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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의 고향(마가복음 6장 1절~6절)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 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하시는 본문 4절 말씀이 오늘의 잠언말씀입니다. 이를 줄여 말하면 곧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니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왜 방문하셨는지 성경 문맥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만,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교훈에 준하여 볼 때 몇 가지로 추측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고향에 돌아가셔서 잠깐 휴식을 취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분주한 생활에서 잠깐 뒤로 물러나 좀 쉬시려 하셨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번 떠나면 예수님의 전도여행은 전부가 다 객지여행입니다. 남의 집에서 주무시고 남의 집에서 잡수셔야 합니다. 모든 생활이 다 낯선 것들입니다. 단 한번도 안온한 가운데에 유하신 일이 없습니다. 3년 동안의 전도생활이란 그야말로 나그네생활이었습니다. 그래 잠깐 휴식을 취하시려고 고향에 들르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가족들을 만나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만, 누구나 고향에 돌아가면 얼마나 이야기가 많겠습니까? 어머니 마리아는 얼마나 많은 것을 궁금해하였겠습니까? 더욱이 아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소문을 듣고 있는 터입니다.
그러니 이래저래 이야기가 많았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고향을 찾으신 이유는 그런 예사로운 이야기를 하시자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 있는 십자가를 설명하시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만나고 떠나면 이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정을 끊고, 마지막 길을 떠난다는 의미에서 저들을 찾아오셨던 것 같습니다. 핍박은 날로 심해지고. 앞에 있는 선교적인 역사, 그 영역은 점점 넓어지면서, 다시는 고향에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기 때문에 찾으신 것 같습니다.
하나 더 중요한 이유를 든다면, 아마도 이것은 틀림이 없을 것으로 추리해봅니다 마는, 고향에 있는 분들에게 전도를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말씀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절)" -혈육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 스스로는 그리스도께로서 끊어져도 좋다고까지 말씀합니다. 그 스스로는 그리스도께로서 끊어져 지옥으로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내 민족 내 친척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그는 동족을 사랑했고 골육친척을 사랑했습니다. 이는 실제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 다 구원 못 받더라도 나만 구원받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내가 구원 못 받더라도 그래서 다른 사람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제 그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 가심에 고향을 예외로 둘 수가 없으셨습니다. 우리가 부모, 형제, 친척, 자녀들을 내 가까이 늘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 역시 당신의 혈육들이 주님 앞에 나아오기를 바라 마지않으셨습니다. 고향사람들이 먼저 예수 믿기를 바라셨습니다.
믿어도 더 잘 믿기를 바라셨을 것은 당연합니다. 복음이 그토록 소중한 것일진대 내 가까운 사람이 먼저 이 복음을 받아주기 바라는 마음, 먼저 믿고 구원받기 바라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의 형제들 가운데 야고보와 유다 두 사람이 예수님을 위하여 제자가 되고 마지막까지 귀한 선교 역사를 이루다가 결국은 순교까지 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혈육들에게 복음을 전할 양으로 고향을 방문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찾아가셔서 만나셨는데 그 반응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건들에 대해서 다들 인정은 합니다. 행하신 기적, 베푸신 교훈, 보이신 능력, 지혜, 위상, 그 놀라운 인격, 또 사람이 되신 것까지도,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까지도 생각들은 합니다. 그러면서도 거부합니다.
배척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섭섭한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시게 됩니다.
자, 이제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이를 사람들이 압니다. 특별히 가버나움에서 많이 고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병 고치는 의사로, 훌륭한 의사로만 영접했을 뿐입니다.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병 고침 받은 사람들부터가 주님을 배척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기도하고 능력을 받아서 또 은혜 가운데서 병고침 받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으로 말씀할 수 있는 것은 병 고침 받는 것과 신앙과는 별도입니다. 병 고침 받았으면 병 고침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끝납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병 고침 받은 것은 병 고침 받았다는 사건 하나로 그치고 맙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훌륭한 의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연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많은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도 그같은 능력을 볼 수 있다면 아마도 굉장할 것입니다. 텔레비전 방송에서 두고두고 리바이벌해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나 엄청난 기적을 눈앞에 보면서도 사람의 마음에는 기적에 대한 놀라움과 호기심 이상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도 기적을 바라고 표적을 바라고 나오는 사람은 바른 신앙에 서지 못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데, 하나님을 못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기적은 하나의 놀라움에 머물고 맙니다. 나와 상관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기적을 많이 보았습니다. 가버나움에서는 특별히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마 11:23)" --이런 말씀까지 하시게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교훈의 깊은 뜻은 받지 않고 교훈 자체에 놀라기만 합니다. 예수님을 한낱 훌륭한 성현으로만 쳐다볼 뿐입니다. 랍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고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조차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기적을 안믿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병 고친 사실을 부인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 가르침의 놀라움을 부정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말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병 고침 받고 기적이나 믿는 것으로 예수 믿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 예수 믿는다는 말의 개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재림, 그리고 하나님 되심을 믿는 신앙에서부터만 예수 믿는다는 내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간증합니다. "말씀이 육신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령 받은 다음의 간증입니다. 성령 받아 깨닫고 이제 참으로 예수를 믿고 나서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3년을 같이 다녔는데 내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합니다. 이래야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여기에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데는 몇 가지의 중요한 문제가 더 있습니다.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거리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가 능력의 출처에 대한 의심이었습니다. 깜짝 놀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그 근원을 궁금해합니다.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합니다.
