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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열매 없는 무화과(누가복음 13:6-9)

by 【고동엽】 2022.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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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없는 무화과(누가복음 13:6-9)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쩌면 비슷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나타난 하나의 사건임에 비해 오늘 본문의 내용은 나타난 사건이 아닌 비유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나무이지만 남쪽 지방에서는 제법 흔하게 볼 수 있는 과수입니다. 특별히 전남의 해안 가까운 지역에서는 대단위 산지가 형성되어 있는 것과 그 가공도 기계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무화과나무는 관상용 나무가 아닙니다. 그 모양이나 자라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는 볼품없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징은 재목으로 쓸 만한 나무도 못됩니다. 적어도 나무라면 곧게, 아니면 굵게라도 자라야 쓰일 데가 있을 텐데 무화과나무는 이리 저리 틀어지며 제멋대로 옆으로 퍼져 아무 데에도 쓰지를 못합니다. 나무들 중에는 비록 재목으로 쓸 만한 것은 못되더라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푸 빛의 건장한 모습으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나무 자체의 볼품도 없고, 아름다운 꽃도, 향기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무화과나무의 존재 목적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 열매입니다. 꽃도 나무도 아닌 오직 열매만을 위해 존재하는 나무입니다. 그 때문인지 이 무화과나무는 많은 수고를 하지 않아도 잘 자라고 열매도 많이 맺히는 것이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길가에도 심어두고 지나가다가 시장할 때면 이 무화과를 따 먹게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무화과나무의 존재 목적은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든 존재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곧 그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목적이 없는 것은 가치 또한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귀한 목적이 있다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희생도, 수고도 할만 합니다. 그러나 그 최종 목적이 불분명하고 시원치 않다면 그것을 위해 수고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허무한 짓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목적을 두고 열심히 수고해왔는데도 그 결과가 목적과 같지 않다면 그 실망과 피곤함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정성 들여 키운 자식이 잘못되면 부모의 마음이 아픕니다. 가을의 추수를 위해 봄부터 뜨거운 햇살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왔건만 그 수확이 변변치 못하면 농부의 실망감과 피곤은 더욱 무겁게 쌓입니다. 그러므로 결과가 목적을 배신하게될 때 실망하고 낙심하며 피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와는 반대로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하더라도 좋은 결과, 좋은 열매만 얻을 수 있다면 그 수고는 결코 무거운 수고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될 본문 말씀의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를 심은 목적이 열매를 얻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나무에도 각기 목적이 있어서 어떤 나무는 관상수로, 어떤 나무는 재목으로, 또 어떤 것은 꽃을 피워 제 몫을 합니다. 이제 무화과나무는 다른 것으로는 아무 데도 쓸모가 없지만 오직 한 길, 열매를 맺기 위해 살아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기억해야 될 것은 모든 존재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에는 목적 없는 존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질서를 잘 모르고 사람의 생각대로 필요와 불필요를 구분하여 손질을 하므로 생태계의 균형이 깨어지게 되고 그로 인한 자연의 보복으로 결국은 인간들에게 위기가 닥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참으로 신비롭고 묘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뱀이지만 그 뱀은 쥐를 잡아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래 살겠다고 그 뱀을 잡아먹어 없애고 보니, 이제는 쥐가 들끓어 아우성입니다. 생태학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짜증스러워 하는 벌레 하나, 파리 한 마리까지라도 다 필요한 것이랍니다. 그래서 생태계학자들의 결론은 이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시안적인 사람들의 생각에서 산에도, 들에도 살충제를 뿌리며 풀을 뽑는 일에까지 제초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생태계에 이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인간에게 돌아오고 마침내는 죽음을 자초한 것이 됩니다.

