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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박힌 사람(5장 24~26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저 유명한 마태복음 16장 16절,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시고 스스로 당할 고난을 비로소 예고하시니, 베드로가 당치도 않다면서 예수님을 붙들고 간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에 예수님은 돌이키시며 정색을 하고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어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실로 귀중한 말씀을 하시지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자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자기'라는 말이 두 번이요 주님 자신을 지칭하는 '나'가 한 번입니다. 첫째, 나를 부인하고 둘째, 나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주님을 따르라 하십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지도 않고 나의 십자가를 지지도 않으면서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무조건 내가 예수 믿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직분을 가졌으니 남보다 예수를 더 잘 믿는 것이다-이렇게 자만하지 마십시오. 천당에 가보아야 알게 될 일이지 내 마음대로는 모를 일입니다. 목사가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 많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사람들을 쪽집개처럼 잘 알아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다른 연유로 교회에 나오고 있을 뿐입니다. 목적이 전혀 틀립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니 갈등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도 흡족하게 시원스럽게 예수를 믿지 못합니다. 한번도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옆에서 보기에도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이보다 딱한 사람이 없습니다. 차라리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면 예수 믿으라고 전도나 할 수 있지만 이건 도대체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절대조건입니다. 여기서 부인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의 반대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인정하지 말아야 됩니다. 내 지식, 내 능력, 내 재주, 내 IQ, 나의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말아야 됩니다.
아무 것도 쓸만한 것이 없습니다. 내 생각, 내 의지에 의존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얼마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자기 의견만을 내세우고 자기만이 옳다고 고집하고 있습니까? 그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를 수 없습니다. 갈등이 있을 뿐입니다. 예배시간에 늦는 사람을 보면 한두 번 늦는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늦습니다. 이런 사람은 수상한 사람입니다. 아마 어디서 배급을 준다고 하면 부리나케 달려갈 사람입니다. 영화구경을 간다고 하면 단 5분이 늦을까봐 야단을 떨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올 때는 꼭 시간에 늦습니다. 이 무슨 못된 버릇입니까? 아직도 자기 부정이 이뤄지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 십자가를 철저하게 지지 못했기 때문이요 큰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이 힘들어집니다.
교회에 가는 발걸음이 무겁기 짝이 없습니다. 가자니 싫고 안가자니 지옥으로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오늘만 가지 말까, 매일 가야 천당에 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루 안가면 어떠랴-이리저리 망설이다보니 벌써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또 늦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이 모든 일들이 진정으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데서 기인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아주 중요한 내용을 연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바른 응답입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크리스찬입니다. 헬라어로는 '오이 데 투 크리스투 예수'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라는 뜻입니다. 완전히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 소속된 사람을 뜻합니다. '소속'의 의미입니다. 저는 풍속이 다른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가끔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명함을 많이 주고받지 않는 편입니다마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굉장히 많이 명함을 주고받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꼬박꼬박 줍니다.
그래서 저도 명함을 가지고 다니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받기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평짜리의 조그만 식당에 가도 주인이 명함을 줍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명함에 씌어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름 석 자와 직장명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이 직장에 속한 사람이다 하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소속을 밝히는 것이요 '나'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증명, 아이덴티피케이션(identification)입니다. 이 증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소속입니다. 명함에 나는 돈 얼마를 가졌다고 써넣은 사람은 없습디다. 나는 집이 몇 채가 됩니다 하고 써넣은 사람도 못봤습니다. 명함에 쓰는 것은 오직 소속입니다. 내가 교수이면 아무 대학의 교수라고 써넣고, 내가 직장인이면 아무 회사의 아무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써넣습니다.
