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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잔치 비유(마태복음 22:1-14)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시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기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오늘 주시는 말씀의 소재 역시 당시에 흔히 있었던 일들을 쉽게 풀어서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곳곳에 많은 왕이 있었습니다. 광활하게 넓은 땅에 비해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여기 저기에 떨어진 마을을 형성하며 소집단 위주의 생활권을 마련하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사람이 많거나 교통 수단과 통신 수단이 발달되지 못한 처지였기 때문에 통치하는 왕이 한 사람 있다 하더라도 넓고 먼 전 지역을 다 다스릴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가 백두산 건너편의 그 넓은 만주 땅을 포기해버렸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소련은 알라스카 땅이 저렇게 중요한 몫이 될 줄은 상상도 못한 채 관심 밖의 땅으로 생각하고 돈 몇 푼 받지 않고 미국에 팔아버렸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배아픈 일이지만 당시에 있어서는 필요할 것까지도 없는 귀찮은 일거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옛날에는 무한히 넓은 땅에 사람은 적고 필요한 수단도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이 있어도 국토의 전 지역을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분봉 왕이라고 하는 제도를 만들어 분할 통치케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을 원님과 같이 한 지역을 맡은 분봉 왕들이 있고 그 왕들 위에 전체적인 하나의 대왕이 있어서 작은 왕들인 분봉 왕들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들 왕이라고 하면 대국을 생각하고 역사적인 인물의 왕들을 기억하기 쉽습니다만, 여기 본문에 나타난 임금이라고 하는 신분은 한 고을의 왕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지방 임금을 예를 들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이요, 그 사랑의 마음은 곧 아픔의 마음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몇 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주고싶은 마음이요,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며 그리고 더불어 살고싶은 마음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고독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결코 고독할 수가 없으며 고독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의 배척을 당할 때에 가장 고통스러운 고독에 빠지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는 혼자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사랑하는 그이와 함께 있고싶고 같이 지내는 것이 기쁘며, 내 기쁜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어렵게 살아온 탓으로 사랑하면 곧잘 구제로 생각하여 먹을 것, 입을 것, 용돈 등을 주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러한 것은 모두 기초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먹고 입는다는 것은 그렇게 돈이 많이 들거나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고 보면 모든 문제는 먹고 난 후에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는 먹이는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입힌다고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결코 물질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 위에, 그보다 높은 차원에서 더불어 함께 하고싶은 마음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나타날 때에도 하나님의 그 기쁘신 마음을 우리와 함께 하시고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오늘 본문에 잔치 비유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어떤 임금님이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풀면서 혼자 즐기지 않고 그 백성을 초대하여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자는 것입니다. 뇌물을 준비하라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가지고 오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잔치에 와서 함께 즐기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함께 즐기자"가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랑에 아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절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거절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묘사할 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며 보상의 하나님이요, 심판의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권선징악을 주도하시고 죄인을 심판하시며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뵙게됩니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요, 적극적인 하나님이며, 행동적이고 그 사랑하심이 너무나도 간절한 그리고 효과적인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찾아오시는 하나님, 행동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하고 사랑해도 배신을 당할 때에는 사랑의 한계를 갖고 미워하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이 사랑이 배반당했을 때에 오는 무서운 심판이 엇갈려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초청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봅니다. 잔치를 다 준비해놓고 먼저는 "오라"고 초청을 합니다. 그런데 싫다고 오지를 않습니다. 이제는 가서 아예 메뉴 설명까지 하며 간청을 합니다.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다시 말하면 백물을 갖추었으니, 즉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잔치자리가 마련되었으니 그저 와서 즐기기만 하게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간절히 두 번이나 초청을 하였건만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임금님의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면서 오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중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라고 부르십니다. 간절히, 애타게 부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하십니다. 생각하면 이 임금의 마음은 간절할 뿐만 아니라 끈질기기도 합니다. 웬만하면 그만두어 버릴만도 한데 그러지를 않고 기어이 이 잔치를 함께 즐길 작정입니다. 끝까지 사랑할 마음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축제를 완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일방적 은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쪽에서 일방적으로 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부름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습니다. 오직 기쁨을 함께 하자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없습니다. 의무나 부담도 없고 대상이나 자격도 상관치 않습니다. "오라"는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이 간절한 초청이 거절을 당합니다. 초청이 거절당한다는 것, 그것처럼 모욕적이고 참기 힘든 일이 없습니다.
