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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지속성〈고린도전서 13장 8~10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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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지속성고린도전서 13810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한번은 내일 아침에 결혼식을 하기로 되어 있는 신부가 저녁에 찾아오더니 퍽 심각한 질문을 합니다.

"내일 결혼을 할까요 말까요?" 이미 약혼을 하고도 꽤 시간이 흘렀고 지금은 결혼식을 위해 양가에서 준비를 다 하고 있는 처지인데 주례자를 찾아와 결혼을 할까 말까 묻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이 아가씨 보십시오.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하고 심각해지더니 "내 일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간이므로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 건지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나도 못 믿겠습니다. 내가 나를 못 믿는데 누구를 믿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결혼에 일생을 걸어야 한다니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부득이 저는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 할 형편에 놓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람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사람이 너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더냐? 그리고 여자인 너의 입장에서 그사람의 이야기 내용이 거친 것이기는 하지만 관심이 가고 재미있게 들려지더냐? 늘 보는 얼굴이지만 보고 싶고 또 보고 싶더냐?" 그러하거든 결혼을 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복잡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들어도, 들어도 또 듣고 싶고, 보아도, 보아도 또 보고 싶으며, 이미 준 바가 많고 지금도 주고 있지마는 더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그런 마음으로 차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주는 것이 아깝고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듣기 싫어"하고 나온다면 이는 아주 멀어진 것이요 게다가 "보기 싫어"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사랑의 정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랑하기에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이 다 좋게만 들리고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게도 의견이 있고 고집이 있기는 하나 일단 마주앉아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면 언제나 저쪽 말이 옳게 들리기 때문에 저쪽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고 어느 사이에 나의 의견이나 고집은 다 녹아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서로 더불어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란 나의 생각이나 의견보다는 상대의 뜻이 더 귀히 여겨져 그것을 따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며, 나에게도 전공과 전문적인 분야가 있지마는 상대가 필요로 한다면 이것을 포기하면서라도 상대의 일을 돕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의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들어도, 들어도 아쉽고, 주어도, 주어도 부족함을 느낄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떨어진다'라는 말은 헤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마치 나무에 달린 과일이 무르익게 되어 그대로 뚝 떨어지는 것처럼 사랑은 그렇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영원히 성장하고 영원히 새로운 것일 뿐 '이만했으면 족하다'고 하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영어로는 '네버 페일(never fail)' 또는 현대 번역에서 '네버 엔드(never end)'라 하여 사랑은 끝이 없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가을이 없으며 추락이나 실패 같은 것도 없습니다. 지루함이나 싫증은 물론 후회나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불만 없이 언제나 변함없이 즐겁고 행복해할 수 있어야 사랑입니다. 이는 스스로 창조되는 사랑의 힘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사랑의 장에서는 참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줄기차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줄곧 거짓사랑과 참사랑을 대조하며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가페를 말하는 대신에 에로스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에로스는 욕구가 많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바라는 것도 많고 보상에 대한 요구도 많아 변변치 않은 사랑을 해놓고도 값을 치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라도 대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무엇을 두고라도 값에 대한 불만이 있다면 그 사랑은 한낱 욕망에 불과한 것입니다.

욕망과 사랑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욕망이란 채워지지 않는 끝없는 욕심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결혼하여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아내는 남편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사랑이라기보다 불같은 욕망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를 사랑하기에 하자는 대로 다 해주었습니다. 심지어는 공부도 시켰으며 집문서, 땅문서 할 것 없이 재산의 전부를 아내의 이름으로 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아내는 여전히 불평이요 원망입니다. 실로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욕망의 사람이었습니다. 끝내는 이 남편을 향하여 나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남편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 이 남편은 70세에 손가방 하나를 든 채 이혼을 하고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불만과 욕구의 사람이 되는 한 사랑이 머물 곳은 없는 법입니다.