이는 결국 저를 죽이려다가 내가 죽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고백하고 인정할 것은 하나님이 내신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목적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 태어난 나에게 목적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살아야하는 이 시간의 존재로서의 시간적 존재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비록 늙어 할일 없는 인생으로 느껴지지만, 이 시간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하여야할 일이 남아있고 목적이 있기에 이 땅에 주신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필요 없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아니라 꼭 필요하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열매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섭리적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며, 물자를 투자하는 등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와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셔서 오늘도 열매맺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하여 깊이 생각할 것은 필연이 있을 뿐 우연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열매가 있어야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열매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 하나의 사건, 한 사람 한 사람, 그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열매, 즉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중의 이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1 : 13에 보면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이 무화과는 그 열매 자체의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열매들은 잘 익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쓰거나 떫은 맛 때문에 먹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 무화과 열매는 익은 것이 아니라도 이렇다 할 불쾌한 맛이 없기 때문에 열매만 맺혔으면 정 시장할 때에는 따먹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열매인데 어쨌든 오늘 본문의 이 무화과나무에는 꼭 있어야 할 열매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 열매만이 목적인데 그것이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3년을 기다리며 열매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3년을 기다렸다는 것은 인내했다는 것이요 참아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아주십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까지, 악하고 교만한 심령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참으십니다. 참으로 오래 오래 기다리시며 참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기다림이 막연히 기다리는 정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동적인 기다림이라는 점입니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가꾸면서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에는 행동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매맺도록, 즉 깨달으며, 행동하며, 부지런하며, 진실하며, 겸손하도록, 그리하여 계속 열매맺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하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때로는 주시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며, 건강하게도 하고 병들게도 하며,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며, 칭찬 받게도 하고 능욕을 당하게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열매맺도록 여러 모양으로 계속 역사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알아야할 것은 3년을 기다렸다는 말은 기다림에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무턱대고 무진장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마냥 그렇게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사랑의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 하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진정 그런 사람이라면 심판도 없어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고,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무한한 사랑이지, 죄짓기를 계속하는 자에게도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인에 대해서 참으십니다. 그러나 죄의 경우에 따라 참기도 하시고 심판도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성향이 어떠한가를 성서의 조명을 통해 발견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를 위해 성서를 주의 깊게 보노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길 때에도 참아주셨고, 죄를 짓거나 탕자가 집을 나갈 때에도 참아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참지 않으시고 급하게 심판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바로 언제냐 하면 하나님의 참으시는 인내를 만홀히 여길 때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다 봐주실 것이라며 짐짓 고의적으로 잘못된 길을 갈 때에는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죄 아니라고 정당화시키려 할 때 하나님은 참지 않으십니다. 죄를 죄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는 것이기에 용서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우상화할 때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살아 계심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을 잘 알고있습니다. 거기를 보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길 때에 차라리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떠나 금 우상을 섬기자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것이 아니고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저들이 하는 말인 즉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너희 신이로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어쩌자고 우상을 놓고 내 이름을 부르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납하지 않으시며 참으실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가 있어서 참아주실 때가 있는가하면 참지 않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3년을 참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충분히 필요한 만큼 참았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많이 참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계에 가서는 참지 않으시며 여기에서 심판이 나옵니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며, 이스라엘의 패망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모두가 하나님의 기다림이 다한 인내의 한계점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의 절정이 곧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내의 상징이며, 사랑의 상징이요, 동시에 사랑에 한계가 있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십자가는 마지막 조건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보루요, 최후의 통첩입니다. 만약 이 십자가의 은혜까지 부정하며 하나님 앞에 도전해온다면 그는 도리 없이 용서받지를 못합니다. 십자가는 최종 복음이며 종말적 복음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어찌 땅만 버리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3년 동안, 충분히 두고 보아도 열매가 없는데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왜 쓸 데 없이 계속 투자만 하고있느냐는 것입니다. 열매도 없는 것을 위해 땅도 못쓰고 거름도 버리며 수고도 헛것이 되고마는 짓을 무엇 때문에 더 계속하겠느냐? 그러므로 "찍어버리라"는 것입니다. 1년도 아닌 3년 동안을 기다리지 않았는가! 더 이상 허비하지 말고, 더 이상 은혜를 낭비하지 말라. 그리고 이제는 그만 찍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침내 버려진 심판입니다. 참으로 합리적 심판이요, 백 번 마땅한 이야기입니다. 심판은 이래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도 계속 곁길로 나가며 은혜를 소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참으심을 만홀히 여길 때 그 끝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이 무서운 심판 앞에 무화과나무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대로 찍힐 수밖에 없는 운명의 직전에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복음이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때에 과원지기가 나타나서 대신 말을 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며 간절한 만류의 부탁을 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기억할 것은 이것은 비유의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며, 과원지기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기대했던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으므로 이제는 찍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이르렀는데, 그러나 주인은 과원지기를 나무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저런 것을 들추어 과원지기를 나무랄 수도 있겠으나 그러지를 않는 것을 보면, 그가 할만큼 열심히 땀 홀리며 정성을 기울여 일하는 모습을 보아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과원지기에 대해서는 일체 비판의 말이 없습니다. 다만 이 나무가 소망이 없으니 찍으라고만 하십니다.

