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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의 감사(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7절)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役事)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道)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탈무드(Talmud)」는 율법학자들의 구전(口傳) 및 해설을 집대성한 책으로, 유대인에게 성서 다음가는 정신문화의 원천으로 높이 평가됩니다. 이「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 처한다 해도 배울 줄을 아는 사람이다.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족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제일 부자다'---참으로 지혜로운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다 다음과 같은 말을 더 보태고 싶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장 건강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예수 잘 믿는 사람이다' --- 이것입니다.
독일의 한 외과의사가 참으로 마음 아픈 수술을 집도하게 되었습니다. 한 여인이 설암(舌癌)으로 혀를 잘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혀를 자르지 않으면 목숨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괴롭지만 그 수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혀를 자르고 나면 앞으로는 영영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십시오." 의사는 집도 전에 환자보고 말했습니다. 여인은 눈이 젖고 입술이 떨립니다. 젖은 눈을 감고 떨리는 입술로 하나님 앞에 조용히 기도합니다. 이윽고 고개를 들더니 "주님 감사합니다"하고는 의사한테 결연히 말합니다. "됐습니다. 이제 혀를 자르세요."
감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만족해서 기쁨으로 하는 감사와 눈물로 드리는 감사입니다. 내가 비록 가진 것이 없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다 해도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눈물로 드리는 감사야말로 가장 값진 감사입니다. 기쁨의 감사, 눈물의 감사 -----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행복은 감사에 달려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감사하는 말, 감사하는 행위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종이 울려야 소리가 나듯이 행복은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와야 행복입니다. 내가 지금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족한 줄 모르고 더 못 가진 것으로 불평하고 원망하고 싸운다면 행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누리지 못합니다. 가지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제아무리 모든 일에 형통하다 해도 여전히 부족하다 여기고 불만 가운데 있다면 행복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고 감사하는 말이 입밖에 절로 흘러나와야 행복일 수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왔다가 원망의 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감사할 때에 행복이 들어오고 원망할 때에 행복은 나가버립니다. 감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30절)"------그렇지 않습니까? 웃는 낯에 침 뱉을 사람 없습니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제아무리 시기가 많은 세상이라지만, 제아무리 제 앞만 챙기는 세상이라지 만 그 누구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을 깐죽거리지는 못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나한테도 좋고 남한테도 좋은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더없이 좋은 말이 "감사합니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하다는 말에 퍽 인색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소리하기가 왜 그토록 힘이 들까요? 어쩌다가 못된 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다고 하면 내가 밑지는 것 같고, 빌어먹는 것 같고,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소리를 차마 입밖에 못 내고 꿀꺽 삼켜버리는 병---이 몹쓸 병 때문입니다. '나는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다' '나는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는다. 남들이 나한테 신세를 입고 있다'---오만불손한 마음입니다.
이 때문에 평생을 두고 감사하다는 말을 한번도 할 줄 모르는 채 숨쉬고 삽니다. 당연히 행복도 모릅니다. 그런 마음이 행복을 알 턱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이 이렇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에 너무도 인색합니다. 마치 해서는 안 되는 말처럼 되어 있습니다. 헛기침 잘하는 봉건 악습의 영향일까요? 잘나고 점잖아서들 그럴까요? 감사는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와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요, 감사의 말도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바탕은 신앙적인 문제와 결부됩니다. 억지로 될 수도 할 수도 없습니다.
감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철학적인 감사입니다. 생각에서 오는 감사입니다. 이를테면 '어제보다 오늘이 낫다'고 해서 감사합니다.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여 생각해본 연후에 보이는 감사입니다. 제가 늘 하는 이야기올시다마는 6․25를 겪은 사람은 무슨 일에고 불평할 자격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워낙 못살았으니까 그때보다 나은 지금을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생각합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비교하여 생각해본 나머지 상대적인 감사를 그로부터 유출해내는 것입니다. 기원전 640년으로 546년까지 살았던 헬라의 철학자 탈레스는 세 가지의 상대적인 감사를 한 바 있다고 합니다. 금수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천대받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헬라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이렇게 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의 유형 그 둘은 충족하는 데서 오는 감사입니다. 배가 고팠다가 그득하게 먹으면 만족합니다. 평안감사가 부럽지 않습니다. 먹게 된 것이 참 고맙습니다. 어렵게 살다가 좀 나아지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욕망 충족에서 오는 감사입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순간적이요 일시적인 것입니다. 지금은 배불리 잘 먹었지만 내일이면 다시 배가 고픕니다. 그때가 지나면 효용이 없어집니다.
