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 5 결박과 광기 막15:1~15
◑서론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다섯 번째 살펴보고 있습니다.
특별히 막14장과 15장은, 십자가를 앞두고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십자가가 점점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속에 있는 것들,
그 민낯들이 무엇인지를 다 겉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그런데 드러나는 것들을 보면, 추악한 죄들이죠.
그 죄악들, 또 연약함들이 하나씩 둘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아주 특별한 영적인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가 내게 다가올수록,
또는 우리가 십자가 앞에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연약함들이 드러나게 된다는 거예요.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처리하셨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내가 그 죄의 문제를 인식하고, 인정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죄의 문제는
절대로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처리하실 때도
그것을 인정하고, 인식하게 하십니다.
우리 구원의 문제도 그렇지 않습니까?
총체적으로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회개했을 때
구원이 우리에게 역사하게 되듯이,
모든 죄의 문제에는 동일한 프린스플(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 죄의 문제를 인식하고 인정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거예요.
자,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 앞으로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한 발짝, 두 발짝, 가까이 오면 가까워질수록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드러나게 하심으로
우리가 무슨 죄 가운데 있는지를 알게 하시고
또한 예수께서 그 죄를, 어떤 죄들을 처리하셨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알 수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다가올수록.. 드러나는 그런 당황스러움(죄)들,
또 우리 안에 있는 죄악들,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
그것은 당황하실 필요가 없고, 감사하셔야 됩니다.
'아, 예수께서 이것을 드러나게 하시는 것은
이미 처리하셨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고
또 내가 거기서부터 자유함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구나'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본문 막15장도 역시, 14장에 계속 이어서
"십자가가 드러내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장에서는 제자들과 함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잡혀가시는 것까지가 기록돼 있다면
15장은, 이제 본격적으로 잡혀가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시기까지
이야기가 15장~16장으로 쭉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십자가가 드러내는 세 가지 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어요.
사실은 세 가지가 아니고 한 6~7가지 돼요.
설교 준비하다 보니까 그걸 다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세 가지만 뽑았는데
여기 보면 폭력도 나오고, 고발하는 것도 나오고, 정죄도 나오고, 불법도 나오고
여러 가지가 나오죠.
불법도 나옵니다. 사실은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 누구를 놓아주는 것이 의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놓아주는 것이 의이지요.
바라바는 폭력을 일으키고 살인했던 자입니다.
당연히 벌을 받는 것이 정의인데, 오히려 그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게 되는 불의함.. 이런 여러 가지 죄들이 등장하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그걸 다 다룰 수는 없고,
그 중에 세 개만 뽑아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결박 - 끌려감 - 광기
◑1. 결박
첫 번째 살펴보려고 하는 십자가가 드러내는 죄의 모습은 1절입니다.
막15:1절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본문에서 발견하게 되는 첫 번째, 십자가가 드러내는 것은 "결박"이에요.
예수를 꽁꽁 묶었습니다.
죄는 "결박"이라는 저주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가치가 뭘까요?
성경에서 '인간'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너는 인간이야' 라는 것을 규정짓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유'입니다.
사람을 어떻게 창조했나 보세요. 선악과를 만드심으로 창조하셨어요.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도 선악과를 주신 적이 없어요.
인간에게만 선악과를 주셨어요. 선악과는 자유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의지에 의해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거에요.
그것(자유)을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얘기하는 인간됨의 가장 핵심은 뭐냐면 '자유함'이에요.
이 '자유함'이 있어야, 거기서부터 믿음도 나오고요.
자유함이 있어야 관계라는 것도 형성되고
자유함이 있어야 사랑이라는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여러분, 자유가 빼앗기면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정의는 뭐냐면, 내가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권이
있는데 그중에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이게 자유거든요, 이게 사랑이거든요.
그래서 사랑은 자유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가장 인간되게 하는 성경적 인간론의 핵심 중의 핵심은 뭐냐면
'자유'입니다. 그것이 선악과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나서, 다른 모든 피조물과 인간의 차이를 두셨는데
그 차이는 인간에게만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선악과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피조물들도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유는
먹고 싶으면 먹고, 먹기 싫으면 안 먹고.. 그런 정도의 자유죠.
그러니까 제한적이고 차별적인 자유를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자유'의 레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존귀와 존엄한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높은 마지막 자유까지 다 주어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받은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자유'라는 것이 무엇을 나타내는가 하면
그의 '존귀함'을 나타내는 거예요.
존귀함이라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과 닮았느냐 하는 것을 나타내는 거예요.
존귀함의 가장 궁극적인 분은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래서 결국 이 자유의 척도는 뭐냐 하면 존귀함의 척도예요.
그래서 인간은 자유를 빼앗기면, 그 존엄성을 빼앗기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자유의 척도, 자유의 레벨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식물을 생각해 보세요. 나무나 꽃 같은 걸 생각하면
분명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체지만, 그에게는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가 없어요.
그냥 주어져 있는 자유가, 딱 나무와 풀이 누릴 수 있는 것까지의 자유예요.
반면 동물들은 그것보다 조금 더 많은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식물에 비해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가 있고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어요.
그러나 이 동물에게 주어져 있는 자유는,
본능을 절대로 거슬릴 수 없다고 하는 제약이 걸려 있어요.
그래서 연어는 다른 곳에 가서 알을 낳을 수 없고요.