그런데 전혀 잘못이 없는 과원지기가 나타나서는 그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한 번 더 수고하겠나이다!" 이것이 곧 복음입니다. 이 때에 이 과원지기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찍히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중보적 역할이요, 중보적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멸망 사이에서 대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중보적인 기도에 힘입어 이 무화과나무는 생명을 보존하게됩니다. 주인의 생각으로는 소망이 없는 나무로 판단한 것에 비해 과원지기는 그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소망을 바라보며 나옵니다. 그러기에 주인이여 1년만 더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보기에는 가망성이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열매 없는 사건을 생리적으로 보지 않고 병리적으로 보았습니다. 병리적으로 보았다는 것은 이 병만 치료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 관계에 있어서나, 가까이는 부분 관계에 있어서도 상대의 어떤 잘잘못의 문제를 생리적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실수를 보고 아예 본래 그런 사람, 즉 원래부터 병신으로 취급을 해버린다면 그야말로 끝난 이야기가 되고, 더는 기대할 것이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이를 병리적인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오늘 이 과수원지기는 무화과나무의 열매 없음을 병리적으로 보고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뒤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18년간 귀신들려 미치고 꼬부라져 조금도 펼 수 없는 여자! 이 여자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과원지기의 마음입니다. 귀신이 들려서 그렇지 귀신만 빠져나가면 누구에 못지 않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의젓한 아브라함의 딸입니다. 어쩌다 귀신의 노예가 되어 불쌍한 사람이 된 것뿐입니다. 이러한 눈으로 세상을 보게된다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과원지기는 이 무화과나무를 본래적으로 나쁘다고 생각지를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서 그렇지 조금만 치료하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면 충분히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소망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열매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 그 책임을 과원지기가 함께 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주인은 나무를 나무랍니다. 하지만 과원지기는 "아닙니다. 내게도 잘못이 있을 것입니다" 하는 의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인천서 목회할 때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주례해준 여자인데 결혼한지 7년만에 와서는 이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다 결정된 일이지만 주례해주신 목사님이시니 알려드리고 하겠다며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하겠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편의 흉이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다 듣고 보니까 아무래도 어렵겠어요.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못살겠구만. 그럼 헤어져야지" 했습니다. 그랬더니 막상 헤어지라고 하니까 또 주춤합니다. 그러길래 이혼할 때 하더라도 한 마디 대답해보라며, "연애 결혼이었는가? 중매 결혼이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연애 결혼을 했답니다. 그것도 집에서 반대하는 것을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 때에도 그 남자가 그렇게 나빴느냐?"고 하였더니 "아니지요, 그때에야 미칠듯이 좋았으니까 결혼하였지요"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대답을 한 번 해보라. 그렇게 좋던 남자가 당신하고 사는 그 7년 동안에 이렇게 나쁜 남자가 되었다면 당신에게는 그 책임이 없는가?" 했더니 "조금 있겠지요, " 그럽니다. 제가 다시 하는 말이 "둘이 같이 살았는데 조금이라니 50%는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나?" "글쎄요, 50%는 져야겠지요"하며 좀 누그러지는 것입니다. "그래, 그러면 50%만 책임을 지고 나머지는 기도하면서 채워보려마" 하고 보내었는데 그 후에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제가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예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에는 내게 책임이 없다는 것이지요. 오로지 상대만 100% 나쁘답니다. 심지어는 내가 나빠진 것까지 저 쪽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 잘못된 것에 대하여 적어도 50%는 내 책임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감히 무슨 말이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책임을 같이 지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책임도 어리석은 사람의 책임도 병든 사람의 책임도 같이 지며 그 아픔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그 근본적인 책임을 같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 때문일 것이라!".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이 과원지기는 내가 잘못한 것같다는 것입니다. "1년만 더 참아주십시오. ''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며 한 번 더 노력해 보겠습니다"라며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대신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나쁘다느니 두고봐야겠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1년 더 수고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무에게 1년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과원지기에게 1년을 수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과원지기가 받은 은혜 때문에 나무는 뒤따라서 우선 1년을 더 살게된 것입니다. 이 과원지기가 대신 책임을 지게됨으로써 무화과나무는 살게된 것입니다. 