미국 콜럼비아대학의 프리드만 교수가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하는 문제를 두고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를 보면, 첫째가 항상 기뻐하는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염세적이며 부정적인 사람은 어디에 갖다 놓아도 불평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직장을 수백 번 옮긴다 하여도 만족이 없기는 마찬가지요

사람을 수없이 바꾸어도 그 불평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채울 수 없는 욕망에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행복의 요소가 소유나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랑을 주면서 받을 줄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보람을 아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일은 죽도록 하면서도 헛된 일, 마지못해서 하는 일쯤으로 생각을 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 에로스적인 사랑이란 채울 수 없는 욕망과 원망과 불평과 질투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사랑은 영원히 만족합니다. 여기에는 황혼도 없으며, 채우고자 하는 욕망도 없습니다. 계속 만족하고 계속 충만한 가운데 지난날의 일까지도 아름답게 해석합니다. 참사랑은 모든 것을 사랑의 눈으로 보기에 저 앞에 놓인 미래를 밝게 전망하게 됩니다. 이 사랑의 시선이 있는 한 현재에 대한 불만이 없으며 미래를 어둡게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사랑은 현재에 만족하고 순간순간에 주어지는 보람을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할" 것이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2, 13, 14장은 모두 은사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특별히 최고의 은사인 이 사랑의 장은 여러 가지 은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운데 끼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소중하고 방언의 은사도 귀하며 지식의 은사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은사가 가장 큰 것임은 사랑의 은사가 없이는 이 모든 것이 다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은사에는 필요의 한계가 있으나 사랑의 은사만은 영원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폐하리라'라는 말의 헬라 원어는 '카탈게데세타이'로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무효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작용이 중단되고 효력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예언이란 그 예언한 바가 성취되면 예언으로서의 구실은 다한 것이기에 거기에서 효력은 폐기되는 것이며 방언 또한 그러합니다.

방언이라는 은사는 고린도전서 1422절에 따르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은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처음 예수를 믿고자 할 때에 아직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지식이나 체험이 없으므로 저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내가 너를 개별적으로 이렇게 사랑한다'라고 하는 확증을 주시기 위하여 개별적인 체험으로 방언같은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방언의 체험은 믿음의 단계가 미숙할 때에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따라서 그 단계를 벗어나 성숙한 은사를 가지게 되면 이 방언의 효력은 그 할 일을 다한 것이 됩니다. 지식은 어떻습니까?

지식이란 실로 끝없는 욕구의 발로입니다. 그러기에 현재의 지식은 또 다른 더 많은 지식을 계속 요구하는가 하면 이 지식과 더불어 근심을 더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이라는 것도 보다 새로운 지식, 완전한 지식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은 사랑만이 완전한 것이며 사랑만이 남는 것입니다. 사랑 아닌 모든 것은 부분적이요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저는 어떤 글에서 '얼굴이 젊다고 몸이 젊은것이 아니며, 젊어 보인다고 하여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재미있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흔히 보면 얼굴만 보면서 "! 젊어지셨습니다"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지요. 늙을 만큼 늙은 것인데 그런 소리 듣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얼굴에 보이는 주름살이 없다고 하여 그 몸이 건강한 것은 아니며 또한 젊어 보인다고 하여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늠름하다고 생각하는 운동선수들이 대체로 단명하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언제 보아도 허약하고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 훨씬 오래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몸의 건강 역시 부분적이요 일시적이지 완전한 것이 못됩니다.

뉴턴(Newton, Issac)같은 역사적인 인물도 노년에 이르러서는 심한 건망증으로 인하여 자기의 이름까지 잊어버렸는가 하면 제자들도 분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대해야 하는 제자들이 너무도 어처구니없어서 "선생님, 그렇게 다 잊어버리셨으면 이제 기억에 남은 것은 뭐가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뉴턴은 대답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내 구주라는 것만은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

이 정도면 천국 문턱에까지 다 간 셈입니다. 그 두 가지면 충분하지 더 복잡하게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바늘귀를 자꾸만 멀리하면서 실을 끼우시는 것을 보고 '아무려면 저럴 수가' 하고 우습게 여겼습니다마는 어느 결에 제 눈도 역시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저 혼자 조용히 생각해봅니다. '이제는 나이 들었으니 먼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가까운 것은 대충 보라는 뜻인가 보다.' 그러고 보면 돋보기를 쓰는 것에도 다 그만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예언이다, 방언이다, 지식이다 하면서 갖가지의 은사를 이야기합니다마는 하나같이 일시적이요 제한적인 은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영원히 남습니다.

