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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누가복음 10:30-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하시니라.
오늘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해석상 가장 오해가 많은 성경 본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비유를 마치 인도주의의 교본이나 자선의 교과서처럼 나름대로 풀이해버리고는 하는데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짓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뜻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선 조심할 것은 본문 말씀은 자선을 가르치는 표본이나 인도주의를 말하는 교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복음적인 의도가 계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핵심은 복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본문의 내용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의 주제를 찾기 위하여 25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배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를 보면 예수님을 옹위하고 있는 많은 무리 중에 한 사람이었던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선생님,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는 질문을 합니다. 언뜻 듣기에는 온순한 질문같지만 그 중심은 알고싶어서도 아니며 듣고 따르려는 것도 아닙니다.
시험하려는 못된 마음으로, 이 무식한 갈릴리 촌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한 번 봐주자는 속셈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시키고 가능한 한 율법적으로나 로마법에 의해서 예수를 책잡아 넘어뜨려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이라도 박게할 심사에서 하는 가시 돋힌 질문입니다. 이 율법사의 잘못된 태도가 29절 둘째번 질문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유식함, 자기의 위대함,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기 위하여 질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의를 하다보면 때때로 학생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다 어려운 책 한 권 읽고 와서는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인용해가면서 그 책을 중심으로 질문을 해오는데, 이는 순전히 교수는 골탕 좀 먹이고 자신은 유식하게 나타나보겠다는 속셈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예수님께로부터도 칭찬과 확인을 받고싶은 마음뿐입니다. 본문의 흐름을 보면 무엇인가 단 한 가지라도 배우고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지를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말하게 해서 그대로 행하면 살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도 다시금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는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의 내면에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좋으나 내가 사랑하여야 할 그 이웃은 누구입니까? 적어도 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 나와 상대할 만한 이웃이란 누구입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사람 참으로 어려운 사람입니다.
언젠가 한 번 이스라엘 사람들의 회당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았는데 그 때 마침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길래 말씀의 내용이 우리와 같은가보다 하고 반가워하며 듣고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대지에 가더니 그 이웃이란 개념은 이스라엘만 이웃이라는 개념으로 완전히 뒤집혀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바로의 산파처럼 이스라엘 편을 돕는 자만 이웃이라는 것으로 못박듯이 정의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저는 이 사람들은 2천 년이 되었어도 제 버릇 남주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기 이 율법사와 꼭 같은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내가 돕고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누구요?" 하고 나오는 이 사람! 이 얼마나 건방진 사람입니까? 사실 요즈음도 이러한 사람이 적지 않지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사랑할 대상이 없어서 사랑을 못한답니다. 내 사랑을 받아들일 만한 자격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집도, 장가도 못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이 고상한 인격과 사랑을 알 만한 자격 있는 대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이를 위해 이제 예수님께서는 저가 모르고 있는 그 이웃, 잃어버린 이웃을 찾아주시려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게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할 것은 맨 처음 질문이 "영생"에 대한 질문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웃의 문제로 넘어가면서 생각 할 것은 이웃을 찾을 때에 그 속에서 영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찾으면 영생을 찾게되고 이웃을 잃어버리면 영생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된다는 깊은 뜻을 잘 이해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바로 찾아주고 그를 통하여 영생에 대한 해답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라서 그 내용을 알기 위한 복잡한 설명은 따로이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강도 만난 이 사람의 사건을 놓고 취급한 문제가 있고, 취급하지 않고 그냥 덮어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취급하지 않은 문제의 첫째가 강도 만난 본인에게는 그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보아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 위험한 길을 왜 혼자서, 어쩌자고 갔느냐?"고 책임을 추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두고는 강도 만난 본인에 대해서 한 마디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당한 그 사건을 놓고 왜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 물을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여기까지 왔느냐?고 따져서는 이웃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폐일언하고 강도 만났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원인을 찾겠다고 추궁해 들어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네 죄는 네가 알렸다"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게됩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든 이유를 묻지 말아야합니다. 오늘 이 강도 만난 사건에서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강도 그 자체에 대한 사회 문제를 묻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민의 나라 이스라엘에 이렇게 강도가 날뛰다니 말이나 되느냐? 왜 이런 사회가 되었느냐? 그 대책은 무엇이냐?는 등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의 말이 없습니다. 단지 강도 만났다고 하는 현실, 거의 죽게된 사람, 피를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 생명, 지금 이 사건을 놓고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도 만났다는 사실 외에 왜, 어떻게 된 것인지 알 바가 아닙니다. 사건을 나타난 그대로 객관시하고 있습니다. 너무 추상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동안에 사건 자체를 흐리게 보기 쉽습니다. 참으로 절박한 시간이며 더 이상 말로 물을 필요가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다고 해서 이 내용을 쉽게 인도주의나 단순한 이웃의 개념, 혹은 사회적인 관계성으로 풀이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절박한 생명의 문제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박한 생명의 문제를 앞에 놓고도 보는 이에 따라서는 그 견해가 각각 다름을 보게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비유했습니다.
