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소경을 인도하는 자(마태복음 15장 12~20절)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그 기능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신 사역이 그 하나요,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신 사역이 그 둘이요,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위로하시고 돌아보신 사역이 그 셋입니다. 이 땅에서 역사 하시는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만민을 구원하시는 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한편에는 예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보고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가리켜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과 같지 않은, 참으로 귀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병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큰 이적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우러렀습니다. 우리 가운데에 귀하신 선지자가 오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감격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와는 달리, 같은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나쁘게 말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일에는 나쁜 일이 따르는 법인가봅니다. 예수님의 이 귀한 역사에 전폭적인 지지가 따름이 마땅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뒤에는 나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헤롯당에 속한 자들이 그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맨 앞에 나서서 끈질기게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하고 모함하는 무리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입니까? 율법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까? 가장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의 어원인 '바리사이오스'는 '구별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이란 특별하게 깨끗하고, 특별하게 잘 믿고, 특별하게 의롭고…… 한마디로 전문적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진실로 잘 믿는 사람이라면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마는 잘 믿는 척하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바리새주의가 문제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믿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열심히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교회이든지 어느 모임이든지 한번 보십시오. 잘 믿는 척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낮추어서 믿음이 없다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똑똑하고 잘 믿는다고 하는 바로 그 사람과 그 생각에 시험이 있고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말씀도 반대하고, 교리도 반대하고, 교훈도 반대하고, 나아가 봉사까지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은 일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해주었으면 고맙다고 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바알세불을 힘입었노라고 모진 악담을 합니다. 아주 나쁜 마음으로 도전적인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를 책망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바리새주의에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서 돌이킬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아직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도 언젠가는 주님의 이름을 들음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을 알면서도 바리새적으로 잘못 돌아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가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유독 바리새인에 대해서만은 용서함이 없이 심판해버리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엄히 책망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비밀리에 혹은 비유적인 말씀으로가 아닌 아주 직접적으로 공개적으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5장에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 앞에 나아와 도전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대놓고 그들을 공격하십니다. "외식(外飾)하는 자들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7, 8절)." 이는 이사야 29장 13절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인용하시어 바리새인들을 문책하십니다. 너희들은 겉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믿는 것이 아니다, 가장 잘 믿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 내용으로는 하나님의 원수이다. 너희들이 정말로 악한 사람이다-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여지없이, 아주 강하게 공개적으로 결정적으로 바리새인들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를 잘 믿으려고 애쓰는 것도, 의를 추구하여 깨끗하고 정결하게 사는 것도 좋습니다만, 그보다는 바리새인이 된 것은 아닌지, 바리새주의에 빠지지는 않았는지를 생각하며 신중히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바리새주의에 빠진다는 것은 끝장이요 구제불능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오늘의 본문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권위를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드러난 저들의 악을 단순히 실수한 것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여러분, 생리와 병리는 다른 것입니다. 무언가 실수해서 잘못한 것과 근본적으로 악한 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그리고 다윗을 보십시오. 실수 없었던 분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다윗도 엄청난 실수를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대로 실수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그 중심을 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한 그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다윗은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실수들을 저질렀지만, 그 본심은 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실수는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그것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범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바로에게 한 것과 같이 그랄에 머물 때에도 아비멜렉왕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나이는 들었어도 아직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은 사라로 인하여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까봐 그런 거짓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이민족 사이에는 남의 아내를 빼앗기 위하여 그 남편을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무던하고 착한 사라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남편 아브라함의 말에 순종합니다. 아비멜렉왕은 아브라함의 말을 믿고 사라를 취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자신의 실수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중심을 보시고 특별한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해주셨습니다. 