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성한 눈 나쁜 눈(마태복음 6 : 22 - 24)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여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이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제 주시는 말씀은 눈을 비유로 하여 매우 실제적인 지혜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크게 잘못되기 쉬운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추상적인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 생활이 잘못 되면 이중적인 혹은 이원론적인 모순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은 그 생활 방법대로, 또한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신앙 생활은 신앙 생활대로 따로 하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과 사람 앞, 교회 안과 교회 밖의 이 두 세계를 왕래하며 각각의 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화된 하나의 신앙 생활로 엮어 가지를 못하고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여 왕래하면서 어떤 때는 천사처럼 또 어떤 때는 악마처럼 살아 버리고 말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생각하기를 "세상은 아무래도 이렇게 살수밖에 없다"며 스스로를 정당화해 버리고 마는데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요 행동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제 생활 그 자체 전부가 신앙화되어야 하고 신학화되어야 하며 성서적인 생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는 노력을 함에도 그것이 잘 안 된다는 이유에서 그만 완전히 포기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그저 본래부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합니다마는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지간에 이 경건한 생활이 실제 생활에서 실현되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신 말씀은 잠깐 지나가는 비유로 하신 말씀이지만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하여야 진정으로 생활화될 수 있느냐? 하는 실제적인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비유는 매우 소중한 비유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을 생활화하며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는데도 왜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를 않는가? 나아가서는 왜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왔느냐? 할 때에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뿌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바르게 살든 못 살든 문제는 뿌리에 있고, 근본 원인에 있습니다. 우리는 현상 문제를 가지고 자꾸만 생각합니다마는 결코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그 원인, 그 뿌리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며, 우리가 약해졌다면 그렇게 약해진 원인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는 마치 병원에서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기 이전에 그 원인을 찾아 며칠씩이나 굶기며, 피를 뽑고 엑스 레이(X - ray)촬영을 하면서 검사를 해야 하는 작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제 원인만 찾으면 치료할 길이 생길 것이며 그리고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원인들도 모르면서 대강 이럴 것이다 하여 치료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처럼 막연한 일이 어디 있으며 그 결과는 또한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제의 원인! 그 원인만 정확하게 바로 규명되어진다면 벌써 그 문제는 해결을 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문제는 그 뿌리로 돌아가서 어떻게 하여야 바르게 살 수 있을까? 아니면 왜 잘못하는가? 의 문제를 그 원인으로 돌아가서 고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가 바로 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 구조에 있어서 어느 한 부분 중요치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우리의 일상 생활을 명랑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눈이 밝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건강하고 잘 생긴 사람이라도 이 눈이 나쁘거나 어두우면 온 세상이 어두워지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특별히 자동차 운전 면허를 얻고자 할 때에는 먼저 시력 검사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시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색맹일 경우는 아무리 운전 기술이 훌륭하고 건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운전 면허를 취득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란 붉고 푸른 신호에 따라 달리고 멈추는 것인데, 파란 것도 노랗게 보이고 노란 것도 빨갛게 보인다면 그것이야말로 끝난 것이란 말입니다. 검사장에서 색맹 검사를 할 때에 보면 알록달록한 종이 한 장씩을 넘기며 커다란 글자를 묻는 것이 색맹이 아닌 사람에게 있어서는 꼭 장난과 같은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색맹의 눈으로 볼 때에는 모두가 다 깜깜한 게 그게 다 그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색을 분별하지 못하는 눈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더라도 운전만은 할 수가 없습니다.