반드시 자기가 태어났던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되는 본능이 있고
또 철새는 때가 됐는데도, 계속 거기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자유가 없어요.
철새는 때가 되면 반드시 가야 될 곳으로 가야 되는 본능을 거스릴 수 없죠.
자 그것이 하나님이 동물에게 부여하신 자유의 레벨이에요.
그 레벨까지 자유를 주시는 거예요.
동물이 자기 본능을 거스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창조주의 질서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는 거예요.
동물들은 하여간 창조주가 창조해 놓은 질서 속에서 자유를 누리지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진 적이 없어요.
▲그러나 사람은 달라요.
사람에겐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에게 주어진 자유 위에
한 단계 더 위에 '자유'를 주셨는데 그것은 뭐냐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를 수 있는 자유'까지 주신 거예요.
그것이 선악과의 의미죠.
선악과를 통해서,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주셨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를 파괴하고 깨뜨릴 수 있는 자유까지
하나님이 부여하신 거예요.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그래요.
(마치 하나님과 비슷한 자유를 가진 거죠. 물론 다르지만)
그런 존귀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거예요.
하여간 성경에서 그의 존귀함, 존엄함을 재는 척도는 뭐냐 하면
바로 '자유'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궁극적인 자유를 주셨는데
그래서 그 이상의 자유, 영광은 없어요. 피조물 중에.
그래서 인간을 인간되게 하고, 인간을 영적인 존재가 되게 하고
인간을 존귀한 존재라고 부르게 하고, 인간을 존엄하다고 얘기하는 그 핵심은
뭐냐 하면 '자유'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최고의 존엄과 가치와 축복과 위대함은
바로 '자유'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죄가 궁극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인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 같습니까?
네, 자유를 빼앗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요.
그래서 죄는 항상 그 방향성이 있는데, 어떤 방향성이냐면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것'의 의미는 뭐냐면,
인간성을 파괴한다는 거예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귀함을 파괴하고,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거예요.
그것이 결국 죄의 결과이고, 죄의 방향성입니다.
▲그래서 죄는 필연적으로 '결박'을 낳게 됩니다.
꽁꽁 묶어서 자유를 빼앗는 거죠.
결박이 의미하는 것은.. 물리적인 묶임 뿐만이 아니라
자유를 빼앗겼다는 거예요.
그래서 죄는.. 자유를 빼앗는 결박을 낳습니다. 여러 종류의 결박을 낳는데
그중에 몇 가지만 살펴보면
1) 첫째 <두려움>의 결박이 있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1차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뭐냐면, 죄책감과 함께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확 몰려오죠.
죄를 지었는데 전혀 두렵지 않다.. 이것은 양심의 화인 맞은 상태이고요.
조그만 죄든, 큰 죄든지 간에.. 죄를 짓게 되면 두려움이 훅 하고 몰려옵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들이 있지 않으세요?
거짓말을 하고 나서 계속 마음이 두근두근두근 떨려서 부들부들 떨었던 경험,
조그만 거 사기치고 나서는, 밤새도록 잠도 못 잤던 경험..
이런 경험이 있지 않으십니까?
뭐 어렸을 때라든지, 아니 나이 들었어도 가끔씩 하셨잖아요.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도둑질하고 뭐 이런 것들...
그러고 나면 두려움이 찾아와요.
'어, 큰일 났다. 이거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두려움이 훅 하고 몰려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잘 한번 관찰해 보십시오.
두려움은 내 자유를 뺏어가요. 무슨 자유를 뺏어가냐면
내가 벗어나고 싶다고 해서 벗어나지지가 않아요.
두려움 속에 계속 머물러 있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당연히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나지지가 않아요. 이게 뭐예요?
자유를 뺏겼다는 거예요.
자유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을 수 있어야 돼요.
자유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런데 '두려움'은 내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두려움으로, 자유를 빼앗기고, 그 자유를 빼앗긴 결과
두려움은 우리의 내면을 괴롭게 합니다.
잠도 잘 못 자게 하고 항상 불안하니까 쉼도 없습니다.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벗어나지진 않아요.
사실은 결박된 거죠. 두려움이라고 하는 끈에 꽁꽁 묶인 겁니다.
죄로 인해서 두려움에 결박된 것입니다.
2) 그리고 이렇게 두려움에 결박되게 되면,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도 제약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삶에서도 결박>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비행기를 타지 못하기도 하고
무대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 앞에 서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이 있으면, 특정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고소공포증이라고 하는 어떤 트라우마가 생긴 사람은 비행기를 타지 못해요.
그러니까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거죠.
비행기를 타야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데...
제주도 가려고 해도 배 타고 가야 되고, 해외는 가지도 못하고,
자기 자유를 심각하게 제약당합니다. 이게 두려움이 우리를 결박하는 거죠.
또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게 되기도 하고..
그러니까 두려움은 우리의 삶을 실제적으로 결박합니다.
또 두려움과 함께 동시에 찾아오는 게 뭐예요? 죄책감이 있습니다.
죄책감도 결박을 낳는데,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결박입니다.
죄책감은 어떤 결박을 만들어내냐면
스스로를 비하하고 부정함으로써.. 낮은 자존감에다가 나를 꽁꽁 묶어놔요.
낮은 자존감에서부터 탈출하지 못하도록, 나를 꽁꽁 결박시켜 놓는 거에요.
