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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자의 길(1장 18~24절)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바울의 극적인 회심은 사도행전 9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회심의 사건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다면 바로 이 바울의 회심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루살렘에 국한되어 있던 기독교를 세계로 발전시키게 되었고 나아가 오늘의 기독교로 성장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바울될 수 있었던 것이 이 회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과거에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는 일에 동참했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도 가담하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이 사건은 많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다메섹이라는 먼 곳까지 피해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곳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붙잡아 공회에 넘기려고 했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잔해해버리려는 철저한 기독교 박해자였습니다. 그러한 바울이 예수를 믿게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됩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예수님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계시적 사건으로 받아들입니다. 소명(召命)으로 압니다. 운명이 여기에서 확실하게 정해졌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누구에게나 바울의 회심과 같이 중요한 사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험 만큼 굉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작건 크건 누구에게나 신앙적 체험은 있으리라고 봅니다. 문제는 그 체험을 어떻게 소중히 여기느냐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결심했으면 그 마음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삶의 전환을 가져온 바로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6․25와 같은 절박한 형편에서는 우선 살아남는 것이 긴했습니다. 살아만 남는다면 앞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불평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살았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다짐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 회심의 사건을 소중히 여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중심으로 생을 전환하여 직선으로 살았습니다.
다시 돌아가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위대한 점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환상을 본 적이 있습니까? 본 사람도 있고 못 본 사람도 있고, 보아도 그만 못 보아도 그만입니다마는 어쩌다 특별한 환상을 보았다 해서 '아,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건가보다'하고 중대한 사건인 양 받아들여 굳게 결심했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내가 아마 꿈을 꾸었었나보지?'하고 마음이 엷어지기 일쑤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중병을 얻어 수술도 받고 약도 먹었지만 소용이 없다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는 가운데 병이 나았습니다. 기쁜 나머지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기분도 좋고 안색도 좋아졌습니다. 그렇게 얼마동안이 지났습니다.
누가 인사를 합니다. "건강해 보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좋아졌습니까?" "글쎄요" 하고 이 사람 대답하는 것 보십시오. "하도 많은 약을 먹어놔서 어떤 약이 들었는지 모르겠어요"-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나았다 하는 마음을 분명히 가지고 신앙으로 받아들였다가도 그때가 지나고 나면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을 거라는 둥 약의 효험을 봐서라는 둥 우연이었다는 둥 딴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실로 유감스런 일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받은 체험은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남이 뭐라 건 세월이 어떻게 달라지건 소중히 여기고 그 마음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로 약속했으면 지금도 순종하는 것이며, 충성하기로 약속했으면 두고두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기로 약속했으면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 마음을 흔들어놓습니다. 체험의 질을 희석시킵니다. 그대로 넘어가 버립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경험이 계시요 소명이라고 믿습니다. 운명이 걸린 사건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대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이 귀중한 종교적 체험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다시 말하면 follow up-후속 조치를 어떻게 했습니까? 이 또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소중한 체험을 가지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을 찾아가 의논을 하기도 합니다. 혹은 몸이 나았으니 기분 좋게 장사하러 떠납니다. 이렇게들 당장에 세상 속으로 나가기 쉽습니다.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 교우 한 분이 큰 수술을 받고 오랫동안 병원에 있다가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불편한 몸인데 그는 집으로 바로 가지 않았습니다. 교회부터 들렀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기도를 드린 다음에 집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언제 어디서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건강만 되찾으면 꼭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여 그 은혜로 건강을 얻었는데 어찌 집으로 갈 수 있겠는가-그래서 하나님의 성전부터 찾아 기도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가끔씩 문간에서 그런 분을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워보이는지 저는 돌아서서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분에게 특별히 은혜 베풀어주소서. 은혜가 더 충만케 해주소서.
