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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과 승리(야고보서 1 : 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의 저자인 야고보는 우리가 아는 대로, 또 전승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대로 분명 주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제 1 대 감독으로 30년 동안 역사하고 순교한 바로 그 야고보로 믿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초대교회 벽두에 30년 동안을 교회의 최고지도자로 역사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가 의장의 역할을 맡아보고 있습니다. 결의안도 마지막에는 야고보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역시 초대교회에서 권위의 중심인물이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는 30년간 목회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했을 줄로 압니다. 또한 분명한 것은 앞에 있는 교인만을 목회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또하나의 선교학적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 우리 소망교회의 교인이 한 3만여 명이 됩니다만, 그 3만여 명만이 우리의 목회 대상은 아닙니다. 앞으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들 모두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을 앞에 하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만을 대상으로 하여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이 설교는 이대로 녹음이 되어서 방송으로 나갑니다. 방송 듣는 사람이 또 많습니다. 또 카세트 테이프로 제작되어 온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여기서도 무려 수천 개가 나가도 있지만, 요즘은 복사기가 있어서 미국에만도 동부에서도 3천여 개, 서부에서도 3천여 개가 서점에서 팔린다고 합니다. 게다가 교인들도 복사해서 믿지 않는 이웃에게까지 나누어 듣게 한다고 하면 이 한 번의 설교를 수십만 명이 함께 듣는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지난번에 뉴욕에 가서 '할렐루야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11년 동안 그 집회를 계속해오면서도 금년만큼 교인이 많이 모인 적이 없었다고 하면서 그 원인이 뭘까 하고 모여서 의논을 합니다마는 해답은 간단합니다. 카세트들은 사람들이 제 얼굴 보러 온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런 사람들이 제일 많습디다. 그저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가 따로 없습니다.
"테이프로 은혜 받았습니다" "테이프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제가 목사님을 뵈려고 열 시간이나 차를 운전해서 달려왔습니다"-이렇습니다. 우리는 결코 눈앞에 있는 몇 사람만을 우리의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중국이나 소련, 또 북녘 땅에 있어 복음을 쉽게 접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 함께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를 맡고 있었습니다만, 예루살렘교회만을 목표로 목회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30년 동안 목회를 하다가 끝내 순교까지 하였지만, 그가 목회하고자 한 대상은 보다 더 넓은 데 있었습니다. 온 세계가 그의 mission field였습니다. 그의 선교지, 교구는 온 세계였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꼭 열두 지파의 유대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그 열두 지파의 사람들을 선교사로 보고 있습니다.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존재하는가, 각 나라에 흩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세계 각국에 많이들 나가 살고 있습니다. 안나가 있는 데가 거의 없습니다.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사람이 가는 곳에는 음식점이 생기고, 일본사람이 가는 곳에는 상점이 생기고, 한국 사람이 가는 곳에는 교회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몇 사람만 모이면 교회를 세웁니다. 여기에는 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온 세계에 선교적 사명을 띠고 나가 있는 열두 지파의 선택된 백성들에게 편지하노라'-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의 독특한 선교학적 통찰력을 볼 수 있습니다. 온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한다는 그의 깊은 선교적 열의와 목회 철학을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매우 중요한 공동서신입니다. 모든 사람, 모든 교회가 읽기를 바라서 보내는 편지이고 보니 야고보가 얼마나 깊이 생각했겠습니까?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중요합니다. 물론 계시의 역사로 영감을 받아서 이 귀중한 편지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첫인사를 마치자 곧 첫 주제로 '시험'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으면서 처음 당하는 것이 시험이요 마지막으로 당하는 것도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시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만 믿으면 모든 일이 잘되고 만사 형통하고 운수 대통하리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먼저 내가 당하는 모든 사건 속에서 시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로부터 그리스도인이요, 바른 신앙으로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시험은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돈 달라면 돈주시고, 건강 달라면 건강 주시고, 지혜 달라면 지혜 주시는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래서는 안됩니다. 정욕적인 인간은 그저 평안하기만을 바랍니다만, 평안해서는 안됩니다. 시험이 없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시험이 없으면 안됩니다.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대한 바른 신앙적 이해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시험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둘째, 그의 목회 경험에서 나온 의도인 줄로 압니다. 30년 동안 목회하면서 보아하니 가장 큰 문제가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개인도 시험을 당하고 교회도 시험을 당합니다. 이를테면 교회가 때로 큰 일을 하려고 하면 꼭 시험을 당합니다. 예배당을 짓는다거나 큰 선교사업을 펼치려고 한다든가 하면 꼭꼭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부흥회를 크게 해서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하면 또 시험을 당합니다. 