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마가복음 9장 45절~50절)

by 【고동엽】 2022. 11. 1.

 

처음 되돌아가기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마가복음 94550)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없음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50)"하시는 오늘의 잠언말씀은 마가복음 9장 전체에 걸쳐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연계해서 상고할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9장은 전반적으로 제자도(弟子道)를 강조하시는 가르치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이러이러해야 한다, 제자는 어떠 어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빠지기 쉬운 시험, 극복해야 할 시련, 주의해야 할 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기로 맹세하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주시는 가르치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시험에 대하여 여러 모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선 29절에 보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 전 까지는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는 능력도 행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이 점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는 권세 있고 능력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없습니다. 어제는 뭇 사람이 부러워할 만하고 우러를만한, 하나님의 능력의 종으로 역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능합니다. 귀신들린 어린아이 하나를 고칠 수가 없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뭇 사람에게서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그래 "왜 그렇습니까?"하고 예수님께 여쭙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합니다. 이때에 대답하신 말씀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심입니다. 과거에는 내가 아무리 능력 있었다 해도, 어제까지도 내가 능력의 종으로 역사 했다 하더라도, 오늘 기도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오늘에 기도함이 없으면 오늘에 시험을 당합니다. 하릴없이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말씀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 : 17)"라고.

기도하기를 쉬어서는 안됩니다. 기도 시간을 단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밥 한끼는 굶을 수 있습니다. 잠 한숨은 덜 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 시간을 제하거나 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능력 있게 행할 때에 기도하는 일을 쉬지 말라 하십니다. 기도하는 일을 쉬었거든 능력을 나타내려고 하지 말라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았거든 귀신들린 사람보고 "귀신아, 나가라" 소리치지 말라 하십니다. 기도 없이는 소리지른다고 나가줄 귀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는 말에는 실수가 따릅니다. 기도하지 않고 생각하는 일은 틀림없이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상고한 바입니다마는, 경쟁심이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문제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두고도 경쟁을 하려듭니다.

내가 더 많이, 내가 더 훌륭하게, 내가 더 인기를 얻겠다는 욕심으로 해서 어느 사이에 하나님의 일은 뒷전에 놓이고 나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는 데까지 하다가 중단해도 괜찮습니다. 하는 데까지 하다가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업적'을 남겨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기념비를 세워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꼭 '기념비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남지 않는다 해도 좋습니다. 최선을 다하다가 쓰러지면 거기까지가 하나님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 승부욕-이런 것이 큰 시험이 됩니다.

아울러, 나만 옳다고 여기는 편견을 불식해야 합니다. 버려야 합니다. 나만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나만 의롭고 나와 같지 아니한 사람은 다 정죄, 심판해 버리려드는 자세가 문제된다 하셨습니다. 또한 남을 실족케 하는 죄가 크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먼저 믿는 사람이 뒤에 믿는 사람에게 실망을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좋지 않은 본을 보일 때가 흔히 있습니다. 본의건 본의 아니건 남에게 실망을 주는 것, 믿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곧 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50)."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소금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약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구약에 보면 우선 제사에 소금을 곁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13절을 보십시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하여, 제사드릴 때에 소금을 쓰라고 했습니다. '소제'란 채소나 식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곡식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양은 죽여서 드립니다. 산 양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대신 양이 죽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제물은 죽여서 드립니다. 죽인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제물은 제단 앞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것을 갖다드리는 것이 아니라 산 것을 죽여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제는 곡식이나 채소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채소나 곡식을 어떻게 죽이겠습니까? 죽이는 대신에 소금을 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소금을 침으로 숨을 죽이는 것입니다. 뻣뻣한 채소가 소금을 먹어 누글누글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소금을 치면 다 누글누글하게 죽습니다. 고르게 됩니다. 숨을 죽이게 됩니다. 기운이 죽는 것입니다. , 이제 상상을 해봅시다. 지금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칩니다. 양이나 소는 다 죽여서 바치는데 채소는 싱싱하게 뻣뻣한 것이 올라 안았습니다. 되지 않을 일입니다. 소금을 쳐 가지고 바쳐라 하셨습니다. 소금을 잊지 말고 빠뜨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죽여서 드리라 하심이요 고르게 섞어라 하심입니다. 따로따로 놀면 안된다 하심입니다. 소금을 치면 다 섞이어집니다. 부드러워지면서 섞이어지는 것입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언약의 소금'이라니, 아주 깊은 뜻의 신학적인 말씀입니다. 약속의 소금이라 하십니다. 하나님 스스로 소금 되심을 말씀하심입니다. 임마누엘을 말씀하심입니다. 뻣뻣한 채소가 소금으로 해서 녹아집니다. 흐물흐물 잦아들고 부드러워집니다. 고루고루 절여집니다. 숨을 죽이고 고르게 됩니다. 여기에 성육신적 계시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이 여기 있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여기 있습니다. 소금은 녹아 없어지는 것 같으나 그대로입니다. 소금의 맛은 그대로 있고 채소는 다 숨을 죽이게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바치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의 약속이 '소금'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입니다. 소금이 이렇듯 귀한 뜻으로 해석되고 있음입니다.