홍수가 나서 물이 범람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실수를 해서 그만 물에 빠져 떠내려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어떤 사람은 그 떠내려가는 사람을 보면서 "인생무상, 인간은 한 번 났다가 한 번 죽는 것"하면서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부모 말씀을 잘 들을 것이지 어렸을 때부터 부모 말씀을 잘 안 들었었군. 자네는 물에 빠져도 싸다.
그것은 네 잘못이다. 왜 조심하지 않았나?" 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는 "사람의 죄 값은 사망이다. 네가 잘못했으니 네가 죽어야지!" 하고 맙니다. 이제 네 번째 사람이 말하기를 "최선을 다 해보아라. 살 길이 있을지 아느냐? 그러고도 불가능하다면 그저 조용히 죽음을 기다려라. 바동거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사람은 이런 저런 생각, 물어볼 것도 없이 우선 물로 뛰어들어가 사람부터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말이든 훈계든 할 것입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강도 만난 사건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선 건져야하고 살려야하는 생명 위주의 사건입니다. 과거가 어떻고, 죄가 어떠하며, 율법, 도덕이 어떻고, 인생무상을 이야기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내 앞에 놓여진 이 한 생명을 우선 건져놓고 볼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더 이상 말할 것도, 이론을 펼 것도 아닙니다. 행동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 사건을 보게되는 세 사람 중 그냥 지나가 버린 두 사람이 종교적 인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는 제사장, 하나는 레위 사람이라는 데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람들도 지나갈 수 있었겠는데 그들은 다 빼어놓고 제사장과 레위인만 거론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문제의 발언임과 동시에 당시의 종교계를 향한 강한 도전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생각하게되는 것은 이것은 비유라기보다는 하나의 정보요, 이미 알려진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설명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라면 이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 대한 정면적 모독이 됩니다. 따라서 이것은 성직 모독이 되고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는 엄청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 말씀에 도전을 받으면서도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을 보면 분명 이와 같은 사건이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다 알고있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들어 그 전말을 이야기하십니다.
"제사장도 지나갔고 레위 사람도 지나갔다. 그런데 너희들이 제일 멸시하는 저 천한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누가 이웃이냐?"하고 말씀하시게 됩니다. 아무래도 당시의 종교계로부터는 큰 반발을 살수밖에 없는 집중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이 제사장을 한 번 생각해봅니다. 제사장이란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위해 시중 들며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집행하는 성별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제사장은 항상 마음뿐 아니라 몸도 깨끗이 하여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사를 드리기 전 얼마 동안은 모든 사생활을 버리고 자기를 위한 제사를 드리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거룩한 제물을 대신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함부로 더럽혀질 수 없는 이 제사장이 지금 제사 드리러 가는 길인데 여기에 불한당을 만난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거의 죽어갑니다. 하지만 성별된 제사장으로서 이 사람을 만지며 돕다가 피를 묻히면 어떻게 되고, 만일의 경우 만지는 중에 죽기라도 하면 시체를 만지는 것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집니다. 레위기 22 : 4~7에 보면 시체로 부정해진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성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는 해가 질 때까지 부정하다는 종교 의식일 뿐만 아니라 위생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입장의 제사장이 24반차를 따라서 오랜만에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고 피나 시체를 만지게되는 날에는 모처럼의 기회를 잃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중요한 일인 제사 드리는 일을 망치면서까지 이 거의 죽은 시체와 같은 사람을 도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 : 7) 하신 하나님 말씀의 중요함을 모르는 행위입니다. 그는 불쌍한 이 사람을 돕는 것이 하나님께 양을 잡아 드리는 제사보다도 귀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때문에 소와 양을 드리는 형식적인 제사만을 생각하면서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피하여 지나갔다는 것은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보고는 되도록이면 더 보지 않으려는 자세로 지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레위 사람입니다. 레위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속한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제사장과는 달리 성전에 관계된 자질구레한 잡일까지도 맡아하는 성전 봉사자들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로지 성전 봉사만을 하는 전문적인 직업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구제하고 희생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할 일이니 내가 책임질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기에서 비교되는 두 가지 입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제사장 쪽에서는 지금 내가 이러한 사람을 도울 때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다른 시간에 만났더라면 돕겠지만 성전에 제사 드리러 가는 처지에서 부정하게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간 문제를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여기에 비해 레위 사람은 이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그러한 결과 이 두 형태의 사람이 모두 돕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린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제사장은 제사장의 일만 하겠다는 것이고, 레위인은 레위인의 일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종교적 이유를 구실로 오늘 죽어 가는 이 사람을 돕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이 시간 종교적 이유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이 오늘 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깊은 의미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그는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헬라말의 어원을 보면 마음이 뜨겁게 움직이는, 애타는 마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는 순간에 이미 마음이 뜨겁게 움직여져 다른 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사람의 아픔이 나에게도 전달이 됩니다. 