이런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개인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첫 번째로 '시험'을 거론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의 '여러 가지 시험'은 '많은 시험' 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시험의 분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의 다양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겹치고 겹치는 많은 시험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시험입니다. 돈에 대한 시험, 이성에 대한 시험, 명예에 대한 시험, 자존심에 대한 시험, 병에 대한 시험--이런 다양한 시험을 고루고루 다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시험을 만나면서 살아갑니다. 나는 시험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좋아질수록 시험이 없을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물며 예수님께서도 시험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하면 시험 당하지 않을 줄로 압니다만,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금식 기도하시고는 시험 당하셨습니다. 고작 몇 시간 기도하고 시험 없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중에도 시험이 있고 기도 끝에도 시험이 있습니다. 잘 믿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시험을 당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신앙이 시원치 않은 사람은 시험을 당해도 시시한 시험을 당하고, 신앙이 높고 큰 사람은 큼직한 시험을 당합니다. 나에게 닥친 시험이 너절하고 시시하거든 '마귀도 나를 하찮게 보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며, 시험이 크거든 '마귀도 역시 나를 알아보는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40일이나 금식기도 하시고도 마귀에게 시험 당하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해둘 것입니다.
또한 성령을 충분히 받으면 시험이 없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열심히들 합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1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성령 받으면 시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시험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시험, 저 사람에게는 저런 시험이 다가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몇 시간 뒤에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우선 여러 가지 시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간혹 우리는 다른 사람이 시험 당하는 것을 보면서 전적으로 남의 일인 것처럼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를테면 "저 사람 돈 때문에 시험 당하고 있구만"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고 있는 순간이야말로 나 자신이 이미 교만 때문에 시험 당하고 있는 순간인 것입니다. 내가 지금 건방져서 시험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시험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저런 시험을 당하고 나는 이런 시험을 당합니다. 오늘은 이런 시험을 당하고 내일은 저런 시험을 당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끊임없이 시험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이라고 가정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쉽게들 '마일에 시험을 당하게 되면' 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만, 좀더 원문 그대로 직역을 하자면 '시험을 당할 때마다' 곧 'whenever' 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마다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번 '시험'이라는 것에 대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시험'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시험'이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만, 헬라원문에서는 '페이라스모스'입니다.
이 '페이라스모스' 라는 말이 본디 '페이라조' '페이라제인' 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그 원의 의미가 '던져본다'입니다. 영어로는 'testing' 'trial'입니다. '한번 건드려본다' 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건드려 본다' 라는 의미입니다. '걸고 넘어뜨린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굳이 영어로 하자면 'temptation'이 아닌 'testing' 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엄격히 구별하여 번역하면 '시험' 이라기보다는 '시련' 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에게 와서 지혜를 시험합니다. 말을 걸어서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남을 유혹해서 죄를 짓 게 만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이 시험으로 말미암아 솔로몬의 지혜가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네 아들 이삭을 바쳐라"-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의 시련입니다. 마침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복을 내리십니다. 이러한 경우의 시험은 좋은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시험이라고 하기보다는 시련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의 시험을 시련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험과 시련을 둘로 나누어서 비교해보겠습니다. 시련은 주로 외적인 것으로 오고 시험은 내적인 것으로 옵니다. 시련의 목적은 선합니다. 결과도 선합니다. 그런데 시험은 유혹해서 타락시키려고 합니다. 목적이 나쁩니다. 또한 시련은 그것으로 인하여 믿음을 성장케 하는가 하면 시험은 상대방을 유혹하여 범죄케 합니다. 시련은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인 반면 시험은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을 당하면 끝까지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만, 시험은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시험을 참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거부하고 그로부터 도망가야 합니다. 시험을 견디어보겠다고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면 이제 정리해보십시다. 우리는 시험을 시련으로 생각하고 시련을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축복을 다시 사명으로 확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지닐 생활철학입니다. 갖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믿음으로 보면 시련입니다. 시련은 우리를 더욱 복되게, 강하게 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시련은 저주가 아닌 복입니다. 나아가 모든 축복은 나만 잘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축복에는 사명이 주어져 있음을 깊이 명심할 것입니다.
