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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누가복음 9장 57절~62절)

by 【고동엽】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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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누가복음 95762)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자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믿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 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오늘 공부할 잠언은 예수님의 제자 되는 사람에 대한, 즉 제자도에 대한 아주 심각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엄격한 성찰 속에서 비상한 각오를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 앞만 보고 가야 할 사람이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그릇됨이 없다 하는 말씀입니다. 제자직의 본질을 말씀하심이요 제자됨의 성격을 말씀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에는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그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오늘도 보면, 예수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슬렘 세계나 공산주의 사회가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하고 나서는 순간에 이에 따라 많은 손해가 따릅니다. 직장에서 떨려납니다. 좋은 직장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혼을 당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정에서도 떠나가게 됩니다. 유산을 못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 마을에 살지 못하고 쫓겨나기까지 합니다. 재산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생명까지 빼앗기는 사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찍이 우리 나라에서도 그랬고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 믿는 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했습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순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순교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순교적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에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 오는 모든 불이익을 다 받아야 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순교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참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순교적으로 살지 않는다면 예수 믿는 참 맛, 참 기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참 행복,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는 위대한 용기와 평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예수 믿는다는 것의 뜻이 무엇이며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름에는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사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 할것없이 다 자세가 중요합니다. 기본자세를 바로해야 합니다. 운동도 그렇습니다. 많은 시간 운동을 해도 기본자세가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좋은 성과를 얻을 수가 없어요. 특별히 예수 믿는 데도 처음부터 바른 자세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에, 제가 이름은 대지 않겠습니다만, 제가 자랑하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본인들을 위해서는 이런 자랑을 한다는 게 뭣합니다마는 그분들, 교회에 처음 나온 날부터 한결같이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더니 벌써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하는 것을 보아요. 처음 나을 때의 그 자세가 세월이 가도 한결같습니다. 시작했다 하면 끝을 내는 이런 분은 정말 칭찬을 하고 싶어요. 사람이 무엇을 한다 하면 그래야 합니다. 하다마다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해서는 못씁니다. 도대체 시원치가 않은 것입니다. 시작했다 하면 어기차게, 끈기 있게 나아가는 사람은 정말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그래야 합니다.

나아가 합당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를 얻는다는 것은 하나를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하나를 얻기 위하여 아홉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하나를 얻기 위하여 전체를 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버리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버리지 않고 다 얻겠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시는 대로 공부를 하려면 놀지 못합니다. 진실하려면 거짓되지 못합니다. 성실하게 살려면 손해 많이 봅니다. 각오해야지요. 이런 각오가 없다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조금 더 어려운 말로 말씀을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종말론적 시간은 과거와 철저하게 결별하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결혼하는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결혼을 했으면 그날부터는 그전의 일을 말끔히 잊어버려야 합니다. 애인이 열이 있었든 백이 있었든 상관하지 말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것은 결혼하고 나서 옛날 애인하고 편지 주고받던 것 버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 숨겨놓았다가 들켜 가지고 말썽이 되지 않습니까? 어쩌자는 것인지 그런 것을 장농 깊숙이 숨겨놓았다가, 사진까지 숨겨놓았다가, 끝내 이것이 말썽이 되지 않습니까? 깨끗이 잊어버려야 합니다. 친정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친정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시원치 않은 사람입니다. 출가외인(出家外人)이라고 했습니다. 시집을 가면 그 순간부터 이제는 시집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합니다.