이 과원지기의 이야기는 ""가 두루 파고, ""가 거름 주며, ""가 수고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나무 한 번 두고봅시다" 하는 그런 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수고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열매맺게 하려면 내 편에서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 고치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 변화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기 이전에 내가 변화되기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달라지면 저 쪽에서도 서서히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부동 자세로 있으면서 저 쪽만 변화되게 해주시기를 위해 "주여, 주여"하는데 그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자식을 바로 키우고 싶으세요?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가 달라지세요. 그리고 기다리십시오. 남편이 달라지기를 바라십니까? 아내인 내가 달라지세요. 아내가 변화되기를 바라십니까? 남편인 내가 변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노라면 저쪽에서 변화가 올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수고하며 이 책임을 대신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결과는 본문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이것 자체가 참사랑이요 사랑의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대신 책임을 지는 엄청난 중보적 희생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마지막 제한된 기회인 1, 이것은 더는 어쩔 수 없는 종말적 기회입니다. 이제 1년만 더 기다리셔서 그 때에 가서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버리소서! 참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기회가 아닙니까? 제가 믿기로는 이 무화과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 과원지기의 깨끗한 수고 때문에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대신해서 희생하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뜨거워지기 마련이며,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반드시 열매를 맺게되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며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뜨거운 사랑을 느낄 때, 감격이 치솟을 때에는 엄청난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불안한 마음을 가지면 거짓말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느끼면 창의력을 발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는 사랑의 감격이 필요합니다. 그 감격은 내 대신 희생하는 자! 나를 위해 피가 흐르는 그의 희생을 보고야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의 다른 묘약은 없습니다. 그로 인해 감격할 때 거기에서 새 사람이 태어나며 열매를 맺게되는 것입니다.

내 희생, 내 수고, 내 기도로 인하여 무슨 열매가 있습니까? 나는 누구를 위하여 오늘 희생하고 있으며, 나는 누구 때문에 오늘이 있는 것입니까? 새로운 열매를 맺기 위하여 저 무화과나무의 입장에도 서 보고, 과원지기의 입장에도 서서 합동하여 아름답고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누가복음 13:6-9)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쩌면 비슷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나타난 하나의 사건임에 비해 오늘 본문의 내용은 나타난 사건이 아닌 비유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나무이지만 남쪽 지방에서는 제법 흔하게 볼 수 있는 과수입니다. 특별히 전남의 해안 가까운 지역에서는 대단위 산지가 형성되어 있는 것과 그 가공도 기계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무화과나무는 관상용 나무가 아닙니다. 그 모양이나 자라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는 볼품없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징은 재목으로 쓸 만한 나무도 못됩니다. 적어도 나무라면 곧게, 아니면 굵게라도 자라야 쓰일 데가 있을 텐데 무화과나무는 이리 저리 틀어지며 제멋대로 옆으로 퍼져 아무 데에도 쓰지를 못합니다. 나무들 중에는 비록 재목으로 쓸 만한 것은 못되더라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푸 빛의 건장한 모습으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나무 자체의 볼품도 없고, 아름다운 꽃도, 향기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무화과나무의 존재 목적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 열매입니다. 꽃도 나무도 아닌 오직 열매만을 위해 존재하는 나무입니다. 그 때문인지 이 무화과나무는 많은 수고를 하지 않아도 잘 자라고 열매도 많이 맺히는 것이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길가에도 심어두고 지나가다가 시장할 때면 이 무화과를 따 먹게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무화과나무의 존재 목적은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든 존재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곧 그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목적이 없는 것은 가치 또한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귀한 목적이 있다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희생도, 수고도 할만 합니다. 그러나 그 최종 목적이 불분명하고 시원치 않다면 그것을 위해 수고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허무한 짓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목적을 두고 열심히 수고해왔는데도 그 결과가 목적과 같지 않다면 그 실망과 피곤함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정성 들여 키운 자식이 잘못되면 부모의 마음이 아픕니다. 가을의 추수를 위해 봄부터 뜨거운 햇살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왔건만 그 수확이 변변치 못하면 농부의 실망감과 피곤은 더욱 무겁게 쌓입니다. 그러므로 결과가 목적을 배신하게될 때 실망하고 낙심하며 피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와는 반대로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하더라도 좋은 결과, 좋은 열매만 얻을 수 있다면 그 수고는 결코 무거운 수고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될 본문 말씀의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를 심은 목적이 열매를 얻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나무에도 각기 목적이 있어서 어떤 나무는 관상수로, 어떤 나무는 재목으로, 또 어떤 것은 꽃을 피워 제 몫을 합니다. 