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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외식(2장 11~13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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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외식(21113)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오늘의 본문에는 신앙인의 외식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우선 본문의 다음에 나오는 14절의 말씀 중 전반절을 주의 깊게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나는 저희들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적어도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복음, 또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의 골자는 첫째,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무슨 의를 조금 행한다 해봤지만 알고 보니 의가 아니고 죄더라,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이것이 하나님일 것이다 했는데 알고 보니 우상이더라-이런 경우가 흔합니다. 나름대로 좀 교만한 생각에서 선을 행하려다보니 부작용이 많습니다. 또 좀더 의롭게 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불의가 됩니다. 마침내 우리는 인간적인 방법, 인간적인 생각으로 선과 의를 추구해봐야 쓸데없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방법, 인간의 의, 인간의 노력, 인간의 공로로써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죄라는 것, 이것이 복음의 기초가 됩니다. -인간으로서는 구제불능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를 재미있게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떠내려가면서 자꾸 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깁니다. 물위로 올라가려고 제 손으로 제 머리끄덩이를 아무리 잡아당겨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그는 점점 더 깊이 빠질 뿐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전적인 타락(total corruption)이라고 합니다. 근본적으로 타락한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구제불능의 존재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 인간의 의로써는 도저히 구원에 이를 수 없다-이것이 첫 번째 복음입니다.

두 번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을 주시고, 그가 보낸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감화하시고, 오늘도 객관적이자 주관적인 말씀으로, 또는 영으로, 또는 사건을 통하여 적극적 주도적으로 역사 하심으로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오직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또 그 은혜를 믿음으로,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과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신다고 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긍휼, 오직 믿음, 오직 십자가-이것이 복음입니다.

,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끼리 내가 크다 네가 작다 하고 우리는 따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 죄인입니다. 서로 잘났다고 해보았자 도토리 키재기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는 웃사람 아랫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 나은 사람도 없고 더 못한 사람도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어차피 다 죄인이요 어차피 은혜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직 은혜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또 이것은 지식이며 자기 인식이며 이웃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행동으로 나타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것처럼 저 사람도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습니다. 노예건 주인이건 혹은 자유인이건 물을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입장에서는 모두 똑같고 귀중합니다. 시쳇말로 하면 전적으로 평등한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끼리는 그래서 서로 형제 자매라고 합니다. 이는 수평적 위치에 있다고 하는 믿음을 생활화한 자세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사는 것은 '절대겸손'입니다. 교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평생을 두고 선만 행한다 해도 그 은혜를 갚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을 은혜 안에서 소중히 여기듯이 다른 사람도 은혜 안에서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논법대로라면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 자매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저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니 저 사람도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므로 그 영혼을 나의 영혼과 똑같이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마침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이웃 사이에 형제애가 싹트고 사랑이 흐르고 평등의식이 피어납니다. 비로소 복음으로 사는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마음에 꼭 새겨두시고 오늘의 말씀을 접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은 신앙의 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신앙을 훼손하는 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신앙을 추상화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추상적 진리로 만들어 학문화해버립니다. 이를테면 성경을 많이 알고 있으면 믿음이 큰 줄로 아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으면 그것으로 예수 잘 믿는 양 생각합니다. 찬송 잘 부른다던가 성경 말씀을 잘 찾는다던가 제반 의식을 잘 안다든가 교회의 행사치레에 능숙하다든가 하면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 : 30)"-순서가 없습니다. '장로는 믿음이 참 좋겠지, 더 잘 믿겠지' '목사의 믿음이야 말할 것도 없이 완전할 것이다'-혹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처음 믿는 사람이 더 잘 믿을 수도 있고 오래 믿은 사람이 알고 보면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 결과는 하늘나라에 가봐야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가면 깜짝 놀랄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꼭 와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꼭 있을 줄 알았는데 없습니다. 또하나는 올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럴 수 있습니다.

지식은 신앙이 아니다-이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공부 많이 하고 성경구절 많이 외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성경을 몽땅 암기한다고 해도 소용없을 수가 있습니다. 한번은 신약성경을 다 외고 시편잠언을 막힘 없이 줄줄 읊어 내리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안양교도소에서 징역살던 전과 7범 인데, 과연 머리가 좋은 사람입디다. 성경 암송 시험을 보이는데, 이 사람은 문제를 내기가 무섭게 척척 외어냅니다. "마태복음 51절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누가복음 37절은?"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이런 식으로 글자 한자 틀리지 않고 암송해냅니다. 컴퓨터는 자판을 찍어야 나오지만 이 사람은 찍지 않아도 나옵니다. 놀라운 재주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과 7범의 흉악범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지식과 신앙을 혼동해서 안됩니다.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깊이가 중요합니다. 진실로 믿으면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행하는 것과 신앙이 별개로 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주 있어 줄줄이 외고 말은 잘하는데 행하는 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 영혼에도 행하는 바 없고 제 생활 가운데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적입니다. 신앙의 추상화입니다.