이렇듯 여러 번 실수를 하면서도 아브라함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언제나 믿음으로 살 수 있었고, 실수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과는 달리 바리새인들은 생리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실수도 전혀 없이 아주 깨끗하고 정결하고 거룩한 것 같지만, 속은 아주 못되고 악하고 삐뚤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실수와 본질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한 사람이 있거든 얼마든지 너그럽게 봐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악할 때에는 문제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선한 것 같으나 내용적으로는 아주 악한 사람들이었기에, 아예 뿌리부터 악한 사람들이었기에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듭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 : 17, 18)"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권위를 부정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로 취급하시어 장차는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이 악을 본질적인 것이라고 보시고 계십니다. 단순히 내뱉은 악한 말 한마디일지라도 그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요, 모두가 그 본질에서부터 나온 것이요, 근본적으로 악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심판 날까지 그냥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현실적인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 것도 가르칠 것도 권면할 것도 없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이제 더는 바리새인들에게 권면할 것도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재적인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버려진 사람들이니 이제 더는 권면할 것도,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도 없다-얼마나 무서운 심판입니까? 우리도 간혹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엇나가는 상대를 위하여 책망도 하고 위로도 하고 권면도 하고 이렇게 하다가 마지막에 정 말을 안 들으면 네 마음대로 해라, 이제 더는 당신하고 말할 것이 없다, 이제 더는 당신에게 상관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런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무서운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를 악에서 돌이키게 하시고자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다 깨끗한 것 같으나 한 사람은 아니다"-가룟 유다에게 거듭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수 차례의 권면과 책망에도 가룟 유다가 악에서 헤어나지를 못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내버려두십니다. "네가 나를 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그냥 내버려두는 시간을 맞았다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구제불능이요, 이제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렇듯 버려진 심령, 화인(火印)맞은 심령, 이미 심판을 받아버린 심령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일입니다. "그냥 두어라"-방치하라는 말씀이요, 큰 저주의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돌이킬 기회가 없다,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이제는 구제불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끝난 사람들이요, 다만 앞에 심판이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 하십니다. 절대로 너희는 저들을 본받지 말라 하십니다. 저들과 사귀지도 말고, 가까이도 하지 말라 하십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실수한 사람이라면 그 잘못을 얼마든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실수한 사람이 있다면 그 잘못을 덮어주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과 가까이하다가 잘못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저들은 누룩과 같고 악한 뿌리와 같고 쓴 뿌리와 같으니 가까이도 하지 말고 본받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들과 가까이하는 순간에 마음이 흐려집니다. 영혼이 황폐해집니다. 나아가 신앙이 흔들립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안 믿는 사람과 가까이할 것입니다. 절대로 바리새적인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말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소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눈감은 사람들로 자기가 소경인 줄은 모르고 남을 인도하겠다고 하는 교만하고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눈을 감아버림으로 소경이 되어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소경 되었다'함은 영적으로 앞을 보지 못한다, 즉 깨달음이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오늘의 분문 말씀은 '깨닫지 못한다'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16절)"-소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되면 눈앞에 화려한 것이 있어도 모릅니다. 위험이 다가와도 모릅니다. 함정이 있어도 모릅니다.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듣는다고 다 아는 것입니까? 본다고 다 아는 것입니까? 마음이 닫혀 있다면 아무 것도 모르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대화할 때에도 가만히 보면 마음이 딴 데 가 있음으로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간혹 저도 앞에 앉아서 이유 없이 움직이는 사람, 조는 사람들 때문에 설교를 하면서 신경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날 3부 예배 때에도 앞에 앉아서 주보로 부채질을 해대는 아가씨가 있어 조금은 힘들었습니다. 옆에 앉은 사람도 그 모습이 신경 쓰이는지 그 아가씨와 간격을 띄우려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도대체 무엇을 먹고 와서 그렇게 더운지 남들은 아랑곳 않고 부채질을 해대더군요. 그것을 지켜보며 설교하는 저도 적잖이 신경 쓰여 당장 부채질 좀 멈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공적인 자리이니 그럴 수도 없고 해서 참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눈을 빤히 뜨고 조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일부러 단상을 힘차게 쾅하고 쳐보는데도 끄떡없이 잡니다. 소리를 높여보아도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벌써 잠에 깊이 빠져들어 몽롱해 있습니다. 또 간혹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앉았는지 멍청히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할 수 밖에요. 제가 말씀을 드리면서도 이 말씀만은 여러분이 꼭 들어주어야 할만큼 중요한 내용이다 싶은데도 무슨 잡념에 사로잡혔는지 안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뢰가 있고 존경이 있고 믿음이 있고, 그리고 내게 겸허함이 있어야만 들리는 것입니다. 교만해지고 굳어지고 잡년에 사로잡히고 걱정근심에 매이고 영혼이 자유하지 못하다면 들리는 것이 없음은 당연하지요. 본다고 보입니까? 듣는다고 들립니까?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아무 것도 안 들립니다. 아무 감동도 없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소경이 되었다'함은 깨달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깨달을 수 있는, 그 귀한 은사를 잃어버렸습니다.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더는 이 믿음도 생기지를 않습니다. 마음이 열리지를 않습니다. 꽉 닫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속이 아주 비틀거렸습니다.