 

다시 신약으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지요.

소금은 맛을 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하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의 주요한 역할이 ''입니다. 자체로는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들어가서 음식에 맛을 냅니다. 스스로는 형체가 사라지면서 맛이 나게 합니다. 또한 소금은 엄격하게 생각해볼 때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방부제라는 것입니다. 썩지 않게 합니다. 그 형체는 녹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소금 자체가 이렇듯 썩지 않는 것처럼 소금이 들어간 물질도 썩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가 어디 있든지 그리스도의 본분을 다할 것이며, 형체는 녹고 없어지는 것 같으나 본질은 그대로 있어서 너희 자신이 썩지 않을 뿐더러 너희가 있는 가정, 너희가 있는 직장, 너희가 있는 사회도 썩지 않도록 하라. 그런 역할을 하라'-이것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하시는 말씀의 뜻인 줄 압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그보다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숨을 죽이는 데 소금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뻣뻣한 것이 소금을 치면 부드럽게 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됩니다. 소금이 온유하게 만들고 절제하게 만들고 화평하게 만듭니다. 인격을 트랜스포밍(transforming)합니다. 변화시킵니다. 소금 되신 그리스도, 소금 되신 복음에 접할 때에 그 인격이 온유해집니다. 그 많은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직도 온유를 배우지 못했고 아직도 겸손에 이르지 못했다면 소금이 덜 쳐져서 그렇습니다. 아주 깨끗하게 녹아져서 온유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들 자신의 인격이 아닙니다. 복음이 주는 효과입니다. 십자가가 주는 효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갈 때에 그 인격은 아주 뼈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바보같은 온유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소금은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부드럽게 만들어놓습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성경말씀을 가르칠 때에 방이 따로 없어서 강대상에 올라앉아 청년들에게 가르치는데 저도 그 자리에 섞여서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젊었을 때에 신천 장터를 주름잡던 깡패, 불량배였습니다. 유명하게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장보러 오는 사람들이 성황당 나무에 대고 오늘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겠습니까? 김익두 만나는 날이면 그날은 망치는 날이니까요. 그런 사람 김익두가 예수 믿고 중생하여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교통수단이 변변치 못하던 시절입니다. 그가 부흥회를 인도하러 한여름에 땀을 뻘뻘 홀리면서 재를 넘어가다가 인적이 뜸한 길이라 웃통을 훌훌 벗어버리고 앉아서 땀을 들입니다. 술이 잔뜩 취한 청년 하나가 건들건들 올라옵니다. 가까이 오자 청년이 김익두 목사님을 보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냐'하고 다짜고짜 주먹질을 합니다. 이리 때리고 저리 쥐어박고 툭툭 차고 하는데, 남달리 키가 크고 뼈대가 굵은데다 주먹 쓰기로야 남에게 뒤질 사람이 아닌 이 양반이 글쎄 고스란히 맞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먹질 발길질에도 응대가 없고 욕지거리에도 대꾸가 없습니다. 맞는 축이 조금이라도 반항을 해야 때리는 축도 재미가 나지, 이건 아무리 해도 시비가 되지 않고 보니 나중에는 때리던 녀석이 지레 지쳐 가지고 씨근벌떡거리면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그제야 김익두 목사님은 청년의 손목을 딱 잡으면서 입을 엽니다. "형님, 다 때렸소?" 김익두 목사님과 악수할라치면 힘이 펄펄 넘치는 장정이라도 그분의 악력(握力)에는 손이 으스러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센 힘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 손에 꽉 잡힌 것이니 알만하지요. 내심 기가 팍 죽었으면서도 청년은 짐짓 목청을 짜내어 대꾸합니다. "다 때렷다, 어쩔래?" 목사님은 정색을 하고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이 말을 알아들을리 없는 청년이 뚱해서 눈만 꿈벅 거리고 있자 목사님은 덧붙입니다. "내가 김익두야." 순간, 청년은 머리끝이 쭈뼛해지면서 등줄기로 식은땀이 좍 흘러내립니다.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는 살려달라고 싹싹 빕니다. "내가 뭐라고 하던가?"하고 김익두 목사님은 청년을 붙잡아 일으킵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이었다면 너는 오늘 이 자리에 뫼를 썼다. 장사될 뻔했다. 그러나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네 명이 남아나게 되었지 않느냐? 그러니 복은 네가 받은 거지 뭔가?" 가까스로 반정신을 수습한 청년이 목사님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목사님은 "어떻게 하긴…… 날 따라와야지"하고 청년을 부흥회에 이끌었으며, 이 청년은 후일 그 마을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제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온유하십니까? 온유의 정도가 어느 만큼입니까? 보아하면 사람들이 경제에 대한 것, 정치에 대한 것, 이런 것 저런 것은 일껏 잘 참아내다가도 한 가지는 못 참는 것이 있습니다. 기분 나쁜 것을 못 참아요. 기분 나쁘면 천당도 포기하고 예수 믿는 것도 포기합니다. 여러분, 기분이 나쁘더라도 교회에는 나와야 될 것이 아닙니까? 기분이 나쁘더라도 예수는 믿고 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말씀은 가까이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기도는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기분이 나쁘면 기도도 하지 않고 교회에도 나오지 않고 천당에도 안가겠다 합니다. '기분'이라는 것이 그렇듯 맹랑합니다. 못써요. 그 몇 푼 안 되는 '기분'-온전히 소금을 쳐버려야 합니다. 숨을 칵 죽여버려야 합니다.

