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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5장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지난 시간에 공부한 5장 17절의 말씀에서 우리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육체의 소욕, 육체의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은 육체의 본능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거스르며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거슬리는 모든 그릇된 욕망을 아울러서 '육체의 소욕'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역사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고 합니다. 극과 극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 중의 하나, 양자택일이 있을 뿐입니다. 털끝만큼이라도 양쪽에다 어정쩡하게 다리를 걸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열매'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열매는 기독교적 윤리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저는 종종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목회를 잘하고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강단이 참 은혜로워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또 교회도 부흥된다고 하던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아직도 당신은 복음 때문인 줄 몰랐습니까?" 오히려 반문해봅니다. 우리는 복음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은혜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흔히들 은혜의 복음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복음이 무엇인지 참으로 숙고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문제를 놓고 봅시다.
먼저 개연성을 말합니다. 사랑은 참 중요하다, 꼭 필요한 것이다-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합리적으로 말합니다. 사랑해야 살고 사랑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설명합니다. 철학이요 윤리학입니다. 둘째, 사랑하라 하고 명령합니다. 사랑하면 복 받고 사랑하지 않으면 벌받는다, 그런고로 사랑해야 한다-명령조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므로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율법입니다. 계율입니다. 셋째, 그러면 복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만 알면 그 사랑에 대하여 사랑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이제는 사랑할 힘이 생기고 사랑할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이 은혜올시다. 우리가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였다 하더라도 이 사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새겨야 합니다.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에 빠지고 어느 사이에 철학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복음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좀더 확실하게 말씀을 드리면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사랑하라고 명령하는 것도 기독교가 아닙니다. 사랑하면 복받습니다 하는 것도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이것이 참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이렇게 나타나 있구나'하고 깨닫고 감격하는 것이 근본적인 은혜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이것이 가슴에 충만하면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원수도 사랑할 수 있고 어려운 일도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가능해집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느냐, 그 근거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는 마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어려운 것입니다. 누구는 사랑을 몰라서 못하고 사랑해서 좋은 줄 몰라서 못하는 것입니까? 언젠가 길을 지나다가 큼직하게 붙여놓은 글귀를 보았습니다. '당신의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 정신나간 소리입니다. 자기 아내 사랑해야 되는 줄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누구의 말을 듣고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상식적으로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있는데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어떡하면 좋습니까? 어떻게 사랑하는 마음을 생기게 할 것입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서 오는 사랑을 깨닫는 것뿐입니다. 그밖의 어떠한 것으로도 마음속에 진정한 사랑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여기서 성령의 열매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열매는 단순한 율법이나 계율, 도덕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생명적인 윤리요 신비로운 윤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종자에 비유하십니다. 씨뿌리는 비유와 같습니다. 우리가 대단히 좋은 밭을 마련하고 토지를 잘 가꾸어놓았다 하더라도 씨앗이 뿌려지지 아니하면 아무런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종자가 반드시 그 밭에 뿌려져야 합니다. 밖에서부터 객관적으로 종자가 떨어져서 그 속에 심기어질 때에 비로소 생명이 이루어집니다. 밭이 좋다고 저절로 생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을 비운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얼마전에 운동을 하러 갔습니다.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쉽지가 않습니다. 거기서 안내하는 아가씨가 저보고 "목사님, 마음을 비우세요" 그럽니다. "그래, 네가 나한테 설교를 해라." 설교는 내가 전문인데 도리어 그 아가씨가 합디다. 우스갯소리로 해본 이야기입니다마는 여러분,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쓰지 마십시오.