종말론적 시간에는 현재와 미래가 있을 뿐 과거는 없습니다.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이 요구됩니다. 딱 끊어버릴 것이 요구됩니다. 과거가 좋았든 나빴든 상관이 없어요. 과거가 부끄럽건 자랑스럽건 문제삼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오늘부터는 종말론적 생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과 약속된 미래가 있을 뿐입니다. 과거는 망각 속에 묻어야 합니다. 지난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영겁 속에 결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가 뒤를 돌아봄으로 예수님께 합당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가정에 애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정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예수님의 제자 됨이 더욱 중요합니다. 결단의 순간에 가서는 가정보다 예수님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너무나 가정적인 사람을 봅니다. 그 살림이 너무 좋아서 무엇을 만들어놓고 쓰다듬고 애지중지하는 사람들 보니 신앙생활이 시원치 않습디다. 사실 신앙생활에 열심 하다 보면 가정생활은 좀 대충대충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가정적이다'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가정이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중요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원수가 네 집안 식구니라" 종말론적 시간 앞에서는 때로 가정이 원수가 될 수도 있다 하심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다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책에서도 읽고 본인에게도 물어보았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물어보고 확인한 이야기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상처(喪妻)를 했습니다. 후처를 맞았습니다. 그분은 변호사 출신입니다. 그런데도 주기철 목사님을 위해서 전처의 아이가 셋이나 딸린 목사님의 부인이 된 것입니다. 핍박이 오자 목사님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래서 홀로 자기가 낳은 것도 아닌 자녀들을 키우게 되는데 조금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목사님들은 다 신사참배 하면서 적당히 넘어가는데도 당신은 왜 감옥에 갇혀 가지고 내가 낳지도 않은 자식들을 나한태만 맡겨 이 고생을 시키는 거요?"하고 불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철저했습니다. 목사님이 감옥에서 너무도 어렵게 고생을 하시므로 장로님들이 돈을 모아 교섭을 해서 목사님은 잠시 병 보석을 받게 되었습니다. 밤중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문을 두드립니다. 사모님이 나와 문을 엽니다. 보니 목사님이 서 있습니다. 반색을 할 사모님이 뜻밖에도 냉정합니다. "웬일이오?" 차갑게 묻습니다. "모르겠어. 나가라고 하기에 나왔지 뭐."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그러자 부인이 말합니다. "살아 돌아오면 당신은 내 남편이 아닙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꼼짝을 못하고 괴로워했다 합니다. 순교해야 할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면 내 남편이 아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주기철 목사님의 일생을 영화로 만들 때, 사모님이 이런 말하는 대목을 커트해 버렸다고 합니다. 너무나 비인도적이라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해 못하니까 이 장면을 그대로 살리면 재미가 없을 것 같다고 해서랍디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느 결정적인 시간에 가서는 가정도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을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에 절대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 오늘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은 가정을 일일이 돌아볼 수가 없지요. 저는 가끔 부부가 되어 유학 가는 사람들 보면 부탁을 합니다. "공부한다는 문제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남편의 시간을 뺏을 생각 마라."밤 한 시에 귀가하든 두 시에 귀가하든, 밤새껏 공부를 하든, 공부하는 자의 아내로서 공부하는 문제에 관한 한은 전적으로 도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해줍니다. 공부하러 간다고 가놓고는 주말 되면 놀러가고 방학 때면 여행이나 가고, 그렇게 하다보니 성적이 떨어져서 그만 좌절하고 마는 경우를 흔히 보는 것입니다. 가정은 중요합니다. 사랑도 중요합니다. 환경도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마는 종말론적 순간에 와서는 그리스도께서 우선을 두어야 합니다. 미온적 신앙. 소극적 신앙, 미 결단적 신앙, 혹은 분명치 않은 신앙, 혹은 뒤로 미루려고 하는 소극적인 신앙 -이런 신앙은 합당치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말씀하는 바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세 가지 유형의 사람 가운데 첫번째 사람은 충동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높은 것을 보고, 또 그 능력이 굉장한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것을 보고, 따라가면 괜찮겠구나 싶어서 충동적으로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57)" 일시적 감정으로 이렇게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즉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부잣집 아들인 모양인데 나 따라오면 고생한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심입니다.

이런 충동형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조금만 핍박이 있으면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신앙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비근한 이야기가 될지 모릅니다마는, 저희 교회에 특히 처음 나오시는 분들에게는 나오시자마자 바로 "등록하십시오" 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등록하라고 권유합니다. 일시적인 충동에서 해놓으면 뒤에 가서 으레 문제가 있습디다. 우리 교회 나오시는 분들은 6개월 뒤에 등록을 하게 합니다. 6개월 동안 다녀보고 확신이 생기면 등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좀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신앙에는 으레 문제가 따릅니다. 꾸준해야 합니다. 별로 많이 남지 않은 생을 살면서, 비상한 결심으로 출발할 것입니다.