듣는 것마다 비뚜로 듣기만 하고, 오해만 합니다. 도리가 없습니다. 정말 어찌해볼 수가 없습니다. 구제불능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소경이 되는 것입니까? 먼저, 착각으로 인해서 소경이 됩니다. 시쳇말로 '착각은 자유'입니다마는 저들은 모르고도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알기는 틀린 것이 아닙니까? 저들은 아무 것도 못하면서도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할 수 있기는 틀린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겸손하게 공부해야겠다는 좋은 자세를 지니면 공부가 잘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만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전부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녔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실은 전혀 아는 것도 없고, 지킨 것도 없었습니다. 저들은 특별히 율법을 잘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실은 전혀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도 얻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율법을 지켜왔다고 하는 자만심을 지녔기에 결국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일이지요.
마태복음 19장에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영생의 길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은 청년은 다시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그 대답을 들은 청년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근심하여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켰느냐고 그 청년에게 물으셨을 때에 "선생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율법을 다 지킨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리 지키려고 노력해도 다 지킬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너는 천국에서 멀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단언했습니다. 이렇듯 자만에 찬 사람이었기에 그는 예수님을 알 수가 없었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란 교만하다보면 언제나 이 청년과 같이 되기가 쉽습니다.
한 대학교수가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총각사공이 노를 젓는 나룻배 하나를 얻어 탔습니다. 사공이 한참 노를 젓고 있는데 대학교수가 묻습니다. "자네 장가갔나?" "못 갔습니다." 사공이 대답하자 대학교수가 다시 묻습니다. "철학을 아나?" "아, 제가 철학이 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 그렇다면 자넨 인생의 4분의 1을 잃어버렸구만." 그 때였습니다. 강풍이 휘몰아치더니 어느 결에 그만 배가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둘 다 물에 빠졌습니다. 대학교수가 반정신을 잃은 채 허우적거립니다.
그 꼴을 보던 총각사공이 묻습니다. "헤엄칠 줄 아십니까?" 대학교수가 대답합니다. "모른다네." 총각사공이 한마디 던집니다. "당신은 인생의 전부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좀 안다고 해서 교만할 것이 아닙니다. 남을 무시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지식이란 별게 아닙니다. 하나를 알면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만함으로 깨달음을 잃어버린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국에서 대학을 좀 일찍 마치고는 곧장 미국에 가서 공부를 시작해서 석사, 박사 과정을 밟았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그렇게 어렵던 영어도 쉽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되자 그 사람, 남들을 무시하기 시작하더군요. 영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유학을 왔다고 하며 영어 좀 한다고 얼마나 잘난 체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주위에 있는 영어 못하는 사람들이 기가 좀 죽었겠습니까? 언젠가 한번 글을 하나 써 와서는 신문에 게재토록 해달라고 제게 부탁을 하더군요. 한글로 써온 그 글을 읽어보고 그에게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네가 써온 이 글은 초등학교 3학년 수준에도 못 미치네. 도저히 창피해서 낼 수가 없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자네가 지금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영어로 무엇을 훌륭하게 할 수가 있겠는가? 없지 않은가. 한국말은 초등학교 3학년 수준밖에는 못되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자네야말로 국제고아일세."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어 좀 잘하려고 하다보면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게 됩니다. 한국말을 잘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영어를 잘하지 못하게 되고요. 아무래도 둘 다 잘하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어차피 하나를 얻는가 하면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가진 것은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그 동안에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많은데요. 간혹 '내가 10년 동안 공부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10년 공부하는 동안 10년이란 많은 세월을 잃어버린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그 시간 동안에 다른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장사하는 경험도 했고, 결혼하는 경험도 했고, 연애하는 경험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공부만 하느라고 그 동안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인생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대단한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스스로는 다 아는 줄 믿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된 일은 없는 데 스스로는 다 된 줄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깨달음이 없는 소경이 되지 않았습니까?