사람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소유요, 둘째가 능력이요, 셋째가 소속입니다. 모두 중요한 것들이지만 그 중 소속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소속이 하나씩은 있습니다. 바로 성씨(姓氏)입니다. 곽씨이면 곽씨 집안에 속한 사람을 뜻하고, 박씨이면 박씨 가문에 속한 사람을 뜻합니다. 성씨에 따라 양반도 되었다 상놈도 되었다 합니다. 이 가문이라는 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있게 되는 소속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소속부터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속-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크리스티아노스', 그리스도께 속한 자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그의 소속에 따라 평가됩니다. 우리가 임종하게 되어 세상을 떠날 때에 무엇을 내놓을 것입니까? 나의 공로를 내놓을 것입니까, 나의 업적을 내놓을 것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라는 아이덴티피케이션 밖에 내놓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소속에 대한 자의식이 분명해야 됩니다. 깊이 생각하십시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의 소속은 그리스도입니다. 소속에 대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백성입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 교포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운동경기차 외국에 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권투를 하든지 축구를 하든지 상관없이 아무튼 시합에서 이기면 애국가가 울려퍼집니다. 그때에 울지 않는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다. 다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속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싸워 이긴 것은 아니지만 내가 속한 나라가 이겼으므로 내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서울올림픽 이후에 세계 어디를 가도 만나는 사람마다 올림픽 이야기를 꺼냅니다. 대개는 다 잊어버렸는데 외국에 나가면 아직도 서울올림픽이 굉장했다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지난번 북경에 갔을 때에 우리 한민족들을 만났습니다.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는 동안에 다들 모였었다고 합니다. '야 저 사람들 참 잘사는구나' 감탄하면서 올림픽게임은 안보고 서울구경만 했답니다. 조금 우습기는 합니다마는 중국 땅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한국사람이라는 동질감을 가지고 있습디다. 마치 자기네가 올림픽을 치른 것처럼 흥겨워합니다. 바로 이것이 소속감입니다. 우리도 한국사람이다 라는 소속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고 하는 소속감을 늘 확인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원칙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가치와 목적과 의미에 있어서 옛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옛날에 속하였던 여하한 관계들도 다 끊어낸 사람입니다. 근본적으로 끊어졌습니다. 옛것은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것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봅시다. 십자가에는 몇 가지 원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는 자원적이고 선택적인 것입니다. 억지로 지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고 도망갈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면 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일부러 침묵하고 변명 없이 십자가를 질 때에 그것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낳아 키우는 일에 좀 고생이 따른다고 해서 자식을 십자가라고 합디다. 그런 싸구려 십자가는 세상에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잘못하여 남편에게 시달려도 십자가를 진다고 합니다. 그것이야 마지못해 지는 것입니다. 도망갈 수 없어서 억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십자가가 못됩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피할 수도 있고 안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안 질 수 있는 것을 내가 자원하고 선택해서 기꺼이 질 때에 십자가가 됩니다. 고통스럽다고 다 십자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적이라는 의미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둘째, 목적적입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확실한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었을 때, 그 의미가 자신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고,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추수의 날을 고대하면서 썩어지는 밀알이 될 때에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렇듯 확실한 목적이 있어야 됩니다. 어물거리다가 그만 말려들었다면 이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무슨 특별한 뜻도 없었는데 어쩌다가 잘못해서 지게 된 고통을 가리켜 십자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셋째, 철저한 고통,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입니다. 고통의 극치입니다. 넷째, 죽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죽음입니다. 죽음이란 기억도 없고, 감각도 없습니다. 가치도 없고, 효율도 없습니다. 물론 매력도 없습니다. 시체에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또한 관심도 없습니다.
모든 관심이 사라졌습니다. 효과도 없고 사역도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살았을 때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죽은 다음에 무슨 의미가 남아 있겠습니까? 시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난 여름 시카고의 맥코믹(McComick) 신학교에 강의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한가한 오후였습니다. 그곳에 거주하는 친구 목사님의 후배들과 제가 가르친 제자들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오늘 하루는 저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주십시오. 어디든 가시고 싶은 데가 있으면 저희들이 안내해드리지요." 그래서 시카고 박물관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규모가 큰 박물관인데 마침 미이라 전시회를 합디다. 제가 프랑스나 로마에서 본 것보다 많습디다. 이집트의 미이라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미이라를 20구 정도 옮겨다 전시해놓았습니다. 어린아이 미이라, 어른 미이라를 쭉 늘어놓았는데 열 개를 보나 하나를 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것이 하나 보였습니다. 그 미이라 중에도 특별히 하나를 해부해 놓은 것입니다. 중간 정도에서 한 번 절개를 하여 전시하고 있었는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마치 북어같습디다. 사람이 꼭 북어 말려놓은 것과 같습디다. "이 미이라된 사람 두 번 죽는구만." 제가 그랬습니다.
