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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실패의 원인(야고보서 4:1-3)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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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원인(야고보서 4:1-3)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오늘은 실패의 원인에 대하여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을 함께 상고하고자 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나느뇨?" 오늘의 본문말씀은 이와같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싸움'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된 원문에서는 '폴레모스'인데, 이는 예사 싸움이 아니라 '전쟁(war)'을 뜻합니다. 곧 싸움입니다. 그리고 '다툼'이라고 하는 말은 '마캐', '분쟁(fight)'을 뜻합니다. '폴레모스'는 집단적인 싸움, '마캐'는 개인적인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이 1절 말씀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까?"

집단적인 싸움이건 개인적인 싸움이건 세상에 싸움이 있는 것은 엄연합니다. 칼 마르크스가 인생을 생존경쟁으로, 적자생존(適者生存)으로 파악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실 우리도 싸움을 숱하게 보며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먹기 위해 싸웁니다. 더 가지려고 싸웁니다.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웁니다. 명예를 얻고자 싸우고 지키려고 싸웁니다. 소위 '기분' 때문에 싸우기도 합니다. 아무튼 큰 '전생'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계급간의 싸움입니다. 인간사(人間事)에 얼만 많은 계급이 있습니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싸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날만 새면 갈등이요 분쟁입니다. 이를테면 노사분쟁(勞使分爭)이 계급간의 싸움입니다. 야고보는 이미 21절로 9절에 걸쳐서 이 계급간의 분쟁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고, 뒤에 나오는 5장에서는 1절로 절에서 분명하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사이에 일어나는 다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119절로 20절에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에 대하여 말씀한 바 있습니다. 411절로 12절의 말씀에서는 개인적인 싸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싸움은 있습니다. 집단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外的)인 싸움이 있고 내적(內的)인 싸움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내부에도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인도 철인이 말한 바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검은 개와 흰 개가 있어서 이 두 마리 개가 끊임없이 싸운다.

