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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의 선택(창세기 13장 1절~13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사람과 브리스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 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줄을 잘 서야 한다'라는 유행어가 있습니다. 정치․경제, 심지어 교육에 이르기까지 줄을 잘 서야 한다고 합니다. 줄을 잘못 서서 큰 낭패를 당하는 일이 주변에서 흔하게 보입니다. 운전을 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차선을 잘못 들어서면 턱없이 고생을 하게 됩니다. 줄을 잘 서야 한다---어느 줄에 서느냐에 따라 운명이 좌우되기에 하는 소리가 아닌가 합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선택한 바에 대하여 일생을 두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선택한 바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어에는 '선택'이라는 의미로 두 단어가 있습니다. 'choice'와 'decision'이 그것입니다. 'choice'는 여러 가지 가운데서 하나를 고른다는 의미요, 'decision'은 하나를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것들을 버리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 선택하는 것 밖의 나머지 것은 모두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택하는 결단을 가져야 하는 동시에 버리는 결단, 포기하는 결단을 아울러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곧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상당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또한, 판단할 수 있는 능력,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래놓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마음을 선택해주기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이에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키우는 것도 그렇습니다. 때로 이래라저래라하며 강요를 하기도 합니다마는, 어떤 때에는 "네 마음대로 해봐라" 합니다.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 아무 일이나 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닙니다. 네가 이 어머니 아버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기뻐하는지, 그 마음을 익히 알고 있으니 어디 한번 네 뜻에 따라 자유롭게 네 길을 선택해보아라---이것이 부모로서의 소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56장 4, 5절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우리가 하나님 당신의 길을 선택하면,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하면, 자녀보다 나은 높은 이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나님을 선택하게 하시고 또한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볼 수 있는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십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정을, 그 자손을, 그 민족을 선택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족속, 곧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켜 선민이라 부르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또한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복을 약속해주십니다. 12장 7절과 13장 15절에서 땅에 대한 복을, 12장 7절과 13장 16절에서 자손에 대한 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명하십니다. 네 고향을 떠나 나를 선택하고 네가 좋아하던 과거와 인연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가리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일단 떠나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순종을 먼저 요구하십니다. 그런 뒤에 '지시할 땅'을 일러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발붙일 만큼의 땅조차, 장막 칠 만큼의 땅조차 허락 받지 못한 채, 평생을 유랑생활 하게 되는 것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그 때마다 선택받은 아브라함, 그는 새로운 긴장 관계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선택한 바를 견지해야 했습니다. 새로운 사건, 새로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새롭게 결단하고 거듭거듭 선택해야 했던 것입니다. 바른 선택을 위하여 그 밖의 모든 일을 과감하게 버리고 극복하는 고통을 함께 겪어야만 했습니다.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합시다. 창세기 12장 6절로 9절에 보면 '땅'에 대한 말씀이 계속하여 나옵니다. '그 땅'이니 '이 땅'이니 '그 곳'이니 하며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일행이 가나안땅에 이르자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그 가나안땅에는 안정이 없었습니다. 기근이 심하여 먹고살 수가 없게 되자 마침내 그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갑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큰 실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약속하십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 일흔 다섯이었습니다. 그 즉시 주셔도 늦다 할 판에 10년을 기다려도 주시지 않자, 그는 하는 수없이 편법으로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 이스마엘은 언약의 자손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15년이 지나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사라가 이미 경수가 끊어져 인간으로서 도저히 잉태할 수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은 이삭이라고 하는 귀한 아들을 주십니다. 그가 바로 언약의 자손입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성실하게 변함없이 임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하고도 휘청휘청합니다. 많은 실수를 합니다. 시간적으로나 장소적으로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감에 여러 차례 실수를 하고 넘어집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하십니다. 그 모든 실수를 따지지 않으시고 꾸준하게 성실하게 약속을 지켜나가십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라함이 휘청거릴 때마다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기준을 두고 인생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애국자요 상해임시정부를 영도한 김구 선생의 젊은 시절 일입니다. 서민의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부모에 효도하고 가문을 일으키는 길은 과거에 급제하는 길뿐이다'라고 다짐하고 공부에 매진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응시하는 족족 낙방을 합니다. 정치가 극도로 부패하여 돈으로 급제자가 결정되는 시절이라 실력에 관계없이 붙고 떨어지고는 하였지만, 번번이 낙방을 하여 낙심하고 있는 선생에게 아버지가 이상스런 충고를 합니다. "풍수쟁이나 관상쟁이가 되면 그런 대로 밥술은 먹고 살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관상쟁이가 되어보자 마음먹고「마의상서」라는 책을 열심히 공부하며 관상술을 익힙니다. 이런 상(相)은 좋고 저런 상은 나쁘고…… 이렇고 저렇고 해가며 죽 읽어 내려가다 보니 문득 자신의 관상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거울에 비추고 요모조모 뜯어 가며 자신의 상을 봅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아래 가운데에서 더 아랫길, 하지하(下之下)가 선생의 운명입니다. 가난과 살인 풍파, 감옥살이, 비명횡사가 선생의 팔자로 나옵니다. '이렇게도 나쁜 관상으로 누구의 상을 본단 말인가? 팔자가 이렇게 기구할 수 있다니' 한탄을 하면서도 계속하여 책을 읽어보았더니 끝에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얼굴이 잘생긴 관상은 몸이 튼튼한 신상만 못하고, 몸이 튼튼한 신상은 마음씨가 좋은 심상만 못하다.' 마음이 좋은 것이 잘생긴 얼굴과 튼튼한 신체보다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관상보다 신상이 낫고, 신상보다 심상이 낫다---마음이 잘생겨야지 얼굴이나 반반하다고 해서 능사가 아닙니다.