본문의 두 번째 사람은 갈등형입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 합니다. 이 대목을 두고 교회에서는 두 갈래의 해석을 하는데, 그 하나는 당장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장례식이나 치르고 따르겠다는 것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그럴듯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는 부모에 대한 사명을 다하게 해달라는 청으로 보아야 합니다. 나는 맏아들이니까 부모님을 모시고 있으니 만큼 부모님 세상 떠날 때까지 책임을 다하고 나서 따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아프리카의 어느 똑똑한 청년에게 장학금을 주겠으니 와서 공부하라고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답신이 왔는데, "아버님 장례식을 치르고 가겠습니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 나이가 몇이냐?"하고 물었더니 "40입니다" 하더랍니다. 그래, 이 사람은 과연 몇 살이 되어야 학교에 올 것 같습니까? 부모를 모시고 효도를 다하고 장례를 치른 다음에 무엇을 하겠다 - 좋은 이야기 같지만 반드시 옳은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야 무슨 일을 하겠어요? 본문의 두 번째 사람은 관습에 매인 사람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히브리사람 나름의 관습이 있거든요. 장자는 부모를 모셔야 한다, 부모님 모시는 한에는 곁눈을 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 우리 나라의 인습으로 보아도 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들은 십리 밖을 못나가게 되어 있어요. 옛날에는 전화도 없고 하니까 멀리 출장 다니면 안되었습니다. 항상 부모님 가까이에서 살아야 합니다. 부모님을 위해 그렇듯 정성을 다하고 효성을 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효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인습이다 효도다 하고 가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한 다음에 언제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순교할 길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죽으면 부모님은 누가 모시나' 걱정해서 순교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옛날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홀로 계신 어머니가 마음에 걸려서 기피를 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이리저리 숨어 다니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끝내 군대에 가지 않고 목사가 되었어요. 그분이 제일 어려워하는 게 뭐냐하면 청년들이 입대하면서 기도 좀 해달라고 하는 것이랍디다. 군에 안 가려고 도망 다니던 사람이 그런 기도를 해주자니 하도 괴로워서 고민하던 나머지 결국은 사표 내고 이민을 가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왜 사표 내고 이민을 가는지 몰랐어요. 가는 날 아침에야 그 비밀을 저에게 털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만회할 길도 없지 않습니까? 부모에 대한 의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따를 마음이 있습니다마는 부모를 장사한 다음에 따르겠습니다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니 어떡하면 좋을까 하고 갈등을 겪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확실한 결단이 없는 분을 주변에서 숱하게 볼 수 있습니다.

Priority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해서 이것은 첫째고 저것은 둘째고 그것은 셋째다 하고 뚜렷이 선을 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 가정의 일, 나의 일 해서 이 일이 먼저냐 저 일이 먼저냐 하고 갈팡질팡하다보면 이 일도 안되고 저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용의주도형입니다. 앞보다도 뒤에 있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주저를 합니다. 이래서 문제가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것도 주저해서였습니다. 확실한 결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멀찍이 서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주저주저하다가 어려운 시험에 들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번 이들 세 유형의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첫번째 사람은 안일한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낮은 처우에 대해서, 예수님과 더불어 고생하는 일에 대해서 감수할 각오가 필요했는데, 예수를 믿어서 더 잘살려 하고 더 명예로우려고만 했지 고난받을 각오는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현실적인 이익이 올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의 의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를 믿음으로 오는 이해득실을 헤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된 것으로 충분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족한 것입니다. 달리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로 믿는 사람입니다. 집이 있다면 천국의 집이요, 평안함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모신 기쁨으로 평안합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을 보면 그에게는 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해야 될 일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싶은 일 쪽으로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세 번째 사람에 대해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하고 이 사람은 말합니다.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합니다. 