이제 무화과나무는 다른 것으로는 아무 데도 쓸모가 없지만 오직 한 길, 열매를 맺기 위해 살아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기억해야 될 것은 모든 존재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에는 목적 없는 존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질서를 잘 모르고 사람의 생각대로 필요와 불필요를 구분하여 손질을 하므로 생태계의 균형이 깨어지게 되고 그로 인한 자연의 보복으로 결국은 인간들에게 위기가 닥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참으로 신비롭고 묘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뱀이지만 그 뱀은 쥐를 잡아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래 살겠다고 그 뱀을 잡아먹어 없애고 보니, 이제는 쥐가 들끓어 아우성입니다. 생태학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짜증스러워 하는 벌레 하나, 파리 한 마리까지라도 다 필요한 것이랍니다. 그래서 생태계학자들의 결론은 이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근시안적인 사람들의 생각에서 산에도, 들에도 살충제를 뿌리며 풀을 뽑는 일에까지 제초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생태계에 이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인간에게 돌아오고 마침내는 죽음을 자초한 것이 됩니다.

이는 결국 저를 죽이려다가 내가 죽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고백하고 인정할 것은 하나님이 내신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목적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 태어난 나에게 목적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살아야하는 이 시간의 존재로서의 시간적 존재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비록 늙어 할일 없는 인생으로 느껴지지만, 이 시간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하여야할 일이 남아있고 목적이 있기에 이 땅에 주신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필요 없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아니라 꼭 필요하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열매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섭리적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며, 물자를 투자하는 등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와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셔서 오늘도 열매맺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하여 깊이 생각할 것은 필연이 있을 뿐 우연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열매가 있어야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열매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 하나의 사건, 한 사람 한 사람, 그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열매, 즉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중의 이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1 : 13에 보면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이 무화과는 그 열매 자체의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열매들은 잘 익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쓰거나 떫은 맛 때문에 먹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 무화과 열매는 익은 것이 아니라도 이렇다 할 불쾌한 맛이 없기 때문에 열매만 맺혔으면 정 시장할 때에는 따먹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열매인데 어쨌든 오늘 본문의 이 무화과나무에는 꼭 있어야 할 열매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 열매만이 목적인데 그것이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3년을 기다리며 열매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3년을 기다렸다는 것은 인내했다는 것이요 참아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아주십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까지, 악하고 교만한 심령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참으십니다. 참으로 오래 오래 기다리시며 참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기다림이 막연히 기다리는 정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동적인 기다림이라는 점입니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가꾸면서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에는 행동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매맺도록, 즉 깨달으며, 행동하며, 부지런하며, 진실하며, 겸손하도록, 그리하여 계속 열매맺도록 모든 조치를 강구하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때로는 주시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며, 건강하게도 하고 병들게도 하며,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며, 칭찬 받게도 하고 능욕을 당하게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열매맺도록 여러 모양으로 계속 역사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알아야할 것은 3년을 기다렸다는 말은 기다림에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무턱대고 무진장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마냥 그렇게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사랑의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 하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진정 그런 사람이라면 심판도 없어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고,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 무한한 사랑이지, 죄짓기를 계속하는 자에게도 무한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인에 대해서 참으십니다. 