시험을 당하거든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기뻐해야 할 이유는 간단합니다. 첫째로, 원인이 하나님께로서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나더러 죽으로는 것이 아니요, 나를 괴롭히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범죄케 하려 하심이 아닌 것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이삭을 내게 바치라"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과연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손해보게 하자고 그러셨겠습니까? "고향을 떠나라" 하심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을 고생시키자고 그러셨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고생을 하기는 좀 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무릇 시련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 약한 점이 무엇이며 강한 점은 무엇인지, 내 형편을 다 아시고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실 때에는 우리에게 감당할 힘도 주시고 피할 길도 주신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주시는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큰 것 같지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무릇 시험을 감당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힘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시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시련의 마지막을, 최종결과를 믿기 때문에 시련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잘 참고 견디기만 하면 반드시 나에게는 복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으로 바뀔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험을 긍정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이해하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더욱 멀리 바라보고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말하자면 종말론적으로 생각하면서 우리는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기쁘게 여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본문을 잘 보십시다.
본문 3절에 "너희가 앎이라"아른 말씀이 나옵니다. 알아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알고서야 비로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아는 고로 기뻐합니다. 믿음으로 알게 되고 알므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이 아니라 시련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왔기에 믿고, 믿음으로 알고, 알기 때문에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 (28절)." 또한 사도 바울은 5장 1절로 4절에서 환난 중에도 기뻐해야 할 이유를 누누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까? 본문에 "믿음의 시련"이라는 요절이 있습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든 시험의 초점은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 중요하고 건강이 중요하고 명예가 중요하고 지위가 중요합니다. 어떤 때에는 기분이 중요하고 자존심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에 가서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믿음뿐이라는 것, 이것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의도 중요하고 선행도 중요합니다만, 그것은 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의롭다 함을 받고 죄사함을 받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사랑을 알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있어야 천국 가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믿음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이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귀한 보화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서 덜 중요한 것을 가져가시고 더 중요한 것을 주시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건강과 돈을 놓고 보십시다. 돈이 아무리 귀해도 건강만은 못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돈을 가져가시고 건강을 주시겠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안 된다고, 싫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미련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총을 겨누며 돈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놀라서 두 손을 번쩍 듭니다. 수중에 많은 돈이 있습니다. 강도가 몽땅 내놓으라고 을러댑니다. 그러자 강도 만난 이 사람, 하는 짓이 같잖습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돈을 모두 보자기에 싸서 허리에 두릅니다. 눈을 감더니 강도보고 말합니다. "자, 쏘시오." 돈을 내놓을 바에야 차라리 가지고 죽겠다는 배짱(?)입니다. 다 내주고라도 보전해야 하는 것이 목숨이 아닙니까? 참 미련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미련한 사람이 이 사람만 이겠습니까?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무엇에 더 중점을 두느냐 하는 가치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는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게 하시고 믿음을 순수하게 하시고 믿음을 강하게 하시고 믿음을 고상하게 하시고 우리로 모든 것을 믿음으로 알고 보고 생각하고 행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불사하십니다. 너는 믿음을 갖기 위해 당분간 병원 신세 좀 져야 되겠다, 너는 믿음을 좀더 순수하게 하기 위해 사업이 망해야 되겠다-몸이 병들었다느니 사업이 망했다느니 하며 야단법석입니다 마는 하나님께서는 싸구려를 가져가시고 귀하고 값진 것을 주십니다. 모든 시련의 초점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련' 이라 하였습니다. 믿음의 시련, 이것이 시험입니다. 시험 든다고 하는 것은 바로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힘있게 하고 지혜롭게 하고 연단시키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본디 금속을 연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쇠는 많이 때려야 됩니다. 그래야 질기고 강해집니다. 매맞은 쇠가 질기고 강한 것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마는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한때 '윌리엄스 포지(Williams Forge)'라고 하는 공장에서 일을 해보았습니다. 돈 좀 벌어보려고 여름방학 동안 그 뜨거운 곳에서 일을 하였는데, 그곳에 무게가 40 톤이나 되는 해머가 있었습니다. 이해가 가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나, 망치 하나의 무게가 40톤인 것입니다. 그 큰 쇳덩이가 증기의 힘으로 칙하고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꽝하고 떨어져서 아래에 놓인 쇠를 때립니다. 물에 넣었다가 꺼내서 또 때리고 하여 강철을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때리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쇠가 쇠를 자르고 깎는 쇠입니다. 쇠를 강하게 만들어서 그 쇠로 쇠를 자르는 것입니다. 쇠를 마음대로 자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토록 많은 매를 맞는 것입니다. 해머에 한번 맞으면 금이 생깁니다. 금이 생기면 그 부분을 갈아서 없애고 그 위를 잉크를 뿌리고 또 갈아서 깨끗하게 되면 물에 담갔다가 또 쇠망치로 때리는 것입니다. 제가 바로 금을 가는 그 일을 했습니다. 이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강한 쇠를 만드는 것입니다. 쇠망치로 때리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차타고 30분 거리 안에는 집도 짓지 못합니다.