검은 개가이기면 육신이 좋아하고 흰 개가이기면 영혼이 좋아한다." 여러분은 오늘도 이런 내적인 싸움을 하다가 나오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속의 흰 개와 검은 개가 싸웠는데, 흰 개가 이겨서 이 자리에 나오셨을 것입니다. '길도 미끄럽고 날씨도 추운데 그만 집안에 편안히 앉아 TV나 볼까?'-이런 검은 개를 흰 개가 이겨낸 것 같습니다. 우리의 내부에는 언제나 이 같은 싸움이 벌어집니다. 심지어는 식사를 할 때에도 내 안에서 알게 모르게 숨가쁜 싸움이 벌어집니다. 입맛이 없다고 '먹을까 말까' 합니다. 맛이 있다고 '실컷 먹어버릴까, 참고 적당히 먹어둘까' 합니다. 대중없이 먹어대어 속탈이 나는 사람이나, 먹기 싫다고 안 먹어서 비실거리는 사람이나, 미련스럽기는 일반입니다. 마음속의 검은 개가 흰 개를 싸워 이긴 결과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오늘의 본문에서 저러한 모든 싸움에 대하여 "어디로 좇아나느뇨?" 하고 그 원인을 추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로 결론짓습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싸움과 다툼의 원인은 '욕심'에 있는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하루는 산책을 하는데, 귀엽게 생긴 두 어린아이가 길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는 형제간이었습니다. 대통령은 손에 쥐고 있는 호두 세 개를 그 아이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두 아이가 티격태격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형이니 내가 두 개를 가지고 너는 하나만 가져." "싫어, 너는 형이니까 네가 한 개만 가져." 서로들 더 가지려고 다툽니다. 그 때, 대통령의 보좌관 하나가 대통령을 찾아 나섰다가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각하, 저 아이들이 왜 싸우고 있습니까?" 보좌관이 링컨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링컨이 대답합니다. "저 아이들은 지금 국제 문제로 싸우고 있는 거요." 그렇습니다. 아이들 싸움이나 어른 싸움이나 마찬가집니다. 요즘 정치한다는 사람들 보면 이 아이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명색만 거창하게 치장하여 내세울 따름이지 그실()을 보면 다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더 가지려고 싸웁니다. 더 먹으려고 아옹다옹합니다. 나를 더 내세우려고 티격태격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12:15)." 형제간에 유산 문제로 싸우다가 예수님께 와서 재판해 달라고 청하므로 하신 말씀입니다. 딴 말씀 길게 하시지 않고 그렇게 간단히 이르셨습니다. 마음속에 욕심이 있는 한,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리지 않고는 해결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몇년 전에 소위'해방신학'에 대해서 공부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면의 책을 읽어 나가다보니 깜짝 놀랄 대목이 있었습니다. 흑백 인종문제에 대한 언급인데, 참으로 기막힌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흑인을 특별히 대하여야 한다는 결론이요, 그 이유인즉 흑인은 오래도록 눌려 살아왔으므로 인권이란 아예 잃고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알고 흑인은 특별히 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만 평등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다보니 미상불 일리가 없지는 않다 싶었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대한다-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정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평등히 대하기도 어렵고 특별히 대하기도 어렵습니다. 해결의 길은 결국 누구라 없이 욕심을 버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는 데서부터 해결의 실마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욕심을 그대로 두고는 무슨 수를 써도 안됩니다. 욕심을 그대로 안고서는 평등히 대한다 해도 평등을 느낄 사람이 없습니다. 말로는 평등이어도 느낌은 평등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이 겨울에 옷을 덥게 입은 사람이 있고 춥게 입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체감온도(體感溫度)라는 것이 있어서, 이를테면 저는 내의를 입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름의 체감온도에 따라 사람은 저마다 추위 타는 정도가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산들바람만 불어도 추위를 타지만 어떤 사람은 엔간히 추워서는 좀처럼 추위를 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평하게 느끼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심이 공의로우신 데 받는 사람들은 공의롭게 받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은혜를 받아서 다같이 욕심을 버리는 때에야 추위도 감사하고 더위도 감사하고 가난해도 감사하고 부유해도 감사합니다.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감사를 모르고 살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은 가난한 때보다도 부유한 때에 불평이 더 많습니다. 자동차 없어서 불평하는 이는 드물어도 자동차 있으면서 더 좋은 차를 욕심 내어 불만에 차 있는 사람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가끔 듣는 소리가 있어요. "어휴, 고물자동차라도 한 대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고물자동차 생기면 그보다 더 좋은 차를 탐내게 됩니다.

해결은 욕심을 버리는 데에 있습니다. 환경을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물리적 평등, 사회적 평등 가지고는 해결이 안됩니다. 생각하기에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더 불평이 많을 것 같은데, 사실은 부잣집 아이들이 더 불평에 차 있습니다. 아이들도 아이들 나름이긴 합니다마는 일반적으로 보아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 학비 못 내서 애쓰고 있지만 그래도 부모님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부잣집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것을 흔히 봅니다. "아버지가 쓰는 돈에 비하면 내가 쓰는 돈은 아무 것도 아니야. 엄마가 하루 외출하는 데 쓰는 돈이 얼마나 엄청난데……" 아이들이 이런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백 원짜리, 천 원짜리 정도로는 성애 차지 않아요. 말이 안되지요. 욕심이란 이렇게 끝이 없고 바닥이 없습니다. 욕심을 그대로 품고 있는 한에는 아무런 해결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싸움은 끝날 날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렇습니다.

이제 분석을 해보십시다. 싸움은 정욕으로 좇아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정욕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물질입니까? 절대빈곤에서 비롯되었다면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모든 범죄가 다 배가 고파서만 저질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조각의 빵이 없어 도둑질을 했다"---이런 소리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에서나 들어보았지, 실제로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 가지고자 하는 욕심, 그 욕심을 끝간데 없이 채우고자 하는 억지, 이런 것이 범죄의 원인이요 비리(非理)와 부정(不正)의 원인인 것입니다. 정욕은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은 일찍 깨달을수록 좋습니다. 정욕-시기, 질투, 탐욕입니다. 가도가도 한량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미련한 것이 질투입니다. 질투로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재만 남습니다. 내 마음 상하고 남 괴롭힙니다.