그러나 죄의 경우에 따라 참기도 하시고 심판도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성향이 어떠한가를 성서의 조명을 통해 발견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를 위해 성서를 주의 깊게 보노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길 때에도 참아주셨고, 죄를 짓거나 탕자가 집을 나갈 때에도 참아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참지 않으시고 급하게 심판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가 바로 언제냐 하면 하나님의 참으시는 인내를 만홀히 여길 때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다 봐주실 것이라며 짐짓 고의적으로 잘못된 길을 갈 때에는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죄 아니라고 정당화시키려 할 때 하나님은 참지 않으십니다. 죄를 죄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는 것이기에 용서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우상화할 때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살아 계심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을 잘 알고있습니다. 거기를 보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길 때에 차라리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떠나 금 우상을 섬기자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것이 아니고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저들이 하는 말인 즉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너희 신이로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어쩌자고 우상을 놓고 내 이름을 부르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납하지 않으시며 참으실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가 있어서 참아주실 때가 있는가하면 참지 않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3년을 참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충분히 필요한 만큼 참았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많이 참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계에 가서는 참지 않으시며 여기에서 심판이 나옵니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며, 이스라엘의 패망입니다. 이러한 심판의 모두가 하나님의 기다림이 다한 인내의 한계점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의 절정이 곧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내의 상징이며, 사랑의 상징이요, 동시에 사랑에 한계가 있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십자가는 마지막 조건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보루요, 최후의 통첩입니다. 만약 이 십자가의 은혜까지 부정하며 하나님 앞에 도전해온다면 그는 도리 없이 용서받지를 못합니다. 십자가는 최종 복음이며 종말적 복음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어찌 땅만 버리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3년 동안, 충분히 두고 보아도 열매가 없는데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왜 쓸 데 없이 계속 투자만 하고있느냐는 것입니다. 열매도 없는 것을 위해 땅도 못쓰고 거름도 버리며 수고도 헛것이 되고마는 짓을 무엇 때문에 더 계속하겠느냐? 그러므로 "찍어버리라"는 것입니다. 1년도 아닌 3년 동안을 기다리지 않았는가! 더 이상 허비하지 말고, 더 이상 은혜를 낭비하지 말라. 그리고 이제는 그만 찍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침내 버려진 심판입니다. 참으로 합리적 심판이요, 백 번 마땅한 이야기입니다. 심판은 이래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도 계속 곁길로 나가며 은혜를 소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참으심을 만홀히 여길 때 그 끝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이 무서운 심판 앞에 무화과나무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대로 찍힐 수밖에 없는 운명의 직전에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에 복음이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때에 과원지기가 나타나서 대신 말을 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며 간절한 만류의 부탁을 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기억할 것은 이것은 비유의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며, 과원지기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기대했던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으므로 이제는 찍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이르렀는데, 그러나 주인은 과원지기를 나무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저런 것을 들추어 과원지기를 나무랄 수도 있겠으나 그러지를 않는 것을 보면, 그가 할만큼 열심히 땀 홀리며 정성을 기울여 일하는 모습을 보아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과원지기에 대해서는 일체 비판의 말이 없습니다. 다만 이 나무가 소망이 없으니 찍으라고만 하십니다.

그런데 전혀 잘못이 없는 과원지기가 나타나서는 그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한 번 더 수고하겠나이다!" 이것이 곧 복음입니다. 이 때에 이 과원지기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찍히고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중보적 역할이요, 중보적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멸망 사이에서 대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중보적인 기도에 힘입어 이 무화과나무는 생명을 보존하게됩니다. 주인의 생각으로는 소망이 없는 나무로 판단한 것에 비해 과원지기는 그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소망을 바라보며 나옵니다. 그러기에 주인이여 1년만 더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보기에는 가망성이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열매 없는 사건을 생리적으로 보지 않고 병리적으로 보았습니다. 병리적으로 보았다는 것은 이 병만 치료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 관계에 있어서나, 가까이는 부분 관계에 있어서도 상대의 어떤 잘잘못의 문제를 생리적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가능성을 위한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실수를 보고 아예 본래 그런 사람, 즉 원래부터 병신으로 취급을 해버린다면 그야말로 끝난 이야기가 되고, 더는 기대할 것이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 이를 병리적인 것으로 보아야합니다.