떠나는 마당이니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라도 하겠다는 '인지상정'에 대하여 예수님은 참 박절도 하시다 싶습니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합당치 않다 하실 뿐입니다. 그토록 비상한 결단을 요구하심입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이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공처가였던 것 같습니다. 집에 인사하러 갔다가는 못 빠져 나올 위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의지가 박약해서 아내가 붙들고 늘어지면 그대로 주저앉을 위인이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점을 아시고 계셨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인사하러 가지 마라, 너 인사하러 갔다가는 못 돌아 나온다 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자기 의지를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나약한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께 합당치 않습니다. 결단은 혼자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실존적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누구하고 의논합니까? 예수님의 제자 되는 것을 누구하고 의논할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해결할 문제입니다.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목사님들 가운데도 공처가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 오늘 부흥회 가도 되나요?" 이렇게 사모님한테 묻고, "가지 마세요"하고 사모님이 말리면 그대로 주저앉고 마는 사람이 있습디다. 어느 목사님은 미국에 유학을 가는데 반대하는 아내를 겨우 설득하여 2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약속하여 건너갔지만, 공부를 해보니 이삼 년 더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 아내한테 더 참아달라고 편지를 했더니 답장이 오기를 '누굴 죽이려고 그래요?' 하고 당장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모님, 고생도 하긴 했어요. 남편 없는 동안에 하숙을 켰어요. 2년 고생도 힘들었겠지요. 그 목사님, 결국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공부도 못 다하고 되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 저도 보았어요.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앙적 문제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배한 문제에는 의논이 필요 없습니다. 의논을 기대하지도 말 것입니다. 무슨 의논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의논을 한다면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물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임을 안다면 탱크처럼 밀어붙일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사람 집에 돌아가서 인사하겠다고 합니다. 그를 보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공교롭게도 한국에서 농사짓는 것과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농사짓던 것이 비슷합니다. 왼손에 쟁기를 잡고 오른손에 채찍을 들고 두 마리의 소를 때리면서 밭을 갈아나가는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 이 일을 조금 해보았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밭갈이를 하실 때에 들에 나가니까, 사람이 살아가려면 다 해보아야 한다고 하셔서 한 시간동안 해보았는데, 참 힘들더군요. 쟁기가 무겁기도 하지만 소걸음이라는 게 얼마나 느립니까? 그러나 쟁기를 땅에다 대고 보니까 얼마나 빠른지 모르겠어요. 똑바로 대어야 되는데, 이렇게 대어나가면서 내가 지금까지 제대로 했는지 궁금해져서 뒤를 돌아보고 싶어져요. 그런데 한번만이라도 돌아보았다가는 이놈의 쟁기가 벌써 하늘로 쳐 들려버려요. 그 때에 저희 아버님이 철학적으로 말씀하십디다. "쟁기는 발 밑에 있지만 너는 항상 저 앞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현재에 살지만 우리의 이상은 항상 저 앞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그럼 왜 돌아보느냐?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해왔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내 과거가 제대로 되었는지 궁금해서 뒤돌아보는 순간에도 쟁기는 계속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중단 없이 가고 있어요. 소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딱 멈추어놓고 돌아보면 모르거니와 쟁기를 잡고 내 고개를 뒤로 돌리면 현재를 망치는 것입니다. 미래도 망치는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잘되었든 못되었든 끊어버려야 합니다. 완전히 결별해버리고 오늘과 내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는 누구 손에 있느냐-이것은 과거의 연장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위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미래는 과거와의 연결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느냐가 상관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이제부터의 운명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만 쳐다보면 됐지, 과거는 왜 보는 것입니까? 과거를 왜 의식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가 거기에 있습니다. 미래가 중요하고, 앞만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본질입니다. 이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갈 것입니다. 뒤돌아보지 마라, 앞으로 가는 사람이면 뒤를 돌아보지 마라, 초등학교 아이들 운동회 할 때 보면 '' 하는 소리가 나는 즉시 막 뛰는 녀석도 있지만 어떤 아이는 뛰다말고 엄마 찾느라고, 엄마 확인하느라고 뒤돌아보다가 꼴찌 하는 녀석들이 있어요. 지금은 앞만 보고 달려도 모자랄 판인데 엄마는 왜 찾아요, 그 시간에. 예수 믿는 사람, 뒤돌아보면 안됩니다.