눈의 좋고 밝음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눈이야말로 우리의 육체적 생활을 능숙하고 밝게 살아가게 하는 첫째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람을 사귀는 일에 있어서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6척에 가까운 키와 갖가지 구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척하면 보는 것이 얼굴이요, 얼굴 중에서도 귀나 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역시 눈을 보게 됩니다. 눈은 곧 마음의 창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 눈을 보면 그 마음의 상태도 어느 정도는 들여다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도 의사의 손이 눈부터 먼저 들춰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더욱이 임종이 가까운 사람을 두고는 자꾸만 눈을 들춰보다가 눈이 흐려지고 동자가 풀려지면 이제는 틀렸다고 하는 것을 보면 역시 눈 속에 인간 생명의 상태가 다 나타나는 것인가 봅니다. 이처럼 눈은 신체의 전부를 대표하고 또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몸의 눈이 그러하듯이 마음의 눈, 영의 눈이 중요함을 설명하시기 위해 이 눈을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눈이 밝아야 온 몸이 밝듯이 영의 눈이 밝아야 비로소 신앙 생활이 바로 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 하여도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보는 눈이 있다면 짐짓 그렇게 마구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마치 좋지 않은 음식일 때는 아무리 배가 고프다 할지라도 먹을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 생활 전부를 장악하는 그 결정적인 원인을 지적하여 눈을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등불이라는 것은 곧 빛을 말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빛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요, 눈이라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둘은 똑같이 동시에 필요한 것입니다. 빛이 있어도 그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그 빛은 적어도 내게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객관적 의미는 있지만 주관적 의미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내 눈이 밝다 하더라도 빛이 없으면 내 눈은 쓸모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일제히 이 예배실 안의 전등불이 꺼진다면 나의 이 밝은 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에 어두울 때 보는 눈과 밝을 때 보는 눈이 따로 있는 것으로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마는 그게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두운 곳에서는 제 아무리 밝은 눈을 가졌다 해도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전혀 빛이 없는 동굴 속에 있는 도마뱀 같은 것은 아예 눈의 기능이 없어지고 말았으며 감각으로만 더듬고 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눈이란 어디까지나 빛 앞에서 유효한 것이지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볼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빛이 있음으로 내 눈 또한 쓸모가 있게 되고, 반면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의 빛이 있다 하더라도 내 자신이 영의 눈을 꼭 감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언제나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눈을 두고 보다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눈 안에 빛이 있는 것은 아니란 점입니다. 이는 곧 눈 자체가 빛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은 빛을 응용하는 절대적인 기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빛이 제 아무리 큰 일을 하고자 해도 눈이 없으면 그 빛은 빛 된 도리를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눈은 빛을 응용하는 절대적 기구요, 빛을 해석하는 방편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빛을 받는 즉시 이것은 빨강, 이것은 노랑, 이것은 추하고 저것은 곱구나 하는 식으로 빛의 효력을 해석하게 되는데 이러한 해석의 전부를 눈이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눈이라는 것은 빛과 함께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이제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눈은 온 몸의 활동을 주관하고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뇌의 특별한 작용들이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생각을 해 보면 눈이 온 몸을 다스린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닌 것입니다. 이는 눈이 정보를 주고 눈에 의하여 욕구를 일으키게 하는 등 인간의 활동을 지배하는 뇌의 작용도 결국은 이 눈의 역할에 의하여 조종되기 때문입니다. 만일의 경우 눈으로부터의 정보가 잘못 전달된다면 결국은 뇌라고 하는 컴퓨터도 별도리가 없이 함께 고장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몸을 주장하고 활동을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마음까지도 눈이 조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괴롭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보게 되면 내 마음도 함께 슬퍼집니다. 