그의 고통으로 나의 마음이 아파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감대를 가지고 함께 하고자하는 이것이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좌우를 가릴 것이 없습니다. 그저 뜨거운 마음으로 부둥켜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마음이 불쌍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히 여겨서 가까이 갔다고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는 가까이 갑니다. 그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여서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자리에서 무슨 도덕을 따지고 종교를 거론할 것이 없습니다. 무조건, 애타는 마음에서 아예 본능적으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보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순간의 이 사람은 이로 인해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자신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저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불쌍한 한 생명만을 생각했습니다. 상황을 본다면 그도 불안해하며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본래 위험한 외진 곳이요, 저를 해친 도적들이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나서 나까지 죽이려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죽어 가는 사람 살리려다가 산 사람인 나까지 죽겠다며 빨리 그 곳을 빠져나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만 도와줄 뿐입니다. 그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맨 후 자기가 타고 온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정성을 다해 돌보아줍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부득불 길을 떠나면서 주인에게 부탁하기를 경비가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오는 길에 갚아줄 것이니 잘 돌보아주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과 정성으로 보아 계속 거기 머무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대단히 바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할 일을 다하고 자기가 못 다한 일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계속 도와줄 것을 부탁하며 그는 갑니다. 다시 말하면 도울 수 있는 만큼, 필요한 만큼, 완전히 살아남을 만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책임지고 도왔습니다. 한 번 돌아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돌아보게 해서 그 일에 책임을 집니다.
이제 결론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묻기를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이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하고 대답하게 됩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론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도 만난 사람을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이는 흔히들 일반적으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이 이웃을 돕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인데, 오늘 본문은 그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하는 강조점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 모로 생각컨대 이 강도 만난 사람은 유대 사람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통한 교통은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되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지금 이 유대 사람이 감기쯤 걸렸다고 상상을 해봅시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 와서 무엇인가 돕겠다고 했다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보나마나 겉으로가 아니면 속으로라도 "에이, 부정하다" 하며 핀잔을 주어 쫓아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꼼짝 못하고 죽을 지경이 되었으니 이 사랑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극한의 고통이 상대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하고 그 강한 민족 의식, 자기 우월의 벽을 깨트리게 하여 사마리아 사람의 진실된 사랑을 받아들이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이웃이 됩니다. 이제 강도 만난 자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이웃이 됩니다. 그러므로 강조하여 말씀드리는 것은 단순한 마음으로 돕고,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으로 맞아들이게 되면 거기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으며 영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과거가 어떻고 현재가 어떻고 하는 것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서 서로 돕고 사랑하는 거기에 이웃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우월의 벽을 깨뜨리기 전에는 이 사마리아 사람의 진정한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보면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받아들일 줄 몰라서 문제되는 것이 많습니다. 얼마나 잘났고 까다로운지 그 우월감 때문에 이웃이 없습니다. 나를 돕는 그의 마음을 깨끗하게 받아줄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이제 본문 27절에 기록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의 뜻을 알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는 신학적인 중요한 문제가 담겨져 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와 질문하는 것은 예수님을 잘 모르고 하는 짓이 아닙니다. 병 고치심, 불쌍한 사람을 돌보심, 기적 말씀의 권위 등 듣고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까다롭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메시아인가, 아닌가? 죄인의 친구로 많은 사람의 비난을 받는 사람, 갈릴리의 무식한 사람, 저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등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다. 강도 만난 것과 같은 너희들을 내가 돕고있는데 무엇이 그렇게도 가릴 것이 많으냐?는 말씀입니다. 곧 내가 너희의 이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요, 복음의 핵심입니다. 도대체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언제까지 까다롭게 시시비비하겠다는 것입니까? 어느 정도가 되어야 깨끗한 마음으로 받습니까? 기어이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되어야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제야 이웃을 맞이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으로 맞이한 그 때에야 영생을 알게됩니다. 이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비난받고 멸시받는 사마리아 사람으로 동일시되시면서, 또한 강도 만난 자를 돕는 주인공임을 친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래도 내가 너희의 이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이웃으로 영접할 때에 비로소 영생을 얻게됩니다. 따라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러면 영생을 소유하게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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