과거에 잘한 것도 볼 것 없고, 잘못한 것도 볼 것 없어요. 내 운명은 그리스도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 합당한 사람, 미래지향적인 사람, 그리스도만 목표로 하는 사람, 결단이 있는 사람, 그리스도께 전 운명을 위탁한 사람, 그리고 적극적인 사람, 하나님의 역사를 최우선적으로 절대 우선으로 하고 모든 것을 다 그 뒤에 두고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주님나라에, 주님의 제자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누가복음 95762)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자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믿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 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오늘 공부할 잠언은 예수님의 제자 되는 사람에 대한, 즉 제자도에 대한 아주 심각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엄격한 성찰 속에서 비상한 각오를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 앞만 보고 가야 할 사람이 뒤를 돌아보는 것처럼 그릇됨이 없다 하는 말씀입니다. 제자직의 본질을 말씀하심이요 제자됨의 성격을 말씀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할 때에는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그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오늘도 보면, 예수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슬렘 세계나 공산주의 사회가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하고 나서는 순간에 이에 따라 많은 손해가 따릅니다. 직장에서 떨려납니다. 좋은 직장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혼을 당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정에서도 떠나가게 됩니다. 유산을 못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그 마을에 살지 못하고 쫓겨나기까지 합니다. 재산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지금도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생명까지 빼앗기는 사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찍이 우리 나라에서도 그랬고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 믿는 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했습니까? 저는 생각합니다. 순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순교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순교적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에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 오는 모든 불이익을 다 받아야 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순교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참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순교적으로 살지 않는다면 예수 믿는 참 맛, 참 기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참 행복,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는 위대한 용기와 평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예수 믿는다는 것의 뜻이 무엇이며 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름에는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장사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 할것없이 다 자세가 중요합니다. 기본자세를 바로해야 합니다. 운동도 그렇습니다. 많은 시간 운동을 해도 기본자세가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좋은 성과를 얻을 수가 없어요. 특별히 예수 믿는 데도 처음부터 바른 자세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에, 제가 이름은 대지 않겠습니다만, 제가 자랑하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본인들을 위해서는 이런 자랑을 한다는 게 뭣합니다마는 그분들, 교회에 처음 나온 날부터 한결같이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더니 벌써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하는 것을 보아요. 처음 나을 때의 그 자세가 세월이 가도 한결같습니다. 시작했다 하면 끝을 내는 이런 분은 정말 칭찬을 하고 싶어요. 사람이 무엇을 한다 하면 그래야 합니다. 하다마다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해서는 못씁니다. 도대체 시원치가 않은 것입니다. 시작했다 하면 어기차게, 끈기 있게 나아가는 사람은 정말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그래야 합니다.

나아가 합당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를 얻는다는 것은 하나를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하나를 얻기 위하여 아홉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하나를 얻기 위하여 전체를 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버리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버리지 않고 다 얻겠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시는 대로 공부를 하려면 놀지 못합니다. 진실하려면 거짓되지 못합니다. 성실하게 살려면 손해 많이 봅니다. 각오해야지요. 이런 각오가 없다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조금 더 어려운 말로 말씀을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종말론적 시간은 과거와 철저하게 결별하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결혼하는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결혼을 했으면 그날부터는 그전의 일을 말끔히 잊어버려야 합니다. 애인이 열이 있었든 백이 있었든 상관하지 말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것은 결혼하고 나서 옛날 애인하고 편지 주고받던 것 버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것 숨겨놓았다가 들켜 가지고 말썽이 되지 않습니까? 어쩌자는 것인지 그런 것을 장농 깊숙이 숨겨놓았다가, 사진까지 숨겨놓았다가, 끝내 이것이 말썽이 되지 않습니까? 깨끗이 잊어버려야 합니다. 친정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친정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시원치 않은 사람입니다. 출가외인(出家外人)이라고 했습니다. 시집을 가면 그 순간부터 이제는 시집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합니다.