감사의 유형 그 셋은 은총적 감사입니다. 이것은 절대적 감사입니다. 본질과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찬송가 405장의 가사처럼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구제불능의 나, 하나님과 원수 된 나를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의 사랑을 확증해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이래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죄 사함 받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는 영원한 것이요 절대적인 것입니다. 바로 은총적 감사요 그리스도인의 감사입니다.
감사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감사하는 자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에 조건을 따지는 자는 비록 그 조건이 충족되었다 해도 감사하는 마음은 그때뿐입니다. 한시간도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내 원망과 불평으로 다시 돌아가고 맙니다. 성경말씀D똕TXT布에도 감사하는 자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영원히 감사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사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노예입니다. 노예는 감사가 없습니다. 주인이 맛있는 음식을 주었다고 감사하겠습니까? 좋은 옷을 주었다고 감사하겠습니까? 노예로 팔려왔는데 무엇이 감사합니까? 나는 노예입니다. 자유가 없는 노예입니다. 아무리 좋은 여건이 주어져도 노예라는 사실 그것 때문에 영원히 감사하지 못합니다. 고마운 마음이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노예이기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유인에게만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아직도 진정한 감사가 없다면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예의식에 사로잡혀 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인은 감사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인격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작은 일에서나 큰일에서나 항상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제대로 할 줄 압니다. 이러한 사람이 자유인이자 인격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마음 아픈 경우를 종종 봅니다. 간혹 감옥에 여러 번 다녀온 전과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고마워하는 것이 애시당초부터 하나도 없는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대체로 고아원 출신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부모가 그를 낳아서 고아원에 갖다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걸레처럼 버려진 존재다 ----- 그래서 고마울 것이라곤 처음부터 없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못마땅하고 귀에 들리는 것이 다 싫습니다. 불만스럽기만 합니다. 그럴 바에야 왜 나를 낳았느냐, 어찌하여 나를 버려진 사람으로 살게 했느냐,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원망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어떤 일에도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밥 한 그릇에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돈 몇 푼에도 고마워하지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보십시오. 유복하게 자라난 사람들은 그 때문에 다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감사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천애고아건 유복하게 자라난 사람이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자녀 된 인식'을 바로 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연후에야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삶 자체에 대한 감사가 없는데 어찌 일일이 감사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가끔 부모 자식간에도 이것이 문제될 때가 있습니다.
부모 된 입장에서야 내가 너를 지금껏 입혀주고 먹여주고 공부시켜주었다고는 하지만, 자녀 된 입장에서는 그 나름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아버지 어머니도 죽지 못해서 사는 이 어려운 세상에 왜 나까지 낳아놓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부모들 자신이 먼저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렇게 재미가 있어서 나를 낳았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을 어렵게 살지 마십시오. 자녀들이 배울 것이 없습니다. '이리 어려운 세상, 왜 나까지 낳아서 고생시키나'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효도를 바랄 수 없습니다. 근본부터 원망인데 무슨 효도입니까?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감사할 수 없다----이것이 원리입니다. 성경은 '감사하라'하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간구와 소원이 참 많습니다. 이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고 저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감사의 조건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감사하라, 우선적으로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감사가 우러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절대조건이 있습니다.
첫째가 깨달음이 있어야 감사합니다. 대개 멍청한 사람이 감사하지 못합니다. 원망과 불평이 많은 사람은 IQ가 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은혜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감사할 일뿐입니다.
