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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용기(다니엘 1장 8절~I7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동무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로 보시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까닭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하게 되리라 하니라 환관장이 세워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하매 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보인지라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인도에 이런 설화가 있습니다. 마술사가 쥐 한 마리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쥐는 단 한순간도 평안한 기색이 없이 불안과 초조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리 돌아보고 저리 돌아보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하고 살펴보니 고양이 때문이었습니다. 고양이가 언제 와서 덮칠지를 몰라 그렇게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마술사는 그 쥐가 불쌍해서 아예 고양이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된 뒤에도 불안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번에는 개 때문이었습니다. 개가 겁이 나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술사는 다시 그 고양이를 개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에는 호랑이가 겁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또다시 호랑이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천하무적의 호랑이가 되어서도 두려워하기는 매일반이 아닙니까? 바로 사냥꾼 때문이었습니다. 사냥꾼의 총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마술사는 무슨 수를 써도 안되겠다는 결론을 얻고, 호랑이를 원래의 모습인 쥐로 돌이켜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요사이는 의사를 찾는 만성환자의 90퍼센트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가 불안과 초조에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같이 불안과 공포로 나약해지고,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무엇엔가 쫓기는 듯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환경이나 여건에서 용기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불안과 두려움이 환경에 연유한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이 바뀌면 괜찮을 것이라고 여겨 직장도 바꾸어보고 거처도 옮겨보고 합니다. 심지어는 남편도 갈아치워보고 아내도 바꾸어봅니다.
그러나 소용없습니다. 환경이 바뀌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불안한 사람은 항상 불안합니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은 항상 두려움에 떱니다. 근심걱정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자기확신에서 용기가 난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은 보잘것없으나 'in spite of--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용기가 난다고 믿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비록 가난할지라도, 즉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평안합니다. 몸이 병들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가 있습니다. 비록 환경이 어렵다 해도 그럴수록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 큰 용기의 사람이 됩니다. '용기는 자기확신에 있는 것이다'---이렇게 생각할 줄을 압니다.
예나 오늘이나 무릇 약한 자는 변명이 많습니다. 약한 자는 지식과 소유에서 용기가 생긴다고 믿습니다. 내가 뭘 모르기 때문에 약해지고 비굴해지는 것이다, 소유가 없기 때문에, 가난하기 때문에 약해지는 것이다, 라고 자기합리화 내지 변명을 합니다.
무식과 소유의 부족에 책임을 전가합니다. 소유와 지식이 부족해서 용기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것 역시 크나큰 착각임을 압니다. 정말로 강한 자는, 용기의 뿌리는 오직 신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신앙이 있는 자는 용기가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자는 어디서나 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 수만의 동포와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입니다. 당시의 포로생활이란 너무나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포로는 하나의 전리품이었습니다. 포로가 된 순간부터 그들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쇠사슬에 묶여서 여기저기 끌려다니고 매매되는 그들에게는 윤리도 도덕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인생다운 인생이 이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비참함이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 후손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포로의 신세였습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꽤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나라를 다스려나갈 지도자를 친히 양성합니다. 포로 가운데서 똑똑하고 총명한 소년들을 발탁해서 왕궁에서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그렇게 발탁된 사람들입니다. 시쳇말로 억세게 운좋은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그 많은 노예들 가운데서 발탁되어 왕궁에서 호의호식하고 공부를 합니다. 그리하여 장차는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토록 탁 트인 운명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재수좋은 사람들입니다. 노예의 신분으로 왕궁에 살게 된, 그리고 장래까지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꿋꿋한 소신이 있었습니다. 그들 나름의 신앙이 있고, 신앙적 생활철학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내 운명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내 신앙의 절조는 결코 굽히지 않는 신앙적 용기가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용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첫째, 호의를 거절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탄압을 받을 때에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의를 누리고 좋은 대접을 받을 때에는 약해지기 쉽습니다. 기독교 순교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독실한 기독교인이 잡혀와, 예수믿는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합니다.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 사람은 한사코 예수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재판관은 그 사람을 보고 으름짱을 놓습니다. "끝까지 예수를 믿겠다고 하니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그 때, 재판관 곁에 있던 사람이 재판관에게 귀띔합니다.