종말론적 시간에는 현재와 미래가 있을 뿐 과거는 없습니다.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이 요구됩니다. 딱 끊어버릴 것이 요구됩니다. 과거가 좋았든 나빴든 상관이 없어요. 과거가 부끄럽건 자랑스럽건 문제삼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오늘부터는 종말론적 생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과 약속된 미래가 있을 뿐입니다. 과거는 망각 속에 묻어야 합니다. 지난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영겁 속에 결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가 뒤를 돌아봄으로 예수님께 합당치 않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가정에 애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정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예수님의 제자 됨이 더욱 중요합니다. 결단의 순간에 가서는 가정보다 예수님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너무나 가정적인 사람을 봅니다. 그 살림이 너무 좋아서 무엇을 만들어놓고 쓰다듬고 애지중지하는 사람들 보니 신앙생활이 시원치 않습디다. 사실 신앙생활에 열심 하다 보면 가정생활은 좀 대충대충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가정적이다'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가정이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중요한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원수가 네 집안 식구니라" 종말론적 시간 앞에서는 때로 가정이 원수가 될 수도 있다 하심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다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책에서도 읽고 본인에게도 물어보았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물어보고 확인한 이야기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상처(喪妻)를 했습니다. 후처를 맞았습니다. 그분은 변호사 출신입니다. 그런데도 주기철 목사님을 위해서 전처의 아이가 셋이나 딸린 목사님의 부인이 된 것입니다. 핍박이 오자 목사님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래서 홀로 자기가 낳은 것도 아닌 자녀들을 키우게 되는데 조금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목사님들은 다 신사참배 하면서 적당히 넘어가는데도 당신은 왜 감옥에 갇혀 가지고 내가 낳지도 않은 자식들을 나한태만 맡겨 이 고생을 시키는 거요?"하고 불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철저했습니다. 목사님이 감옥에서 너무도 어렵게 고생을 하시므로 장로님들이 돈을 모아 교섭을 해서 목사님은 잠시 병 보석을 받게 되었습니다. 밤중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문을 두드립니다. 사모님이 나와 문을 엽니다. 보니 목사님이 서 있습니다. 반색을 할 사모님이 뜻밖에도 냉정합니다. "웬일이오?" 차갑게 묻습니다. "모르겠어. 나가라고 하기에 나왔지 뭐."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그러자 부인이 말합니다. "살아 돌아오면 당신은 내 남편이 아닙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꼼짝을 못하고 괴로워했다 합니다. 순교해야 할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면 내 남편이 아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주기철 목사님의 일생을 영화로 만들 때, 사모님이 이런 말하는 대목을 커트해 버렸다고 합니다. 너무나 비인도적이라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해 못하니까 이 장면을 그대로 살리면 재미가 없을 것 같다고 해서랍디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느 결정적인 시간에 가서는 가정도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을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에 절대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 오늘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은 가정을 일일이 돌아볼 수가 없지요. 저는 가끔 부부가 되어 유학 가는 사람들 보면 부탁을 합니다. "공부한다는 문제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남편의 시간을 뺏을 생각 마라."밤 한 시에 귀가하든 두 시에 귀가하든, 밤새껏 공부를 하든, 공부하는 자의 아내로서 공부하는 문제에 관한 한은 전적으로 도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충고해줍니다. 공부하러 간다고 가놓고는 주말 되면 놀러가고 방학 때면 여행이나 가고, 그렇게 하다보니 성적이 떨어져서 그만 좌절하고 마는 경우를 흔히 보는 것입니다. 가정은 중요합니다. 사랑도 중요합니다. 환경도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마는 종말론적 순간에 와서는 그리스도께서 우선을 두어야 합니다. 미온적 신앙. 소극적 신앙, 미 결단적 신앙, 혹은 분명치 않은 신앙, 혹은 뒤로 미루려고 하는 소극적인 신앙 -이런 신앙은 합당치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말씀하는 바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세 가지 유형의 사람 가운데 첫번째 사람은 충동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높은 것을 보고, 또 그 능력이 굉장한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것을 보고, 따라가면 괜찮겠구나 싶어서 충동적으로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57)" 일시적 감정으로 이렇게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즉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부잣집 아들인 모양인데 나 따라오면 고생한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심입니다.

이런 충동형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조금만 핍박이 있으면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신앙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비근한 이야기가 될지 모릅니다마는, 저희 교회에 특히 처음 나오시는 분들에게는 나오시자마자 바로 "등록하십시오" 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등록하라고 권유합니다. 일시적인 충동에서 해놓으면 뒤에 가서 으레 문제가 있습디다. 우리 교회 나오시는 분들은 6개월 뒤에 등록을 하게 합니다. 6개월 동안 다녀보고 확신이 생기면 등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좀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시적이고 감상적인 신앙에는 으레 문제가 따릅니다. 꾸준해야 합니다. 별로 많이 남지 않은 생을 살면서, 비상한 결심으로 출발할 것입니다.