옳은 말 같지만 사실은 공염불입니다. 마음 비울 수도 없거니와 비운 사람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아무리 비우려고 해도 비워지지 않는 것이 마음입니다. 일생동안 비우려고 애를 써봐도 도저히 비워지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욕심만 많아집니다. 비운다는 말은 기독교적 용어가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교리는 오히려 채우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마음을 충만하게 채움으로써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비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원천적인 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애매하게 알고서 믿기 때문에 불교인이 되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 왔다갔다합니다. 기독교인이기는 하나 그 신앙방법론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가득 채울 때에 욕심이 도망가고 은혜로 가득 채울 때에 잡다하고 더러운 것들이 물러가게 됩니다. 사랑함으로써 증오를 잊을 수 있습니다. 미워하지 않겠다, 잊어버리겠다 하며 아무리 애를 써보십시오. 꿈속에 나타나는데 어떻게 잊어버립니까? 보면 생각이 나는데 어떻게 잊어버립니까? 벌써 잊은 줄 알았는데 만나는 순간 확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채워야 됩니다. 사랑해버려야 됩니다. 애초에 사랑으로 채워야 미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씨가 밭에 떨어져야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지 밭이 고르다고 생명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행동보다 더 근본적인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생명력, 생명의 힘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 노력하지 말고 좋은 나무가 되도록 노력하자.'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어쨌든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쓸데없는 것에 힘을 씁니다. 좋은 나무는 되지 못하면서 좋은 열매만 맺고 싶어합니다. 씨앗이 없는데 어디서 열매를 맺겠습니까? 아무리 공들이고 아무리 기다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이 그 안에 계시고 성령이 주도하시어 내 인격과 내 마음을 전부 다스리게 되면 그때에 자연스럽게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이 아홉 가지 열매요 바로 기독교 윤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놓고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는 씨앗의 문제입니다. 즉 종자의 문제입니다. 반드시 성령이 내 안에 계셔야 합니다. 마귀나 육신의 욕심이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세상적인 것이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성령만이 씨앗이 되어 내 마음에 뿌려져야 합니다. 이것은 생명적인 문제이며 질적인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수용의 문제입니다. 생명이 내게 들어왔는데 내가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마치 길가와 같고 돌밭과 같아서 이 생명을 수용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는 듣는데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중공에서 겪은 일입니다. 공산치하에서 나서 40여년 간을 살아온 사람들을 앉혀 놓고 설교를 했답니다. 여러 가지로 은혜스런 말씀을 드렸더니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외치더랍니다. "지금 하신 말씀을 전폭적으로 접수합니다." 그곳에서는 회의석상에서 상대의 의견을 지지할 때 '전폭적으로 접수합니다'라고 실제로 말한다고 합니다. 바로 접수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 아무리 귀한 말씀이라 하더라도 내가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수용이 문제입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팔짱을 턱 끼고 '어디 무슨 소리하나 보자'하는 듯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한 시간 아닌 두 시간을 앉아 있다고 한들 무슨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겠습니까?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생명을 성장케 해야 합니다. 성장을 도와야 됩니다. 생명이 내 안에서 자라나도록 알맞은 여건을 마련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한 말씀을 들을 때에 순종하고 두 말씀을 깨달을 때에 순종하고 세 말씀을 알게 될 때에 그대로 실천합니다. 그럴수록 은혜가 점점 더 충만해집니다. 더 깊이 깨닫게 되고 더 많은 능력을 얻게 됩니다. 크나큰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열매를 간단히 구분해봅시다. 아홉 가지를 세 가지씩 묶어서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둘째는 이웃과의 관계, 셋째는 나 자신과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봅시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아홉 가지 열매가 맺어집니다.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이 열매가 없으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돌이켜서 근본적으로 다시 회개하고 성령을 내 안에서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이제 성령의 열매를 하나씩 살펴봅시다. 첫 번째 열매는 사랑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Agape)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대로 아가페는 보통의 사랑과는 좀 다릅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꽤 많습니다. 우리의 언어에서도 그 차이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애-친구에 대한 사랑, 형제애-형제에 대한 사랑, 효심-부모에 대한 사랑, 애국심--국가에 대한 사랑 등으로 구분됩니다.
헬라어에서는 이러한 사랑들이 아예 단어부터 다릅니다. 어원이 전혀 다른 네 가지의 단어가 있습니다.