문제가 많습니까? 근심이 많습니까? 고민이 많습니까? 아직도 덜 죽어서 그렇습니다. 소금을 한줌 더 쳐주어야 합니다. 아주 죽도록 쳐주어야 합니다. 한 번만 죽어지면 아무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복잡하단 말입니까? 뭐가 그리 대단한 기분이라고 말썽입니까? 뭐가 그리 대단한 인격이란 말입니까? 깨끗이 죽여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억울한 소리도 듣고 억울하지 않은 소리도 듣습니다. 있는 말도 듣고 없는 말도 듣는 것입니다. 좋은 말, 좋은 평판만 듣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평판이 어떻게 정확할 수 있습니까? 좀 억울하면 어떻고 좀 분하면 어떻습니까? 소금을 쳐라 하십니다. 그래서 화목하라 하십니다.

소금은 값비싼 것이 아닙니다.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값싼 것입니다.

대단치 않은 것입니다. 대단치 않지만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소금이 없으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할만큼 소금을 소중히 여깁니다. 사람만이 소금을 먹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양도 소금을 먹어야 됩니다. 양한테도 소금을 먹입니다. 그래야만 양이 기운을 차립니다. 저들은 그래서 소금을 소중히 여깁니다.

소금을 쳐서 온유 겸손하게 만듭니다. 온유 겸손한 다음에야 화해가 가능합니다. 화목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교만한 곳에는 화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때에 팽팽히 맞서 가지고 밤새껏 싸워보십시오.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겸손 온유하기까지는 화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정의를 외쳐서 정의 찾아내는 것 보았습니까? 밤새껏 따지고 몇 년을 따져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온유할 때에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유가 내 의지로 됩니까, 어디? 온유하겠다고 하여 온유해집니까? 겸손하겠다고 맹세하니 됩니까? 겸손한 줄 알았는데 뒤에 보니까 아닙니다. 결국은 소금이 들어가고야 온유해집니다. 십자가 앞에서만 온유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절대로 안됩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만 온유해집니다. 예수님 생각하는 마음을 잠깐 잃어버렸기 때문에 온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겸손하기가 힘이 듭니까? 한번 더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땅을 들여다보고 있고, 옆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옆을 보면 경쟁심과 질투심이 나옵니다. 그러나 위를 보고, 주님을 보고,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 할말이 없습니다. 뭐가 잘나서, 뭐가 대단해서 교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교만한 가운데는 화목이 없습니다.

화목하지 못하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온유하기가 힘이 든다는 것은, 화목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덜 온유해졌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여기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겸손한 주님을 우리가 따라갑니다.

그런고로 교만한 마음으로는 따를 수 없습니다. 화평의 주님을 우리가 따릅니다. 그런고로 다투는 마음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낮아진 주님을 우리가 따릅니다. 그런고로 높아지려는 마음으로는 따를 수 없습니다.

용서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원한을 품고는 안됩니다. 한을 품든가, 섭섭한 마음을 가지든가, 무엇이 속에 맺힌 마음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화평할 수가 없습니다. 교만한 인격들이 모여서 하나되겠다지만 불가능합니다. 결국은 겸손해지고 온유해진 다음에야 소금 안에서 화해가 되는 것입니다. 소금을 두고 화해가 됩니다. 소금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누구와도 그렇습니다.