그 좋은 예로서 남녀가 사랑을 하는 일에 있어서의 경우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함께 무르익었을 때에 어느 편에서든 사랑을 고백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야지, 어느 한 편은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게 되는 날에는 이는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모욕이요 수치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자살 소동까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초청의 거절당함이, 특별한 사랑에의 초청이 거절당했을 때 그만큼 참기 어려운 고통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공감대와 사랑의 나눔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면 그 거절당하는 아픔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를 하던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한 권사님이 저의 손목을 잡고 울면서 하는 이야기가 자기는 자녀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목사님을 초대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못했는데, 지난주간에 있었던 자기 생일, 그것도 환갑날에는 특별한 날이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꼭 한 번밖에 없는 기회에 목사님을 모시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그만 목사님이 부흥회 인도하러 가시고 안 계셔서 모실 수가 없었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서럽게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초청을 거절당하고 사랑이 거절당한다는 것은 괴롭고 마음 아픈 일입니다. 사실을 말하면 나더러 무엇을 자꾸만 달라고 하는 것도 괴롭지만, 나의 마음으로부터 주겠다고 하는데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이것은 더욱 괴로운 것입니다. 사랑의 거절당함! 이 아픔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경험하며 보고 듣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 잔치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세 가지는 갖추어져야 잔치다운 잔치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에는 물론 음식도 좋아야하고 분위기도 좋아야 하는 등 다른 여러 가지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런 것은 다 별 것이 아닙니다. 잔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손님이 많아야합니다. 잔칫집에 손님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 마나한 끝난 잔치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휴일에 결혼식을 하겠다고 주례를 부탁하러 옵니다. 그러면 저는 공휴일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공휴일에 결혼식을 하면 사람들도 오지 않을 뿐더러 와도 기분이 좋지 않다는 설명을 하며, 왜 하필이면 남들 하루 쉬는 날 결혼식을 해서 오라 가라 하며 모처럼의 휴식과 나들이를 빼앗으려고 하느냐고, 그렇기 때문에 공휴일에 결혼식 하는 것은 실례라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래도 못 알아듣고 꼭 하겠다면 하는 수 없이 내 희생하는 것은 괜찮다며 허락을 하게됩니다. 문제는 공휴일인 결혼식 당일에 식이 시작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 신랑이 와서는 "아 목사님, 큰일났습니다"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왜요?" 그랬더니 "손님이 없어요" 합니다. "그래 내가 뭐라고 합디까? 본인은 처음 하는 결혼식이지만 나는 주례를 20년을 했는데 왜 그것을 모르고 말을 안 들어요?" 하고 주례를 하러 나갔더니 글쎄, 커다란 예배당 안에 한 여남은 명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입니다. 형편이 이쯤 되고 보면 모두가 민망하고 답답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저 잔칫집에는 손님이 많아 음식이 모자랄 정도가 되어야합니다. 어쨌든 손님이 많이 와주기를 바라는 것이 잔칫집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손님의 질이 문제입니다. 손님은 손님인데 저질 손님만 온다면 이 얼마나 곤란한 문제이겠습니까? 흔히들 하는 말대로 바라는 손님은 오지 않고 오나 마나한 손님만 온다면 이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을 만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요즈음 말로 브이 아이 피(VIP)인 귀빈, 주인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품위 있고 지체 높은 분들이 많이 참석해줌으로써 그 잔치는 그럴듯하고 돋보이는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는 순수한 마음으로 와야합니다. 요즈음 하객에는 그렇게 순수한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잔치에 오라고 하면 우선 수첩부터 꺼내 보면서 우리 집 잔치에는 얼마나 부조를 했던가를 먼저 계산에 넣고 오고 가니 이 모두 장사 속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리본에 소속이나 이름만 새겨보낸 화환, 꽃다발을 보아도 그렇게 순수한 것 같지를 않습니다. 거기에 숨겨진 다른 거래가 있고 정치성이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이와 같이 순수치 못한 손님들은 반갑지가 않습니다. 순수한 마음, 깨끗한 마음, 오직 주인과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임금도 손님을 초대할 때에 청할 만한 사람을 초대하고 순수한 손님이 많이 와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이 임금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 때문에 마지막에는 누구든지 오게 해서라도 자신의 마음을 달래야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만나는 대로 불구자이건 장님이건. 