저는 결혼주례 하다가 가끔 신랑보고 싱거운 소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자네는 참 복도 많구먼. 이토록 어여쁜 색시가 자네 위해 일생을 살아주겠다고 하니 부러울 것이 없겠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깨달음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감사가 우러나기 위한 조건입니다. 둘째는 겸손해야 감사합니다. 자기를 크게 보는 사람은 감사가 없습니다. 자기만이 잘난 줄 아는 사람, 남에게 주기만 하고 받은 것은 없다고 하는 사람, 신세진 것은 없고 빼앗긴 것만 많다고 하는 사람----이같이 오만불손한 사람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은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작게 여겨야 합니다. 모든 것이 받은 것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농부의 마음은 겸손합니다. 이를테면 아무리 수고해봐도 바람 한번 잘못 불고, 비만 한번 잘못 내리면 한순간에 농사를 망칩니다. 그래서 농부는 늘 자연 앞에 겸손합니다. 요즘에는 기계로, 과학적으로 운운하면서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합니다마는 자연의 섭리 앞에 함부로 나댈 것이 아닙니다. 지각이 들어야 합니다.
인간의 문제, 도덕의 문제, 존재의 문제에 이르러 꼼짝없이 걸리고 마는 그따위 교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마땅히 겸손해져야 합니다. 샛바람 한줄기에도 겸손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만이 감사할 줄 압니다. 셋째는 소망과 믿음이 있을 때에 감사합니다. 미래가 없고야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감사'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 2절, 2장 13절, 3장 9절에서 거듭 말씀하고, 5장 18절에 가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못박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바랍니까? 역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이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별난 보답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하고 베풀었으니 너희는 기뻐하고 감사하라----이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셨고, 은총을 주셨고, 먼저 사랑하셨고, 그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그 엄청난 값을 치르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로 당신의 자녀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을 인하여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그 선택적 역사에 대하여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선물입니다. 분명 은사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소망은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그날'을 바라볼 수 있는 확실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절망 없이 낙심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믿음을 주셔서 믿음으로 역사하게 하십니다. 사랑을 주셔서 기쁨으로 수고하게 하십니다. 소망을 주셔서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인내하게 하십니다. 소망 없이는 결코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소망을 주셔서 잘 참고 견디도록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울의 여러 편지 가운데에 감사에 대한 언급이 수없이 나옵니다마는 놀라운 것은 물질, 건강, 성공, 부유, 풍요, 풍년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환난과 핍박 속에 있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 예수를 믿었고 고난 가운데서 믿음을 지켜나갔습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에서도 똑같은 것을 느낍니다. 비록 건강은 잃어버렸지만 소중한 믿음을 얻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였으나 그 때문에 참으로 소중한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하여 절망합니다. 바라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우리는 하늘나라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믿음을 주신 하나님, 사랑을 주신 하나님, 약속과 소망을 주신 하나님, 그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제 귀한 사진을 한 장 얻었습니다. 얼마 전 북녘 땅 신의주에서 교인들이 가정에 모여 예배드리는 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20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인도자도 없고 성경은 한 권뿐입니다. 공책에다 손수 베낀 성경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교회들이 신의주에만 열 한 군데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은 545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라고 합니다.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그들은 죽기를 한하고 예배드리고 찬송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다음으로 많이 부르는 찬송은 431장의 '내 주여 뜻대로'라고 합니다. 특별히 재미있는 것은 이 '내 주여 뜻대로'의 가사를 김일성 찬가 곡조에 맞추어서 부른다는 것입니다. 누가 지나가다 밖에서 들으면 영락없이 '김일성 찬가' 부르는 것으로 압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얼마나 읽었던지 이사야서를 몽땅 외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목숨걸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감사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할말 있습니까? 우리가 할말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더는 불평하지 맙시다. 어차피 한번 살고 떠나야 할 세상, 이만큼으로 살았으면 되었지 않습니까? 더는 욕심내지 마십시다. 더는 원망하지 마십시다. 세상사 대충 해두십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할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잔이 넘칩니다. 이대로 끝난다 해도 괜찮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다. 있는 것에 감사하고 받은 것에 감사하십시다. 확실한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기에 감사하십시다.
「실락원」을 쓴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이 마흔네 살에 실명(失明)했을 때, 그 순간에마저 그는 귀한 한마디를 시로 남깁니다.