별로 달갑지 않습디다. 차라리 태워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북어 꼴을 하고 이리저리 박물관으로나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뼈에 가죽이 조금 붙어서 바짝 말랐습니다. 썩지 않았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며 야단법석이지만 차라리 썩은 것만도 못합니다. 바보 같은 짓입니다. 옛날 왕들이 참 어리석었습니다. 미이라로 만들어 안 썩게 하면 죽지 않는 것입니까? 안 죽기는 왜 안죽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짓입니다. 정말 보기에 딱한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죽음입니다.
왕의 죽음이든 거지의 죽음이든 죽음은 죽음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모두 똑같습니다. 거기에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완전하게 부정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죽음은 능동적입니다. 피동적이거나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올시다. 능동적인 죽음,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죽음입니다.
본문 말씀에 따르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인간이 죽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철학입니다. 모든 철학이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습니까? 종말론으로부터 생각합니다. 모든 종교가 종말론적이요 모든 철학이 종말론적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숨을 쉬고 있어도 스스로 죽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사도 바울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I am crucified with Christ.)-너무도 위대한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철저하게 죽어야만 자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법적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나는 죄인이고 이미 타락한 몸이며 잘못된 심령이기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깨끗하게 죽어야 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경험하고 간증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차를 타고 가면서 잠깐 방송으로 들었습니다마는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겪은 바를 간증합디다. 그렇게도 못된 사람이었는데 완전히 죽어져서 은혜를 받았다는 체험을 나름대로 설명합니다. 참으로 은혜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참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죽는 것을 체험합니다. 자기가 죽는 것,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죽습니다. 내가 죽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죽도록 만드십니다. 스스로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하게 만드십니다. 완전히 죽어져서 백기를 들어야 그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교회에 몇십 년 다녔다고 해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는 체험을 아직 못한 사람이라면 사는 체험은 더더욱 못했을 것입니다. 죽는 체험이 있고서야 사는 체험이 있습니다. 내가 죽는 체험이 없이 무슨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철학적으로 지식적으로 '이치가 이렇구나' 하고 아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가 빈번합니다. 회개도 제대로 못하고 찬송도 크게 못부릅니다. 한번도 벅찬 감격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심령이 바싹 메말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분명히 말씀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자기가 철저하게 죽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자유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십자가에 죽어져야 하는데 죽는 중에 다 죽지 못했습니다. 버리는 중에 다 버리지 못했습니다. 좋은 예는 아닙니다마는 우리 문화권 안에서는 비교적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여자가 결혼을 합니다. 옛날에는 결혼이라고 하지 않고 혼인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두 말의 의미가 애매하여 저도 '결혼'이라고도 하고 '혼인'이라고도 했습니다마는 국어사전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혼인이라는 말이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요즘은 결혼식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혼인식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하나, 시집간다고 합니다.
시집으로 가서 그 가문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신랑이 있건 없건 상관없습니다. 신랑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시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입니다. 족보를 옮기는 것입니다. 호적을 떼어다가 옮겨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시집갔으면 친정은 잊어야 합니다. 이제 친정은 의미상으로 죽었습니다. 친정 걱정을 자주 하는 사람치고 시집살이 잘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일절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쪽은 까맣게 잊어야 됩니다. 그야말로 출가외인입니다. 완전히 나는 이집 사람이다 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몸은 여기에 와 있는데 생각은 항상 친정에 가 있습니다. 아이도 낳고 살림을 하면서도 전화통만 붙들고 있습니다. '친정에 가서 무엇을 가져올까.' 이런 궁리만 하고 앉았습니다. 그러니 될 까닭이 있습니까? 그래서 원만하지가 못합니다. 친정에 금덩이가 있든 은덩이가 있든 이제는 나와 별개의 문제입니다. 시집과의 관계가 중요하지 왜 딴 데에 신경을 씁니까? 말하자면 아직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고로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에 우리는 옛사람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해야 합니다. 성서적으로 이런 비유를 많이 용납합니다. 이 청산이 잘 안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전하고자 하는 것이 이 점입니다. 부분적으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아직 잔재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잔여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철저히 죽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모세를 보십시오. 40일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귀한 체험을 하고서는 산에서 내려오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을 내던집니다. 우상 섬기는 것을 좀 봤기로니 그렇게 때려부술 수 있습니까? 아주 철저하게 죽은 줄 알았는데 욱하고 올라오는 기운에 마구 폭발합니다. 어떤 때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세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돌판을 내리치면 어떡하겠다는 것입니까? 