신앙의 적 그 둘은 위선(僞善)-외식(外飾)입니다. 신앙인의 행위를 위장하는 것입니다. 잘못 믿으면서도 잘 믿는 것처럼, 별로 선한 마음도 없으면서 선한 일을 발벗고 따라다니면서 합니다. 돈 조금 내놓는 것으로 헛기침을 하지만 마음속에는 전혀 진실함이 없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땅을 팔아다 바치고 사람들로부터 훌륭하다고 칭찬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칭찬 받는 거 간단하구나.

돈 좀 내면 되겠구나'하고 생각합니다. 땅을 팔았습니다. 팔고 나서 다 바칠 생각을 하니 아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반은 감추고 나머지 반만을 갖다바쳤습니다. 위선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초대교회에서 위선은 이처럼 가장 무서운 적이었고, 위선자에게는 엄한 처벌이 내려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기는 하는데 진실한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해서도 아니고 감사한 마음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오직 사람에게 보여 칭찬 받으려는 생각뿐입니다. 이는 거룩함과 거룩한 이름을 도둑질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요,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거룩한 행위를 위장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온 것부터 생각합시다. 베드로가 일하는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나 앞서 본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할례 받은 유대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이방사람들에게 전도를 합니다. 이방이 자신의 미션 필드(mission field)요 책임입니다. 또 그에게는 그것이 전문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할례 받은 유대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책임이었습니다. 소명도 같고 부른 자도 같으며 복음을 전하는 역사는 같았지만, 일터가 다르고 대상이 달랐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사람에게 베드로는 유대사람에게-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베드로는 원래 갈릴리 태생이요 헬라말을 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태생으로 헬라말과 헬라 문화에 능통해 있었습니다. 더구나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적절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된 일인 것입니다.

아무튼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베드로가 이방선교의 본거지가 된 안디옥에 왔습니다. 이곳은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곳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오기는 왔지만 그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신학이 정립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공부가 없었습니다. 이방사람들에게 선교할 때에는 어떤 말로 해야 하며, 어떤 주제를 어떤 방법으로 다루어야 하며,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런 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해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이방선교를 위한 신학이 정리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 말씀과 같은 일을 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과는 거리가 멉니다.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인 다음에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기도하고 연구하여 신학체계를 세운 후에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한치도 흔들림이 없이 일관성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방사람들에게 갔을 때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에 대한 신학적 정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또하나는 믿음과 관성(慣性)의 문제입니다. 즉 습관의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극복해야 할 관성이 있었습니다. 유대사람이기 때문에 유대 민족이 가지는 나름대로의 습관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습관을 완전히 복음적으로 해석해놓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오래 전에 한번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마는 일본에 예수를 잘 믿어서 '감사 할머니'라고 불리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그저 '감사합니다', 아이가 병원에 입원해도 '감사합니다', 개가 죽어도 '감사합니다'할 만큼 '감사합니다' 소리만 하고 다녀서 '감사 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어느 수요일 저녁, 이 할머니가 교회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소방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자기집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감사 할머니가 부지런히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는 집은 다름 아닌 자기 집이었던 것입니다. 목조로 된 큰집이 순식간에 다 타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할머니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내놓은 소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무아미타불"이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관성입니다. 사람의 내면 깊숙이에 숨어 있다가 무의식중에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우를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또 어느 때에 보면 '재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재수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재수는 왜 찾습니까? 그런가 하면 '전생에 죄가 많아서' 하면서 전생(前生)을 찾습니다. 전생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궁합(宮合)을 찾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버릇들이 우리의 내면에 알게 모르게 잠재되어 있어서 어느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아직도 깨끗이 버리고 비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완전히 극복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취한 행동도 깊이 생각한 끝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관성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밑바닥에 남아 있던 습성이 자기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와서 실수하게 되었습니다. 신중히 생각했다면, 또 바울로부터 책망들을 것을 생각했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워낙 실수를 잘하는 사람이지만 그래서 더욱 엄청난 실수를 하고 맙니다.