본문의 두 번째 사람은 갈등형입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 합니다. 이 대목을 두고 교회에서는 두 갈래의 해석을 하는데, 그 하나는 당장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장례식이나 치르고 따르겠다는 것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그럴듯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는 부모에 대한 사명을 다하게 해달라는 청으로 보아야 합니다. 나는 맏아들이니까 부모님을 모시고 있으니 만큼 부모님 세상 떠날 때까지 책임을 다하고 나서 따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아프리카의 어느 똑똑한 청년에게 장학금을 주겠으니 와서 공부하라고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답신이 왔는데, "아버님 장례식을 치르고 가겠습니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 나이가 몇이냐?"하고 물었더니 "40입니다" 하더랍니다. 그래, 이 사람은 과연 몇 살이 되어야 학교에 올 것 같습니까? 부모를 모시고 효도를 다하고 장례를 치른 다음에 무엇을 하겠다 - 좋은 이야기 같지만 반드시 옳은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야 무슨 일을 하겠어요? 본문의 두 번째 사람은 관습에 매인 사람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히브리사람 나름의 관습이 있거든요. 장자는 부모를 모셔야 한다, 부모님 모시는 한에는 곁눈을 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 우리 나라의 인습으로 보아도 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들은 십리 밖을 못나가게 되어 있어요. 옛날에는 전화도 없고 하니까 멀리 출장 다니면 안되었습니다. 항상 부모님 가까이에서 살아야 합니다. 부모님을 위해 그렇듯 정성을 다하고 효성을 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효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인습이다 효도다 하고 가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한 다음에 언제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순교할 길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죽으면 부모님은 누가 모시나' 걱정해서 순교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옛날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홀로 계신 어머니가 마음에 걸려서 기피를 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이리저리 숨어 다니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끝내 군대에 가지 않고 목사가 되었어요. 그분이 제일 어려워하는 게 뭐냐하면 청년들이 입대하면서 기도 좀 해달라고 하는 것이랍디다. 군에 안 가려고 도망 다니던 사람이 그런 기도를 해주자니 하도 괴로워서 고민하던 나머지 결국은 사표 내고 이민을 가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왜 사표 내고 이민을 가는지 몰랐어요. 가는 날 아침에야 그 비밀을 저에게 털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만회할 길도 없지 않습니까? 부모에 대한 의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따를 마음이 있습니다마는 부모를 장사한 다음에 따르겠습니다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니 어떡하면 좋을까 하고 갈등을 겪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확실한 결단이 없는 분을 주변에서 숱하게 볼 수 있습니다.

Priority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해서 이것은 첫째고 저것은 둘째고 그것은 셋째다 하고 뚜렷이 선을 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 가정의 일, 나의 일 해서 이 일이 먼저냐 저 일이 먼저냐 하고 갈팡질팡하다보면 이 일도 안되고 저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용의주도형입니다. 앞보다도 뒤에 있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주저를 합니다. 이래서 문제가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것도 주저해서였습니다. 확실한 결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멀찍이 서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주저주저하다가 어려운 시험에 들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번 이들 세 유형의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첫번째 사람은 안일한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낮은 처우에 대해서, 예수님과 더불어 고생하는 일에 대해서 감수할 각오가 필요했는데, 예수를 믿어서 더 잘살려 하고 더 명예로우려고만 했지 고난받을 각오는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현실적인 이익이 올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의 의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를 믿음으로 오는 이해득실을 헤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된 것으로 충분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족한 것입니다. 달리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로 믿는 사람입니다. 집이 있다면 천국의 집이요, 평안함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모신 기쁨으로 평안합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을 보면 그에게는 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해야 될 일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싶은 일 쪽으로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세 번째 사람에 대해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하고 이 사람은 말합니다.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합니다. 떠나는 마당이니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라도 하겠다는 '인지상정'에 대하여 예수님은 참 박절도 하시다 싶습니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합당치 않다 하실 뿐입니다. 