남편과 아내도 그렇고, 친구와 친구도 그렇습니다. 소금을 두고 온유 겸손해질 때에 비로소 화해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해 자체를 위한 노력은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소금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맛은 여전합니다. 소금은 어디에 가서든지 녹아져 없어집니다 마는, 소금 자체의 제 맛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살아서 역사 합니다. 그런고로 화평이란 결코 타협이 아닙니다. 무조건의 양보도 아닙니다. 다만 형체가 없어질 뿐입니다. 소금이라고 하는 맛은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그러고도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오묘한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죄와 타협하라는 얘기도 아니요, 불의의 길로 함께 가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안으라는 얘기가 아니요, 더러운 이득을 함께 취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비겁하게 살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나 하나는 희생했습니다. 내 형체도 없어지고 내 고집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맛, 그리스도만은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맛은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내 이득도 없고, 내 명예도 없고, 내 체면도 없고, 사람들이 볼 때에는 바보 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일본의 어느 화가가 그린 그림에 예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림 제목이 '바보 예수'입니다. 화가가 볼 때에 예수님은 바보라는 것입니다. '바보 예수요?' 하고 들여다보았더니 입술이 쪼글쪼글 말랐어요.

너무 불쌍해요. 더 자세히 보았더니 눈 하나가 찌그러졌어요. 너무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다보니 눈이 찌그러졌다는 설명입니다. 갈빗대가 앙상해요. 예수님은 그 능력을 가지고 그 지혜를 가지고 어째서 십자가를 져야 했던가? 바보가 아니고는 그럴 수 없다는 설명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죄와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온유 안에서 제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짠맛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하십니다. 내 형체는 없어져도 짠맛 예수, 그 예수 진리는 그대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별도의 노력이 필요 없어요. 두 가지만 노력하면 됩니다. 내 형체는 없어지고, 소금의 제 맛은 꼭 지키고, 그러면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다 거꾸러집니다. 뻣뻣한 사람들, 그 앞에 서면 다 녹고 맙니다. 다 숨죽입니다. 그 역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처럼 위대한 사람은 없어요. 그 앞에다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자기희생을 완전히 하면서 자기 본래성을, 그 신앙의 본래성을 굳게 지키고 있을 때에 그 앞에서 감동이 됩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순교사()에 보면 있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순교자들을 처형하려 하는데 그분들이 찬송을 합니다. 한 사람도 원망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백부장을 향하여 "당신도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간절하게 부탁을 하면서 죽어갑니다. 백부장이 그 때에 유명한 말을 합니다. "내가 로마의 백부장만 아니었다면 당신들처럼 여기에서 죽고 싶소." 로마군인이라고 하는 명예가 아니라면 나도 당신들처럼 죽고 싶소 오히려 그렇게 말합니다. 마침내 그도 군복을 벗어 던지고 순교자들 속으로 들어가 같이 죽어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핍박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핍박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교만한 사람을 벗고 온유해집니다. 감동을 합니다. 녹아집니다. 거꾸러집니다. 숨죽이게 됩니다. 아무리 교만한 사람도 다 녹아집니다. 자기희생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내 명예, 내 모든 것을 완전히 희생하고 나오는 데야 어떻게 할 것입니까?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소금은 그저 자기 모습만 지키면 됩니다. 자기 본질만 끝까지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녹아지면서 형체가 없어지면 됩니다. 형체는 없으면서 본맛은 항상 가지고, 지조를 굽히지 않고 사랑, 소망,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명을 다할 때에 정말로 화목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목은 둘이 앉아서 타협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치를 따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사과하고 사과를 받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백날 해보아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십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여행을 할 때에 그 길을 가로막는 것은 태산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발 속에 들어온 조그마한 돌 하나가 여행자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원수가 아닙니다. 신앙인의 원수는 내 안에 있는 교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핍박이 많아서가 아니요, 세상이 거칠어서가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교만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네가 크냐 내가 크냐 자리다툼을 하고, 예수님 십자가 지시는데 뒤따라 나가면서 숙덕거리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왜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교만한 자아를 완전히 뿌리뽑지 못한 탓입니다. 두 인격의 화목이란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은 그리스도요 십자가요 복음이요 진리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닮은 사역이요 사명적 인격입니다. 이제 어느 가정이든, 어느 직장이든, 어느 불화한 곳에서든, 정말로 소금된 한 인격이 있어서 거기에 들어가 녹아지고 본분을 다할 때에 문자 그대로 '소금을 두고' 화평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마음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마가복음 94550)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없음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50)"하시는 오늘의 잠언말씀은 마가복음 9장 전체에 걸쳐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연계해서 상고할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9장은 전반적으로 제자도(弟子道)를 강조하시는 가르치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이러이러해야 한다, 제자는 어떠 어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빠지기 쉬운 시험, 극복해야 할 시련, 주의해야 할 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기로 맹세하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주시는 가르치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시험에 대하여 여러 모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선 29절에 보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 전 까지는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는 능력도 행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이 점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는 권세 있고 능력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없습니다. 어제는 뭇 사람이 부러워할 만하고 우러를만한, 하나님의 능력의 종으로 역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능합니다. 귀신들린 어린아이 하나를 고칠 수가 없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뭇 사람에게서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그래 "왜 그렇습니까?"하고 예수님께 여쭙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합니다. 이때에 대답하신 말씀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심입니다. 과거에는 내가 아무리 능력 있었다 해도, 어제까지도 내가 능력의 종으로 역사 했다 하더라도, 오늘 기도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오늘에 기도함이 없으면 오늘에 시험을 당합니다. 하릴없이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말씀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 : 17)"라고.