주께서 내 육안(肉眼)을 어둡게 하심으로 주님만을 뵐 수 있는 심안(心眼) 열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비록 물질적인 것은 없으나 영적인 것을 얻었습니다. 순간적인 것은 잃었으나 영원한 것을 얻었습니다. 세속적인 것은 다 잃었으나 확실하고 영원한 가치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마는 이는 원래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게서 유래합니다. 청교도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첫해에 곡식을 거둬들여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날이 시초가 되어서 지금의 감사절이 있게 된 것입니다. 1620년 12월 26일, 미국 동북부 플리머스(Plymouth)에 상륙한 146명의 청교도는 상륙 즉시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180톤밖에 안 되는 작은 배이지만 그들은 배를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 배의 속력은 평균시속 2마일 이어서 어떤 때에는 걷는 것보다 느립니다. 그러나 117일 간을 항해하여 무사히 약속의 땅 아메리카에 도착한 것을 감사합니다. 항해 중에 두 명이 죽었지만 한 명의 아기가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큰 돛까지 부러질 정도의 풍랑을 만났으나 파선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고, 여자 몇이 물결에 휩쓸려서 실종되었으나 구출된 것에 감사하고, 원주민의 방해로 한 달여 항구를 배회했으나 마침내 호의를 얻어 무사히 상륙한 것을 감사하고, 삼 개월 반 동안의 고통스런 항해에도 고향으로 되돌아가자고 원망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을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항해에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해도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고 주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감사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감사야말로 가장 생산적인 은혜요 최대의 전도입니다. 불평과 원망 속에서 전도해봐야 헛일입니다. '나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나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쁩니다'---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이 한마디가 으뜸의 전도가 됩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웅변입니다. 보십시오. 원망하면서 가르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 문을 엽니다.
자녀 교육을 잘하고 싶습니까? 자녀에게 고맙다고 하십시오. 남편의 마음을 열고 싶습니까? 바가지나 긁는다고 되지 않습니다. 고맙다고 해보십시오.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대의 설교가 됩니다. 또한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이 한마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제 조건을 따져 묻지 맙시다. 조건을 기다리지도, 환경이 변화할 것을 기다리지도 맙시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선적으로 감사하고 절대적으로 감사합시다. 우리의 생이 다하도록 감사하고 생이 끝나는 그 순간에도 감사할 것입니다. 감사의 은혜가 어두운 세상을 거뜬히 이기게 합니다. *
선택받은 자의 감사(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7절)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役事)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道)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탈무드(Talmud)」는 율법학자들의 구전(口傳) 및 해설을 집대성한 책으로, 유대인에게 성서 다음가는 정신문화의 원천으로 높이 평가됩니다. 이「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 처한다 해도 배울 줄을 아는 사람이다.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족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제일 부자다'---참으로 지혜로운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다 다음과 같은 말을 더 보태고 싶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장 건강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예수 잘 믿는 사람이다' --- 이것입니다.
독일의 한 외과의사가 참으로 마음 아픈 수술을 집도하게 되었습니다. 한 여인이 설암(舌癌)으로 혀를 잘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혀를 자르지 않으면 목숨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괴롭지만 그 수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혀를 자르고 나면 앞으로는 영영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십시오." 의사는 집도 전에 환자보고 말했습니다. 여인은 눈이 젖고 입술이 떨립니다. 젖은 눈을 감고 떨리는 입술로 하나님 앞에 조용히 기도합니다. 이윽고 고개를 들더니 "주님 감사합니다"하고는 의사한테 결연히 말합니다. "됐습니다. 이제 혀를 자르세요."