더 건강하게 해주소서.' 우리가 얻은 체험에는 이같이 후속 행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은 사명자의 길로 네 곳을 갑니다. 첫째, 아라비아로 갑니다. 아라비아로 간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앙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라비아로 갑니다마는 그곳에 혼자 가서 무엇을 하였는지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마도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기도를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신학공부를 한 것입니다. 혼자서 했더라도 신학은 신학입니다. 이것을 학문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종교적 경험을 지식화한 다음에 신학화하고, 그 다음에 사명화하여 마침내 행동화한 것입니다. 체험을 하자마자 간증부터 하려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골치 아픈 전화가 종종 걸려옵니다. "목사님, 저 아무개입니다" "누구시더라? 잘 모르겠는데요" "아무튼요, 교회에서 간증을 좀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제가 지금 귀중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많습니다. "조금 더 기도하고 생각해본 다음에 하도록 합시다." 저는 이렇게 대답해줍니다. '아라비아 3년'이 필요한 것입니다. 체험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신앙적으로 소화하고 지식화해야 됩니다. 여러 성경 말씀과 대조하여 성경의 어느 맥락, 어느 말씀과 관계가 있는지-성경적인 진리와 연결을 시켜야 합니다. 또한 이미 받은 종교적 체험과 자기가 가진 생활, 이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어 신학화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지식화, 신학화, 체계화해야 됩니다. 신학이라고 하여 별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의미, 계시적인 의미를 따져서 체계를 잡아나가는 일입니다. 성경 안에서 일관성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벗어나도 안되고, 다르게 이해해서도 안됩니다. 성경의 맥락에 상통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아브라함에서부터 찾아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하신 말씀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연결시킵니다. 놀라운 발견이요 엄청난 신앙고백입니다. 위대한 신학입니다.
바울의 신학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의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성경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았습니까? 아브라함에게서 찾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 : 6)" 그리고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장 4절에서 찾습니다. 바울은 이 두 말씀을 붙들어서 구약성경의 맥락을 꿰뚫어 성서적으로 신학화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체계가 잡힌 신앙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흔들립니다. 아무리 좋은 종교적 경험을 했더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했더라도 흔들립니다. 자칫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신앙적으로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특별한 체험 때문에 잘못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소중한 체험을 신학화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라비아 3년은 준비기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려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선교사가 되어 해외로 나가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준비 좀 했습니까?" "준비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무조건 가는 것이지요." 말도 안됩니다. 선교사로 나가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여자라면 간호원 공부라도 해야 하고 남자라면 기술 한가지라도 익혀야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도 수도 공사를 잘하는 선교사가 와 계십니다. 수도 기술자입니다. 이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일할 수 있는 기술이나 무엇을 준비하고 나가야 합니다. 요즘은 의사나 선생님이 적당합니다. 특히 영어를 잘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이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요즘 북한에서는 영어를 배우느라 한참 바빠서 영어를 가르칠 선생님이 가겠다고 하면 언제나 환영한다고 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일할 수 있는 기구를 들고 가야 합니다. 빈손으로 가서 어떻게 일할 것입니까?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복음, 문화, 신학, 교회구조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걱정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러한 경우가 허다했습니다마는 지금에 와서도 더 나아지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할 때, 공부를 시키지 않고 그냥 보냈습니다. 우리 나라에 선교학을 공부한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목회하던 사람을 준비 없이 그냥 내보내니 현지에 가서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선교를 합니다. 한국식으로 해서 생긴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태국에 간 선교사가 한국식으로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답니다. 얼마동안 억지로 열심히 나오더니 모두 쓰러지고 말더랍니다. 다음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안될 일이었습니다. 워낙 날이 뜨거운 나라여서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보통 9시, 10시입니다. 그 시간에 일어나서는 잠깐 일하다가 점심을 먹은 다음 한두 시간씩 낮잠을 잡니다. 그리고 3시쯤에 나와 일을 좀 하다가 저녁을 먹습니다. 그때부터 밤 12시까지가 주된 활동시간입니다.