기도하기를 쉬어서는 안됩니다. 기도 시간을 단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밥 한끼는 굶을 수 있습니다. 잠 한숨은 덜 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 시간을 제하거나 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능력 있게 행할 때에 기도하는 일을 쉬지 말라 하십니다. 기도하는 일을 쉬었거든 능력을 나타내려고 하지 말라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았거든 귀신들린 사람보고 "귀신아, 나가라" 소리치지 말라 하십니다. 기도 없이는 소리지른다고 나가줄 귀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는 말에는 실수가 따릅니다. 기도하지 않고 생각하는 일은 틀림없이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상고한 바입니다마는, 경쟁심이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문제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두고도 경쟁을 하려듭니다.

내가 더 많이, 내가 더 훌륭하게, 내가 더 인기를 얻겠다는 욕심으로 해서 어느 사이에 하나님의 일은 뒷전에 놓이고 나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는 데까지 하다가 중단해도 괜찮습니다. 하는 데까지 하다가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업적'을 남겨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기념비를 세워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꼭 '기념비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남지 않는다 해도 좋습니다. 최선을 다하다가 쓰러지면 거기까지가 하나님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 승부욕-이런 것이 큰 시험이 됩니다.

아울러, 나만 옳다고 여기는 편견을 불식해야 합니다. 버려야 합니다. 나만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나만 의롭고 나와 같지 아니한 사람은 다 정죄, 심판해 버리려드는 자세가 문제된다 하셨습니다. 또한 남을 실족케 하는 죄가 크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먼저 믿는 사람이 뒤에 믿는 사람에게 실망을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좋지 않은 본을 보일 때가 흔히 있습니다. 본의건 본의 아니건 남에게 실망을 주는 것, 믿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곧 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50)."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소금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구약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구약에 보면 우선 제사에 소금을 곁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13절을 보십시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하여, 제사드릴 때에 소금을 쓰라고 했습니다. '소제'란 채소나 식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곡식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양은 죽여서 드립니다. 산 양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대신 양이 죽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제물은 죽여서 드립니다. 죽인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제물은 제단 앞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것을 갖다드리는 것이 아니라 산 것을 죽여서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제는 곡식이나 채소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채소나 곡식을 어떻게 죽이겠습니까? 죽이는 대신에 소금을 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소금을 침으로 숨을 죽이는 것입니다. 뻣뻣한 채소가 소금을 먹어 누글누글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소금을 치면 다 누글누글하게 죽습니다. 고르게 됩니다. 숨을 죽이게 됩니다. 기운이 죽는 것입니다. , 이제 상상을 해봅시다. 지금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칩니다. 양이나 소는 다 죽여서 바치는데 채소는 싱싱하게 뻣뻣한 것이 올라 안았습니다. 되지 않을 일입니다. 소금을 쳐 가지고 바쳐라 하셨습니다. 소금을 잊지 말고 빠뜨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죽여서 드리라 하심이요 고르게 섞어라 하심입니다. 따로따로 놀면 안된다 하심입니다. 소금을 치면 다 섞이어집니다. 부드러워지면서 섞이어지는 것입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언약의 소금'이라니, 아주 깊은 뜻의 신학적인 말씀입니다. 약속의 소금이라 하십니다. 하나님 스스로 소금 되심을 말씀하심입니다. 임마누엘을 말씀하심입니다. 뻣뻣한 채소가 소금으로 해서 녹아집니다. 흐물흐물 잦아들고 부드러워집니다. 고루고루 절여집니다. 숨을 죽이고 고르게 됩니다. 여기에 성육신적 계시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이 여기 있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여기 있습니다. 소금은 녹아 없어지는 것 같으나 그대로입니다. 소금의 맛은 그대로 있고 채소는 다 숨을 죽이게 됩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하나님 앞에 바치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의 약속이 '소금'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입니다. 소금이 이렇듯 귀한 뜻으로 해석되고 있음입니다.