감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만족해서 기쁨으로 하는 감사와 눈물로 드리는 감사입니다. 내가 비록 가진 것이 없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다 해도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눈물로 드리는 감사야말로 가장 값진 감사입니다. 기쁨의 감사, 눈물의 감사 -----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행복은 감사에 달려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감사하는 말, 감사하는 행위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종이 울려야 소리가 나듯이 행복은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와야 행복입니다. 내가 지금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족한 줄 모르고 더 못 가진 것으로 불평하고 원망하고 싸운다면 행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누리지 못합니다. 가지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제아무리 모든 일에 형통하다 해도 여전히 부족하다 여기고 불만 가운데 있다면 행복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고 감사하는 말이 입밖에 절로 흘러나와야 행복일 수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왔다가 원망의 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감사할 때에 행복이 들어오고 원망할 때에 행복은 나가버립니다. 감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30절)"------그렇지 않습니까? 웃는 낯에 침 뱉을 사람 없습니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제아무리 시기가 많은 세상이라지만, 제아무리 제 앞만 챙기는 세상이라지 만 그 누구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을 깐죽거리지는 못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나한테도 좋고 남한테도 좋은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더없이 좋은 말이 "감사합니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사하다는 말에 퍽 인색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소리하기가 왜 그토록 힘이 들까요? 어쩌다가 못된 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다고 하면 내가 밑지는 것 같고, 빌어먹는 것 같고,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소리를 차마 입밖에 못 내고 꿀꺽 삼켜버리는 병---이 몹쓸 병 때문입니다. '나는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다' '나는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는다. 남들이 나한테 신세를 입고 있다'---오만불손한 마음입니다.
이 때문에 평생을 두고 감사하다는 말을 한번도 할 줄 모르는 채 숨쉬고 삽니다. 당연히 행복도 모릅니다. 그런 마음이 행복을 알 턱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이 이렇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에 너무도 인색합니다. 마치 해서는 안 되는 말처럼 되어 있습니다. 헛기침 잘하는 봉건 악습의 영향일까요? 잘나고 점잖아서들 그럴까요? 감사는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레 우러나와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요, 감사의 말도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바탕은 신앙적인 문제와 결부됩니다. 억지로 될 수도 할 수도 없습니다.
감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철학적인 감사입니다. 생각에서 오는 감사입니다. 이를테면 '어제보다 오늘이 낫다'고 해서 감사합니다.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여 생각해본 연후에 보이는 감사입니다. 제가 늘 하는 이야기올시다마는 6․25를 겪은 사람은 무슨 일에고 불평할 자격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워낙 못살았으니까 그때보다 나은 지금을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생각합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비교하여 생각해본 나머지 상대적인 감사를 그로부터 유출해내는 것입니다. 기원전 640년으로 546년까지 살았던 헬라의 철학자 탈레스는 세 가지의 상대적인 감사를 한 바 있다고 합니다. 금수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천대받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헬라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이렇게 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의 유형 그 둘은 충족하는 데서 오는 감사입니다. 배가 고팠다가 그득하게 먹으면 만족합니다. 평안감사가 부럽지 않습니다. 먹게 된 것이 참 고맙습니다. 어렵게 살다가 좀 나아지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욕망 충족에서 오는 감사입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순간적이요 일시적인 것입니다. 지금은 배불리 잘 먹었지만 내일이면 다시 배가 고픕니다. 그때가 지나면 효용이 없어집니다.
감사의 유형 그 셋은 은총적 감사입니다. 이것은 절대적 감사입니다. 본질과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찬송가 405장의 가사처럼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구제불능의 나, 하나님과 원수 된 나를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의 사랑을 확증해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이래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죄 사함 받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는 영원한 것이요 절대적인 것입니다. 바로 은총적 감사요 그리스도인의 감사입니다.