다시 한마디로 말하면 그에게는 이방인을 상대할 때에 갖추어야 할 선교신학이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요새말로 한다면 먼저 선교신학을 공부한 다음에 안디옥을 방문했어야 합니다. 여러분,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 사전 공부 없이 보낸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낯선 지역에 가서 그곳의 낯선 문화와 맞닥뜨리게 되면 당황할 것은 당연합니다. 별소리를 다하게 됩니다. 심지어 신학적으로 책임지지 못할 말까지 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는 먼저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 기독교의 현황부터 자세히 익히게 합니다. 이것을 선교신학이라고 합니다. 이 선교신학을 정립한 연후에 나가서 부딪쳐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라고는 하지만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 유명한 사람이요 기둥의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지금 사도권적인 연계를 위해서 안디옥에 갔지만 선교신학의 부재로 말미암아 그만 엄청난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불확실하게 되었습니다. 불확실하게 되면 자연히 나약하게 되고, 나약해지면 본의 아니게 위선에 빠지고 맙니다. 우리는 그러한 베드로의 경우를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신앙체계를 확실히 해야 됩니다. 신학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비로소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어떤 형편에 처해서도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학체계의 미비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음식을 같이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편의상 여기서 사도행전 2467절을 봅시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모일 때마다 저들은 떡을 떼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그리고 반드시 떡을 떼었습니다. 떡을 떼며-하나의 친교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마는 지금은 떡을 조그마하게 만들고 잔도 작은 것으로 성찬식이라고 하는 특별의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저녁식사를 하면서 성찬식을 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저의 할아버지 적 초대교회에서는 성찬식을 인절미로 했다고 합니다. 큼직한 쟁반에다 인절미를 해다 놓고 사랑방에 죽 둘러앉아 떡을 뚝뚝 떼어 꽤 푸짐한 성찬식을 한 것입니다. 요즘은 퍽 인색해 보입니다.

이를 보고 옛분들은 불만스러워합니다. '요새 성찬식은 성찬식 같지도 않단 말이야. 입에 넣으라는 떡인지 눈에 넣으라는 떡인지 모르겠다'- 보일 듯 말듯하게 작아빠진 떡쪼가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찬식이라는 예배의식이 아직은 완전히 구체화되기 전이어서 성찬식 자체가 그대로 식사시간이었습니다. 동식(同食 ; common meal)이었습니다. 친교적 식사가 곧 성찬이었습니다. 성찬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모인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함께 식사를 하게 되면 그 식사를 성찬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찬식이라 해서 따로 준비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626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드시면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시고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십니다. 음식은 본래 있었습니다. 거기에 성찬적인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재미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33)"-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성찬식을 할 때에 순서대로 기다렸다가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좋으련만 배고픈 사람, 욕심 많은 사람들이 먼저 다 먹어버리기 때문에 온유하고 겸손해서 뒤에 남은 사람들은 얻어먹을 것이 없어지곤 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먹어 배가 터질 지경이고 어떤 사람은 못 얻어먹어 허기지고-오죽 답답했으면 사도 바울의 입으로 그런 충고를 했겠습니까?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34)"-예배는 딴 데 있고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초대교회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합니다.

기도하고 함께 떡을 나누는 성찬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것만큼 큰 친교는 없습니다.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라도 한잔 나누거나 마주앉아 식사라도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께서 좋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때에만은 모두가 평등해집니다. 성찬식에서 장로님은 큰 떡, 집사님은 작은 떡, 평교인은 더 작은 떡으로-이렇게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성찬식의 순간에는 모두가 평등함을 피부로 느낍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방인도 노예도 함께 참여합니다. 평소 같으면 귀족이 따로 있고 천민, 노예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성찬이 아니고는 마주 앉지도 못하는 신분들입니다.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common meal의 중요한 의미가 이것입니다. 유월절 그날의 성만찬-그리스도의 사랑이 여기에서 구체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페라고 불렀습니다. '사랑의 잔치'-'애찬(Love Feast)'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다시 돌아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유대사람들은 융통성 없는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강하여 유대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교만했습니다. 거룩을 자칭하고 성결을 자칭하며 하나님의 긍휼도 유대사람들의 전매특허인 양 생각했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이웃은 유대사람뿐이었습니다. 이방사람들을 더러운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멍멍개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방사람과는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하여 사업도 함께 하지 않습니다. 여행도 같이 하지 않습니다. 동식도 동숙(同宿)도 하지 않습니다. 이방사람에게는 대접하는 법도 대접받는 법도 없습니다. 굶어죽어도 이방사람의 집에서는 얻어먹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방과는 통혼(通婚)도 없었습니다. 이토록 도도했습니다. 이방사람하고 가까이하는 것은 절대 금기(taboo)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사람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습니다. 이방 땅인 안디옥에 들어섰더니 이방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반갑게 자기를 맞이합니다. 베드로의 방문을 그들이 고맙게 여깁니다. 이를 본 베드로 역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감격합니다. 위대한 12제자하고도 수제자요, 반석이요, 천국의 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그만 으쓱해집니다. 경황 중에 예의 그 터부를 망각합니다. 이방사람에 대한 금기사항을 돌아볼 경황이 아닙니다.