첫째가 에로스(Eros)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로틱하다는 말은 우리가 자주 듣습니다. 남녀간의 애정을 말합니다. 상대방을 서로 그리워하고 소유하며 만나고 싶어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철학적 사랑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두 번째는 필리아(Philia)입니다. 프렌드쉽(friendship)이라는 영어단어가 여기서 파생되었습니다. 친구(friend)처럼 수평적으로 친한 관계를 말합니다.
세 번째는 스토르게(Storge)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핏줄의 사랑입니다. 자식의 부모에게 향한 사랑, 부모의 자식에게 향한 사랑입니다. 혈육으로서 느끼는 사랑입니다. 분명하게 의미가 구분되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가페입니다. 특별히 성경에 많이 나타나는 용어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극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는 곳은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때에 '아가파스 메'라고 말씀합니다. 네가 나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퀴리에 수 오이다스 호티 필로 세'-필리아의 사랑을 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아가페라는 말을 쓰지 못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고 물었는데 필리아의 사랑을 한다고 답합니다. 희생적인 사랑을 하느냐고 물었는데 친구의 사랑을 한다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필레이스 메'--그러면 친구의 사랑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제야 베드로는 당황합니다.
이러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의 묘미는 우리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쉽게 사랑 사랑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성령의 열매는 아가페이지 에로스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으면 연애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으면 친구가 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가페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유의 사랑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에 아가페의 사랑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서 누누이 말씀한 바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16장은 예수님의 성령론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본문이 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 : 13~14)." 내가 너희들에게 이미 말한 것을 깨닫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건에 대하여 깨닫게 합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둘째는 기억나게 합니다. 그 사건이 순간순간 마음속에 재생됩니다. 기억하지 못하면 사건이 사건될 수 없습니다. 기억에서 사라지면 사건은 없어지고 맙니다.
성령은 마음 안에 들어와서 계속 기억나게 합니다. 셋째는 감당하게 합니다. 넷째는 진리에로 인도합니다. 이렇듯 성령은 우리에게 와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하고 감당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 열매가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을 때 비로소 사랑하게 됩니다. 내 마음은 어디로 가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옵니다.
미워하던 사람을 이제는 사랑하게 됩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던 이야기입니다마는 퍽 재미있어서 또 합니다. 어느 부인이 실제로 성령을 받고 보니 남편이 예쁘게 보이더랍니다. 어찌나 예쁜지 하나님께 원망을 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잠잘 때에 눈을 감고 자도록 만들었을까? 눈을 뜨고 자게 만들었으면 사랑하는 남편을 바라다보면서 잘 수 있을 텐데.' 원망도 참 가지가지입니다마는 이 정도로 마음에 사랑이 넘칩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을 해보았습니까? 아직껏 못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남편이 집에 돌아왔는데도 보기 싫어서 "왔수?"하고 마지못해 한마디합니다. 말을 할 때에도 똑바로 쳐다보지 않습니다. 딴데를 보면서 말을 합니다. 많이 잘못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예뻐집니다. 또한 성령을 받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으면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미운 사람도 고와집니다. 모든 일들을 사랑으로 다 소화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도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일 뿐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은 아주 쉬운 길입니다.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하게 마련입니다.
두 번째 열매는 희락입니다. 헬라어로는 '카라'라고 하는데 이 말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joy입니다. 단순한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기쁨입니다.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이런 때는 기쁘고 저런 때는 슬퍼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내게 잘해주고 못해주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기쁨은 소유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지식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세상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기쁨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를 깨달을 때에 오는 기쁨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마음에서 샘과 같이 솟아올라 강과 같이 넘칩니다. 이 기쁨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한번씩은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기쁩니다. 누가 이유를 묻는다면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데 그냥 좋아 죽겠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맺게 하는 열매는 내 모든 감정을 사로잡는 기쁨입니다. 성령이 내 마음을 사로잡을 때에 내 모든 감정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제가 빌립보서 강해 시간에도 수차 드렸던 말씀입니다마는 예수 잘 믿는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궁상스럽게 울고 다닌다고 해서 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늘상 엎드려서 울다가 돌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대체 울 일이 그렇게도 많으냐고 물었더니 슬픈 일이 많아 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 울음이 웃음으로 바뀌어질 때까지 기도하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웃음으로 바뀌어지지 않았다면 아직 성령을 못 받은 것입니다. 성령은 그 열매가 희락으로 나타납니다. 슬픔도 아니요 탄식도 아닙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 올라가 영광의 예수님을 뵙습니다. 베드로가 고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5절)" - 처자식이 버젓하게 있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합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옵니다 - 도대체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이 시간이 좋으니 이대로 여기에 눌러앉아 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마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이대로 만족합니다. 더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 시간이 기쁘고 좋습니다. 성령이 동력이 되어서 내 마음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 기쁨으로 모든 상황을 극복합니다. 그 기쁨이 크기에 사소한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 이길 수 있고 다 웃어넘길 수 있습니다. 시시한 문제를 가지고 아귀다툼할 것이 없습니다. 큰 기쁨이 있는데 무엇이 걸리겠습니까? 그 기쁨은 모든 시험과 모든 상황을 이기는 승리의 힘이 됩니다.
