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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뿌리는 비유1(마태복음 13:3-8)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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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뿌리는 비유1(마태복음 13:3-8)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씨뿌리는 비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비유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비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어떤 경우에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가리키는가 하면 때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질문을 던져 "비유 중에서도 가장 높은 가치의 비유는 어떤 것일까?"고 묻는다면 그 해답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심"이라 할 것입니다. 가까운 관계라 하여 부부간에 어떠하다든지, 형제간이 어떻다든지 혹은 교회가 어떠하다는 등의 그러한 문제보다는, 비교의 차원을 넘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며 또한 그 예수님 자신과 우리와의 관계의 문제를 말씀한 비유가 가장 값비싼 비유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씨뿌리는 비유는 예수님 자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직선적으로 표현하여 말씀하는 그런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가장 귀한 비유이며 더욱이 인간 궁극의 관심사요 목적인 하늘나라에 대한 설명과, 나아가서는 복음의 문제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받지 않으면 안될 구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깊고도 폭 넓은 진리가 담긴 비유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 주어진 씨뿌리는 비유를 개괄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어진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 육지와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앉으셨는데, 그러고 보면 예수님이 계시는 뱃전은 강단이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이 쪽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바닷가에 죽 늘어섰습니다. 이제 조용한 가운데 예수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육지 쪽을 향하여 서 있는 무리들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아마도 예수님의 음성은 대단히 컸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요즈음처럼 좋은 마이크 시설이나 음향 효과, 방음 시설도 안된 틔여진 자연 환경 속에서 육성으로 수천의 무리들에게 말씀을 하시자면 얼마나 힘이 들고 음성인들 얼마나 컷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당시는 지금처럼 시끄러운 소리들이 별로 없는 조용한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그런 장소였기에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멀리 뒷자리까지 그 소리가 전달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닷가의 뱃전에서 말씀을 하시고 무리들은 바닷가 언덕에 죽 둘러서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보시면 예수님의 시야에 늘어서 있는 군중이 있고, 그 군중들의 저 뒤에서는 농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씨를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소재가 풍부할 뿐더러 아주 실재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보시고 들으시는 전부가 말씀의 소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멀리 씨 뿌리는 농부의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씨를 뿌리는 사람이 나가서 씨를 뿌리고 있다. , 보라! 저렇게 뿌리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씨앗을 뿌린다고 다 결실이 되는 것이냐? 어떤 것은 길가에 뿌려져서 새가 주워 먹고 어떤 것은 돌밭이나 가시밭에 떨어져 이렇게 저렇게 없어지고 말고 그런데 꼭 옥토에 떨어진 것만은 결실하지 않느냐?"는 이 이야기는 시작도 끝도 없이 이것으로 끝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은 방법론적으로 볼 때 순전히 히브리적인 것입니다. 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생각하고 발견해 보라는 것입니다. 한 해 두 해 씨뿌리는 모습을 보아온 그들이 아니겠지만 형식만을 보며 ", 씨를 뿌리는구나! 금년에는 농사가 잘 되려나!"하는 정도로 스쳐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무슨 씨앗을 뿌리는가를 궁금해하며 경제적인 생각이나 사회적인 유익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에 비해, 예수님은 보여지는 그 자체에서 이것을 상징적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건 속에서 하늘나라의 진리를 보며, 하늘나라의 진리를 설명하십니다. 동일한 사건을 다같이 함께 보지만 예수님은 그 속에서 하늘나라의 진리를 보았고 무리들은 이 진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지 못한 자에게 보게 하시고 깨닫게 깨우쳐 주시는 분인 그 예수님의 안목과 관점,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익히면 모든 것이 비유요 모든 것이 말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씨를 뿌리는 장면을 직접 보시면서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지혜로운 귀와 지혜로운 눈, 지혜로운 판단력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결국은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아침에 세수를 할 때면 "마음도 씻어주시옵소서!", 음식을 대할 때는 "영적인 양식도 주시옵소서!", 가다가 넘어질 뻔 했으면 "내가 넘어져 다리는 부러질지라도 내 영혼은 넘어지지 않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할 것입니다. 순간순간 당하는 모든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깨달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씨뿌리는 방법에 관한 것인데 이게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당시 이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씨를 뿌렸기에 길가에 나가떨어지는가 하면, 엉뚱하게도 가시덤불이나 돌밭에까지 뿌려졌는지 생각해 보면 그 무모함이 적지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2천여 년 전의 농사법이라 원시적일 수밖에 없었겠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비닐 하우스에서 싹을 낸 후 옮겨 심거나, 처음부터 정교하게 씨를 뿌린 후 흙을 덮어야 되겠지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씨를 뿌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씨앗을 가지고 나가 바람에 날리면서 확하고 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바람에 날려가서 어떤 씨앗은 길가에도 떨어지고 또 어떤 것은 아주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더러는 가시덤불이나 돌밭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겠지요. 이는 지금도 쉽게 상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씨앗을 뿌릴 때 대부분 하나씩 집어넣지만 아직도 훨훨 뿌리는 경우가 많이 있고, 또 다른 방법은 조금 게으른 것이나 대단히 재미있는 방법입니다.

