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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의 선택(에스겔 33장 10절~16절)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중에서 쇄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 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 이는 법과 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
생명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생명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의미가,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잘사느냐 못사느냐, 건강하냐 병들었느냐, 혹은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는 묻지 마십시오. 살아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근거를 그 모양이나 가치에 두려고 합니다마는 그실 알고 보면 살아 있다는 것만이 아름답습니다. 생명이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떤 생명일지라도 살아 있기에 그것은 모두 아름답습니다.
또한 살아 있는 것은 생명을 생산합니다. 죽음은 생명을 죽음에로 이끕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것은 또 다른 생명을 생산하고 생명에로 연계(連繫)합니다. 생명의 보탬을 줍니다. 생명의 향상을 가져다줍니다. 나아가 생명은 가치를 창출합니다.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가 생명에 근거합니다. 생명은 그 생명을 지키며, 그 생명을 연장하며, 또 다른 생명을 생산합니다.
그리고 늘 생명에로 지향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11절)."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사는 것을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악인일지라도 악에서 떠나 생명의 길에 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악인이 악에서 죽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악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회복과 구원에 대한 희망은 없다고 믿는, 회개하면 산다고 하신 당신의 약속을 무시하고 불 신앙에 빠진 유대사람들에게 "어찌 죽고자 하느냐"라고 힐책하십니다. 아마도 이에 대하여 일반적인 우리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가 살고자 얼마나 애를 쓰는데요. 이렇듯 살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죽고 싶어 하느냐라시니 도대체 어인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어찌 죽고자 하느냐"---여기에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생명에는 필연적인 면과 선택적인 면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태어날 때에 우리의 마음대로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죽는 것 역시 우리 인간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어느 때가 되건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이렇듯 생명에는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것 같은 필연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의 선택적인 면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놓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7)"---나의 말에 순종하면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생명의 길을 택하라시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의 선택성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우리에게 "어찌 죽고자 하느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살고 싶다면서 왜 죽음의 길을 선택하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길에 있기 때문이요, 죽음으로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사는 것입니까? 삶의 길에 대해서 단계적으로 한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첫째로, 먹어야 삽니다. 이것처럼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도 없습니다. 분명히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음식을 두고도 안 먹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필시 죽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먹지 않습니다.
이렇듯 생명은 하나님께 있지만, 먹어야 사느니 만큼 그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기로 한 이상 잘먹어야 하고, 또 적당히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미련한 일이 있습니다. 살기를 바라면서도 음식은 살도록 먹지 않고 죽도록 먹습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음식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먹어놓고 숨이 차서 씩씩거리다가 소화제 먹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살자고 먹는 음식이니 즐겁게 먹어야 하는데 분수에 넘치도록 먹어놓고 이기지 못해 소화제를 먹어야 하는 사람, 미련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사람답지 않은 사람인 것입니다.
위장을 전문으로 연구한 어느 의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세계에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에게만 있는 병명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위하수」라고 하는 병이 그것입니다.「위하수」란 위가 무기력해지는 병입니다. 서양의 의사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위 수술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농담처럼 한답니다. "언젠가 한번 위 수술을 하려고 개복 했더니 위가 없더라.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장 밑으로 들어가 있더라."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위가 제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위가 무기력해 졌기 때문입니다. 이「위하수」의 원인은 너무 많이 먹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위의 70퍼센트 이상 차도록 먹으면 안 되는데 우리는 숨도 못 쉴 정도로 위를 가득 채웁니다. 그래서 결국은 위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축 늘어지는 현상이 일어나, 이것이 심해져서 병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미련스럽습니까? 이쯤 되면 살자고 먹는 음식이 아니라 죽으려고 먹는 음식입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환경이 적합해야 삽니다. 