심신이 다 상처를 입고 마는, 백해무익한 것이 질투입니다. 시기와 질투와 욕심은 끝없이 에스컬레이트되어 필경에는 살인에까지 이릅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죽는 것입니다. 이미 115절에서 배운 바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 잉태하거든 벼랑에 이르러 잽싸게 말고삐를 잡아채듯 그 선에서 결단코 멈출 것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입니다. 영양상태도 좋지 않은 때라 밤늦게 공부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던지요. 그런 시간이 오면 큰 소리로 외는 성경이 있습니다.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12:12)"-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에 피곤하게 합니다. 공부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애쓰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지런을 떨어봐도 별것 아니요, 잘살아봐도 별것 아니요, 다 벌어보아도 별것 아닙니다. 이것을 한시바삐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자기부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하셨습니다. 참된 해결의 길은 기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신령한 세계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먼 미래를 직시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해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무슨 일을 하다 실패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흔히 자본이 어떻다, 정책이 어떻다, 무엇이 어떻다 하고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거나, 아니면 그 원인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서 내가 마련했다느니 게을렀다느니 아이디어가 부족했다느니 하고 자책을 하거나 합니다. 이와 같이 나름대로 평가를 해봅니다마는, 그 원인을 제대로 집어내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결혼이건 사업이건, 무릇 실패의 원인은 기도하지 않은 데에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웅변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2)"-공하지 못한 것은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를 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깨닫지 못했으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고백을 바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했어요.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안되던데요'라고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3)"-기도를 하기는 했으나 잘못 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잘못 하는 기도와 잘 하는 기도-성경에는 기도에 대한 교훈이 많으므로 한 두 마디로 어떻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런대로 요약해서 대조해볼까 합니다.

첫째, 잘하는 기도는 하나님 중심의 기도입니다. 목적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잘 하는 기도입니다. 잘못 하는 기도는 자기중심의 기도입니다. 언제나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위주로 기도합니다.

둘째, 잘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오늘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부터 묻는 기도---이것이 잘 하는 기도입니다. 잘못하는 기도는 내 뜻만 고집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경도 제쳐놓고 설교도 듣지 않아요.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없이 내 소리만 하는 것입니다.

"좌우간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이런 식입니다. 그래놓고 어찌어찌 해서 일이 잘되면 시건방을 떱니다. "거봐라! 내 기도에는 하나님도 꼼짝 못하신 단 말이다." 엄청나게 잘못된 기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셋째, 내 뜻을 주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기도가 잘 하는 기도입니다.

'저는 이렇게 하고 싶지만, 하나님의 뜻이 그렇지 않으시다면 제 생각을 바꾸도록 해주십시오'-잘 하는 기도입니다. 잘못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은 묻지 않고 내 뜻만 고집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성경에 뭐라고 말씀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내 뜻과 내 소원만 내놓고 억지를 부립니다. 여러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2:42)"-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일치시키는 기도입니다. 십자가가 이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밤새 기도하시고 그 응답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기도의 자세로 볼 때에는 십자가는 응답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되어서 진 것이며 실수한 것이지 응답이 아닌 것입니다. 잘못된 기도의 자세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넷째, 잘 하는 기도는 기도하는 중에 자기를 계속 변화시킵니다. 끊임없이 transforming합니다. 내 안에 쉼 없이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 기도를 계속해나가는 가운데 내 뜻이 움직입니다. 얻으려고 했던 마음이 기도하는 가운데 주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미워하던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해갑니다. 잘못된 사람을 바로잡아 주십사고 기도하다가, 문제는 내게 있으니 나를 변화시켜 주십사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잘 하는 기도입니다. 잘못된 기도는 내가 달라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조금 실수한 것 말고는 내 잘못이 없다며 부동자세를 취합니다.