세 번째 열매는 화평입니다. 화평은 헬라어로 '에이레네'이고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샬롬이 바로 은혜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이 평안할 것입니다. 이 평안은 팍스(pax)가 아닌 피스(peace)입니다. 힘으로 이루어진 평안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평안입니다. 저는 가끔 환자들을 위해서 이러한 내용의 기도를 하곤 합니다. '건강할 때에 얻지 못했던 신비로운 평안을 오히려 병든 가운데 얻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건강해야만 평안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들었을 때에 어려울 때에 신비로운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 걱정도 아무 미련도 없습니다.
순수한 평안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평안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리스도와 화평하고 사람과 화평하게 됩니다. 그리고 충만하기 때문에 달리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내 소원을 다 이루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다윗의 고백처럼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평안'이란 바로 이같은 마음입니다.
기도하면서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만족하겠다 싶은데 뭐 그리 요구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청구서가 많습니다. 이것도 달라 저것도 달라, 오목조목 다 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극히 어려운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디다. 지난번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만난 사람입니다. 어찌나 매를 많이 맞았던지 전신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그 몸으로 16년 동안을 병석에 누워 살아왔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면서 단 한가지도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래서 감사합니다, 저래서 감사합니다-그저 감사하다는 소리만을 거듭하다가 아멘으로 끝납니다. 이것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물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럴 때에 만족할 수 있고 자기 충만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과 화해하고 싶습니까? 가정을 화평하게 하고 싶습니까? 간단합니다. 제가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날마다 하루에 세 번씩만 말하십시오.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자녀들에게도 말하십시오. "나는 너희들 때문에 행복하다. 너희를 보면서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러면 화평해집니다. 화목하자, 화목이 좋다더라 하고 입이 아프게 이야기해 본들 무엇하나 이루어집니까? "야, 나는 너 때문에 못살겠다." 이런 소리나 지껄입니다. 그래서 무슨 화목이 오고 무슨 화평이 오겠습니까? 내 마음에 먼저 충만함이 있어야 화평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불행하고서야 누구와 화평을 합니까? 내 마음에 화평이 없는데 누구와 화평하자는 것입니까? 별수 없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합니다. 웃는 사람하고 원수 맺을 수 없습니다. 항상 웃고 기뻐하면 화목한 사람입니다. 굳이 이름은 안 밝히겠습니다마는 우리 교인 가운데에 몇 집사님들은 만날 때마다 싱글벙글합니다. "뭐가 그리도 좋습니까?"하고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화목케 만드는 자입니다. 피스 메이커(peace maker)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올시다. 성령이 우리 안에 화평을 주시고 모든 관계 안에 평화를 주십니다.