애굽사람을 죽였던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돌인데, 잠시 옆에 놓고 다른 돌을 던지든 말든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을 내던지면 어떡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는 아직 덜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에 그는 종종 그런 실수를 합니다. 반석을 탕탕 두 번 친 것도 그렇습니다. 모세가 덜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가 죽을지언정 따라가겠다고 장담하였는데, 죽음의 위험이 닥치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아직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목숨을 바치고 사는 사람이라면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형식적으로 법적으로 세례교인이므로 교인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죽지 못한 까닭에 진짜 교인이 안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라고 합니다.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박았습니다. '정(精)'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데마신'입니다. 라틴어로는 아시다시피 '파시온(passion)'입니다. '정'의 원뜻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정열'입니다. 그 마음에 정열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정열입니다. 이 정열이 죽지 않아 문제입니다. 늘 들먹거립니다. 그 다음에 욕심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두미아이스'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일에 대한 욕심, 지위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욕심의 종류는 많습니다. 어느 경영학 서적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사업에 실패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지식과 정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셋째는 욕심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왜 실패하는가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지나친 욕심이 원인입니다.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했습니다. 정과 욕심까지 십자가에 못박아 완전히 죽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뜻을 하나님께 둔다고 말로는 하면서 아직도 정과 욕심은 그대로입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셔서 내가 정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내가 너무 욕심이 많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도 합니다. 여러 사건을 통해서 나에게 욕심이 문제라는 것을 지시해주십니다. 그런데도 바둥바둥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붙들고 있는 동안은 참그리스도인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매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을 붙들고 고집하다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에야 포기합디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조금 더 일찍 체험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과 욕심까지 철저하게 십자가에 못박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한번은 어느 장로님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웃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회개할 일이 있습니다" 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장로님에게는 아들 셋이 있습니다. 그 중 똑똑한 아들 하나가 일류대학을 나와 저 유명한 미국 MIT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이 아들이 가문의 명예를 높이겠구나 하여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미국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 저 신학공부 해서 목사가 되겠습니다." 아마도 수련회에 참석하였다가 은혜를 받은 모양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기가 막혀 소리쳤습니다. "야 이놈아, 정신나갔구나 너. 지금까지 공부한 것은 어찌하고……" 성공이 눈앞에 환한데 왕청스레 목사라니 웬말인가 싶습니다. 그길로 아들이 달려나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다짜고짜 하는 말이 "장로님, 왜 그러십니까?" 였습니다. 그 장로님 곰곰이 생각해보니 큰 실수를 했습니다. 가슴깊이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아들 가운데에 가장 똑똑한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똑똑한 녀석이 목사가 뭐냐'라고 했으니 말이 됩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요? 정과 욕심을 아직 십자가에 못박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치관이 여전히 희미하기 때문에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정과 욕심-십자가에 깨끗이 못박아야 됩니다.
그럴 때에야 참으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절)" 라고 말씀합니다. 안과 밖이 다 성령으로 맺어져야 합니다. 감정만 성령을 따라서도 안되고 지식만 성령을 따라서도 안됩니다. 행동 자체가 성령의 길을 따라야 됩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사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줄을 잘못 탔다'고 하는 유행어가 있습니다. 줄을 잘못 타면 정말 큰일납니다. 고속도로 여행을 할 때에 어쩌다 차선을 잘못 들어서면 한참 고생을 합니다. 줄을 잘 타야 됩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줄을 따라가야 됩니다. 잘못된 줄을 타면 엉뚱한 방향으로 빠집니다, 그래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6절)"라고 합니다. 격동은 약함의 증거입니다. 약하니까 소리만 요란한 것입니다.
투기가 왜 생깁니까? 자기가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가는 사람을 잡아당기는 것이 투기입니다. 투기하는 자의 마음은 실패한 자의 마음입니다. 자신만만한 사람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지 남 잡아당길 필요가 없습니다. 넘어진 사람이 앉아서 남에게 트집을 잡는 것입니다. 가장 비겁한 행동이 투기입니다. 내 마음속에 질투하는 마음이 있거든 각성해야 합니다. 투기는 약자의 하소연입니다.
실패한 자가 제자리에 앉아 남을 끌어내리자는 마음입니다.
참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똑바로 바라보십시다. 거기에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나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그리고 나의 죄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나의 십자가를 발견해야 됩니다. 그때에 나는 온전한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온전히 죽을 때에 자유 하게 됨을 체험합니다. 마침내 부활의 참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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