그토록 비상한 결단을 요구하심입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이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공처가였던 것 같습니다. 집에 인사하러 갔다가는 못 빠져 나올 위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의지가 박약해서 아내가 붙들고 늘어지면 그대로 주저앉을 위인이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점을 아시고 계셨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인사하러 가지 마라, 너 인사하러 갔다가는 못 돌아 나온다 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자기 의지를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나약한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께 합당치 않습니다. 결단은 혼자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실존적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누구하고 의논합니까? 예수님의 제자 되는 것을 누구하고 의논할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해결할 문제입니다.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목사님들 가운데도 공처가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 오늘 부흥회 가도 되나요?" 이렇게 사모님한테 묻고, "가지 마세요"하고 사모님이 말리면 그대로 주저앉고 마는 사람이 있습디다. 어느 목사님은 미국에 유학을 가는데 반대하는 아내를 겨우 설득하여 2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약속하여 건너갔지만, 공부를 해보니 이삼 년 더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 아내한테 더 참아달라고 편지를 했더니 답장이 오기를 '누굴 죽이려고 그래요?' 하고 당장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모님, 고생도 하긴 했어요. 남편 없는 동안에 하숙을 켰어요. 2년 고생도 힘들었겠지요. 그 목사님, 결국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공부도 못 다하고 되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 저도 보았어요.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앙적 문제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배한 문제에는 의논이 필요 없습니다. 의논을 기대하지도 말 것입니다. 무슨 의논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의논을 한다면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물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임을 안다면 탱크처럼 밀어붙일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사람 집에 돌아가서 인사하겠다고 합니다. 그를 보고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공교롭게도 한국에서 농사짓는 것과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농사짓던 것이 비슷합니다. 왼손에 쟁기를 잡고 오른손에 채찍을 들고 두 마리의 소를 때리면서 밭을 갈아나가는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 이 일을 조금 해보았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밭갈이를 하실 때에 들에 나가니까, 사람이 살아가려면 다 해보아야 한다고 하셔서 한 시간동안 해보았는데, 참 힘들더군요. 쟁기가 무겁기도 하지만 소걸음이라는 게 얼마나 느립니까? 그러나 쟁기를 땅에다 대고 보니까 얼마나 빠른지 모르겠어요. 똑바로 대어야 되는데, 이렇게 대어나가면서 내가 지금까지 제대로 했는지 궁금해져서 뒤를 돌아보고 싶어져요. 그런데 한번만이라도 돌아보았다가는 이놈의 쟁기가 벌써 하늘로 쳐 들려버려요. 그 때에 저희 아버님이 철학적으로 말씀하십디다. "쟁기는 발 밑에 있지만 너는 항상 저 앞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현재에 살지만 우리의 이상은 항상 저 앞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그럼 왜 돌아보느냐?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해왔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내 과거가 제대로 되었는지 궁금해서 뒤돌아보는 순간에도 쟁기는 계속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중단 없이 가고 있어요. 소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딱 멈추어놓고 돌아보면 모르거니와 쟁기를 잡고 내 고개를 뒤로 돌리면 현재를 망치는 것입니다. 미래도 망치는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잘되었든 못되었든 끊어버려야 합니다. 완전히 결별해버리고 오늘과 내일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는 누구 손에 있느냐-이것은 과거의 연장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위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미래는 과거와의 연결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느냐가 상관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이제부터의 운명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만 쳐다보면 됐지, 과거는 왜 보는 것입니까? 과거를 왜 의식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가 거기에 있습니다. 미래가 중요하고, 앞만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본질입니다. 이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갈 것입니다. 뒤돌아보지 마라, 앞으로 가는 사람이면 뒤를 돌아보지 마라, 초등학교 아이들 운동회 할 때 보면 '' 하는 소리가 나는 즉시 막 뛰는 녀석도 있지만 어떤 아이는 뛰다말고 엄마 찾느라고, 엄마 확인하느라고 뒤돌아보다가 꼴찌 하는 녀석들이 있어요. 지금은 앞만 보고 달려도 모자랄 판인데 엄마는 왜 찾아요, 그 시간에. 예수 믿는 사람, 뒤돌아보면 안됩니다.

과거에 잘한 것도 볼 것 없고, 잘못한 것도 볼 것 없어요. 내 운명은 그리스도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 합당한 사람, 미래지향적인 사람, 그리스도만 목표로 하는 사람, 결단이 있는 사람, 그리스도께 전 운명을 위탁한 사람, 그리고 적극적인 사람, 하나님의 역사를 최우선적으로 절대 우선으로 하고 모든 것을 다 그 뒤에 두고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주님나라에, 주님의 제자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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