생명은 환경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늘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것들은 다 그렇습니다. 철새를 보십시오. 철새는 스스로의 삶에 맞는 환경을 찾아서 철 따라 더운 지방으로 혹은 추운 지방으로 이동합니다. 그들의 몸에 맞는 기후조건을 찾아다니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어느 정도 신체의 적응한계가 넘었을 때에는 부득불 옷을 더 입기도 하고, 불을 지피기도 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이렇듯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환경을 삶의 터전으로, 우리를 살리는 환경으로 가꾸어나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우리는 생명을 죽이는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적당한 소유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소유가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유가 지나치게 많거나 적어도 문제는 생깁니다. 인격은 부족한 사람이 높은 지위를 얻던가 많은 재산을 가지던가 하면 그 소유에 치여서 제 명도 제대로 못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저 가난하게 웬만큼 살았으면 좋았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돈 좀 벌고 지위 좀 높아지는 바람에 사람을 망치고 맙니다. 그만 비참해집니다. 결국 소유 때문에 죽게 됩니다. 성경에도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듯 우리 주위에는 그릇된 소유로 인하여 죽는 길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생명에 있어서는 평화가 중요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이것을 알면서도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살자는 것입니까, 죽자는 것입니까? 이 불화 또한 마음의 멸망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평화가 필요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평화가 있고야 생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은 평화 속에 깃듭니다. 또한 생명은 사랑으로 통합니다. 사랑하면 거기에 생명이 있고, 미워하면 거기에 죽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워하면서 살고자 한다면 그런 사람 역시 자살 행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생명은 도덕성입니다. 도덕성이 지켜질 때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도덕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도덕성을 떠난다면, 그것은 죽자는 것이지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몸도 마음도 죽어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되기를 포기한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아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바른 신앙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저버릴 때에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간혹 우리는 살기를 원하면서도 죽는 길로 갑니다.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도 행하는 일은 죽는 일만 골라서 합니다. 이런 사람은 살자고 사는 것입니까, 죽자고 사는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오늘의 본문은 "어찌 죽고자 하느냐"라고 간단하게 힐책합니다. 건강을 원하면서 절제하지 못하고,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 이는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화(寓話)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솝의 어렸을 적 일입니다. 많은 학생들 사이에 끼어서 공부를 하고 있는 이솝에게 선생님이 "옆에 있는 공동목욕탕에 가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오너라"하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보고 돌아온 이솝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이솝을 포함한 여러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공동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나 많은지 발 들이밀 틈이 없습니다. 기가 막힌 선생님은 이솝을 불러서 "야, 이놈아. 한 사람밖에 없다더니 왜 이렇게 많으냐?"라고 나무랍니다. 이솝은 천연스럽게 "사람 같은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냐?" "제가 여기 와보니 목욕탕 문 앞에 커다란 돌이 하나 있는데 들어오는 사람마다 걸려서 넘어질 뻔하면서도 그냥 들어가더군요. 모두들 넘어질 뻔하고는 그냥 들어가는데 딱 한 사람만이 그 돌을 치워놓더군요. 그러니 사람 같은 사람은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죄는 뼈를 마르게 하고, 골수의 진액을 마르게 합니다. 정신을 혼미하게 합니다. 세상을 썩게 만듭니다.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죽게 만들어버립니다. 죄가 사망의 원인입니다. 만일 죄에서 떠나지 않고, 죄의 길에 여전히 서 있다면 살고 싶은 것입니까, 죽고 싶은 것입니까? "어찌 죽고자 하느냐"---본문의 뜻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유대사람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짓고 살아남을 수 없음을, 자신들이 죄인 됨을 알고 있습니다. 구제불능의 죄인임을 압니다. 죄가 너무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소망이 없기에 이제는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음을, 멸망밖에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현대에서는 흔히 한계상황이라고 합니다. 혹은 총체적 위기라고도 합니다. 끝났다, 다 죽었다, 다 망했다, 소망은 없다--결정적 종말입니다. 물론 율법적인 관계에서는 당연히 그렇습니다. 우리의 도덕성, 인간성, 정치, 경제, 생태학적 형편…… 아무리 살펴보아도 소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스스로의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면 아직은 살길이 있다고. 오늘의 본문도 우리에게 내게는 길이 없으나 하나님께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계십니다. 나는 나를 포기했을지언정 하나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과거에 매여서 절망하고 있지만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미래를 제시하시면서 생명의 길로 나오라고 재촉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끝났다고 결정적으로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일이 시작될 것이라고 간곡하게 예언하고 계십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궁극에서도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인간이 인간의 노력을 완전히 정지하는, 완전히 포기하는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아직도 죄 중에 있습니다. 