그 다음에는 출신을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하고 배척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한 나머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요한복음 1장 11절은 말씀합니다. 참 모순이지요? 그러나 사실이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 6절을 보십시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이 각지에서 들려올 때에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 3 : 21)" 합니다.
백성들과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사람들부터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이 선지자의 고향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배척했는지, 우리는 더 심층적으로 연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 때문입니다. 잘못된 지식 때문입니다.
여러분, 공부를 한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인다 연구를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어야 합니다. 이는 중요한 일입니다. 새로운 정보를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달나라를 못 가봤어도 달나라 갔다온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믿어야 합니다. 제가 평양을 다녀와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저마다 "어떻습디까?" 합니다. 그리고는 자꾸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그래서 가끔 이야기를 해주면 "그 동안에 똑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마는 그래도 긴가민가했는데, 목사님이 말씀하시니 이제부터는 믿기로 하겠습니다"해요."이제부터는 믿겠다" --그만큼 믿기가 어려웠다는 반증입니다.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 해도 우리는 들음으로써 정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보는 것도 그렇습니다. 본다고 다 믿을 수 있습니까? 보는 것을 내가 믿어야 지식이 성립합니다. 새로운 지식을 수용해야 합니다.
새로운 정보를 수용해야 합니다. 어떤 경로로든지 수용할 것입니다. 귀로 들었건 눈으로 보았건 손으로 만졌건 남의 얘기를 들었건 간에, 간접적으로 듣건 직접적으로 듣건 간에 정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귀가 너무 넓어도 걱정이지만 귀가 너무 좁아도 문제입니다. 받아들이는 마음, 수용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Receptively(수용성)가 좋아야 지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옛 지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옛날 옛날 아주 옛날에, 거울이 없을 때인데, 심심 산골에 사는 새 신랑이, 결혼한 지 아직 몇 달밖에 안되었는데, 나뭇짐을 지고 장에 가서 팔았습니다. 돈을 손에 쥐고 보니 아내에게 뭘 좀 사다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장터를 돌아다니는데 생전처음 보는 물건이 눈에 띄기에 "이거 참 좋구나"하고 샀지요. 그것은 거울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방 안 한쪽 벽에 그 거울을 걸어놓고 외출을 하는데, 아내가 들어와 그 거울을 들여다보니 웬 예쁜 여자가 보입니다. 이 아내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습니다. '이 양반이 나무 팔러 장에 가더니 어디서 예쁜 첩을 하나 얻어왔구나!' '당장에 시어머니한테 쫓아가 하소연합니다. 며느리의 말을 듣자 시어머니가 달려와 역시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웬 늙어빠진 할머니 하나가 거기 보입니다. "에잇, 첩은 무슨 첩"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어디서 할망구를 하나 데려다놨구먼!"