또한 바리새인들은 대단히 교만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의 근본자세는 겸손이 아닙니까?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대해서 지식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안다는 것으로 교만하고, 의롭다는 것으로 교만하고, 거룩하다는 것으로 교만하고, 남보다 죄를 덜 졌다는 것으로 교만했기에 결국은 무지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릇된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참된 지식은 배움이 더할 수록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혹시 공부하면서 자꾸만 교만해지거든 잘못된 지식인 줄로 아십시오. 참된 지식은 배움이 더할수록 모르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 전에 내가 안다고 했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진정으로 바른 지식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교만하기 때문에 마음의 문이 닫혀 있는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 교만한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남들을 가르치겠다고 덤벼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배우는 것이 먼저입니다. 백 가지를 알아야 한 가지를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도 모르면서 남을 가르치겠다고 하는 것처럼 무서운 교만은 없습니다. 인도자가 되고 선생이 되겠다고 하는 것처럼 큰 잘못은 없습니다.
나이가 50이 넘고 60이 넘어 세상일 다 겪었고 이미 은퇴가 가까워온 분들이 제게 찾아와서 목사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가령 50된 사람이 이제 와서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돋보기 끼고 눈도 어두운 사람이 이제 와서 의학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신학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밝고 총명한 나이는 딴 데에 다 흘려보내고 이제 끝물이 되어서 잘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게 된 때에 와서 신학공부를 하겠다니, 이것은 신학에 대한 모독이요 하나님의 일에 대한 모독입니다." 상대방이 듣기 거북한 소리일지라도 저는 그것이 바른 말이라고 생각하기에 주저 없이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저에게 좀 지나치다고 합니다마는 그래도 할 수는 없지요. 일생을 두고 공부해도 다 못하는 이 소중한 하나님의 일을 반백(半白)이 넘은 지금에 와서야 하겠다니 도대체 주님의 일을 뭘로 아는 것인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공부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공부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세월을 다른 곳에 다 허비하고 지금 와서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문성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인도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얼마나 많이 경험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에게 이제 그렇게 할 충분한 시간은 없지 않습니까? 하긴 저도 가르쳐보아서 압니다만, 나이 드신 분들이 아주 열심히 공부합니다. 시험칠 때에도 보면 다른 학생들은 시험지를 다 작성하고 나간 다음에도 그냥 앉아서 열심히 합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보느라면 '진작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와서 이게 무슨 고생인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도자가 되려고 하는 마음 이전에 배우는 자된 자세가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남을 인도하고 가르치겠다고만 대들었지, 그 전에 갖추어야 할 배우는 자의 자세를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듣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소경이 되고 만 것입니다.