죄인이건 악인이건 상관치 말고 다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통첩은 참으로 가슴 아픈 결정이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애절한 요청인 것입니다. 어쨌든 호의를 거절한다는 것은 주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처지에 그래도 추장 집에 머물면서 눈치로 생활을 하며 선교를 해나가고 있는데, 그 집에서 제일 좋은 음식이라며 귀하게 생각하여 주는 것이 선지피를 반숙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슴의 피를 반숙하여 마시는 것인데 그네들은 최고의 음식으로 생각하고 입가에 피를 묻혀가며 맛있게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교사에게는 어쩔 수 없이 먹어야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끔찍한 기분이었지만 이 호의를 거절하면 큰 일이 나는 것이기에 눈 딱 감고 마시는데 그렇게 고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 마신 다음에는 트림까지 해야 인사가 된다고 합니다. 고역이긴 해도 그래도 그 정도는 괜찮았는데 맨 마지막에 생긴 문제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답니다.
계속 한 1주일을 머물며 전도를 하고 떠나려하자 추장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호의로 선물을 하는데, 그 선물이 어처구니없게도 그 추장의 열한 번째 아내를 주더랍니다. 그의 말인 즉 내가 마지막으로 얻은 예쁜 아내인데 당신한테 주고싶으니 데리고 가라면서 내어주더라는 것입니다. 이쯤 되고 보니 아무리 선교사라 한들 달리 생각해볼 여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거절을 했더니 이번에는 아예 죽이겠다고 하더랍니다. 이 큰 호의를 거절하는 것으로 보아 너는 원수라며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가 그것을 설명하는데 1주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호의를 거절했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곧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 거절하는 이유가 한결같습니다. 모두가 싫어했는가 하면 하나같이 돌아보지도 않았다 했습니다. 또한 동일한 비유인 누가복음 14:18에는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인의 마음을 돌아보지도 않고, 이 임금님의 마음이 얼마나 섭섭할 것인가에는 아랑곳없이 똑같이 사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는 자기 밭으로 가고, 또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게다가 남은 자들은 심부름 간 종들을 능욕하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모독이며 어리석은 광란의 행패입니까? 누가복음 14장에 표현된 말씀을 첨가해보면,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보아야 하겠고",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나는 장가들었으니." 이 모두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전부가 하나같이 나를 생각했습니다. 초청한 분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사정만을 생각했습니다. 임금의 마음을 헤아린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분과 자기의 유익만을 계산한 것입니다. 저들은 끝까지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이 영접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초청에 응하려고 하면 먼저 나 자신에 대한 계획이나 생각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초청자인 주인의 마음과 형편을 생각하며 초청 자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초청에 응하는 태도가 빈부귀천에 저울질되어서도 안됨은 물론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빠져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나로부터의 모든 문제를 제거하고 오로지 초청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며 거기에 응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청에 응하는 자의 바른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악한 자나 선한 자를 불문하고 만나는 대로 불러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병신, 소경, 저는 자들을 다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강권하여 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모두 불러와서 이 기쁨을 나누고싶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강권하여 데리고 오라는 것이 주님 말씀의 초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강권해서 주님 앞으로 데려와야 합니다. 나만 예수 믿고, 나만 기뻐하며, 나만 즐거워할 것이 아닙니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하고 그러기 위한 노력을 해야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축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축제! 부활의 축제! 영원의 축제! 이 가슴 벅찬 기쁨의 축제를 어찌 혼자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함께 나눌 자가 있어야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 올 때 혼자만 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를 들러서라도 한 사람 데리고 와서 같이 즐겨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즐기려는 그 마음이 바로 주인의 초청에 응하는 자의 마음임을 알아야합니다.