'남편이, 아내가, 다른 사람이, 세상이 변화해야 한다, 나는 잘못이 없으니까.' 이런 자세로 하는 기도는 잘못된 기도입니다.

다섯째, 잘된 기도는 영적(靈的)인 대화입니다. 신령한 가운데서 하나님과 대화합니다. 나도 아뢰고 하나님의 말씀도 듣습니다. 그래서 듣는 시간과 말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간혹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시간도 드리지 않은 채 열심히 말해놓고 달아나는 사람도 있어요. 이래서는 안됩니다. 삼십 분 기도하면 삼십 분 성경보고, 한 시간 기도하면 한 시간 성경보고, 똑같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항상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놓고 기도하십시오.

잘못된 기도는 일종의 독백이요, 푸념입니다. 자기소원, 자기불만, 자기욕심…… 모든 것을 있는 대로 토하듯 쏟아놓고 '아멘'하고 가버리는 기도, 이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여섯째, 잘 하는 기도는 항상 응답을 듣습니다. 기도하면서 응답을 듣습니다. 시간시간 응답을 듣고, 또 생활 속에서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사랑하셔서, 넘치게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그래서 달라고 기도하다가도 마지막에는 감사와 찬송으로 끝나게 됩니다. 잘못된 기도에는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으로 끝나고 맙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뮐러는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오만 번이나 응답을 받았다. 그때마다 나는 회개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그때마다 넘치게 주셨습니다. 받은 다음에 생각해보니 달라고 한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받을 때마다 회개했다 하니 얼마나 은혜로운 기도생활을 한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잘못된 기도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3)"-기도가 정욕에서 비롯되면 응답이 없다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욕심을 다 제거해야만 밝은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분한 마음, 억울한 마음, 미워하는 마음, 시기, 질투를 그대로 품고는 어떤 기도도 되지 않습니다. 기도가 막히게 됩니다. 정욕에 매여 있으면 바른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기도의 문을 열어주소서'-정말 속이 시원할 정도로 회개자복(悔改自服)을 하고 나면 정욕이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연후에야 밝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정욕'이 무엇입니까? 첫째, 육체적이요 세속적인 욕망을 말합니다. 둘째, 자기만 생각하는 마음이 정욕입니다. 나의 유익, 나의 평안, 나의 안일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는 기도가 안됩니다. 셋째, 정욕이란 현재적인 것입니다. 현재만 생각하지 십 년 후, 이십 년 후, 그리고 내가 세상을 떠난 다음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재만 생각하는 마음, 이것이 정욕입니다. 이러한 정욕이 쌓여 있는 동안에는 바른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도를 할 때에는 궁극적 목적을 말해야 합니다. '돈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에는 그 돈을 어디에 쓰겠다고 밝히십시오. '건강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에는 건강한 몸으로 무슨 일을 하겠다고 밝히십시오. 여러분, 자식이 돈 달란다고 아무 말 없이 널름 내주는 부모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알아본 다음에야 내줍니다. 그 계획이 옳을 때에 줍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에 덮어주고 '주십시오' 하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십시오. 청사진을 내놓으십시오. 계획표를 하나님 앞에 내보이십시오.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서원기도(誓願祈禱)'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약속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저는 돈을 벌면 하나님께 바치고, 건강하면 주님의 일만 하겠다고 약속드리는데도 돈을 못 버네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약속하는데도 기도를 안 들어주시네요" -이 말에 대해서만은 외람 되지만 제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대답하겠습니다. "당신은 그 동안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는 말은 곧이듣지를 않으시는 겁니다. 당신의 맹세를 모두 부도수표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바락바락 악을 쓰면서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신용을 많이 얻은 사람은 구구하게 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는 이미 응답이 오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느낍니다. 제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기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좋아하실 것 같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사람의 울부짖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용을 얻고,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지고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보는…… 그런 가운데 있는 사람이 무엇이 답답해서 악을 쓰듯 소리지르며 기도하겠습니까? 무슨 긴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서원기도도 중요하지만, 그 서원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래야만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안팎으로 싸움이 있고 번민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원인을 분명히 알고 나서 바른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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