 

다시 신약으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지요.

소금은 맛을 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하고 말씀하십니다. 소금의 주요한 역할이 ''입니다. 자체로는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들어가서 음식에 맛을 냅니다. 스스로는 형체가 사라지면서 맛이 나게 합니다. 또한 소금은 엄격하게 생각해볼 때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방부제라는 것입니다. 썩지 않게 합니다. 그 형체는 녹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소금 자체가 이렇듯 썩지 않는 것처럼 소금이 들어간 물질도 썩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가 어디 있든지 그리스도의 본분을 다할 것이며, 형체는 녹고 없어지는 것 같으나 본질은 그대로 있어서 너희 자신이 썩지 않을 뿐더러 너희가 있는 가정, 너희가 있는 직장, 너희가 있는 사회도 썩지 않도록 하라. 그런 역할을 하라'-이것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하시는 말씀의 뜻인 줄 압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그보다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숨을 죽이는 데 소금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뻣뻣한 것이 소금을 치면 부드럽게 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됩니다. 소금이 온유하게 만들고 절제하게 만들고 화평하게 만듭니다. 인격을 트랜스포밍(transforming)합니다. 변화시킵니다. 소금 되신 그리스도, 소금 되신 복음에 접할 때에 그 인격이 온유해집니다. 그 많은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직도 온유를 배우지 못했고 아직도 겸손에 이르지 못했다면 소금이 덜 쳐져서 그렇습니다. 아주 깨끗하게 녹아져서 온유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들 자신의 인격이 아닙니다. 복음이 주는 효과입니다. 십자가가 주는 효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갈 때에 그 인격은 아주 뼈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바보같은 온유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소금은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부드럽게 만들어놓습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이 성경말씀을 가르칠 때에 방이 따로 없어서 강대상에 올라앉아 청년들에게 가르치는데 저도 그 자리에 섞여서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젊었을 때에 신천 장터를 주름잡던 깡패, 불량배였습니다. 유명하게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장보러 오는 사람들이 성황당 나무에 대고 오늘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겠습니까? 김익두 만나는 날이면 그날은 망치는 날이니까요. 그런 사람 김익두가 예수 믿고 중생하여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교통수단이 변변치 못하던 시절입니다. 그가 부흥회를 인도하러 한여름에 땀을 뻘뻘 홀리면서 재를 넘어가다가 인적이 뜸한 길이라 웃통을 훌훌 벗어버리고 앉아서 땀을 들입니다. 술이 잔뜩 취한 청년 하나가 건들건들 올라옵니다. 가까이 오자 청년이 김익두 목사님을 보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냐'하고 다짜고짜 주먹질을 합니다. 이리 때리고 저리 쥐어박고 툭툭 차고 하는데, 남달리 키가 크고 뼈대가 굵은데다 주먹 쓰기로야 남에게 뒤질 사람이 아닌 이 양반이 글쎄 고스란히 맞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먹질 발길질에도 응대가 없고 욕지거리에도 대꾸가 없습니다. 맞는 축이 조금이라도 반항을 해야 때리는 축도 재미가 나지, 이건 아무리 해도 시비가 되지 않고 보니 나중에는 때리던 녀석이 지레 지쳐 가지고 씨근벌떡거리면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그제야 김익두 목사님은 청년의 손목을 딱 잡으면서 입을 엽니다. "형님, 다 때렸소?" 김익두 목사님과 악수할라치면 힘이 펄펄 넘치는 장정이라도 그분의 악력(握力)에는 손이 으스러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센 힘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 손에 꽉 잡힌 것이니 알만하지요. 내심 기가 팍 죽었으면서도 청년은 짐짓 목청을 짜내어 대꾸합니다. "다 때렷다, 어쩔래?" 목사님은 정색을 하고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이 말을 알아들을리 없는 청년이 뚱해서 눈만 꿈벅 거리고 있자 목사님은 덧붙입니다. "내가 김익두야." 순간, 청년은 머리끝이 쭈뼛해지면서 등줄기로 식은땀이 좍 흘러내립니다.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는 살려달라고 싹싹 빕니다. "내가 뭐라고 하던가?"하고 김익두 목사님은 청년을 붙잡아 일으킵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이었다면 너는 오늘 이 자리에 뫼를 썼다. 장사될 뻔했다. 그러나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네 명이 남아나게 되었지 않느냐? 그러니 복은 네가 받은 거지 뭔가?" 가까스로 반정신을 수습한 청년이 목사님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목사님은 "어떻게 하긴…… 날 따라와야지"하고 청년을 부흥회에 이끌었으며, 이 청년은 후일 그 마을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제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온유하십니까? 온유의 정도가 어느 만큼입니까? 보아하면 사람들이 경제에 대한 것, 정치에 대한 것, 이런 것 저런 것은 일껏 잘 참아내다가도 한 가지는 못 참는 것이 있습니다. 기분 나쁜 것을 못 참아요. 기분 나쁘면 천당도 포기하고 예수 믿는 것도 포기합니다. 여러분, 기분이 나쁘더라도 교회에는 나와야 될 것이 아닙니까? 기분이 나쁘더라도 예수는 믿고 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말씀은 가까이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기도는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기분이 나쁘면 기도도 하지 않고 교회에도 나오지 않고 천당에도 안가겠다 합니다. '기분'이라는 것이 그렇듯 맹랑합니다. 못써요. 그 몇 푼 안 되는 '기분'-온전히 소금을 쳐버려야 합니다. 숨을 칵 죽여버려야 합니다.