나귀 등에 씨앗 자루를 실어 놓고 그 자루의 밑에 구멍을 뚫은 후 나귀를 때리면 그 나귀가 돌아다니는 대로 씨앗이 뿌려진다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그렇게 흔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아무튼 좀 원시적인 방법으로 훨훨 넓게 뿌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면 바람에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더러는 목적하지 아니한 길가나 돌밭, 가시덤불에도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말씀의 선포적 의미입니다. 말씀의 선포, 말씀은 교육의 내용만은 아닙니다.

말씀은 선포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프로클러메이션 (Proclamation), 케리그마(Kerygma) 등에 해당되는 말로서 "말씀을 퍼뜨린다, 말씀을 선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널리 전한다는 말입니다. 현대적 표현을 빌리면 '광고한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의 광고나 벽보에 게재된 광고, 혹은 삐라를 뿌리는 것처럼 활활 뿌린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이 말씀에 접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그것이 곧 복음 전파인 것입니다. 말씀은 선포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붙들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 복음을 집어넣어 그로 하여금 예수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기 위한 씨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널리 선포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본인 스스로에 의해 받아들여지도록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서나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대로 일단은 먼저 복음을 전하고 그 이후에 일어나는 문제 곧 복음을 듣고 회개하거나 안하거나의 문제는 들은 자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듣고도 회개치 않는다면 이제는 회개치 않는 그 자의 잘못이지 복음을 전한 사람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복음을 전하지 않아 듣지 못해서 구원받지 못했다고 하면 이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의 책임이니 그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으로 "내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저 사람 망한 책임을 내가 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일단 모두 들어야 합니다. 다 듣도록 종자를 훨훨 뿌려야 한다는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복음을 듣는 기회로부터 제외되어 못 듣는 자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거기에는 선교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은 내가 교육하고 내가 책임질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기를 기도하고 내가 할 부분만 내가 하는 것입니다. 선포하고 씨를 뿌리는 것까지만 내가 하고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중요한 부분은 무엇보다도 씨를 뿌리는 자에게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인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지금으로 말하면 전도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자와 밭, 그 옥토 사이에 씨뿌리는 자의 수고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씨앗이 있고 밭이 준비되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이 씨앗을 뿌려 주지 않는다면 이 씨앗은 결단코 싹을 내거나 결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전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 귀한 생명의 복음이 있습니다. 저기에 아무리 좋은 마음 밭이 있어도 누군가가 전도하지 아니하면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아무리 큰 소금 뭉치라 하더라도 부뚜막에 두면 뭘하고 식탁 위에 두었다고 맛을 내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뿌려 녹아져야 맛이 나는 것입니다. 씨앗이 좋고 밭이 좋아도 전도자가 없으면, 씨앗을 뿌리는 자가 없으면 생명의 역사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전도자적인 사명을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대할 때마다 마음 밭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 돌밭 같은 마음, 길가와 같은 마음들을 상상하고 구분하며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하여야 될 것은 종자가 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마음 밭이 아무리 좋더라도 종자가 없으면, 씨앗이 뿌려지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무슨 결실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중대한 진리를 발견하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구원이란 자기 스스로의 수양이나 도덕, 윤리적 생활의 향상과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도의 윤리,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자체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무리 애쓰고 정결히 자신을 가꾼다 할지라도 나 스스로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컨대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이라고 가정했을 때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머리카락을 자기 손으로 잡아당긴다 해서 물에서 나와지는 것은 아닙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허우적거려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밖에서 밧줄을 던져 주어야 하고 그것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구원의 손길을 펴 주어야 살 길이 있는 것이지 그 안에서 혼자 허우적거린다고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점점 기운만 더 빠지고 그리고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에 인간적 종교와 계시적 종교와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깨끗하고, 인간이 아무리 애쓰며, 아무리 도를 닦고 참선을 하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그것 가지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밭이 아무리 좋아도 씨앗이 있어야 합니다. 