죄책감이 들어오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 나는 나쁜 놈이야' 이 생각이 들지요.
죄책감은 나를 '나쁜 놈'이라는 생각으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나는 쓸모없는 존재야 나는 벌을 받아도 마땅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 죄책감은 우리를 '낮은 자존감'이라는 기둥에다 꽁꽁 결박해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원래 지음받기를 하나님의 위대한 자녀로 지음받았어요.
저와 여러분은 존귀한 존재지, 쓸데없는 존재가 아니에요.
저와 여러분은 벌을 받아 마땅한 존재가 아니라, 축복을 받아 마땅한 존재예요.
저와 여러분은 나쁜 놈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은 존귀한 자예요.
복의 근원이고, 복을 누려야 될 존재이고, 복을 전해주는 존재예요.
그런데 그 존재가, 그 하나님의 약속에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컴컴한 지하실 구석에 결박시켜 버리는 거예요.
죄로 인한 죄책감은 우리를 시커먼 지하실 구석에다가 결박시킵니다.
지하실은 어떤 곳이에요? 햇볕이 들지 않는 곳, 항상 우울하고, 항상 비참하고,
항상 소망도 없고, 자유도 없는 곳에, 우리를 딱 가둬버려요.
딱 가둬서 결박시켜버립니다.
3) 셋째, 죄가 가져오는 결박은 <중독>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중독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삶의 좋은 것을 중독이라고 그러진 않죠.
내 삶을 파괴하고, 내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알아요.
그래서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나지 않는 것을 '중독'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무 좋아하고, 내 삶을 풍성하게 하고 복이 되는 거는 '중독'이란 말을 쓰지 않죠.
나는 '기도에 중독이 돼 있어' 그런 건 중독이라고 말을 안 하죠.
그래서 '중독'이라는 것은, 내 삶을 파괴하고 나를 계속 비참하게 만드는데,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은데 안 돼요. 그것을 중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라는 것은, 두려움이나 죄책감 같은 내적인 결박을 넘어서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을 결박해요. 거기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게 해요.
예를 들어서 음란물이라든지, 아니면 쇼핑, 거식증, 폭식증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스마트폰 중독,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 성중독,
도벽, 약물 중독에 이르기까지
죄는 수많은 중독에 우리를 묶어서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결박시켜요.
삶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거에요.
'내가 하고 싶지 않은데 안 돼요' 자유가 없어져요.
그래서 일단 결박이 되고 나면, 우리는 자유를 빼앗깁니다.
'나는 더 이상 절대로 게임은 안 할 거야'
게임을 하다. 보니까 이게 완전히 삶이 다 파괴됐어요.
그렇죠. 하루 종일 게임 중독돼 있으면 삶이 파괴됩니다.
정상적인 삶이 안 되죠.
'그래서 더 이상 안 되겠어, 이렇게 폐인으로 살 수는 없어
오늘부터 게임을 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어느 순간 보니까 또 키보드 앞에 앉아 있어요. 이런 게 중독이잖아요.
마치 포로가 된 기분이에요.
'더 이상 음란물에 사로잡히지 않을 거야'
그러면서도 한 3일도 지나지 않아서, 또 음란물을 보고 있네요.
이런 중독.. 정말로 포로가 된 것입니다. 죄의 포로!
보이지 않는 포박줄에 꽁꽁 결박되어서
게임에, 음란물에, 약물에, 스마트폰에 묶여버린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자유를 빼앗길 때
인간을 존귀하게 하고, 존엄하게 하는 이 하나님의 모든 계획들이 무너집니다.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은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됨을 파괴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가장 인간되게 한 것은 뭐였냐면
자유를 부여하심으로 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가장 존엄하게 하신 것은 뭐냐면
선악과를 부여하심으로 입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존중하냐면, 네가 나까지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내가 너희를 존중할게'
인간이 얼마나 존중받을 만한 존재였냐면
하나님이 그렇게 리스펙트해 주셨다는 거에요. 그게 인간의 존엄성이거든요.
개나 고양이에게는 하나님께서 '너의 본능을 네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존중할게' 이러신 적 없어요.
개나 고양이는 그냥 '내가 알아서 창조해 줬으니까 그대로 살아!
그게 너한테 제일 좋은 거야'
그래서 개나 고양이는 아무리 귀엽고, 아무리 발랄한 것 같고,
아무리 자유로운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선택권을 주신 적은 없어요.
'내가 창조한 대로 그냥 살아!' 인간은 그렇게 안 하셨단 말이에요.
인간은 '내가 창조한 대로 살아!' 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네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내가 리스펙트 할 게!'
이게 인간의 존귀함이고 존엄성이에요.
근데 자유를 빼앗기게 되면, 인간은 그것을 다 잃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개돼지 수준이 되는 거예요.
4) 자, 중독과 반대되는 결박도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면 정말 하고 싶은 것도 연약함으로 인해 못하는 게 있어요.
중독은.. 하기 싫은데 묶여서 할 수 없이 하는 거고
중독에 반대되는 건 뭐냐면, 연약함인데
그 연약함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연약해서 잘 못하는 거에요.
그것도 여러분 결박입니다.
중독 못지않게 사람의 내면을 파괴하는 결박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말을 심하게 더듬어서.. 이게 뭔지 알아요.
말을 아주 심하게 더듬는 연약함이 있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하는 거에요.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제대로 안 되고
말이 제대로 안 되니까 수많은 것들에 제약이 걸립니다.