감사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감사하는 자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에 조건을 따지는 자는 비록 그 조건이 충족되었다 해도 감사하는 마음은 그때뿐입니다. 한시간도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내 원망과 불평으로 다시 돌아가고 맙니다. 성경말씀D똕TXT布에도 감사하는 자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영원히 감사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사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노예입니다. 노예는 감사가 없습니다. 주인이 맛있는 음식을 주었다고 감사하겠습니까? 좋은 옷을 주었다고 감사하겠습니까? 노예로 팔려왔는데 무엇이 감사합니까? 나는 노예입니다. 자유가 없는 노예입니다. 아무리 좋은 여건이 주어져도 노예라는 사실 그것 때문에 영원히 감사하지 못합니다. 고마운 마음이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노예이기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유인에게만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아직도 진정한 감사가 없다면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예의식에 사로잡혀 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인은 감사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인격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작은 일에서나 큰일에서나 항상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제대로 할 줄 압니다. 이러한 사람이 자유인이자 인격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마음 아픈 경우를 종종 봅니다. 간혹 감옥에 여러 번 다녀온 전과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고마워하는 것이 애시당초부터 하나도 없는 사람을 볼 때가 있습니다. 대체로 고아원 출신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부모가 그를 낳아서 고아원에 갖다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걸레처럼 버려진 존재다 ----- 그래서 고마울 것이라곤 처음부터 없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못마땅하고 귀에 들리는 것이 다 싫습니다. 불만스럽기만 합니다. 그럴 바에야 왜 나를 낳았느냐, 어찌하여 나를 버려진 사람으로 살게 했느냐,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원망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어떤 일에도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밥 한 그릇에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돈 몇 푼에도 고마워하지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보십시오. 유복하게 자라난 사람들은 그 때문에 다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감사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천애고아건 유복하게 자라난 사람이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자녀 된 인식'을 바로 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연후에야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삶 자체에 대한 감사가 없는데 어찌 일일이 감사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가끔 부모 자식간에도 이것이 문제될 때가 있습니다.
부모 된 입장에서야 내가 너를 지금껏 입혀주고 먹여주고 공부시켜주었다고는 하지만, 자녀 된 입장에서는 그 나름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아버지 어머니도 죽지 못해서 사는 이 어려운 세상에 왜 나까지 낳아놓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부모들 자신이 먼저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렇게 재미가 있어서 나를 낳았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을 어렵게 살지 마십시오. 자녀들이 배울 것이 없습니다. '이리 어려운 세상, 왜 나까지 낳아서 고생시키나'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효도를 바랄 수 없습니다. 근본부터 원망인데 무슨 효도입니까?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감사할 수 없다----이것이 원리입니다. 성경은 '감사하라'하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간구와 소원이 참 많습니다. 이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고 저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감사의 조건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감사하라, 우선적으로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감사가 우러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절대조건이 있습니다.
첫째가 깨달음이 있어야 감사합니다. 대개 멍청한 사람이 감사하지 못합니다. 원망과 불평이 많은 사람은 IQ가 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은혜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감사할 일뿐입니다.
저는 결혼주례 하다가 가끔 신랑보고 싱거운 소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자네는 참 복도 많구먼. 이토록 어여쁜 색시가 자네 위해 일생을 살아주겠다고 하니 부러울 것이 없겠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깨달음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감사가 우러나기 위한 조건입니다. 둘째는 겸손해야 감사합니다. 자기를 크게 보는 사람은 감사가 없습니다. 자기만이 잘난 줄 아는 사람, 남에게 주기만 하고 받은 것은 없다고 하는 사람, 신세진 것은 없고 빼앗긴 것만 많다고 하는 사람----이같이 오만불손한 사람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은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작게 여겨야 합니다. 모든 것이 받은 것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농부의 마음은 겸손합니다. 이를테면 아무리 수고해봐도 바람 한번 잘못 불고, 비만 한번 잘못 내리면 한순간에 농사를 망칩니다. 그래서 농부는 늘 자연 앞에 겸손합니다. 요즘에는 기계로, 과학적으로 운운하면서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합니다마는 자연의 섭리 앞에 함부로 나댈 것이 아닙니다. 지각이 들어야 합니다.