모름지기 이전에 가졌던 지식을 빨리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것,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transforming world view'가 문제인 것입니다. 세계관의 전환이 요구됩니다. 세계관은 한마디로 말하면 집단습관입니다. 오랜 세월 쌓여온 습관입니다. 생각 속에 굳어 있는 습관입니다. 이것을 빨리 버려야 합니다. 옛것을 버려야 새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버리지 못할 때에는 새것이 들리어도 소용없고 보이어도 소용없습니다. 지식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지식을 교정하는 것입니다. 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있지만 오늘 새로운 것을 듣고 잘못을 알면 과감히 고쳐야 합니다. 빨리빨리 고쳐야 합니다. 민첩하게 고쳐야 합니다. 생각이 고루하고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람은 공부가 안됩니다. 그 옛날 개화기에 우리 나라에도 그런 문제가 있지 않았습니까? 새로운 지식이 물밀듯이 들어올 때에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이 있고 거부한 사람이 있습니다. 상투를 틀고 앉아서 "한문을 공부해야 한다"고만 고집을 부렸습니다. 한문이 어느 나라 글입니까? 중국 글이지 우리 글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것 우리 것 하면서 고집을 부렸어요. 생각을 고칠 줄 모르는 사람의 어리석음이지요. 모름지기 전이해(前理解)를 버려야 합니다.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늘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두 청년이 산에 올라갔습니다. 산 속에 있는 조그마한 오두막 별장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밤에 모기가 마구 들어오니까 덥지만 좀 참고 지내자 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놓고 잠을 청했지만 문을 꽉 닫아놓았으니 너무 더워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견디다못해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안 열립니다. 아무리 해도 안 열립니다. 둘은 유리창을 깼습니다. 쨍그랑하고 유리창이 깨졌습니다. "아, 이제 좀 시원하구나"하고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옷장문이 깨져 있습니다. 간밤에 유리창을 캔 것이 아니라 옷장 유리를 깨뜨렸던 것입니다. 시원했을 리가 없는데 그들은 시원하다며 잤습니다. 바람이 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말입니다. 이런 현상을 전이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렇듯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이 관념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빨리 버려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 교회에도 그런 일이 좀 있습니다. 특별히 저 미국에 있는 교포 교회들, 이런저런 분쟁이 많아요. 교인들이 얼마 안 되는데도 자꾸 갈라집니다. 그 때문에 목사님들이 늘 걱정을 해요. 장로님들도 모여 앉으면 교포 교회들이 왜 툭하면 갈라지는지 몰라합니다. 저는 이분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 "해답은 간단합니다. 교인들이 여기 모였으나 어떤 사람은 순복음교회에서 왔고 어떤 사람은 영락교회에서 왔고 어떤 사람은 소망교회에서 왔고 어떤 사람은 성결교회에서 왔고 어떤 사람은 감리교회에서 왔고…… 이렇게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머리 속에 나름대로의 교회관이 있어요. 공부하고 생긴 관념이 아닙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이런데, 영락교회는 이런데, 소망교회는 이런데, 순복음교회는 이런데 하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니 안 갈라질 수가 있습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빨리 버리고 목사님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회관을 정립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분열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옛 경험입니다. 경험이라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실은 경험에 집착하다가 새로운 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경험을 너무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잘못된 경험은 없는 것만도 못합니다. 경험하면서 지식은 점점 멀어집니다. 고집만 생깁니다. 경험 많이 한 사람들이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도 인정을 해야 되는데 자기 경험만이 제일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먹을수록 고집만 많아지게 됩니다. 자기가 다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지극히 적은 경험을 보편화하는 것처럼 무서운 죄가 없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하찮은 경험인데 그것을 절대화하고 보편화하고 일반화하려듭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경험한 작은 사건일 뿐입니다. 이 점을 인정하고부터 새로운 지식의 세계가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욕망입니다. 욕망을 비워야 됩니다. 지나친 욕망이 있으면 안됩니다. 요새도 보면 여러분 가운데 그런 분이 많습니다. 아들은 이과(理科)를 가려고 하는데 부모는 법과에 가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부모와 자식이 다툽니다.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부모 생각대로 하면 효자라 하고, 자식의 가치관대로 살겠다 하면 불효자라 합니다. 욕망이 문제입니다. 욕망을 비워야 생각이 맑아지고, 생각이 깨끗해져야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굳어진 욕망에 노예가 되어 있으면 새로운 지식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이른바 'Dissimulation (異化)'이라고 하는 이상한 사고형태가 생겨납니다. 가까운 사람하고는 멀고, 먼 사람하고는 가깝습니다. 한국사람들이 일본사람과는 잘 못 지내고 미국사람하고 친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현상이 '디시뮬레이션'입니다. 잘 아는 사람하고 멀고 모르는 사람하고 가까워요. 참 잘못된 일입니다. 가까운 사람하고 더 가까워야 되는데 가까운 사람끼리는 존경심도 없고 신뢰감도 없습니다. 그리고는 모르는 사람만 존경합니다. 이래서 인류역사를 개관해보면 어느 민족이든지 그 민족의 왕이 된 사람은 그 민족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 outsider가 왕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나라도 단군, 단군 하지만 단군이 어디서 온 사람입니까? 실은 저 몽고에서 온 사람입니다. 일본의 옛 '천황'도 백제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왜 이럴까요? 가까운 데에 있는 사람은 너무 잘 아니까 존경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밖에서 오는 사람, 이 사람을 존경하고 이 사람에게 신뢰가 갑니다. 참 묘하지요? 알수록 더 신뢰가 가야 되는데 알수록 점점 더 무시하게 되고 거기에 시기 질투까지 더해집니다. 모르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종교도 그렇습니다. 어느 종교든지 그 종교가 발생한 그 민족과 지역에서 성공한 종교가 없습니다. 