어렸을 때 그런 거 있잖아요.
사람들 앞에 나가서 막 이렇게 말도 하고 싶고 그렇죠.
그런데 이게 다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중독만큼이나 사람의 내면을 고통스럽게 해요.
하고 싶은데 연약함으로 인해서 할 수 없는 것,
이 연약함은, 소극적인 의미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 (연약함)
그리고 이런 연약함으로 인해서 우리가 결박당하기도 합니다.
장애로 인해서, 소심함으로 인해서, 트라우마로 인해서,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결박 속에 삽니다. 이 모든 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라는 거예요.
▲자 이런 '결박'들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데
이 고통의 본질은 인간성이 파괴되는 고통이에요.
왜 우리가 결박당하면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가요?
보세요. 나무는 꽁꽁 결박해 놔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아요.
그런데 사람은 꽁꽁 결박해 놓으면 고통스러워해요. 왜요?
원래 인간은 자유를 누리도록 지음 받았는데.. 그것을 뺏긴 거예요.
그래서 고통스러운 거예요. 인간성이 파괴되는 고통입니다.
자유에 의해서 주어지는 인간성이 파괴되는 내적 고통입니다.
개인적인 결박뿐만 아니라, 죄는 더 큰 범죄로 인간을 결박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와 같은 '제도적인 결박'이 있어요.
또 극단적인 자본주의에서, 돈을 사용해서, 금권을 사용해서
우리를 결박하는 결박도 있어요.
이것은 훨씬 더 큰 규모로 행해지는 결박입니다.
둘 다 모두 위임된 어떤 힘, 권위를 사용해서..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거예요.
공산주의는 대놓고 인간을 통제함으로 자유를 빼앗고
극단적인 자본주의는 금권이라고 하는 힘을 사용해서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고 뺐습니다.
둘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죄입니다.
성경은 얘기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유해야만 해요. 반드시 자유해야 돼요.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돌려주신 것은 바로 이 자유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거라는 거예요.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자유> 관련글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른대요.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인간의 존엄성,
그 자유에 이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유'가, 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는 거예요. 롬8:21
자,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결박을 끊고,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멘!
'영광'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 그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모든 결박을 끊고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자유롭고 충만한 상태, 거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통해서!
그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이에요.
'죄와 사망의 법'을 패하셨어요.
죄는 뭐예요?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거에요.
그런데 그 법을 패하셨어요.
그래서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고 축복입니다.
십자가에는 어떤 능력이 있냐 하면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고 빼앗는 모든 결박을 끊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멘!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결박이 있습니까?
중독이라든지 아니면, 연약함도 있을 수 있고..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연약함 (이것도 결박이죠)
또는 하기 싫은데 벗어날 수 없는 중독, 아니면 죄책감, 아니면 두려움..
어떤 종류의 결박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요.
정말 유일한 길은 십자가 밖에 없어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 모든 죄와 사망의 법을 폐하셨기 때문에
오직 십자가에서만 여러분이 자유함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러므로 여러분, 이런 결박이 있다면,
감추지 마시고, 도망가지 마시고, 그것을 들고 십자가 앞으로 나오셔야 돼요.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결박이든...
두려움이든, 죄책감이든, 연약함이든, 질병이든,
어떤 것들 간에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억압하고, 구속하려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들고 다른 데 가봐야 절대로 해결 안 돼요.
십자가 앞으로 나오셔야 돼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피를 쏟으심으로.. 우리를 해방하셨어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박이 있는 분이 있다면,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오늘 나오십시오. 주님은 십자가에서 그 결박을 끊으실 것입니다.
아니 이미 끊으셨습니다. 믿음으로 그냥 취하기만 하시면 돼요.
십자가의 진짜 축복과 의미는.. 해방에 있어요.
십자가는 종교적 아이콘이 아니에요. 성경은 뭐라고 그랬냐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그랬어요. 고전4:20
십자가는 실질적으로 우리를 해방하는 능력이 있죠.
그냥 종교적인 아이콘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론이 아니라는 거예요.
실질적으로 우리를 묶고 있는 끈(결박)을 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예수 앞으로 나오시고,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해방의 능력이 여러분을 자유케할 것입니다. 아멘!
◑2. 자, 본문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드러나는 것은 <끌려가는> 거예요.
막15:1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이 '끌고 가는' 것은 '결박'(1대지) 과 깊게 연결되어 있는 죄인데
이것 역시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유린하는, 반자유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끌려가신 것은
우리 죄값 때문에 그러신 거죠)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끌고간다는 거에요.
죄의 특징은 뭐냐면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요 (1대지)
-두 번째 특징은 뭐냐면 우리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거예요. (2대지)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요?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거짓말은, 먼저 한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세상에 거짓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죄를 짓고 나면 두려움도 있고 들킬까 봐 떨리고 그런데
죄가 익숙해져서 감각이 마비된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죄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죄를 짓고 나면, 그 죄가 또 다른 죄를 짓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그러니까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하는 자리로 우리를 데려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죄는, 항상 우리를 끌고 갑니다.
죄를 짓고 나면, 상황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가게 됩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곳, 또 다른 죄의 현장으로 끌려간다는 거예요.
또 다른 예로 불륜을 저질렀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죄가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갑니까?