제일 일을 많이 한답니다. 한두 시가 되어서나 잠자리에 드는데 새벽 4시에 나오라고 했으니 되겠습니까? 새벽기도는 한국에서나 되는 것이지요. 그곳에서 하려면 아침 9 시에나 해야 됩니다. "내가 선교공부를 하지 않고 갔다가 얼마나 그릇된 강요를 했었는지 모릅니다. 결국은 실패했습니다"-어느 선교사가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공부할 것이 많습니다. 선교를 목적으로 할 때에는 많은 시간을 두고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0년 동안 준비하시고 3년을 일하셨습니다. 마음이 아무리 급해도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에 가서 3 년은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는 혼자 갔습니다. 가서 깊이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경륜이 무엇일까, 왜 나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을까-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갈라디아서 1장에 나온 바와 같이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擇定)함을 입었구나-깨닫습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체험을 하게 되면 먼저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종종 실패하는 것은 어떤 사건에 직면했을 때에 세상으로 뛰어나가 닥친 일부터 처리하려들기 때문입니다. 우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기도한 후에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하는 일은 모두 실패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호렙산에서 훈련시키십니다. 그런 다음에 시내산에서 만나 말씀하십니다. 언제든지 사람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고, 사람과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받은 계시를 좀더 명확히 이해하고 확인하기 위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영성(靈性)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그 성격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을 씻어내고, 고치고, 죽이고, 잘라내야 합니다. 아프고 괴로운 일이지만 이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계시를 받는 순간에도 "주여, 뉘시오니이까?"하고 물었던 바울입니다. 확인(confirm)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누구요?' 그래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시는 대답을 듣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 경황에서도 확인을 하고 나옵니다. 그러한 바울이기에 아라비아에 가서 3년 동안 확인을 한 것입니다. 좀더 깊이깊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라비아로 간 것입니다.
다음에는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역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났던 일을 다메섹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곳 교인들이 잘 알고 있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처음 예수를 만나서 회심을 한 후에 다메섹으로 곧장 들어갔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여러 회당을 돌아다니며 증거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습니다. "이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행 9 : 21)"하고 의심을 합니다. 저사람 간첩이 아니냐, 예수 증거 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모았다가 모두 잡아가려고 하는 모양이다-별의별 의심을 다합니다. 그런가하면 유대사람들은 유대사람들대로 바울이 유대교를 배신했다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릅니다.
사도행전 9장에 이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경황에서도 그가 경험한 소중한 바를 다메섹교회에 와서 전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던 사람이 돌변하여 이제 예수를 전파한다고 하니 곧이곧대로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기도 없이 전하였기에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3년 동안 기도를 하면서 신학화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체계 있게 정리한 다음에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증거해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원점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실패한 그 자리, 그 원점으로 되돌아가 저들에게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똑바로 설명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각오로 다메섹으로 갑니다. 지난번에는 기도 없이 갔지만 이번에는 기도하면서 갑니다. 가서 전하려고 합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거의 그는 다메섹에 있는 교인들을 전부 끌어다 죽이려는 마음으로 공문서를 가지고 왔었습니다마는 이제는 그 빚을 갚으려고 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다. 당신들에게 많은 피해를 끼치고 많은 빚을 졌으니 이제는 복음의 빚을 갚아야겠다'라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진정으로 받은 바 체험과 복음을 낱낱이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메섹으로 간 이유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은혜에서 한번 실패했다고 한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도를 충분히 한 다음에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되돌아가서 반드시 열매를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세 번째로 예루살렘에를 갑니다. 회심 후 3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회심하자마자 바로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아니라 3년간 기도 생활을 한 연후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독적으로 만났기에 누구와도 의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난 시간의 본문 말씀에서 본 바와 같이 누구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단독적이요 계시적입니다. 하나님과 나와는 직선적인 관계, 직통하는 관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나만 옳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확실하다면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 역시 확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라면 내게 말씀하셨듯이 베드로에게도 말씀하시고 야고보에게도 말씀하셨을 터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는 예수, 베드로가 아는 예수를 같이 생각해야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사도적 전승을 명백히 하려는 것입니다. 단독적이요 계시적인 복음이라 믿고 있는 것을 사도적 전승과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연결하여 협력하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나도 옳지만 그들도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협력을 요청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체험, 개인적인 신앙고백에서 한 걸음 나아가 공동체적이고 교회론적인 의미를 함께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나만 옳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옳으면 다른 사람도 옳은 것이요, 나의 체험이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고 함께 힘을 모을 때에 더 크고 온전한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조금 인색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18절)"-오래 있지 않고 아예 십오 일이라고 제한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의 형제 야고보 말고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서 교제했다던가, 1년 동안이라도 같이 지내며 성경공부를 했다던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베드로와 야고보, 이 두 사람만 만나 보름 동안 같이 지냈다고 합니다.