그런가 하면 밝고 성공적인 장면을 볼 때는 내 마음도 함께 밝고 기쁜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내 느낌이나 내 감정도 눈이 지배해 줌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내 뜻, 내 의지도 눈이 말해 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 여기에 강물이 흐르고 있고 그 강을 건너 저 편으로 가야 할 경우 내가 이 강을 건널 것인가, 안 건널 것인가 하는 행동의 결정은 내 눈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 눈이 건널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판단을 내린다면 나는 그것을 믿고 강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눈이 못 건넌다는 지시를 내리게 되면 강을 향해 전혀 발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 용기, 내 의지도 사실상 눈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시력이 좋지 않다 보면 매사에 자신이 없어지고 발은 항상 후들후들 떨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저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마는 다른 분들에게도 그런 일은 있는 것으로 봅니다. 맨 처음 돋보기 안경을 끼고 나니 이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특별히 이것을 끼고 발 있는 아래쪽을 봐야 할 경우는 그 거리 측정을 바로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 때문에 처음 몇 번은 별 수 없이 잘 넘어졌던 것입니다. 이 거리 측정도 몇 년은 족히 걸려야 제대로 조종이 되는데 이 조종을 눈이 해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만약 눈이 정확한 정보로써 조종을 해주지 못한다면 내 손, 내 발은 계속해서 실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눈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 내 지혜, 내 의지, 이 모두가 눈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고 나면 모든 영적인 생활이 어두워지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활에 있어서 그 잘못의 원인은 눈에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을 발하는 등불! 그 등불이 비췸으로 가치 결정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 빛이 생명을 주고 활력을 주며 활동을 가능케 하여 내 능력이 능력 되게 하며 내 지혜가 지혜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눈이 밝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눈이 좋다는 것은 참으로 보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 일생을 늙도록 살면서 계속 눈이 좋다는 것은 참으로 복되고 귀한 것입니다.
저의 친구 중 한 사람은 어렸을 때 약을 잘못 먹어 눈이 나빠졌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리 안경을 쓰며 조종을 하여도 얼굴 앞에까지 바짝 대지 않으면 웬만한 글자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휘를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는 악보나 원고를 완전히 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함께 길을 가면서 저기 간판 보이느냐고 하면 제대로 보이지가 않고 그저 뿌옇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자니 얼마나 많은 고통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세상사는 재미가 없겠구만"하면 "그렇다"고 합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다 환히 제대로 보여야 재미가 있는 것이지 이것, 저것 할 것 없이 뿌옇게만 보고 살자니 얼마나 재미없는 일이겠습니까? 이처럼 눈이 어둡다고 할 때에는 세계가 그만큼 좁아질 뿐만 아니라 사실은 몽롱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요, 잘못된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빛이 밝아야 하고 눈이 밝아야 하며 곧 영이 눈이 밝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굉장히 과학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본문을 보면 "네 눈이 성하면"할 때의 그 "성"자 옆에 1이라고 쓴 것이 있고 그것을 풀이하고 있는 맨 아랫지면 1옆에는 헬라어를 뜻하는 "헬"을 쓰고는 "순전하면"이라는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하다는 말의 헬라어는 '아플루우스'라는 말로 그 뜻은 싱글 호울(Single Whole), 즉 단순하다, 꾸밈없이 순수하다는 뜻의 말입니다. 또한 다른 면으로는 기능이 원만하고 명확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한 눈이란 아주 명확하고 순수한 그런 깨끗한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8)하신 것도 그 원문의 깊은 뜻은 단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눈은 항상 그 초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는 곧 단순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그 비결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든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눈의 초점이 분명한 가운데 있어야 하겠는데 여기 보고, 저기 보면서 눈동자가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분명 시원치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예 재미없는 인물이니 아마도 사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눈이란 깨끗하고 영롱하면서 분명한 초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눈, 깨끗한 눈, 순수한 눈, 바로 그러한 눈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표적인 예로 바울을 들어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바울은 참으로 단순한 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밖에 몰랐으니까 말입니다. 그의 생각, 그의 뜻, 그의 목적, 그의 생활, 그 전부를 예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으로 그 뿐이요, 그밖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강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언제나 무서운 사람입니다.