-배우자를 속이는 곳으로 끌고 가지요.
-거짓말을 하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더 나아가 가정이 파괴되는 현장으로 끌고 갑니다.
아니 그 현장에 끌려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보는 걸 즐겨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무도 그 자리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죄가 우리를 끌고 가는 거죠.
그리고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자녀들이 망가져요.
죄가 되물림되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죄가 우리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죄는 항상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또 살인은 어떻습니까? 살인을 하게 되면, 끝은 명확합니다. 감옥에 가는 거죠.
감옥으로 끌려갑니다.
이 감옥에서 여러분 평생을 보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끌려가는 거죠. 이 죄와 감옥이라고 하는 것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뭐 죄를 졌으니까 당연히 감옥에 가야지' 쉽게 생각하는데
죄의 본질이 뭔지를 잘 나타내고 있어요.
죄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법이 만들어진 거예요.
죄는 항상 우리를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가는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우라'고 성경이 얘기한 이유는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계속 가게 된다는 거에요. 히12:4
인생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죄를 짓게 되면, 원치 않는 자리로 계속 끌려가게 되는 것이
죄의 속성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곳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죄는 항상, 반드시, 어김없이, 절대로,
우리를 원치 않는 곳, 저주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내가 끌려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끌려갑니다. 이게 죄의 속성이에요.
그래서 죄가 끌고 가는 곳을 생각해 보십시오
죄가 끌고 가는 곳은, 기쁘고, 소망 있고, 밝고, 사랑이 가득하고
가슴 뛰고.. 이런 곳이 아니에요.
죄가 끌고 가는 곳은 항상 어떤 곳이냐면
어둡고, 우울하고, 두렵고, 절망적이고, 분노가 가득하고, 후회가 막 넘치고
항상 이런 곳으로 끌고 가지 않습니까?
죄가 끌고 가는 곳에 가보면, 항상 후회가 있어요.
'아이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어' 근데 이미 늦었지요.
죄가 우리를 결박해서 끌고 와 버렸습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혹시라도
'와, 내가 처한 상황은 왜 이렇게 어둡고,
또 내가 원하지 않는 그런 상황이고, 이렇게 힘들고 비참할까?'
만약 이런 의문이 있으신 분들이 있다면
죄송하지만 그게 죄의 결과예요.
하나님 없이 살아온 죄!
그 죄는, 악의적인 죄만 죄가 아니라 그랬어요.
연약함도 죄에요.
그러니까 그게 죄든지, 연약함이든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는 거에요.
오늘 내가 살아가고 있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상황은
결국 내가 죄를 선택했기에,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죄가 나를 끌고 온 거예요.
만약 이런 관계를 모르고, 사람들은 단순히 그냥 그 상황을 피하려고만 해요.
'나는 억울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이게 참 해결이 어렵습니다.
그러면 이것(내 힘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이걸 해결하려면, 십자가 앞에 들고 나가야 되거든요.
십자가 앞에 들고 나가야 되는데,
'나는 억울하다'고만 생각하면, 십자가 앞에 안 나가는 거죠.
'아, 이것이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거구나' 라며 회개에 이르러야
십자가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모든 상황과 모든 문제에 대한 첫 번째 해결책은
'이것이 내 죄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인식하고 인정하는 거예요.
직접적으로 어떤 죄 때문에 당장 이렇게 된 건 아닐지 몰라도
여러 죄들이 쌓이고 축적되고 축적되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인식할 때.. 해결될 수 있는 소망이 보입니다. 아멘.
이것이 은혜이고 십자가인 줄 믿습니다.
▲자 그래서 마지막에는 죄가 우리를 어디까지 끌고 가는지 아십니까?
이것이 계속 죄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쌓이고, 모이고 해서
그래서 마지막으로 끌고 가는 곳이 어디냐면 지옥이에요.
죄의 마지막 종착점입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시간이 다 마치고 나면
그 죄의 결과, 정말 원치 않는 곳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게 어디냐면 지옥이에요.
세상에 지옥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억지로 비참하게 끌려가는 거지요.
그래서 여러분 마지막 날 지옥에 끌려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지막에 지옥에 끌려가는 사람은 모두 다 발버둥 치면서 들어갈 겁니다.
'가기 싫어! 여기가 아니야! 난 여기 있지 않을 거야!'
다들 거부하고 발버둥 치고 그러면서 끌려가는 거지,
지옥에 기쁘게 들어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왜 끌려갈까요? 죄의 특징은 끌고 가는 거라니까요.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지옥에 들어갈 때는 뭐
'살려 줘, 가기 싫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발버둥 치면서 끌려갈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이에요. 죄가 궁극적으로 끌고 가는 곳은 지옥입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것이라 생각한다면
'죄'를 잘 모르시는 분입니다. 죄가 뭔지 모르시는 분이에요.
죄는 절대로 인간을,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지 않아요.
죄는 항상, 언제나, 변함없이, 인간을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갑니다.
그것이 변치 않는 죄의 내재적 속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에게 예수가 필요하고,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만약 십자가가 없다면, 저와 여러분 인생의 끝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지옥이에요.
우리 삶을 계속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다니는 죄가
평생 해결되지 않고 쌓이고, 쌓이고, 쌓였는데
그 결과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겠어요?
▲그러므로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하셔야 될 일이 있습니다.
죄를 해결하셔야 돼요.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하셔야 될 것은, 죄를 해결해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십자가에서!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게 십자가에요.