네 번째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 '마크로두미아'라는 헬라어는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마크로'는 '오래(long)'라는 말이고 '두미아'는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오래 가는 마음입니다. 헬라어에는 인내라는 말로 '휘포모네'가 있습니다. 마크로두미아는 일반적인 인내가 아니라 특별한 인내입니다. 오래 참는 것입니다. 잠깐 참는 것이야 쉽습니다. 오래 참음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해소되어버려서 더이상 참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두고보자 하며 버티다가 한 10년 뒤에 가서 '내가 10년을 참아왔다'하며 터뜨립니다. 이것은 참는 게 아닙니다. 그럴 것이면 참지 말고 진작에 터뜨렸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내가 아닙니다. 오래 참음이란 오래 참을 필요가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 없어졌습니다. 아무리 두고보아도 다시 미워하고 다시 참고 다시 고통을 느낄 것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 해소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인내를 성령이 주십니다. 그리스의 교부 크리소스톰은 인내를 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 '복수할 힘이 있어도 사용하지 않는 것'-원수를 갚을 수 있는 데 갚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는데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힘을 주셔서 평안하고 쉽게 참아낼 수 있습니다. 굳이 인내라고까지 표현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인내, 오래 참음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다섯 번째는 자비입니다. 자비, '크레스토테스'라는 헬라어는 친절함을 말합니다.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친절입니다. 적극적인 친절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친절해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자연스럽게 친해집니다. 예수를 잘 믿고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지 반가워하고 친절함이 자연스럽게 유발됩니다.
여섯 번째는 양선(良善)입니다. '아가도수네'라는 헬라어는 자주 쓰는 말입니다. 자비에 비해 훨씬 능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라이트푸트라는 학자는 그 차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비는 잠재적인 양선이요 양선은 현실적으로 힘을 나타내는 자비이다.' 양선은 좀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비를 의미합니다. 기다리는 선이 아니라 찾아가는 선입니다.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가서 베푸는 선이 양선입니다.
일곱 번째는 충성입니다. '피스티스'입니다. 믿음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충성, 진실, 믿음은 헬라어로 다 같은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충만할 때에 진실성이 생기고 성령이 충만할 때에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충성된 사람이 된다고 하는 성령의 열매올시다. 여덟 번째는 온유입니다.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테스'입니다. 이것은 길들여진 말을 의미합니다. 뻣뻣하고 거친 말이 아닙니다. 유들유들하니 잘 길들여진 온순한 말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매사에 너무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성령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그 고집이 꺾어져야 됩니다. 눈에 띄게 개성이 강하고 모나게 행동하는 것도 무엇인가 조금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유순해야 합니다. 온유함의 모델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에 온유함이 실현되어 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온유함입니다. 내 뜻이 엄연히 있건만 내 뜻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즐거움으로 따라갑니다. 이것이 온유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따금 식당에 식사를 하러 가보면 유별나게 주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똑같은 것만을 주문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마는 나는 요것으로 주시오 하고 음식을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충 먹으면 안되나? 옆사람과 비슷비슷한 것으로 시킬 일이지 뭘 저리도 가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처럼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변변치도 않은 자기 의지를 그렇게도 꺾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배냇병신입니다. 반드시 고쳐야 됩니다.
내 뜻을 속히 버리고 그쪽 뜻을 따라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굽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주는 열매입니다.
마지막으로 아홉 번째는 절제입니다. 헬라어로는 '엑크라테이아'이고 영어로는 셀프 컨트롤(self-control)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 쉬운 일 같습니까? 자기 절제, 자기를 다스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내 욕심, 내 성격, 내 게으름, 내 명예심, 내 교만-나를 다스리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잠언 16장 32절에 보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자기 절제를 가능케 합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할 때에 가능하였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역시 성령이 충만할 때에 충분히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이 열매가 나에게, 내 인격에, 내 성품에 자연스럽게 맺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홉 가지 중에 하나도 없습니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는 것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재충전해야 합니다. 새어나간 성령을 다시 채워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어지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열 때에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이제 주님께 내 자유를 위탁해버립시다. 그리고 당신께서 내 안에 충만하여 나를 완전히 다스리시고, 나를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때에 나는 비로소 사랑의 사람, 희락의 사람, 화평의 사람, 오래 참음의 사람, 자비의 사람, 양선의 사람, 충성의 사람, 온유의 사람, 절재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보고서 스스로 놀라고 감사하는 때가 곧 다가올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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