"재판장이여, 저 사람을 죽이면 안됩니다. 죽이면 예수 이름으로 순교해서 천당간다고 더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정배를 보내버릴까?" "그것도 안됩니다. 정배를 보내면 얼싸좋다 하고 거기서 실컷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럼 매질이나 하고 말까?" "그것도 좋지 않습니다. 매질을 하면 예수 이름으로 매맞는다며 기고만장할 것입니다." 재판관은 난감해졌습니다.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말이냐? 어떻게 하면 저놈에게 호된 고통을 가할 수 있을꼬?" "돈을 많이 주어서 석방시키십시오. 기독교인들을 결정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들려면 죄짓게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그럴듯한 판단입니다. 사람이란 박해를 받고 고통을 당할 때에는 오히려 강해지는 성향이 있지만, 심신이 평안하고 만사가 형통하면 오히려 약해지는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론을 위한 용기는 풍부하지만 실천을 위한 용기는 부족하다'라고 헬렌 켈러는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을 두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며 말은 잘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막상 내 앞에 현실로 닥치고보면 그렇게 초라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남의 선심이나 호의, 남이 주는 선물에 약합니다. 욕먹을 때에는 강하다가도 칭찬을 들으면 무너집니다. 고통을 당할 때에 강하다가도 조그마한 명예나 하찮은 선물에 그만 비굴해지고 맙니다. 초라하고 불쌍합니다. 고난당할 때에는 용기있다고 자인하던 사람이 명예 앞에, 물질 앞에, 선심 앞에서 어이없게, 비참하게 무너집니다. 평소의 고고(孤高)하던 용기는 간데온데없습니다.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달랐습니다.
둘째, 다니엘과 세 친구의 용기는 정결(淨潔)을 지킬 줄 아는 용기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에게 기름진 고기와 좋은 음식과 감미로운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잘먹어 건강하라고 베푼 왕의 호의였습니다. 그들은 이 호의를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의 음식이라는 것은 전부가 우상의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앙적 용기가 그것들을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8절)"---나를 더럽히지 않게 해달라고 저들에게 담대히 요구합니다. 절대 권력을 쥔 왕의 호의를 정면으로 거절하다니,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정결을 지키고자 한 용기입니다.
정결을 잃어버린 사람은 용기가 없습니다. 양심과 인격과 진실을 모두 팔아버린 사람에게 무슨 용기가 있겠습니까? 진실을 상실한 사람에게서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결한 사람만이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용기는 정결에서 비롯되고 또 정결을 지킬 수 있게 합니다. 용기가 있다는 것은 단순히 남보다 먼저 비겁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려움을 당할 때에 도의를 잃어버리지 않고 비굴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용기의 사람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깨끗이 살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깨끗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다니엘은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하여 호의호식을 거절했습니다. 깨끗한 사람입니다.