인간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이미 처리하셔서
죄의 모든 능력을 무력화시키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구체적인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그 죄를 다시 안 짓는 것)
십자가는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능력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영광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축복이에요.
네, 십자가는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칭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십자가를 그냥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분을 바꿔주는...
원래 죄인인데, 죄인을 의롭게 봐주시는 그것(칭의)으로 제한하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훨씬 더 뛰어넘어요.
십자가는 죄를 실질적으로 처리 해서 무력화시킨 거에요.
죄를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킨 것이 십자가에요.
(그 공로가 내게 혜택이 되려면, 구체적인 회개가 필요합니다. 가슴 아파하면서요)
그래서 여러분, 십자가 앞에 우리가 어떤 죄든지 가져가면
그 죄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들이 무기력화 되는 거예요.
우리를 결박하고, 우리를 끌고 가는 모든 죄의 능력을 무기력화시키는 것이
십자가에요.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의 법'이 있다는 거예요. '사망의 법'이 있다는 거예요.
죄와 사망에는 법칙 principle 이 있다는 거에요. 그게 뭐예요?
1) 죄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법칙이 있고,
2) 죄는 우리를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가는 법칙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 죄와 사망의 법칙을 어떻게 했다는 거예요? 깨뜨렸다는 거예요.
그것을 무너뜨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든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서
죄를 그 십자가 위에 올려놓는 자는
더 이상 그 죄가, '죄의 법(칙)'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거에요.
그것이 어떤 죄든지 간에, 여러분들이 십자가로 가져가서
예수의 십자가 위에 올려놓았을 때
더 이상 그 죄가 여러분을 결박하지도 못 하고
더 이상 그 죄가 여러분을 원치 않는 것으로 끌고 가지도 못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결과 우리가 지옥을 벗어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십자가이고, 구원입니다.
여러분 지옥은 가지 마십시오. 지옥에는 끌려가지 마십시오.
지옥은 여러분, 사람 살 곳이 아니에요.
지옥은 인간의 인간성이 완전히 말살되는 곳입니다. 어떻게?
자유를 완전히 빼앗김으로써.. 그래서 지옥에는 어떤 자유도 없는 곳이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지옥을 묘사할 때,
-꺼지지 않는 불이 활발 타고 있고,
-불로 소금 치듯 하고.. 이게 뭐예요?
내가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지옥이 실질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하나는 분명해요. 지옥은 우리의 자유를 다 뺏긴 곳이에요.
다 뺏겨서 벗어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는 거예요.
벗어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는 곳이 지옥입니다.
자유를 완전히 뺏겼어요.
벗어날 자유가 없고, 후회를 끝내고 싶어도, 끝낼 수 있는 자유가 없어요.
그러므로 여러분, 지옥은 가시면 안 됩니다.
지옥은 피하셔야 돼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지옥으로 끌고 가는 죄를 끊으셔야 돼요.
지옥으로 끌고 가는 죄의 결박을 파쇄하셔야 돼요.
(*한 번 영접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죄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나가셔야 돼요.
끊임없이 죄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구체적으로 나가셔야 돼요.
구체적으로 여러분 가운데 죄가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자복하고 회개하라고 그랬어요.
어떻게 십자가 앞에 나가는 겁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서 고백하는 거에요.
'예, 주님 내가 이러저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 죄의 결과에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 죄를 내가 오늘 십자가에 올립니다.
주님, 십자가에서 이 죄의 모든 결박을 끊으시고
나를 해방하시고 자유케 하신 것을 믿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취하라는 거예요.
그랬을 때 예수께서 뭐라 그러시냐면
'네 죄가 사함받았다. 그리고 돌아가서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말라'
그리고 그 후로 죄와 싸우셔야 돼요.
죄와 싸우실 수 있는 힘을 성령께서 주세요.
이것이 구원이고 은혜입니다.
◑3. 본문에서 발견하게 되는 죄의 세 번째 모습은
<광기>입니다.
막15:13~14절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십자가로 가까이 갈 때, 발견되는 죄는 뭐냐 하면 "광기"예요.
죄에는 광기가 있습니다. 보세요. 사람들이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묻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나는 아무리 찾아봐도, 예수라고 하는 자가 무슨 악한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냥 더욱 소리 지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게 바로 광기죠!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는 게 무슨 장난입니까?
십자가는 실제로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고 처참하게 죽이는 장치거든요.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서
천천히.. 수치스럽게.. 모든 고통을 다 맛보면서 죽일 수 있는 장치입니다.
이게 무슨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더욱 소리 질렀어요.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재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소리 지르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예수님이 이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살인을 했습니까? 가족을 죽였습니까? 돈을 뺏었습니까? 없거든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만한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설령 자기들을 기분 나쁘게 했던 뭐가 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입니까?
그런데 이들이 소리 지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이거는 광기죠. 광기!
이성을 잃은 분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분노한 감정만 온몸을 휘감아서 지배하는...
뭐에 씌인 상태죠.
▲죄에는 광기가 있습니다. 광기란 뭐냐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분노의 표출이에요.
인간의 분노와 이기심이 모이고 쌓이면
이제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됩니다.
그것을 '광기'라고 부르는데요.
그런 적 있죠. 아주 심하게 분노에서 폭발할 때 보면
'아이고, 저 사람이 이성을 잃었어' 말합니다.