잠언 4장 25절 이하의 말씀에서도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까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 눈은 똑바로 볼 것이지 비스듬히 우왕좌왕, 사시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깨끗한 눈에 명확한 초점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의 주위를 살펴보아도 정말 마음이 청결하고 의지가 바로 선 사람은 그 눈동자가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들 말하기를 "그 분의 눈에는 정기가 있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이처럼 깨끗하고 분명한 눈, 똑바로 보는 단순한 눈을 일컬어 예수님께서는 성한 눈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소위 난시(astigmatism)라는 것은 이와 같은 단순성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를 위해 캠블 몰간(Cambel Morgan)이라는 사람이 의학 사전에 난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의한 것을 보면 난시란 "광선이 눈의 망막 초점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되어진 눈의 구조적 결합을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빛이 비추이면 눈의 깊숙이 있는 망막의 초점에 하나로 집중되어야 하겠는데 이것이 그 초점에 맞추지 못하고 흐트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똑바로 되어 있는 것 같지만 안의 구조가 잘못되어 비뚤어지고 흐트러져서 그 때문에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조적 결함이 바로 이 난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의학적인 측면에서 "비난시"인 그것이 바로 "성한 눈"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가 둘, 셋으로 보이는 난시가 아닌 똑바로, 정확하게 하나로 보이는 눈, 영적으로 똑바로 볼 수 있는 그런 눈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하시는 말씀이 "눈이 나쁘면"하신 것인데 여기에서 나쁘다는 말은 헬라어로 '포네로스'라고 하는 말로 육체적 의미에서 약하다는 뜻과 함께 악하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그 원 뜻을 찾아보면 어떤 좋지 않은 영향으로 인하여 나빠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좋지 않은 영향에 끌려 있는 눈이 나쁜 눈이란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해석하면 눈이 흐려졌고 가리워 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욕에 가리워 지고 시기, 질투, 욕심에 가리워 질 때에 무엇이나 바로 보이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를 않습니까? 욕심이 많은 사람은 무엇이나 제대로 순수하게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시기, 질투를 시작하면 그 얼마나 무서운지 제대로 똑바로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흐려진 눈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가롯 유다도 그만 돈에 눈이 흐려져서는 예수님을 대하여 '이런 은전 30짜리'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더란 말입니다. 이처럼 만사가 돈으로 보이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양복점을 경영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나 남의 옷만 보게 되고 미장원을 하는 이는 남의 헤어스타일만 살피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무엇엔가 좌우간 끌려 있는 사람은 똑바로 보는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쁘게 보기 시작하면 이제는 자꾸만 나쁘게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좋게 보기로 시작하면 너무나 좋게만 보다가 이제는 그것이 불의인지, 의인지도 모르게 되고 마는데 이는 모두 다 잘못된 눈입니다. 그야말로 가려진 눈이요, 흐려진 눈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였기에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이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무서워하며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실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신이 나가도 보통 나간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는 눈, 이 눈이 바로 잘못된 눈이요, 흐려진 눈입니다. 이런 눈을 가지게 되면 그 때는 정말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눈이란 것은 선험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앞서 어떤 충격을 받은 눈을 말하며 그 이미 있었던 경험이 그를 강하게 붙들어서 그로 인해 다른 것을 잘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너무 어두운 데만 있던 눈은 밤은 빛을 못보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갑작스레 익숙하지 못한 밝은 빛을 보게 되면 눈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어린이들의 경우에도 어두운 데서 책을 너무 많이 읽던가 하면 결국은 눈이 나빠지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의 활동은 언제나 적당한 밝기에서 이루어져야지 그렇지를 못하고 어두운 데 익숙하다 보면 눈은 나빠지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떤 동일한 사항을 많이 보게 되면 그것이 앞선 경험으로 작용되어 지금 여기의 이것도 그 선험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자라보고 놀란 사람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이야기가 다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것을 보았던 그 경험이 강하게 충격 되어 다른 것을 볼 때에도 그와 비슷하게 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것들이 다 잘못된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런 경우는 영적으로 더더욱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는 어떤 충격에 의해 균형을 잃은 잘못된 눈이 되어 한 쪽으로 자꾸 기울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눈이요, 나쁜 눈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나쁜 눈이란 어떤 눈인가에 암시된 말씀은 곧 두 가지로 보이는 눈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재물과 돈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는 사람의 그런 눈 말입니다. 