오늘 이 과수원지기는 무화과나무의 열매 없음을 병리적으로 보고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뒤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18년간 귀신들려 미치고 꼬부라져 조금도 펼 수 없는 여자! 이 여자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과원지기의 마음입니다. 귀신이 들려서 그렇지 귀신만 빠져나가면 누구에 못지 않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의젓한 아브라함의 딸입니다. 어쩌다 귀신의 노예가 되어 불쌍한 사람이 된 것뿐입니다. 이러한 눈으로 세상을 보게된다면 세상에 나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과원지기는 이 무화과나무를 본래적으로 나쁘다고 생각지를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서 그렇지 조금만 치료하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면 충분히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소망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열매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 그 책임을 과원지기가 함께 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주인은 나무를 나무랍니다. 하지만 과원지기는 "아닙니다. 내게도 잘못이 있을 것입니다" 하는 의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인천서 목회할 때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주례해준 여자인데 결혼한지 7년만에 와서는 이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다 결정된 일이지만 주례해주신 목사님이시니 알려드리고 하겠다며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하겠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편의 흉이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다 듣고 보니까 아무래도 어렵겠어요.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못살겠구만. 그럼 헤어져야지" 했습니다. 그랬더니 막상 헤어지라고 하니까 또 주춤합니다. 그러길래 이혼할 때 하더라도 한 마디 대답해보라며, "연애 결혼이었는가? 중매 결혼이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연애 결혼을 했답니다. 그것도 집에서 반대하는 것을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 때에도 그 남자가 그렇게 나빴느냐?"고 하였더니 "아니지요, 그때에야 미칠듯이 좋았으니까 결혼하였지요"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대답을 한 번 해보라. 그렇게 좋던 남자가 당신하고 사는 그 7년 동안에 이렇게 나쁜 남자가 되었다면 당신에게는 그 책임이 없는가?" 했더니 "조금 있겠지요, " 그럽니다. 제가 다시 하는 말이 "둘이 같이 살았는데 조금이라니 50%는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나?" "글쎄요, 50%는 져야겠지요"하며 좀 누그러지는 것입니다. "그래, 그러면 50%만 책임을 지고 나머지는 기도하면서 채워보려마" 하고 보내었는데 그 후에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제가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예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에는 내게 책임이 없다는 것이지요. 오로지 상대만 100% 나쁘답니다. 심지어는 내가 나빠진 것까지 저 쪽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 잘못된 것에 대하여 적어도 50%는 내 책임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감히 무슨 말이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책임을 같이 지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책임도 어리석은 사람의 책임도 병든 사람의 책임도 같이 지며 그 아픔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그 근본적인 책임을 같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 때문일 것이라!".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이 과원지기는 내가 잘못한 것같다는 것입니다. "1년만 더 참아주십시오. ''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며 한 번 더 노력해 보겠습니다"라며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대신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나쁘다느니 두고봐야겠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1년 더 수고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무에게 1년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과원지기에게 1년을 수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과원지기가 받은 은혜 때문에 나무는 뒤따라서 우선 1년을 더 살게된 것입니다. 이 과원지기가 대신 책임을 지게됨으로써 무화과나무는 살게된 것입니다. 이 과원지기의 이야기는 ""가 두루 파고, ""가 거름 주며, ""가 수고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나무 한 번 두고봅시다" 하는 그런 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수고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열매맺게 하려면 내 편에서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 고치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 변화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기 이전에 내가 변화되기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달라지면 저 쪽에서도 서서히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부동 자세로 있으면서 저 쪽만 변화되게 해주시기를 위해 "주여, 주여"하는데 그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자식을 바로 키우고 싶으세요?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가 달라지세요. 그리고 기다리십시오. 남편이 달라지기를 바라십니까? 아내인 내가 달라지세요. 아내가 변화되기를 바라십니까? 남편인 내가 변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노라면 저쪽에서 변화가 올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수고하며 이 책임을 대신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결과는 본문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이것 자체가 참사랑이요 사랑의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대신 책임을 지는 엄청난 중보적 희생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마지막 제한된 기회인 1, 이것은 더는 어쩔 수 없는 종말적 기회입니다. 이제 1년만 더 기다리셔서 그 때에 가서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버리소서! 참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기회가 아닙니까? 제가 믿기로는 이 무화과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 과원지기의 깨끗한 수고 때문에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대신해서 희생하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뜨거워지기 마련이며,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반드시 열매를 맺게되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며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뜨거운 사랑을 느낄 때, 감격이 치솟을 때에는 엄청난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불안한 마음을 가지면 거짓말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느끼면 창의력을 발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는 사랑의 감격이 필요합니다. 그 감격은 내 대신 희생하는 자! 나를 위해 피가 흐르는 그의 희생을 보고야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의 다른 묘약은 없습니다. 그로 인해 감격할 때 거기에서 새 사람이 태어나며 열매를 맺게되는 것입니다.

내 희생, 내 수고, 내 기도로 인하여 무슨 열매가 있습니까? 나는 누구를 위하여 오늘 희생하고 있으며, 나는 누구 때문에 오늘이 있는 것입니까? 새로운 열매를 맺기 위하여 저 무화과나무의 입장에도 서 보고, 과원지기의 입장에도 서서 합동하여 아름답고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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