더 이상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이성, 판단을 다 잃어버리고, 그냥 분노밖에 안 남은 거에요.
그런 게 '광기'입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죄로 인한 광기가 있습니다.
'에이 나는 없어!' 아니요. 있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아주 가끔은 내게도 광기가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어요.
광기는,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하고, 부조리하고, 불합리하고, 파괴적인 감정의 폭발입니다.
죄가 모이고 쌓이면.. 어느 순간 그것은
모든 합리적 이성과 도덕을 마비시키고
오로지 괴이한 분노만 표출하는 광기로 넘어가게 됩니다.
▲자, 여기서 '모이고 쌓인다'는 것은
개인 안에 분노가 계속 축적되는 것도 있지만
여러 집단 사이에서, 여러 명의 분노가 집단적으로 쌓이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한 사회의 분노지수, 한 사회의 스트레스지수가 아주 높아지게 되면
항상 뭐가 나와요? 광기가 나오죠.
그래서 혁명이나 폭력사태 같은 것이 일어나면
사실 거기에 이성이라는 건 없습니다.
그냥 분노에 의해서 아무나 죽이는 거예요. 그게 뭐예요?
집단적으로 그 사회에 어떤 분노가 계속 쌓여서 나타난 결과인 거죠.
역사를 보면, 영악한 지도자들은 이 광기를 이용하거나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습니다.
중국에 공산혁명이 일어날 때, 마오쩌뚱은 홍위병의 광기를 이용했죠.
홍위병이라는 젊은 층들,
미래도 없어 보이고, 가난하고, 차별받는 이 청년들의 광기를 이용해서
정권을 손에 넣습니다.
이 광기가, 여러분 얼마나 광기였는지는,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각자 자료들을 찾아보십시오. 정말 광기입니다.
이성도 없고, 합리성도 없고, 그냥 광기였습니다.
그냥 화가 나서 아무나 때려죽이는 거예요.
△또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즈, 여러분 잘 아시죠? 킬링필드!
크메르루즈는 정권을 잡으면서 150만 명을 학살했는데
그때 인구가 700만이었어요.
인구의 20%를 죽이는데, 광기를 이용합니다.
이 광기가 얼마나 광기였냐면, 안경만 썼다고 사람을 죽였어요.
배운 사람은 다 잡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1970년대 얘기인데
제가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그때 목회 시작하기 전에 선교사로 가려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제 캄보디아를 조금 알아본 적이 있어요.
근데 정말 놀라웠던 게 뭐냐면 캄보디아에 학교가 없더라고요.
2000년대가 됐는데, 학살이 있는지 30년이 지났는데
거기에 대학이 없어요. 왜 없냐 하면, 교수할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지식인은 다 죽인 거에요. 광기죠.
△또 히틀러는 어떻습니까? 유대인 학살하면서 600만 명을 죽인.. 광기죠.
또 광기에 사로잡힌 영조는
자식(사도세자)을 뒤주에 가둬서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이 동일한 광기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어요.
이 동일한 광기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이 광기를.. 최초로 이론화한 자가 사실 마르크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의 광기를 이용해서 사회를 바꾸어 나가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사실 이게 '죄'를 이용하겠다는 거에요.
그들은 사회를 항상 두 개로 나누잖아요.
가해자와 피해자,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부르조아 와 프롤레타리아
항상 둘로 나눠서 둘 사이의 갈등을 조장합니다.
그래서 여기 안에 있는 갈등이 어느 레벨을 넘어가게 되면, 광기가 되는 거죠.
광기가 되게 되면, 사회를 변역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온대요.
이게 도대체 무슨 에너지예요? 분노의 에너지잖아요.
여러분, 분노의 에너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법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사회를 바꿀 수는 있을 거예요. 왜요? 엄청난 에너지가 나오니까요.
거의 아무나 때려죽일 만한 에너지가 나오니까, 사회를 뒤집을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게 될까요? No
죄의 결과가 뭐라고 그랬어요?
오히려 항상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 마르크스가 주창한 공산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유토피아'가 있었습니다. 원하는 곳(이상향)이 있었는데
지난 100년 동안 실험해 보니까 어때요?
아무도 원하는 곳에 간 사람이 없어요.
다 원하지 않는 이상한 곳으로 가서, 비참하게 끝났지요.
왜 그랬을까요? 죄를 에너지로 삼았거든요. 광기를 에너지로 삼았거든요.
그 안에 있는 분노와, 그 안에 있는 미움과
그것들을 결국 에너지로 삼아서 사회를 변혁시키겠다고 하는 것이
마르크스가 제창했던 공산주의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항상 기독교와 대척점에 있었어요.
한 번도 기독교하고 공존한 적이 없었어요. 여러분이 잘 기억하셔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마르크스주의하고 같이 갈 수는 없어요.
이거는 완전히 상극에 있는 거예요.
그들이 얘기하는 결과들은 비슷해 보일 수 있어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자'
그러나 철저하게 대척점에 있는 게 뭐냐면
복음이 얘기하는 건 뭐예요?
사랑과 희생을 통해서 거기로 가야 된다는 것이고...
마르크스는 뭐예요? 광기를 이용해서 거기로 가야 된다는 거에요.