문제가 많습니까? 근심이 많습니까? 고민이 많습니까? 아직도 덜 죽어서 그렇습니다. 소금을 한줌 더 쳐주어야 합니다. 아주 죽도록 쳐주어야 합니다. 한 번만 죽어지면 아무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복잡하단 말입니까? 뭐가 그리 대단한 기분이라고 말썽입니까? 뭐가 그리 대단한 인격이란 말입니까? 깨끗이 죽여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억울한 소리도 듣고 억울하지 않은 소리도 듣습니다. 있는 말도 듣고 없는 말도 듣는 것입니다. 좋은 말, 좋은 평판만 듣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평판이 어떻게 정확할 수 있습니까? 좀 억울하면 어떻고 좀 분하면 어떻습니까? 소금을 쳐라 하십니다. 그래서 화목하라 하십니다.

소금은 값비싼 것이 아닙니다.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값싼 것입니다.

대단치 않은 것입니다. 대단치 않지만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소금이 없으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할만큼 소금을 소중히 여깁니다. 사람만이 소금을 먹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양도 소금을 먹어야 됩니다. 양한테도 소금을 먹입니다. 그래야만 양이 기운을 차립니다. 저들은 그래서 소금을 소중히 여깁니다.

소금을 쳐서 온유 겸손하게 만듭니다. 온유 겸손한 다음에야 화해가 가능합니다. 화목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교만한 곳에는 화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때에 팽팽히 맞서 가지고 밤새껏 싸워보십시오.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겸손 온유하기까지는 화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정의를 외쳐서 정의 찾아내는 것 보았습니까? 밤새껏 따지고 몇 년을 따져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온유할 때에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유가 내 의지로 됩니까, 어디? 온유하겠다고 하여 온유해집니까? 겸손하겠다고 맹세하니 됩니까? 겸손한 줄 알았는데 뒤에 보니까 아닙니다. 결국은 소금이 들어가고야 온유해집니다. 십자가 앞에서만 온유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절대로 안됩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만 온유해집니다. 예수님 생각하는 마음을 잠깐 잃어버렸기 때문에 온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겸손하기가 힘이 듭니까? 한번 더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땅을 들여다보고 있고, 옆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옆을 보면 경쟁심과 질투심이 나옵니다. 그러나 위를 보고, 주님을 보고,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 할말이 없습니다. 뭐가 잘나서, 뭐가 대단해서 교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교만한 가운데는 화목이 없습니다.

화목하지 못하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온유하기가 힘이 든다는 것은, 화목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덜 온유해졌다는 뜻입니다.

결국은 여기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겸손한 주님을 우리가 따라갑니다.

그런고로 교만한 마음으로는 따를 수 없습니다. 화평의 주님을 우리가 따릅니다. 그런고로 다투는 마음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낮아진 주님을 우리가 따릅니다. 그런고로 높아지려는 마음으로는 따를 수 없습니다.

용서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원한을 품고는 안됩니다. 한을 품든가, 섭섭한 마음을 가지든가, 무엇이 속에 맺힌 마음으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화평할 수가 없습니다. 교만한 인격들이 모여서 하나되겠다지만 불가능합니다. 결국은 겸손해지고 온유해진 다음에야 소금 안에서 화해가 되는 것입니다. 소금을 두고 화해가 됩니다. 소금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누구와도 그렇습니다.