이제 돈도 하나님으로 보고 하나님도 돈으로 보는! 이건 정말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사람 중에도 이와 같은 이가 적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에 왜 나오느냐고 물으면 복 받으러 나온다는 것인데 그 복이 바로 돈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돈이요, 돈도 하나님이니 돈이 좀 생기면 이제 교회에는 나오지 않고 그러다가 사업이 좀 잘 안되면 그 때엔 또다시 주여! 주여! 하며 야단인데 가만히 보면 하나님과 돈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난시요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의 신앙 생활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다. 나는 진정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는가? 아니면 돈과 하나님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눈이요, 좋은 눈의 기능은 하나님과 돈,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귀한 것과 귀하지 않는 것을 분명하게 가려내어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이것이 분명하지 못하면 결국은 그 모든 신앙 생활은 잘못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으며, 눈이 잘못 되어 나빠지면 온 몸이 어두워지고, 전체 신앙 생활이 잘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 중에서도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4)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서 저들이 모른다는 것은 곧 장님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란 말입니다. 지금 자기들이 하는 일이 진정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볼 수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도 결국은 마음의 눈이 잘못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생각나는 철인 데카르트(Descartes)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산책을 하고 있던 철인 데카르트는 자기 앞에 도사리고 있는 뱀 한 마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보고도 피해 가지 않는 뱀을 데카르트는 손에 있던 지팡이로 뱀을 쳤습니다마는 뱀은 여전히 끄떡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그만 피해서 다른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자리로 갔더니 또 그 뱀이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도 보니까 또 있어요. 그래서 이 데카르트는 "요놈 봐라 그래 오늘은 아예 결판을 내자"하고 지팡이를 들어서 힘껏 내려쳐도 까딱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자세히 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오라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그만 사흘 동안이나 속은 데카르트는 "내 눈이 나를 속였다"며 큰 충격을 받게 되어 마침내는 회의주의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내 눈이 나를 속였는데 누구를 믿으라는 말이냐?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믿을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못 믿겠다고 하는 그 사실 하나만은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회의주의 철학의 결론입니다.
아무튼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믿음이 가는 것은 눈입니다. 그런데 이 눈마저 믿지를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끝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눈이 성하면, 즉 우리의 영의 눈이 성하면 모든 생활이 밝을 것이요, 그렇지를 못하고 눈이 나쁜 결과 돈이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돈으로 보일 정도가 되고 선과 악,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혼동할 정도가 되었다면 그 신앙 생활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갈 때에도 특별히 처음 가는 길인 경우에는 안내판의 싸인을 잘 보아야 합니다. 이것 한번 잠깐 놓치고 잘못 보는 날에는 한두 시간 헛걸음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다고 하는 문제가 바로 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깜박거리는 신호등 하나 잘못 보게 되면 내 생명은 거기에서 끝나고 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 나만 죽는 것이겠습니까? 남까지 죽이니 더 큰 문제이지요. 가령 그 누구가 붉은 신호를 푸른 신호로 보았다고 한다면 그 이후의 사건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문제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마음의 눈, 영의 눈부터 먼저 밝게 고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많은 기도를 해왔습니다 마는 오늘 이 시간은 하나님이여, 나에게 밝은 영의 눈을 주시어서 사물을 밝게 보게 하시고 가야 할 길로만 가게 하옵소서 하는 그런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랑 신부 비유(에베소서 5:22-23) (0) | 2024.03.19 |
---|---|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마태복음 15 : 12 - 14) (0) | 2024.03.19 |
새와 백합화(마태복음 6 : 25 - 34) (0) | 2024.03.19 |
사람 낚는 어부(마태복음 4 : 18 - 22) (0) | 2024.03.19 |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5장 24~26절)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