람이요, 그 버릇 가지고는 죽을 때까지 가난합니다. 그야말로 빌어먹을 팔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격언 중에 사람에게는 자기 밥 먹는 사람과 빌어먹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자기 밥 먹는 사람은 부자이고, 빌어먹는 사람은 거지입니다. 부자는 배가 부르나 거지는 배가 고픕니다. 어쩌다 한 번 배고픈 것이 아니라 먹어도먹어도 배고픕니다. 그러니 거지 팔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생리적으로 거지입니다. 참으로 생각할수록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개 문제가 있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아도 제가 보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만하면 세상 사람들도 상팔자라고 불러주겠는데뭐가 그렇게 불평이 많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더 바라고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글쎄, 그것을 모르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길래 그것은 병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병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질적인 그 병을 가진 줄 모르는 그것이 병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계속 배가 고프니 병자입니다.

오늘 비유의 이 부자는 병리적인 부자입니다. 농사가 아무리 잘되고 창고가 모자랄 정도가 되어도 아직도 부족합니다. 그러니 이는 불쌍한 부자란 말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 사람의 가난하고 불쌍한 모습을 보게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적하여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어리석음이 무엇입니까?

째로 그는 그 풍성한 소출에 대한 한 마디의 감사도 없이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며 오히려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출이 많다고 계속 쌓아두기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본래 곡식이란 적당히 있어야지 너무 많아도 걱정인 것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잉여 농산물 때문에 대단히 골치를 앓습니다. 한번은 제가 직접 목격한 것인데 굉장히 넓은 밭을 금년에는 정부에서 농사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농사의 수확으로 생길 만큼의 돈을 정부가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계속 농사를 지어 물량이 쌓이게 되면 농산물 값이 헐값이 되고 그 때문에 농민이 망하게되면 다음 해 농사는 누가 하겠습니까? 그러기에 농민이 망하지 않게 하려면 나라에서 사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사들인 곡식을 둘 데가 없어 또 걱정입니다. 그래서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바다에 버리기도 하고 기름을 빼낸 굴에 집어넣는 등 그 처분하는 일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돈으로 줄테니까 제발 농사하지 말고 쉬면서 여행이나 다니며 즐기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알고 보면 이 식량이란 것은 만나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저 해마다 생기는 것입니다. 적당히 농사해서 적당히 먹게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나와 같이 그 날, 그 날 걷어 먹어야 신선하고 좋은 것을 먹게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형편이 모자란다, 모자란다 하면서도 묵은 쌀을 먹게되는 것은 결국 햅쌀은 저장하고, 저장했던 묵은 쌀을 먹는 것입니다. 아무튼 저장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장한다손 치더라도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부자가 쌓아둘 곳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나누지 않고 쌓아두려고 하니까 쌓아둘 곳이 없고, 저장의 문제가 생기더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만큼 주셨는데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가져서 문제이고, 어떤 사람은 배가 고파서 아우성입니다. 지금도 이디오피아에서는 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실로 21세기를 준비하는 인간으로서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텔레비전의 화면을 통해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그 비참한 모습, 이 순간에도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는 계속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느 나라에서는 농산물이 남아돌아 버리기에도 골치를 앓고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문제요, 세계인류의 문제이며,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입니다. 한 편에서는 너무 과다한 영양 섭취로 비대해진 살을 빼느라 이런 저런 운동을 하며 야단이고, 다른 한 편에서는 영양 실조로 쓰러져 가고 있으니 이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같이 나누어 먹고 함께 살도록 되어있는 존재입니다. 자기 생각만을 했기 때문에 저장할 곳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6:19-20) 고 하셨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쌓아두면 간단히 끝날 것을 땅에 쌓아두겠다니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집에 보화가 많은 사람은 걱정이 많습니다. 그것 때문에 잠도 깊이 못 자고 집을 비우지 못해 교회 출석도 안하고 맙니다. 그런데 요즈음 세상 같아서야 집을 지킨다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음놓고 부수고 들어와 죽이고라도 가져가겠다는 데 앉아서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것은 문을 열고 살 수 있으면 좋고 또한 도둑이 와도 가져갈 것이 없는 집으로 아예 소문이 나면 그 이상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땅 위에는 쌓아둘 곳이 없습니다.

스위스 은행을 능가하는 그 어디에도 둘 곳은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 쌓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요, 영원히 보존될 유산이 되는 것입니다. 곧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입니다. 재물이란 잘 벌어야 하고 잘 지켜야하며 그리고 잘 써야합니다. 그러나 여기 이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사람이 어리석다는 것은 자기의 영혼이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어리석게도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하며 대단히 근사한 말을 하고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통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영혼이라고 해서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내 영혼은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 20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생명은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물질로 인해서 주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오라면 가야지요. 1분도 연기 신청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혼을 두고 감히 이러자, 저러자 하겠다는 것입니까? 더욱이 "여러 해 쓸 물건"이라고 하였는데 그 여러해는 누가 보장한 여러 해입니까?