왜 이토록 인색하게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전하는 복음은 절대로 누구에게서 배우거나 전승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적 전승과 조금도 위배됨이 없는 교회적인 온전한 복음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타협하거나 흥정하여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다,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나는 나대로 그리스도로부터 직통으로 받은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하나다-바로 이런 관계가 중요합니다. 인간적인 것, 세상적인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과 직선적으로 이루어진 계시적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핵심적인 접촉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의 사도권과 복음의 기원을 오직 그리스도께로 근거시키고자 하는 깊은 신앙적 의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히 예루살렘으로 가서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인 야고보를 만났다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시간에 다루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네 번째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갑니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21절)"-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를 말합니다. 아라비아에서 다메섹, 그리고 예루살렘을 거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 귀향에 담겨 있는 의미를 따져봅시다.
로마서 9장 3절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인 생명보다 더 소중히 여긴 것이 자기 골육의 친척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서둘러서 고향 사람들부터 먼저 만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먼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법입니다. 기쁜 소식이 있으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을 전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가까운 친구, 가장 가까운 이웃이 주님 앞에 나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그 마음이 참으로 귀중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하고 말씀하신 최후의 위임령은 무엇을 뜻합니까? 마치 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파문이 중심에서부터 바깥쪽으로 퍼져나가듯 가장 가까운 데서부터 점점 더 먼 곳으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서 친척, 친구, 가까운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말씀은 참으로 고귀하다고 하겠습니다.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22~21절)." 바울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소문이 이미 퍼졌습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지금은 전도자가 되었단다'-바울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져나가 이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니라-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여러분에 대한 소문은 어떻게 어디로 돌아갑니까? 여러분에 대한 평판(reputation)이 주위로 퍼져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까? 반대로 욕이 돌아갑니까? 가슴에 손을 얹어보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에 대한 소문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경우를 돌아봅시다. 저는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소망교회에 대한 소문이 사방으로 좋게 퍼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서울의 소망교회'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게 이야기합니다. 소문이 아주 훌륭하게 났습니다.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소문이 실제보다 좀 과장된 것 같을 때입니다. 어제 저녁에도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새벽기도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모이는 수가 꽤 된다면서요?" "글쎄올시다. 정확히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아마 1천여 명이 모일 것입니다" "2천 명 모인다고 하던데요?" "앞으로 그렇게 되겠지요." 2천 명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숫자입니다. 아래층이 꽉 차야 2천 5백 명이 되는데, 빈자리를 빼면 아래층 위층을 다 합해야 2천 명이 될 것 같습니다. 자, 이제 어찌하면 좋습니까? 소문은 이미 났습니다. 알아서 행해야 합니다. 은혜스러운 교회, 사랑스러운 교회, 일을 많이 하는 교회-사실보다 더 크게 소문이 났습니다. 또하나, 시간을 잘 지키는 교회라고들 합니다. 대단할 것은 없지만 듣기에는 좋은 소문입니다. 시간에 늦게 오면 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인지 아무튼 시간은 비교적 잘들 지키는 편입니다. 무릇 교회는 이와 같이 소문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교회'하면 '그 교회는…'하고 칭찬할 소문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소문은 전도와 부흥의 비결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좋은 소문이 나도록 해야 합니다. 좋은 소문을 내어야 합니다. 전도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참 은혜가 많습니다. 한번 와 보세요." 이것이 전도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제 아내가 버스를 탔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전도를 하더랍니다. "예수 믿읍시다!" 그러기에 "어느 교회를 나가십니까?" 궁금하여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사람, "소망교회에 나갑니다. 꼭 한번만 나와주세요"하면서 버스를 내릴 때까지 끈질기게 권하더랍니다. 뭐라고 말하기가 난처해서 그냥 "나가도록 힘쓰겠습니다"하고 얼버무리며 내렸답니다. 여러분, 이렇게 전도하는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잠시 버스를 탈 때에도 옆사람에게 "소망교회에 한번만 나와보세요!"하고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도 그렇지만 개인도 마찬가지올시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소문이 친척 또는 친구들을 통하여 이래저래 다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의 소문입니까? 그 소문을 듣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야 합니다. 소문이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한다면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바울이 직접 돌리는 영광이 아닙니다. 나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소문 때문에, 내가 한 일 때문에,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어도 이 소문을 듣는 사람들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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