불교도 인도에서 시작됐지만 태국에서 성공하고 중국에서 퍼집니다. 발생한 그 현지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기독교도 유대나라에서 시작됐지만 유럽으로 들어가고 한국까지 온 것입니다. 유대나라 예루살렘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 이래야 됩니까? 그 마음속에 선지자의 고향 같은 잘못된 개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지요? 좋아도 하고, 환영도 하는 것 같은데 믿지를 않고 존경하지를 않아요. 편견이 따릅니다. 옛 경험에 묶여 있습니다. 옛날 이야기를 자꾸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볼 때에도 이 사람 목수출신이 아니냐? 이전에 목수였는데 어느 사이에 어디서 이렇게 배워왔는고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풀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30년 동안 지내던 목수생활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환영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영접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보지 못하고 세속적인 세계. 인간적인 세계에서 예수님을 보니까 "아무개 집 목수 아니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다윗 왕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베들레헴의 목자였습니다. 아주 작은 한낱 목자였습니다. 그 아버지나 형제들도 변변찮게 여겼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서 유대나라 왕이 됩니다. 아모스 선지는 드고아의 목자입니다. 뽕나무를 재배하던 사람입니다. 소 몰던 농사꾼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에 선지지가 됩니다. 결코 우리는 편견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일에든지 '선지자의 고향'같은 생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가끔 목사 사모님들만 모이는 모임에 가서 강연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한마디씩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 사모님들 조심해야 합니다. 삐끗하면 천당 못 가기 쉽습니다." 왜 그럴 것 같습니까? 아침에 부부싸움을 하고 나왔더라도 일단 목사님이 단에 서서 설교를 할 때에는 하나님의 종으로 받아들이고 은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부싸움 하던 것이 자꾸 생각나거든요. 그래서 "사랑하라"고 하면 '말은 잘하네', "용서하라"고 하면 '입술에 침이나 발랐나'합니다. 만일 이렇게 30년이 흘러간다면 천당 가겠습니까, 못 가겠습니까? 이거 문제 아닙니까? 심각한 문제입니다. 일단 목사님이 강단에 섰을 때에는 그가 내 아들이든 내 조카든, 내 동창이든 내 남편이든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 딱 쳐다보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orientation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게 됩니다.
교역자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지면 제일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못 보게 됩니다. 설교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지자의 고향'과 같은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것은 여간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편견에 매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목사님이 어느 학교 출신이든 어느 지방 출신이든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가운데 미국에서 목회 하시다가 우리 나라의 모 교회에 목회활동 하러 나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 학교 동창들의 권유로 그 교회에 나가시게 된 것입니다. 제가 알았으면 가시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동창이 오라고 해서 가셨으니, 이것이 문제입니다. 가끔 가다가 신자들이 그 목사님보고 '자네'하고 나옵니다. 목사님에게 '자네'하니 되겠습니까? 그 동창 되는 분은 결국 한번도 진실한 의미에서 목사님으로 강단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역자들은 이런 말들을 합니다. 동창이 장로로 있는 교회에는 가지 말라고. 사실은 고향으로 가지 말아야지요. 예수님께서도 못하셨는데 우리가 거기 가서 일이 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선지자의 고향에는 질투가 있습니다. 다 같은 사람으로 보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저 양반, 대학 나온 것도 아니고 박사도 아닌데 어느 사이에 저렇듯 훌륭해졌단 말인가 하는 질시가 따릅니다. 투기와 질시, 자기보다 큰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어요. 결국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게 됩니다. 선지자의 고향 같은 마음 --- 조심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뭐 좀 안다고, 여기에 매여서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아볼 수 없다면, 어느 사이에 그는 선지자의 고향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더는 선지자를 영접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선지자의 고향 같은 마음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알아도 좋고 친해도 좋고, 설사 그가 내 아들이라도 좋습니다. 그가 일단 강단에 섰다면 우리는 순수한 의미에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라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장면, 12세 때에 생기는 일, 이 모든 사실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비록 자신이 키운 아들이지만, 그 이루어지는 사건 속에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있는 것을 조용히 생각하고 그 모든 사실을 늘 마음 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예수님을 아들로서 영접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메시야로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더 친하고 더 알고 더 가까워질수록 믿음도 강해지고 하나님의 종으로 영접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선지자의 고향 같은 위치를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선지자의 고향을 만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선지자의 고향을 만들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정실에 매이든가 인간적인 지식에 사로 잡히든가 편견에 붙들리게 되는 순간, 가장 소중한 신령한 권세, 영적인 위상,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그 카리스마적 권위를 놓치게 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잊지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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