밭이 옥토요, 즉 사람이 좋고 그 인간의 도덕성이 어떻고, 아무리 이야기해 보아도 그것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씨앗이 뿌려지는 객관적인 생명의 역사, 다르게 표현하면 객관적인 계시의 역사가 있고서야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맨투맨(man to man) 식으로 하나씩 개별적으로 만나지 않고, 오늘 본문에서 활활 뿌렸다는 점에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듣는 편에서의 수용성 여부와 그 정도에 대한 책임을 지금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 자신에게 묻겠다는 것입니다. 전하는 것은 전하는 대로의 책임이 있고 받아들이는 자는 받아들이는 대로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언제나 자유 선택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이유 없이 일단 전하여야 하고 전한 이후에 받아들이고 안 받고의 책임은 이쪽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전한 자의 책임이 아니라 다만 받지 아니한 자에게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고 보면 결국은 그 마음 밭에 따라서 생명의 효력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거론하면, 먼저는 복음을 전하여야 하고 그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전해진 이후의 결과는 똑같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동일한 내용으로 한 장소에서 전도를 하여도 어떤 이는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믿지를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가는 길에 한 마디 듣고도 구원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권고하고 부탁해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려운 것이며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전도자가 된 우리들은 우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반드시 내가 수고 한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저 쪽은 돌밭입니다. 결실이 없는 것입니다. 이 편은 길가입니다. 거기에도 결실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동시에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맨 처음 반응인 길가와 같은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다. 길가와 같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19절 말씀에서 해설하고 계십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린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린 자요"라고 하셨습니다. 길가에 뿌린 씨앗은 새가 와서 주워 먹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옥토에 떨어져서 흙으로 잘 덮여진 씨앗이라면 새가 먹을 수가 없었겠는데 반들반들한 길가에 떨어져서 환하게 눈에 보이므로 쉽게 새가 주워 먹고만 다는 것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무슨 결실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길가와 같다는 말은 굳은 땅을 말하는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녀서 닳고 닳은 땅을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흔히들 이러한 경우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논이나 밭이 있을때 조금 돌아가면 제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름길로 가기 위하여 기어이 가운데를 밟고 지나들 갑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자리는 반들반들하게 굳어지는데 바로 그 자리를 말합니다. 여기에 뿌려진 씨앗은 새들이 주워 먹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결실은 기대할 수 없는 땅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땅, 굳은 땅, 닫힌 땅, 닫혀진 마음, 굳은 마음, 고집스러운 마음, 교만한 마음들을 가리켜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알기 쉽고 부드럽게, 그리고 두고두고 생각이 되살아날 귀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은 언제까지나 우리의 생각에서 지워 버릴 수 없는 마음입니다. 복음은 이미 뿌려졌습니다.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는데 듣고도 모르고 보고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돕고자 하여도 복음이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하고 평생을 같이 살아도 복음을 안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처럼 끝까지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되는 그 많은 죄로 인해, 혹은 그 악한 마음 때문에, 마음 문이 굳게 닫혀져 있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문제의 마음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불쌍하고 괴로운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바로 이처럼 마음의 귀가 어두워진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망할 때는 먼저 귀부터 멀고 그 다음에 망한다고 합니다. 귀가 열려 있는 동안에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여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면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전혀 남의 말이라고는 듣지 않고, 양심의 소리에는 귀를 막고, 아예 누구의 말도 안 듣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는데 이야말로 끝난 인생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인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닫혀진 마음이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이토록 마음이 굳게 닫혀진 이유가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그 사람 자신의 경험 때문입니다. 많은 경험이 반복되면서 그 반복되는 행위가 경험을 낳고 그 경험이 다시금 반복되어 나갈 때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이 형성되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경험이란 필요하고 참으로 중요하며 좋은 것이지만 한번 경험을 하고 나면 생각은 어두워지기가 쉽습니다. 가끔 보게되는 경우인데 젊은 남녀 사이에서 중매를 할 때입니다. 중간에서 이야기를 하노라면 처음에는 그렇게도 묻는 것이 많습니다. 키는 얼마나 되고 취미는 무엇이고 등등 이 정도 되면 저로서는 더 아는 것이 없고 말하기도 귀찮으니까 아예 만나보라고하여 만나게 해주고는 맡겨버립니다. 