예배를 마치고 그들과 한자리에 앉아 즐겁게 음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그런데 그때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야고보가 보냈다는 말도 아니고 야고보의 제자라는 말도 아닌 것 같은)이 들어섭니다.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기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에서 온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불쑥 나타난 순간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납니다. 음식을 먹다말고 벌떡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유대 사람된 본색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불식간에 '나무아미타불'이 튀어나오고 만 격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관성이 작용한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를 뜨고 맙니다. 이렇게 되니 문제가 안될 수 없습니다.

이방사람은 할례 없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예루살렘교회에서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할례 없이 예수를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친교해야 되느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할례 안 받고 예수 믿어도 된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이러한 사항은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교 방법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언급이 되지 않았어도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기독교인으로 평등하게 대했어야 합니다. 똑같은 기독교인 사이에 동서남북이 어디 있습니까? 딱하게도 베드로에게는 그만한 자질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융통성이, 그러한 여유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신학 부재'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할례 없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해 놓고 이방사람과 같이 음식을 먹는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해결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큰 실수입니다. 이것이 위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면 과거와는 상관없이 그 집에 가 잠도 자고 먹기도 같이 먹으며 통혼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같은 복음에 따른 하나님의 자녀다-말은 이렇게 하면서 행동으로는 구별해서야 되겠습니까? 예삿일이 아닙니다.

위선은 또 다른 위선을 낳습니다. 이것은 더욱 예삿일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일어서니까 같이 있던 유대사람들이 따라 일어서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참 유감스러운 대목이 나옵니다. "같이 외식(外飾)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13)." 바나바라면 사도 바울처럼 이방에의 전도자입니다. 마음이 좋고 덕이 있는 사람인데 명철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일어서므로 나도 일어섰다-베드로를 추종할 만큼 마음으로 존경하는 것까지는 가타 치더라도 베드로가 잘못하는 일까지야 따를 것 없지 않습니까? 위선(僞善)까지 왜 따릅니까? 바나바까지 베드로의 위선에 유혹되어 나가버리면 이방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더더욱 상처를 입겠습니까? '우리하고 한 자리에서 식사하기를 꺼리다니, 당신들은 말끝마다 우리한테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이 무슨 차별이란 말인가?'-많은 사람이 낙심하게 되고 불만을 품게 됩니다. 당연히 사도 바울은 몹시 분개합니다. 베드로를 호되게 책망합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본문 말씀의 행간에서 우리는 서슬 퍼런 바울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베드로를 베드로대로 존경하는 바울입니다. 그러나 그 존경을 신앙 위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위대합니다. 내가 아무개를 존경하지만 그분이 하는 일이라면 다 옳다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존경할 것이면 끝까지 변치 말고 존경하십시오. 그에게 실수가 있더라도 존경하십시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신앙의 자세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유명한 베드로가 오늘은 그만 유명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큰 실덕(失德)입니다. 그 명성이 오늘의 이 신앙적인 실수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사람 하나가 끼치는 영향력은 큽니다. 그 사람이 특별한 지도자인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장로님들 많이 나오셨는데 참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어느 교회에 가보니 저녁예배에 장로님들이 안 나옵디다. 그 교회는 언제나 저녁예배에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장로님이 안 나가는데 내가 왜 나가' '집사님이 안 나가는데 나야 뭐'-교인들이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이래서 지도자의 위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만큼 크고 장로만큼 자란다고 합니다. 장로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그만큼 교회가 달라집니다. 장로가 새벽기도 안 나오면 그 교회 새벽기도에 사람 모이기는 틀린 것입니다. 될 리가 없습니다. 장로가 십일조 안 하는데 누가 십일조 하겠습니까? 집사가 십일조 안 하는데 평신도가 십일조 하게 됐습니까? 지도자의 영향력은 이렇듯 중요합니다. 베드로 한 사람, 존경받는 이 한사람이 삐끗하고 실수하니까 유대사람이 다 삐끗합니다. 그래서 따라 일어납니다. 바나바마저 위선자가 됩니다. 모두가 위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분개했습니다. 신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흔히 일어나는 윤리적인 문제라거나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요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위선이야말로 금기이기 때문에 무섭게 책망합니다. 확고한 신앙입니다. 양보 없는 신앙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의 신앙을 지켜가고자 하는 그의 참된 신앙적 의지가 참으로 우러러 보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복음 안에서 행하라 하십니다. 복음 진리를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그 행위가 한결같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다르고 사람 앞에 다르면 못씁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가 같아야 합니다. 함께 행동하다가 누가 보면 달라지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람 앞에 따로 하고 하나님 앞에 따로 하고 내 양심에 따로 하면 못씁니다. 신앙인에게 닥치는 유혹과 시험 앞에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무서운 위선입니다. 외식은 무서운 적입니다.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늘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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