선생은 그 마지막 부분에 용기를 얻고 결심을 합니다. '내가 이 민족에 태어났으니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리라.' 마침내 선생은 우리 민족의 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후에 주일학교 교사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갑니까? 어떤 관상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앞길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을 것 같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나서 그 중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의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 머물다 흉년이 들자 애굽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죽을 뻔도 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다시 가나안땅으로 되돌아옵니다. 바로 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조카 롯과 함께 나와서 가나안땅에 머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가족과 소유가 있었고 롯에게도 가족과 소유가 있었습니다. 땅은 한정되어 있고 소유는 많아서 동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는 불화가 없었지만 아랫사람들 사이에 자주 다툼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상황이 이리되자 아브라함이 롯을 불러 말합니다. "우리 분가하기로 하자." 여기서 아브라함은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화평을 선택합니다.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8절)"라고 말합니다.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화평하고자 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재물은 많이 모아봐야 별것 아닙니다. 화평이 먼저입니다. 출세해봐야 별것 아닙니다. 화목이 먼저입니다. 화목을 깨뜨리면서까지 이루고 얻으려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화평, 화목을 먼저 선택합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화목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둘째, 화평하기 위하여 양보를 합니다. 양보 없이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평하려면 양보부터 해야 합니다. 전부는 못할지언정 반이라도 양보해야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반도 양보할 마음이 없으면 애초부터 화목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전부를 얻으면 상대편이 전부를 잃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반은 양보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숙한 인격을 가진 아브라함은 자기의 기득권을 롯에게 양보합니다. 이기심도 극복합니다.
그리고는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합니다. 네 마음대로, 네 좋은 대로 먼저 가져라, 남는 것을 내가 갖겠다---참으로 엄청난 양보입니다. 링컨은 말했습니다. '시비를 가리느라고 개한데 물리기보다 차라리 양보하는 것이 현명하다.' 가만히 보세요. 우리 주위에 시비를 가리느라고 싸우다가 개한테 물린 것 같은 상처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옳고 그르고, 아무리 따져보아야 마지막에는 재밖에 남지 않습니다.
양보하고 화해하는 것이, 화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의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꼬를 잘 압니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인 그녀는 역시 그리스도인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남편의 월급이 얼마 안되어 생활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살림에 보탤 요량으로 자기 집에다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냅니다. 친절하고 성실하게 손님을 맞이하였더니 장사가 잘되어 얼마 안 가서 날마다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너무 바빠져서 정신이 없습니다.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그 모습을 보고 한마디합니다. "여보, 장사가 잘되는 것은 좋은 일이오마는, 이러다가는 다른 가게들이 문을 닫게 되겠소.
우리만 잘살겠다고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지 않소?" 아내가 남편의 충고를 받아들입니다. 점차로 물건을 줄이고 손님들을 다른 가게로 보냅니다. "우리 가게에는 없습니다. 저 앞 가게에 있으니 그리로 가서 사십시오"---손님을 이렇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좀 생깁니다. 조금씩 여유가 생기자 본래 가지고 있던 소질을 살려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쓴 작품이 그 유명한「빙점」입니다. 이 작품이 당선되고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는 더 큰 부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양보하고 희생한다고 합시다. 손해를 좀 보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 손해는 하나님께서 엄청난 것으로 반드시 보상해주십니다. 이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양보는 절대로 손해가 아닙니다. 신앙적 양보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양보를 해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체험해보았습니까? 아브라함은 엄청난 희생을 하면서 양보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남․북한 사이에 대화가 오가고 사람이 오가고 합니다. 얼마 전에도 북한의 여성 대표들이 서울에 왔었습니다마는 그만 일정을 다 채우지 못하고 도중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생각 저 생각 갖가지 생각을 합니다마는, 평양을 다녀온 저로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 그들에게 좋은 한복을 선물했습니다. 그들로서는 지금껏 구경도 못해본 고급 옷을 입고 좋아하는데, 그 모습이 방송에 나오고 신문에도 크게 나왔습니다. 우리가 선물한 옷을 입고 좋아한다는 것을 나타내려 한 것이지요. 이것을 분명 평양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위에서 가만히 보니 안되겠던가 봅니다. 그러니 '올라 와라'할 밖에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무엇인가 받고 좋아하는 것을 꼭 드러내 알려야 하겠습니까? 주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받는 사람에 대한 모독입니다. 40년 동안 굳게 닫혀 있는 저들과 만나고 대화하려면 우리가 먼저 많이 양보해야 합니다.