그 후에 둘이 좋아지내게 될 때에 "나한테 묻던 것 한 번 물어보자"하고 일부러 물어봅니다. 그 사람 성격은 어떻고, 취미는 무엇이며, 장래 희망은? 하고 묻노라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결혼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진정 그 사람을 알고 싶으면 만나지를 않고 알아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되면 객관적인 판단력보다는 감정이 앞서서 풍덩 빠지게 되고 따라서 정신이 몽롱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같이 사는 이 사람을 더 잘 알 것 같지요? 그래서 내 남편, 내 아내를 내가 잘 알 것 같지만 그건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더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내 자식을 내가 더 모르고 내 사람을 내가 더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벌써 주관화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객관화되지 않는 것은 진실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경험을 갖는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으나 그 경험을 하면서 판단 의식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쪽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자기가 이미 거기에 동화되고 변질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멍청해졌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경험한 일에 대해서는 생각이 둔해지고 판단이 흐려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고집만 남게 됩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 경험해보았는데" 하는 식 말입니다. 경험했으니까 오히려 모른다는 그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 좋은 예로서 아이 낳은 경험이 있다고 모두가 산부인과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이 낳아보지도 못한 사람이 의사가 됩니다. 내가 경험을 했건만 아무 것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경험은 안 했어도 알고는 있는 의사를 찾아가게 됩니다. 이렇듯이 경험하므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이 점차 확대되면서 마지막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고집이 생기고 그 후에는 이 고집이 과장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 치고 줄여서 말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한 번 보았으면 열 번 본 것처럼, 어느 조그만 부분을 접하고도 전부를 만난 듯이 신나게 이끌어 갑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다름 아닌 경험의 우상화 작용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경험에 집착하게 되면 점점 자기 고집만 생기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몹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결국은 닳고닳아서 자기 우상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번 속아본 사람들이 곧잘 하는 말에 "세상 사람들 다 못 믿겠다"는 말이 있지요.

한번 속아보고는 다 못 믿고 믿을 것은 자신뿐이라는 이야기인데, 이게 믿을 만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남자들은 다 나쁘다"고 말하는 여자가 있다면 도대체 몇 명의 남자에게 얼마나 속았길래 이 세상 남자들이 다 나쁘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때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다 그렇더라"고하여 보편화시키려고 하는데 그럴 때면 "언제 통계 내어보았느냐?", 그리고 "몇 사람이나 만나보고 하는 소리냐?"고 묻고 싶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편화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나쁜 것입니다. 우리들의 언어 생활 속에서 "다 그럽니다. 다들 그렇다고 합니다" 하는 말은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그 말은 100퍼센트 거짓말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믿을 말도 안믿게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 누가 와서 "다 그럽니다" 하면 그 말은 믿지 않습니다. 알아보나마나 그 말은 거짓말이니까요. 뿐만 아니라 "누가 뭐라고 합니다" 하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것에 관한 한 고집이 대단합니다. 그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라는 말만 믿습니다. ""라는 표현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어느 누가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과장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조그만 경험을 이렇게도 과장합니다. 한 두 사람에게 속았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 다 못 믿겠다는 것이지요. 몇 사람 좋다고 세상 사람들 다 좋다는 생각, 그런 것을 소아병이라고 합니다. 결코 우리는 이러한 고집에 빠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는 곧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에게 속아 왔으니 예수님의 말씀도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14 이하의 말씀을 보노라면 벙어리 귀신 들린 사내아이의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 올라가시고 계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귀신을 쫓아내겠다고 무척 애를 쓴 모양입니다. 어쩌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썩 나가라 했을 법도 합니다. 그런데 이 귀신이 이러나 저러나 나가주지를 않습니다. 그러자니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핀잔 섞인 말들이 오가며 야단이 났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왜들 이렇게 모여 무엇을 변론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와서 큰 실례를 합니다. "내가 이 귀신들린 내 아들을 데리고 와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귀신 쫓아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들은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선생님이시니 무엇을 좀 하실 수 있거든 고쳐 주십시오"라고 나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크게 책망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사람은 다 못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못 믿었어도 예수님은 믿었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안 믿고, 못 믿었으니까 예수도 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반들 반들 닳고 굳어서 자기만 옳고, 그래서 누구의 말도 듣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복음의 씨가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또 한 가지 길가와 같다는 말은 편견을 뜻합니다. 