베드로후서 15절로 7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라고 팔층의 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서 설명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즉 덕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지식이 없는 덕은 사람을 해치며, 절제가 없는 지식은 교만하게 만들고, 인내가 없는 절제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경건이 없는 인내는 자기중심적인 완고함을 낳게 하며, 형제 우애가 없는 경건은 외식에 빠지게 되고, 진정한 사랑이 없는 형제 우애는 인간적인 사랑의 범위를 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에 가서는 사랑을 공급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고, 그 사랑 위에 세워짐으로써만 그것들의 본래적인 의미가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명분이란 제구실을 못함은 물론 오히려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는 문제만을 낳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기록된 에베소교회를 향한 말씀의 내용이 그러한 것입니다(2:1-7). "너희는 수고도 있고, 인내도 있으며, 판단력과 정의감, 그리고 진실도 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사랑 없는 수고, 사랑 없는 비판, 사랑 없는 정의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너를 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 없이는 그 어떤 고상한 명분이나 행위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사랑만이 그 모든 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서두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학생 시절을 생각해보더라도 그 아무개선생님의 얼굴이 참 잘생겼었다 거나 실력이 좋았었다 거나 하는 것들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경우에는 단 하나의 선명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어느 눈 내린 겨울날 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하느라 종소리를 듣지 못한 채 놀아버리는 바람에 지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쩔 줄을 몰라하며 아예 벌받을 각오로 뒤늦게 교실에 들어선 저에게 선생님께서는 의외로 저의 빨갛게 언 손을 어루만져주시면서 "몹시 손시려웠지?"라고 말씀해주시던 일입니다. 그때 그 말씀, 그 모습밖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 많은 똑똑한 선생님들은 기억에서 모두 사라지고 사랑만이 남습니다.

사랑 없는 충고란 아무런 의미도 효과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온전한 것이기에 이 온전한 것이 이를 때에는 부분적이고 미완성적이며 임시적인 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양의 위대한 기독교 인물인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선생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평생을 빈민굴 전도를 위해 바친 사람으로 살인자, 도박꾼, 창녀, 알코올 마약중독자들에게 전도와 구제를 하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다했습니다.

한번은 그의 친구가 그의 일하는 현장을 보겠다며 찾아와서 보니 선생의 사는 꼴이 너무도 한심한 것이었습니다. 겨우 몇 명을 앉혀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느라니 어떤 청년이 들어와 예배 중에 있는 창녀를 불러냅니다. 그런가 하면 술 취한 친구가 들어와서는 돌을 던져 얼굴에 상처를 냅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예배가 끝난 후에는 예배에 참석해주었으니 그 대가로 돈을 요구하면서 도박을 해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거니 하고 또 돈을 주어 보냅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던 친구가 "자네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군. 이것은 위선이야! 이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며, 사회적으로 옳은 일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소망 없는 일을 하고 있는가? 이는 오히려 악을 조장하고 있는 일이 아닌가?"하고 혀를 찼습니다. 이에 가가와 도요히꼬가 대답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조금 흉내내어 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더라도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믿어주는 길밖에는 도리가 없지 않은가?"

여러분! 사랑 없는 지식으로 볼 때에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같이 인구 문제로 고민하는 시대에 굳이 구제하며 도와줄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 없는 지식, 사랑이 없는 경건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으로 바꾸어 생각해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에는 낙심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 보면 그 중 어느 한 제자도 그 뜻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베드로 같은 제자는 정신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가하면 심지어 가룟 유다 까지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히시어 제자들의 때묻은 발을 하나하나 씻겨주신 것입니다. 이 장면을 두고 사도 요한은 뒤늦게 말씀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

그 사랑에는 끝이 없습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후로도 우리는 이 사랑으로 태어나고, 이 사랑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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