많이 참아야 합니다. 어지간히 양보하지 않으면 단 한마디도 대화하지 못합니다. 뭣 좀 주고는 그것을 자랑거리 삼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물질만이 아닙니다. 기분으로 명예로, 많은 양보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화목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세째, 아브라함은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신앙적 판단을 합니다. 신앙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부하건 가난하건, 우하건 좌하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같은 양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산, 있어도 그만이요 없어도 그만입니다. 직업, 지위, 명예---아브라함에게는 그리 소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도 구체적인 사건 하나하나에 연연하지 말 것입니다. 지위건 명예건, 사업이건 건강이건, 어떤 것이건 간에 여기에 목숨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끔 답답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찾아와서는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 저를 죽자살자 따라다니는 남자가 있습니다. 저 아니면 죽겠다고 합니다. 죽겠다고 약을 먹었습니다.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결혼을 해야 할까요?" 저에게는 이런 질문에 준비된 대답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이렇게 말해줍니다. "한 여자 때문에 죽느니 사느니 하는 남자하고는 결혼하지 말아라.
이미 싹이 노란 사람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여자 때문에 죽는대서야 되겠습니까? 남자 하나로 죽느니 사느니 해서야 쓰겠습니까? 꼭 그 여자이어야 한다, 꼭 그 남자이어야 한다, 이래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대충대충 해둡시다.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귀한 목숨을 걸어야 합니까? To be or not to be!---죽느냐 사느냐 해봐야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면 다 뜬구름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나이 많은 분들을 보세요. 그토록 중대하다 싶었던 일도 지나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업, 지위, 명예…… 다 그렇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대입시험이 있습니다. 개중에는 "너는 이 대학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라고 소위 일류대학에 입학원서를 넣어 놓고는 자녀들에게 "못 들어갈 바에야 죽어라"하는 부모님들이 있다고 합니다. 못 들어간다고 해서 죽어야 합니까? 한 번으로 안되면 재수(再修)요, 재수로도 안되면 삼수(三修)요, 삼수로도 안되면 장사하면 되지요. 이 문이 닫히면 저 문으로 들어가면 될 일이 아닙니까? 무엇인가 하나에 목숨을 걸어놓고는 못 들어가면 가문의 망신이라느니 어쩌느니 야단입니다 마는 생각해보면 뭐가 그리 대단한 가문입니까? 쓸데없는 생각 가지지 마세요. 다 잘못된 생각들입니다. 그릇된 집념이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미치는 사람들이 대개 이런 유형입니다. 한번 파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스스로 못 견뎌합니다. 잠조차 자지 못합니다. 이러니 사람이 살 재간이 있나요. 대충대충 해둡시다. 이것저것 다 지내보신 여러분, 그리 연연해야 할 일이 있습디까?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으면 그렇게 발광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양보하는지 아십니까? 덕이 있고 인격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리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아무 곳이면 어떻고 아무 때면 어떠하냐, 'I don't care.'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나는 어디서나 하나님을 향해 신실하게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더 바랄 것이 없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 아브라함은 그 자신에게 하나님의 약속만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미래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나의 운명은 하나님께 달렸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주셔야 한다---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는 어떠한 여건에서도 행복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완전히 버립니다. 온전히, 깨끗하게 주님만을 따르기로 합니다. 주님을 선택하고 또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롯을 보세요. 롯은 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봅니다. 소돔과 고모라땅, 물이 넉넉한 것이 풍요로워 보입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것이 참으로 좋거든요. 그래서 롯은 먼저 그곳을 갖겠다고 합니다. 형식적으로라도 한 번쯤은 "삼촌이 먼저 선택하십시오"하고 양보할 만도 하건만 저가 먼저 선택을 하고 맙니다. 이 일을 두고 칼뱅은 말합니다.
'롯은 장차 낙원 속에 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지옥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그는 장차 아름답고 풍요한 땅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으로 믿었습니다마는 결국 이 때문에 망하고 맙니다. 더욱이 본문에서는 롯이 계속하여 동으로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소돔․고모라에까지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불행하게 되는 줄 알면서도 정신없이 그쪽으로 치닫는 것이 불행한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잘못된 일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끊지를 못하고 천방지축 그 길로만 달리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습니까? 바른 선택을 해놓고 그 아름다운 선택을 지켜가기 위하여 시련을 겪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잘하는 일입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이 바른 선택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혹, 잘못 선택을 해놓고 돌이킬 수 없어서 고민하고 있습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다시 궤도를 수정하세요. 선택을 바로 하세요. 선택받은 자는 하나님 밖의 일은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 길을 보장해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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