이제 생각해보십시다. 믿음이 어떻게 꿋꿋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시험을 많이 당해야 합니다.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시험을 당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죽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 신앙은 연단이 되지 않아 쓸모 없게 된 쇠붙이와도 같이 볼 것 없는 신앙입니다. 시련이 필요합니다. 본문에서는 믿음이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썩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인내라는 말은 헬라어로 '휴퍼모네'라고 하는데, 맨밑에 있다는 뜻입니다. 밑에서 견딘다는 뜻으로 원문대로 하면 억지로 참는다는 소극적인 태도라기보다 어려움을 환영한다, 시련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넉넉한 기쁨으로 수용한다는 적극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이 그 정도의 인내로까지 도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맞고 또 맞고 해서 강하게 연단 되면 시련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반기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점점 더 빛나게 되고 인격이 높아집니다. 소문도 나게 되고 종국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본인도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신앙적인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람, 웃음의 사람, 긍휼의 사람, 능력의 사람, 권세의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인내를 생산하기 때문에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좀 멀리 내다보며 사십시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기뻐하여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 학생들 가운데서 재수, 삼수한 학생들이 있습니다. 삼수해서 합격을 하고 나서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당시는 무척 괴로웠는데, 지내고 보니 3년이 잠깐 지나갔습니다"-합격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겠습니다만,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낙방한 학생이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슬퍼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릅니다. 직접 겪은 사람만이 알고 있습니다.
본문은 다시 말씀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인내를 끝까지 완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왕 인내를 할 마음을 먹었으면 능동적으로 참아 견디어 끝장을 보라는 것입니다. 도중에 울고불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이루게 되면 두 가지를 얻게 됩니다. 온전해집니다. 온전해진다-헬라어로 '텔레이오스'라는 이 말은 영어로는 'perfect'입니다. 주어진 목적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가졌던 그 목적 그 목표에 도달하게 됩니다. 또한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구비하다'-영어로 'complete' 인 이 말은 헬라어로 '호로크레로스'인데 부분 부분이 모두 완전해진다는 뜻입니다. 기능이 완전해진다는 말입니다. 비유하여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에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점에서 흠이 없이 완전하여야 합니다. 모든 지체가 완전하여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게 한다는 것도 군사적 용어입니다. 곧 완전 무장한 군인, 잘 훈련된 군인과 같아서 겁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인격을 말합니다.
이제는 칭찬을 받아도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원수 같은 사람을 만나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힘든 일도 주저하지 않고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넉넉히 이기는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주위를 가만히 보아도 사실이 그렇습니다. 가난하여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좀더 가난해지는 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남대문시장에서 고생 고생하여 어느 정도 사업을 일구어놓기는 하였지만,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 형편이 어려워지기도 하는 모양이었지만, 가끔 만나서 사업이 어떠냐고, 불경기라는데 괜찮으냐고 인사를 하면 그때마다 걱정 없다고 대답합니다. 남대문시장에서만 30년인데 맨손으로 어디를 간들 밥 못 먹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분이 참 좋아 보입디다. 보는 저의 마음이 참 편안합니다. 어떤 사람은 약간만 불경기가 되어도 망했다느니 큰일이라느니 하며 밤낮없이 걱정인데 그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대문 바닥에서 30년 살았다는 것입니다. 갖은 풍파를 다 겪었기 때문입니다.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넉넉합니다. 그까짓 정도로는 문제도 안됩니다. 이러한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시험을 통하여 주시는 축복입니다. 시험이 없이는 이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두 가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시련을 긍정적으로 신앙적으로 받아 들이라, 그리하면 너의 인격은 고상한 인격,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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