선입관으로 꽉 차있는 자기 고집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새로운 지식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은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예수님에 대하여 전도할 때에 그는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고 일단은 거부를 합니다. 그러나 "와 보라" 할 때에 그는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이 사람 나다나엘은 선입관을 버릴 줄 아는 그러한 지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결정적인 실수가 바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었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만을 절대화하고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길가와 같다는 말은 또한 무관심을 뜻합니다. 자기 고집에 집착한 나머지 이제 그 외의 일들에는 하나같이 무관심하게 대하고 맙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천국문이 닫힌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문을 두드리며 열어줄 것을 요청하면서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면서 아는 체 해주실 것을 바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게 "나는 너희를 모른다", "나를 떠나가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한 상에서 먹고 마셨으면 무얼하고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으니 어쩌란 말입니까? 이제 와서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성경 66권을 모두 외워도 소용이 없고, 종교적 의식을 다 행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진리와 나와의 관계입니다. 서자서아자아(書自書我自我)라는 말이 있듯이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가 이 말씀을 믿고 그 말씀 안에 살아야지요. 그럴 때에 그 말씀이 내게 주시는 구원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를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무관심에 대하여 관심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결코 무관심에 의한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제 좀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길가와 같다는 것은 습관화를 말합니다. 이는 형식화, 습관화, 요즈음 말하는 문화화된 상태의 신앙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하나의 습관으로 되어 아무런 느낌이나 생각도 없이 그저 들락날락 합니다. 그래서 으레 주일과 수요일 저녁이면 교회를 찾아오는데 별다른 생각은 나지를 않습니다. 마치 자동 기계처럼 왔다 갔다 할뿐입니다. 자동이라는 것은 감정이나 생각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저 왔다 갔다 하면서 길가와 같이 반질 반질 닳아 습관만 남았습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의식과 습관에 매이게 될 때 거기에는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길가와 같은 마음, 그 마음이 되지 않도록 계속 갈고 부수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이 길가와 같은 마음에 씨앗이 뿌려진다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는다"고 하셨습니다. 대단히 위험한 말씀입니다.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갖지 아니하면 불신의 요인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는 아예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보다 더 악해진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더라면 좋았겠는데 듣기는 들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한때 교회를 다녔었다고 하는 사람,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을 많이 배웠다면서도 교회에는 나오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예외 없이 핍박자 제1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전도 한 번 하려면 그렇게도 힘이 듭니다. 자기 나름대로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이러쿵저러쿵 굳은 논리를 고집하며 나옵니다. 정말 골치 아픈 사람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복음은 받아들여 믿을 때에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 듣고도 믿지 아니할 때에는 더욱 악해지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와서 빼앗아간다는 그 점을 우리는 동시에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이러한 결과에서 복음을 왜곡하며 핍박자가 되고 방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이처럼 길가와 같이 굳은 마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는 깨뜨려버려야 합니다. 부수고 깊이 갈아 씨앗이 머물 수 있게 해야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깨뜨리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깨뜨리십니다. 내가 겸손하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겸손 할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시험입니다. 무서운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길가와 같은 그 마음 그대로는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합니다. 다 깨뜨리고 잘게, 곱게 부수어 정리된 옥토와 같은 겸손의 그 자리에서 말씀의 효력은 생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은 버려질 수밖에 없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굳어진 마음 밭이라 할지라도 옥토로 바꿀 수 있는 길이 있고 계속하여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이고 이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보존키 위해 영적 밭갈이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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