세째,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8절)"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다니엘의 용기는 뜻을 정할 줄 아는 용기였습니다. 무릇 용기는 뜻을 정하는 데서 나옵니다. 결단이 있어야 용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면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스스로 확고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를 선택하고자 아홉을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절대적 가치를 구하여 상대적인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구하여 순간적, 찰나적, 세상적인 것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구하여 사람의 것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파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이 그랬듯이 뜻을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결단은 필연적인 것도 아니요 부득이해서 내린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요 자원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신앙 안에서 결단을 내립니다. 신앙 안에서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참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뜻을 정하고나니 마음은 그지없이 평안해지고 무서운 용기의 사람이 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심지가 굳은 사람은 주님께서 평강으로 인도하신다고 이사야 26장 3절은 말씀합니다. 곧 뜻을 정하고나면 마음이 평안해진다고 말씀함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일관성 있는 심지(心志),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뜻을 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해질 수 있습니다. 우왕좌왕 아무 생각 없이 흔들리는 마음에는, 아침저녁으로 변덕을 부리는 마음에는, 절대로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네째, 다니엘의 용기는 변치 않는 용기였습니다. 일단 뜻을 정했으면 끝까지 굽히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보지 않습니다. 환경이 변했다고 달라질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결단과 자신의 행위로써 초래되는 어떠한 고통과 손해도, 어떠한 불이익도 그는 전적으로 감수할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서, 자신이 결정한 일에 대해서,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말론적 결단입니다. 생사(生死)가 걸려 있다 해도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습니다.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굽히지 않습니다. 오늘 정한 이 뜻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지킵니다. 이런 사람이 용기의 사람입니다. 상황이 달라졌다느니, 세태가 달라졌다느니, 때가 때인만큼 어쩔수없다느니 하고 어물쩡 변절하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들 앞에 열린 형통의 길, 잘살 수 있는 길을 거부했습니다. 정결하게 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로해서 실격이 되고, 불명예를 겪고, 심지어는 죽음이 온다고 해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뒤에 나오는 3장에서 우리는 참으로 장엄하고도 귀한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이 거대한 황금신상을 세우고 낙성 의식을 치릅니다. 나라의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그 신상에 절을 하도록 명합니다. 그러나 지방장관으로 있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 친구는 왕 앞에 끌려왔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하고 느부갓네살이 무섭게 눈을 부라립니다.
곁에서는 과연 풀무불이 극렬히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여"하고 세 사람은 당당하게 입을 열어 말합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풀무 가운데서 건져내주시지 아니한다 하여도 우리는 결코 우상 앞에 절할 수 없다---엄청난 용기가 아닙니까? 마침내 그들은 노기등등해진 느부갓네살의 명으로 일곱 배나 더 뜨겁게 지핀 풀무불 속에 던지어졌습니다. 얼마나 뜨거웠으면 그들을 던져넣던 병사들마저 타죽었겠습니까?
그러나 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머리카락 한올도 그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것이 신앙적 용기입니다. 무슨 조건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깨끗한 믿음에서 생긴 확실한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그 존재와 신분을 지켜가는 것에 만족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정결하게 죽기를 바랍니다. 죄와 더불어 향락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더러운 명예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깨끗하고 정결한 인격을 지켜 그대로 끝내고 싶은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앙을 지키고 그 걸음으로 생을 끝낼 각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저러한 믿음과 결단으로해서 푸성귀와 물만 먹고도 얼굴이 윤택했으며 저러한 용기로해서 건강한 모습으로 이보란듯 왕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나라일을 총괄하는 총리의 자리에까지 받들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영광, 이 승리---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들은 정결함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큰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시카고 뉴스」지에 솔직한 논평을 많이 써서 유명해진 해리스라는 칼럼니스트가 있습니다. 그가 쓴 책「대통령을 위한 기도」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오 주여, 그에게 그의 경험과 지식과 신념이 아닌, 당신의 계율을 지킬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지도자에게는 물론 정치적 능력, 권세, 지식, 경험, 그리고 신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용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이러한 용기의 사람을 도우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율을 지킬 줄 아는 용기의 사람을 높이고 계시며, 그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여, 정결함에 용기를 주시옵소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진실을 지키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비겁한 승리보다 의로운 패배를 선택할 줄 아는 지도자를 주시옵소서. 잘살고 잘먹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고 좀더 정직하게 좀더 부지런하게 좀더 성실하게 사는 가난한 백성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명예를 위하여, 권세를 위하여, 번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니엘과 세 친구의 용기를 보았습니다. 이러한 신앙적 용기와 결단이 나에게도 우리 민족에게도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함께 하신 것과 같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를 승리케 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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