잠언 27 : 1에 보면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인생입니다. 얼마 전에도 건강한 어떤 부인이 계산대 앞에서 손님으로부터 웃으면서 돈을 받는 중에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런데도 여러 해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영혼을 향하여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하는데, 영혼이 즐거워하는 것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이 사람의 생각이 여기에 머물고있으니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어리석다는 것은 인간 존재는 영혼의 유무에 있고 육체의 움직임이 영혼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이 육체 속에 있으므로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물질은 그 뒤에 따르는 것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물질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유물사관, 물질 중심의 그 세계관이 바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물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 뒤에 오는 남은 문제가 더 크고 중요하건만 어리석은 이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끝내는 이 물질이 내 것이 안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나에게 있다고 내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 물질 또한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지금 나에게 맡겨져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얼마 후에는 내 것이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도 내 것이 아니요, 장차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분명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물질이 무엇인가도 모르면서 물질을 위해서 살고 물질을 벌어들이며 물질을 저장하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있는 것입니다. 끝내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가끔 대리석에 새겨진 커다란 문패를 볼 때마다 아무래도 너무 든든하게 붙였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냥 간단하게 써붙였다가 쉽게 뗄 것이지 그렇게 대리석으로 고정까지 시켜놓으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차라리 어떤 집처럼 종이로 써 붙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책 한권을 가지고도 무슨 보화나 되는 것처럼 사자마자 이름 써놓고 다른 사람 보는 것도 꺼려합니다. 이름 많이 써놓은 책은 뒤에 도서관에 기증을 해도 복잡합니다. 아무 물건에나 이름 써넣는 것 즐겨할 것이 아닙니다. 내 이름 썼다고 내 것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현재에 내 것이라 할지라도 이 사람, 저 사람 돌아가면서 같이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모자라고 닳아지면 그만두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아끼며 감추고 쌓아두어도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누구의 것이 될지도 모르는 것을 가지고 창고만 넓히며 앉았는 이 어리석은 인간아!"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물질관은 첫째로, 물질은 비목적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물질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둘째는, 비우상화입니다. 물질을 우상으로 섬겨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셋째가, 물질을 죄악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는, 물질은 잠시 동안 맡아있는 청지기적인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내것이 아닌 것을 지금 임시로 맡아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알고있는 훌륭한 목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625를 만나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피난을 가면서도 선교사가 맡기고 떠난 돈 얼마는 기어이 가지고 다니며 보관했다가 625가 끝난 다음에 선교사에게 그대로 갖다 바쳤습니다. 깜짝 놀란 선교사가 "그 난리 통에서 어떻게 도로 가져오셨습니까?"고 말할 때에 이 목사님은 "내 것이 아닌데 왜 내가 쓰겠습니까?"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재산을 버리고 가면서도 남의 것이기 때문에 가지고 다녔습니다. 남의 것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격 이하의 인간입니다. 내 물건이야 없어져도 좋고 버려도 좋지만, 남의 물건이기 때문에 소중하고 책임이 큽니다. 이것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야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물질도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더 소중한 것입니다. 내 자식, 내 건강,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먹어버린 그것뿐입니다. 그것 외에는 내 것이라고 보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오늘 저녁을 다시 먹을 수 있을는지, 아니면 그 전에 인생이 끝나버릴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같이 나누어 쓰도록 되어있고 또한 그래야 합니다. 이것을 알고 쌓아둘 곳을 찾아야합니다. 모두를 위해 쌓아둔다는 것은 모두를 위해 쓴다는 말입니다. 나만을 위해 쌓아둔다는 것은 죄가 됩니다. 경제에 있어서도 "순환경제"라는 말이 있듯이 축척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형편이 어렵다보니 자꾸만 저축을 강조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사실 쓰지 않으면 막히고 마는 것이니까 큰 일이 나게 마련입니다.

마지막으로 알아야될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의 어리석음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쌓고 쌓으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너무나도 인색합니다. 내 아들, 내 명예를 위해서는 10만 원, 100만 원도 아까울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그렇게도 벌벌 떱니다. 진실로 두려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 비추어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얼마나 부요한 자인가를 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일에 대한 것과 내 자신을 위한 것과의 밸런스를 맞춰보아야 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를 하면서 예배당을 짓는 중에 약속한 헌금이 수금이 잘 되지 않아 공사에 어려움을 겪었던 적이 있습니다.그 일 때문에 많은 기도를 하는 가운데 어느 날 이러한 말씀을 한 번 했습니다.

"만약 내 아들이 병원에 입원을 하여 수술을 받아야할 형편이라면 돈 없다고 수술받지 않겠습니까? 빚을 내어서라도 수술을 받는 것이 우리 인간의 일일진대 하물며 지금 하나님의 집이 이 모양이 되었는데 빚 좀 내면 안되겠습니까?" 하여 빚내기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헌금이 들어와서 무사히 예배당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다 쓰고 남으면 그 때에야 하겠습니까? 분명히 알아둘 것은 그러한 찌꺼기는 하나님이 원치 않으십니다. 진정 우리의 마음 한 구석, 생활 한 구석이 뚝 떨어져 나가는 것같은 그 무엇이 있어져야 합니다. 어쩌다가 부스러기 돈 좀 생기면 그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하겠노라 한다면, 그는 여전히 가난합니다. 그래가지고는 하나님의 사업도, 하나님의 교회도 여전히 가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부요하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가난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와 같이 어리석으니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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