나아가 이 바리새인들에게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은 지식의 고집입니다. 특별히 나쁜 고집은 종교적 고집이요 신앙적 고집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믿고, 내가 믿는 것이 옳다고 딱 버티어 서서는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들의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구전을 수고스럽게 여기고 율법을 내버렸습니다. 장로의 유전은 지키면서 주님의 말씀은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자세입니까? 그래서 결국 저들은 다른 사람의 실수만 보고 스스로를 살필 줄은 몰랐습니다. 이러한 신앙적 고집은 사람을 점점 어둡게 만듭니다. 자기가 스스로 파놓은 고집의 함정 속에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이제는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습니다. 자유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은 소경이 되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바리새인들은 위선과 외식에 차 있었습니다. 이 체면이라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그저 각자 나름대로 침잠한 마음으로 진실해졌으면 좋겠지만, 체면이 앞서게 되어 그렇지를 못합니다. 어떤 때에는 직분이라는 것이 체면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집사요 권사요 장로요 하고 직분을 내세웁니다. 차라리 장로가 아니었다면 좋은 사람이 되었을 사람이 있습니다. 거룩한 직분에 합당한 내용은 없이 체면만 앞세웁니다. 봉사를 해도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라는 직분상, 집사라는 직분상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피곤할 수 밖에요.
저희 교회에서는 건축헌금을 한다든지 기타 무슨 헌금을 할 때에도 전혀 광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누가 얼마를 헌납하는지 절대로 모릅니다. 헌금을 함에 있어 서로들 모르니 참으로 좋더군요. 보십시오. 이 장로는 얼마, 저 권사는 얼마…… 하고 알리면 이것이 얼마나 큰 시험이 되겠습니까? 어느 사이엔가 자기도 모르게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이 위선과 외식-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도 나는 기도를 얼마동안이나 했다, 선행을 얼마나 했다, 봉사는 얼마만큼이나 했다고 내세웁니다만, 그만큼 그 내용은 점점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식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형식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형식주의자였습니다. 결국 저들은 이 외식과 형식 때문에 소경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체면 때문에 텅빈 인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제 불능한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 : 41)"라고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16절로 19절에 걸쳐 거듭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소경된 자들아, 소경된 자들아"하고 책망을 하십니다. 여지없이 비판을 가하십니다. 왜입니까? 정말로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모를 수밖에 없도록 심판을 받아버렸습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소경에게 인도를 받는 소경, 얼마나 불쌍합니까? 둘 다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지도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도하는 사람도 소경이요 따라가는 사람도 소경입니다.
따라서 그 지도자 하나가 잘못된다면 모두가 잘못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결혼식 주례를 볼 때마다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복을 타고나야 합니다. 하나는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둘은 스승을 잘 만나야 합니다. 유치원 때부터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대학 다닐 때에도 좋은 교수를 만나야지 못된 교수를 만나면 일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사이에 잘못되는 지도 모르게 끌려가고 맙니다. 신앙생활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구든지 좋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만나고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 가지 복의 마지막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아무개 권사님, 아무개 장로님 참 좋으신 분이지, 아 그런 분에게 가까이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을 가져본 분이 있다면, 그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불행은 어디에서 비롯합니까? 어떤 비교인이 교인들과 사귀어보니 하나같이 못되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형편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 잘못 걸려드는 것입니다. 어찌하다보니 바리새인들만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 하기 어렵습니다. 소경을 만난 소경, 얼마나 불쌍합니까? 소경을 따라야 하는 소경도 불쌍한 사람이요, 지도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따라가는 그 소경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소경이 되어서 소경을 인도하겠다는 사람은 더욱 한심하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한다고 하는 것처럼 잘못된 일은 없습니다.
모름지기 남을 인도한다고 하기 전에, 먼저 내가 눈을 떠야 합니다.
이 막중한 책임을 밝히 보아야 합니다. 우선 내가 먼저 눈을 뜨고 항상 새롭게 깨달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래야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을 더 밝은 빛으로 인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누가복음 9장 57절~62절) (0) | 2024.03.19 |
---|---|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마가복음 9장 45절~50절) (0) | 2024.03.19 |
선지자의 고향(마가복음 6장 1절~6절) (0) | 2024.03.19 |
선생만한 제자(마태복음 10장 24절~28절) (0) | 2024.03.19 |
생명과 소유(누가복음 12장 13절~21절)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