여기에서 잠시 해석을 덧붙이면 앞서 두 번의 초청,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청한 자에 대한 초청은 유대인을 향한 초청을 의미하며 마지막 초청은 이방 사람들에 대한 초청입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신분을 가려서 초청을 하였고, 마지막에는 신분 같은 것은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데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게다가 누가복음의 강권하여 데려오라는 말씀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표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궁금하기도 하고 의아하게 느껴지는 것은 예복의 문제입니다. 갖가지의 사람들로 잔치자리가 가득 채워졌을 때 손님을 맞기 위하여 임금이 들어와 보니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가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요즈음에는 의복이 다양해서 남녀를 구분 못할 정도입니다마는 옛날에는 그 모양이나 색깔이 다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양반의 옷이 있고 서민의 옷이 있어서 그 옷의 모양으로 신분을 가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 그들 중에서도 특별히 랍비들의 경우에는 사철을 검은 코트까지 걸친 정장에 모자를 쓰고 긴 수염으로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옷은 그 나라를 설명해주기도 하고 어떤 신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옷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고 가능한 한 자기 신분의 것이어야 했는데, 이 옷이 옛날에는 깨끗하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2천여 년 전에는 옷이 귀해서 옷 하나 가지고 3대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의 옷이 깨끗하거나 좋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잔치를 할 때에는 초청하는 사람이 입고 올 예복을 한 벌씩 보내면 그 옷을 입고 잔치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길거리에서 닥치는 대로 마구 불러왔으니 미리 옷을 보낼 여유는 없었고 아마도 문간에서 입혔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아무튼 주인이 마련한 옷을 다 입혀서 예식장에 들여보냈다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 사람은 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할 때에 모르긴 하지만, 짐작컨대 거절하였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어쩌면 그의 생각에는 이 집에서 주는 잠시 입는 옷보다는 내 옷이 개성이 있어 더 좋고, 갈아입는 번거로움도 싫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그를 한눈에 알아보고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고 묻지만 할 말이 없는 그는 유구무언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때에 임금은 대단히 노하여 사환들에게 명하기를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지옥으로 내어쫓으라는 말씀입니다.
옷은 몸을 감싸줍니다. 더럽고 추한 것을 가리워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복은 하나님의 의와 새로운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의 의를 가지고 나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임금이 베푸는 호의와 의를 힘입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것을 의로 생각하며 나왔다는 것인데, 이것은 용납될 수 없는 자기 착각입니다. 그러나 용납될 수 없다는 바로 여기에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더러웠거나 추했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거역했든, 능욕했든 과거는 묻지 않습니다. 다만 예복만 입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면 되는 것이고 와서, 예복만 입으면 되는 두 가지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는 것을 믿음으로 간주하고, 예복을 입는 것은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구원의 과정입니다.
먼저는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나아갈 것입니다. 나의 때묻은 의를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고, 내 선한 행실이 주님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지도 말며, 자기의 의나 선한 행적을 완전히 포기한 후 오로지 주님의 공로와 그 의만을 힘입어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초청한 왕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처음부터 아무나 데려올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기왕이면 좋은 손님 맞고싶었으나 계속 거절당하였기에 양보하고 양보해서 최후의 초청으로서,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초청! 이것을 듣고라도 응답하면 되는 것입니다. 응답하는 것이 믿음이요, 여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이렇게 응답하며 주님 앞에 나아올 때 반드시 잊지 말아야할 것은 나의 의를 완전히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의만을 힘입고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잊어버리는 수가 많습니다마는 복음은 잔치입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은 축제의 연속이요 잔치하는 마음의 나열입니다. 우리는 죄사함 받고 어린양 잔치의 기쁨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더는 자신의 일을 앞세우거나 얽매일 것이 아니라 주님의 초청에 기쁜 마음으로 응하여야 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응하여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준비해놓고 간절히 부르시는 그 음성! "오라!"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오라!" "강권해서 내 집을 채우라!" 그리고 "내가 주는 예복을 입고 잔치에서 함께 즐기며 기뻐하자!" 이 사랑의 초청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진실한 응답, 그것뿐입니다. 그것이 신앙이요, 거기에서 우리를 초청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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