남편과 아내도 그렇고, 친구와 친구도 그렇습니다. 소금을 두고 온유 겸손해질 때에 비로소 화해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해 자체를 위한 노력은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소금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 맛은 여전합니다. 소금은 어디에 가서든지 녹아져 없어집니다 마는, 소금 자체의 제 맛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살아서 역사 합니다. 그런고로 화평이란 결코 타협이 아닙니다. 무조건의 양보도 아닙니다. 다만 형체가 없어질 뿐입니다. 소금이라고 하는 맛은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그러고도 화해를 이루는 것입니다. 오묘한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죄와 타협하라는 얘기도 아니요, 불의의 길로 함께 가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안으라는 얘기가 아니요, 더러운 이득을 함께 취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비겁하게 살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나 하나는 희생했습니다. 내 형체도 없어지고 내 고집도 없어졌습니다. 나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맛, 그리스도만은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맛은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내 이득도 없고, 내 명예도 없고, 내 체면도 없고, 사람들이 볼 때에는 바보 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있다는 말입니다.

일본의 어느 화가가 그린 그림에 예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림 제목이 '바보 예수'입니다. 화가가 볼 때에 예수님은 바보라는 것입니다. '바보 예수요?' 하고 들여다보았더니 입술이 쪼글쪼글 말랐어요.

너무 불쌍해요. 더 자세히 보았더니 눈 하나가 찌그러졌어요. 너무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다보니 눈이 찌그러졌다는 설명입니다. 갈빗대가 앙상해요. 예수님은 그 능력을 가지고 그 지혜를 가지고 어째서 십자가를 져야 했던가? 바보가 아니고는 그럴 수 없다는 설명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죄와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온유 안에서 제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짠맛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하십니다. 내 형체는 없어져도 짠맛 예수, 그 예수 진리는 그대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별도의 노력이 필요 없어요. 두 가지만 노력하면 됩니다. 내 형체는 없어지고, 소금의 제 맛은 꼭 지키고, 그러면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다 거꾸러집니다. 뻣뻣한 사람들, 그 앞에 서면 다 녹고 맙니다. 다 숨죽입니다. 그 역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처럼 위대한 사람은 없어요. 그 앞에다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자기희생을 완전히 하면서 자기 본래성을, 그 신앙의 본래성을 굳게 지키고 있을 때에 그 앞에서 감동이 됩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순교사()에 보면 있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순교자들을 처형하려 하는데 그분들이 찬송을 합니다. 한 사람도 원망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백부장을 향하여 "당신도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간절하게 부탁을 하면서 죽어갑니다. 백부장이 그 때에 유명한 말을 합니다. "내가 로마의 백부장만 아니었다면 당신들처럼 여기에서 죽고 싶소." 로마군인이라고 하는 명예가 아니라면 나도 당신들처럼 죽고 싶소 오히려 그렇게 말합니다. 마침내 그도 군복을 벗어 던지고 순교자들 속으로 들어가 같이 죽어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핍박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핍박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교만한 사람을 벗고 온유해집니다. 감동을 합니다. 녹아집니다. 거꾸러집니다. 숨죽이게 됩니다. 아무리 교만한 사람도 다 녹아집니다. 자기희생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내 명예, 내 모든 것을 완전히 희생하고 나오는 데야 어떻게 할 것입니까?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데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소금은 그저 자기 모습만 지키면 됩니다. 자기 본질만 끝까지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녹아지면서 형체가 없어지면 됩니다. 형체는 없으면서 본맛은 항상 가지고, 지조를 굽히지 않고 사랑, 소망,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명을 다할 때에 정말로 화목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목은 둘이 앉아서 타협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치를 따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사과하고 사과를 받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백날 해보아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십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여행을 할 때에 그 길을 가로막는 것은 태산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발 속에 들어온 조그마한 돌 하나가 여행자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원수가 아닙니다. 신앙인의 원수는 내 안에 있는 교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핍박이 많아서가 아니요, 세상이 거칠어서가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교만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네가 크냐 내가 크냐 자리다툼을 하고, 예수님 십자가 지시는데 뒤따라 나가면서 숙덕거리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왜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교만한 자아를 완전히 뿌리뽑지 못한 탓입니다. 두 인격의 화목이란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소금은 그리스도요 십자가요 복음이요 진리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닮은 사역이요 사명적 인격입니다. 이제 어느 가정이든, 어느 직장이든, 어느 불화한 곳에서든, 정말로 소금된 한 인격이 있어서 거기에 들어가 녹아지고 본분을 다할 때에 문자 그대로 '소금을 두고' 화평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마음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