광기의 죄를 도구로 사용해서 유토피아로 가겠다고 하는 건데
그게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절대 이루어질 수도 없는 것이고,
기독교와는 상극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기독교인도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할 수는 없어요.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은, 복음을 떠났다는 얘기예요.
말은 어떻게 하고, 무슨 교회를 다니고 어쩌든지 간에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는 기독교인은 존재할 수가 없어요.
왜? 죄를 지지하는 기독교인이 어디 있어요?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통해서에요.
'사랑과 희생을 통해서 거기로(하나님의 나라) 갈 수 있다'고 하셨지
광기를 통해서 여기로 갈 수 있다고 하신 적이 없어요.
그것(광기)은 죄이고, 십자가에서 처리되어야 되고, 해결되어야 될 죄일 뿐이에요.
▲이 광기의 결과는, 종종 살인과 폭력으로 이어지는데
그 본질은 타인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이 광기가, 여러분 앞서 살펴봤던 결박, 끌고다님이
사실 집약된 모습이에요. 아주 인텐스하게 집약된 것이 광기라는 거죠.
그래서 광기의 본질을 보십시오. 첫째는 자신도 자유를 잃습니다.
자기가 진짜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아니에요.
뭐에 씌어가지고 그냥 광기로 움직이는 거죠.
그리고 결과는 폭력, 살인,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거죠.
그래서 광기는, 어떤 죄의 모습이
가장 집약적이고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되는 모습이에요.
광기에 휩싸인 사람은 인간으로 안 보이죠.
저건 그냥 미친 짐승처럼 보이죠.
그러니까 광기는, 자기의 인간성도 무너뜨리고
타인의 인간성도 무너뜨리는.. 이것이 광기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딴 나라 이야기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광기는 제 안에도 있고 여러분 안에도 있습니다.
선거 때나, 선거가 끝나면 나타나는 폭력과 분노 속에서
작게는 깜빡이 켜지 않고 내 앞으로 끼어드는 차를 보면서
우리 안에서 광기가 올라오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드러냅니다. 이 죄가 가장 집약되어 있는..
그래서 내 인간성도 무너뜨리고, 타인의 인간성도 무너뜨리는 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 광기의 죄라는 거예요.
▲자, 이제 말씀을 마무리 합시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죄는 법이 있어요.
'죄와 사망의 법'이 있다고 했어요. 법칙이 있다는 거예요. 롬8:2
이 법칙은 뭐냐면,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그게 죄의 법칙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구원을 묘사하는데 가장 자주 사용된 단어 중에 하나가
'해방'이에요.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해방하셨느니라'
죄의 본질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거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구약에서 여러분, 죄와 구원을 보여주는 가장 큰 메타포(은유)는,
출애굽이잖아요.
이것은 노예된 상태에서 시작하죠. 자유를 빼앗긴 상태!
죄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요.
자유를 빼앗기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성이 무너지고 파괴됩니다.
자유를 빼앗기게 되면, 인간의 존귀와 존엄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게 저주죠.
그래서 이 죄는, 때로는 결박의 모습으로.. 1)
때로는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가는 모습으로.. 2)
그리고 때로는 컨트롤할 수 없는 분노, 광기의 모습으로 3)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또 상대방의 자유를 빼앗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죄를 처리하셨어요.
그래서 십자가를 묘사하는 가장 정확한 단어가 '해방'이에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이 결박과, 이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가는..
또한 우리의 컨트롤할 수 없는 분노, 이 광기를..
십자가에는 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것을 들고 십자가 앞에 나오는 자는
거기서부터 자유케되고 해방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오늘 여러분 안에 해결되지 않은 결박이 있고
해결되지 않는 죄가 있고, 해결되지 않는 연약함이 있다면
오늘 여러분 십자가 앞으로 나가십시오. 예수께서 그 일을 해결하십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그냥 그 자리에서 즉시 해결하시는 것도 있고요.
또 어떤 것들은.. 근원부터 차근차근 시간이 걸려서 해결하시는 것도 있어요.
모든 것을, 그냥 모든 것을 십자가 앞에 올려놓으면
그 즉시로 해결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과 깊이 물려있기 때문에
그렇게 비인격적으로 해결하시면, 우리의 인격이 망가져버려요.
죄는 우리의 아주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병도, 어려운 병은 수술 한 번으로 끝낼 수 없습니다.
근원부터 고치려면 차근차근 하나씩 하나씩 고쳐가야만
그래야 병이 완치됩니다.
마찬가지로 복잡한 죄들은, 한 번의 회개로 해결이 안 돼요.
한 번의 회개로 해결이 안 되는 이유는
그 피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십자가가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스턴트 즉시 처리하시든지
-천천히 단계적으로 해결하시든지
하여간 궁극적으로 해방하신다는 사실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믿으셔야 됩니다. 이 믿음을 굳게 잡으셔야 됩니다.
십자가는 모든 결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합니다.
이 복음이 오늘 여러분에게 큰 해방의 능력으로 임하시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할 때, 십자가 앞으로 들고 나갑시다.
어떤 종류의 결박이든지 간에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해결하시고 해방하십니다.
구체적으로 들고 나가십시오.
결박이 있다면 그 결박을 들고,
연약함이 있다면 그 연약함을 들고,
구체적으로 나가셔서
오늘 예수께서 행하시는 은혜, 십자가의 역사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게 하십시오.
이미 그렇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취하십시오.
우리 회개하시면서 죄의 문제를 처리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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