분명코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 중에 있습니다. 이대로는 하릴없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직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살아 있다는 이 생명의 현재성 자체가 엄청난 긍휼이요 기적인 것입니다. 이 자체가 놀라운 역사입니다. 생명의 현재성이 있기에 지금도 우리는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귀에 들리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에게 기대를 걸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생명은 기회요 소망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가 아니면 죄도 지을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늘에서 벼락을 치기라도 했다면 누가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는 일마다 전부 못된 짓만 하고 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짓만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생명은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 있습니다. 과거도 은혜 안에 있었고, 현재도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약속하시면서 은혜의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 것입니다. 사회심리학자 프롬(Fromm, Erich)은 인간됨의 특질로 '호모 에스퍼랜스(Homo Esperans)'를 들고 있습니다. 사람은 소망의 존재입니다. 소망이 있기에 사람인 것입니다. 생명은 곧 소망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돌이키고 돌이키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10절로 16절의 본문말씀 가운데 '돌아오라'라는 이 말이 여섯 차례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말에는 회개에 해당하는 단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회개하고 뉘우친다는 뜻의 '나함'과 돌아오는 것에 초점을 맞춘 '수브'가 그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나는 '돌아오라'는 '수브'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뉘우침이라는 것은 물론 귀한 일이지마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에는 절망하고 맙니다. 뉘우치면서 죽어갑니다.
후회하면서 더욱 깊은 죄악에 빠집니다. 그러나 여기에 플러스 알파의 믿음이 주어진다면 뉘우침으로부터 긍정적인 세계를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마음의 변화, 태도의 변화,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마음에는 변화가 있는 듯한데 아직 자세가 바로 되지 않았습니다.
태도는 고친 듯한데 여전히 행위는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봐도 여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11절)"라고 거듭 말씀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재벌 가운데 깁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깁슨의 3대 성공비결'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미리스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아주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처음 물레방앗간에서 심부름을 하는 머슴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공부라는 것은 별로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성실하고 부지런히 일함으로 당대 미국 최고의 재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커다란 성공을 거두자 많은 사람들이 너나없이 그에게 성공의 비결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 때마다 그는 이렇게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저는 늘 이 세 가지를 약속하고 지켜왔습니다. 첫째, 술을 마시지 말 것. 둘째, 고생을 두려워 말고 일을 할 것. 고생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너무 편하려고만 해서는 안됩니다. 셋째, 하나님을 믿고, 만사를 의심하지 말 것.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 신조입니다. 저는 이것을 지켰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삼척동자도 압니다. 다른 비결은 없습니까?"라고 다시 묻습니다.
깁슨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많은데 이대로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길을 몰라서 안 갑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몰라서 못하는 것입니까? 말을 하라고 하면 얼마나 잘합니까? 가르치라고 하면 모두가 선생이 아닙니까? 문제는 행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돌이키고 돌이 키라"---이는 행위를 요구하심입니다. 앉아서 눈물만 흘리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슴을 치며 한탄만 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생명의 길로 돌아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망의 길을 떠나서 생명의 길로 돌아 오라---이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자기 신뢰나 율법적 관계에 매여 자책하지 말고 은혜의 세계로 돌아 오라,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 오라, 나 자신의 의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많은 축복과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시고 우리가 당장이라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생명에의 길은 사랑의 길이요 화목의 길이요 진리의 길입니다. 여러분, 생명에의 길로 돌아갈 것입니다. 참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온전한 자유요 온전한 사랑이요 온전한 소망입니다. 살기를 바라면서 죽음으로 치닫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면서 죄악의 길로 가는 생활을 언제까지 지속해야 합니까? 모순된 생활에서 이제는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바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이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은 험한 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길입니다. 이 길은 때로 고통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길입니다.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새로운 생명의 길로 돌아오라고 강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주님의 이 뜻을 알고 바로 응답하는 생명에의 선택이 오늘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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