인간의 문제, 도덕의 문제, 존재의 문제에 이르러 꼼짝없이 걸리고 마는 그따위 교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마땅히 겸손해져야 합니다. 샛바람 한줄기에도 겸손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만이 감사할 줄 압니다. 셋째는 소망과 믿음이 있을 때에 감사합니다. 미래가 없고야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감사'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 2절, 2장 13절, 3장 9절에서 거듭 말씀하고, 5장 18절에 가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못박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바랍니까? 역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이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별난 보답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하고 베풀었으니 너희는 기뻐하고 감사하라----이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셨고, 은총을 주셨고, 먼저 사랑하셨고, 그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그 엄청난 값을 치르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로 당신의 자녀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하라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을 인하여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그 선택적 역사에 대하여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선물입니다. 분명 은사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소망은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그날'을 바라볼 수 있는 확실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절망 없이 낙심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믿음을 주셔서 믿음으로 역사하게 하십니다. 사랑을 주셔서 기쁨으로 수고하게 하십니다. 소망을 주셔서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인내하게 하십니다. 소망 없이는 결코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소망을 주셔서 잘 참고 견디도록 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울의 여러 편지 가운데에 감사에 대한 언급이 수없이 나옵니다마는 놀라운 것은 물질, 건강, 성공, 부유, 풍요, 풍년에 대한 감사가 없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환난과 핍박 속에 있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 예수를 믿었고 고난 가운데서 믿음을 지켜나갔습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에서도 똑같은 것을 느낍니다. 비록 건강은 잃어버렸지만 소중한 믿음을 얻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였으나 그 때문에 참으로 소중한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하여 절망합니다. 바라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우리는 하늘나라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믿음을 주신 하나님, 사랑을 주신 하나님, 약속과 소망을 주신 하나님, 그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제 귀한 사진을 한 장 얻었습니다. 얼마 전 북녘 땅 신의주에서 교인들이 가정에 모여 예배드리는 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20여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인도자도 없고 성경은 한 권뿐입니다. 공책에다 손수 베낀 성경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교회들이 신의주에만 열 한 군데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은 545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라고 합니다.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그들은 죽기를 한하고 예배드리고 찬송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다음으로 많이 부르는 찬송은 431장의 '내 주여 뜻대로'라고 합니다. 특별히 재미있는 것은 이 '내 주여 뜻대로'의 가사를 김일성 찬가 곡조에 맞추어서 부른다는 것입니다. 누가 지나가다 밖에서 들으면 영락없이 '김일성 찬가' 부르는 것으로 압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얼마나 읽었던지 이사야서를 몽땅 외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목숨걸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감사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할말 있습니까? 우리가 할말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더는 불평하지 맙시다. 어차피 한번 살고 떠나야 할 세상, 이만큼으로 살았으면 되었지 않습니까? 더는 욕심내지 마십시다. 더는 원망하지 마십시다. 세상사 대충 해두십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할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잔이 넘칩니다. 이대로 끝난다 해도 괜찮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다. 있는 것에 감사하고 받은 것에 감사하십시다. 확실한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기에 감사하십시다.
「실락원」을 쓴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이 마흔네 살에 실명(失明)했을 때, 그 순간에마저 그는 귀한 한마디를 시로 남깁니다.
주께서 내 육안(肉眼)을 어둡게 하심으로 주님만을 뵐 수 있는 심안(心眼) 열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비록 물질적인 것은 없으나 영적인 것을 얻었습니다. 순간적인 것은 잃었으나 영원한 것을 얻었습니다. 세속적인 것은 다 잃었으나 확실하고 영원한 가치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마는 이는 원래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게서 유래합니다. 청교도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첫해에 곡식을 거둬들여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날이 시초가 되어서 지금의 감사절이 있게 된 것입니다. 1620년 12월 26일, 미국 동북부 플리머스(Plymouth)에 상륙한 146명의 청교도는 상륙 즉시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180톤밖에 안 되는 작은 배이지만 그들은 배를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 배의 속력은 평균시속 2마일 이어서 어떤 때에는 걷는 것보다 느립니다. 그러나 117일 간을 항해하여 무사히 약속의 땅 아메리카에 도착한 것을 감사합니다. 항해 중에 두 명이 죽었지만 한 명의 아기가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큰 돛까지 부러질 정도의 풍랑을 만났으나 파선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고, 여자 몇이 물결에 휩쓸려서 실종되었으나 구출된 것에 감사하고, 원주민의 방해로 한 달여 항구를 배회했으나 마침내 호의를 얻어 무사히 상륙한 것을 감사하고, 삼 개월 반 동안의 고통스런 항해에도 고향으로 되돌아가자고 원망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을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항해에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해도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고 주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감사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감사야말로 가장 생산적인 은혜요 최대의 전도입니다. 불평과 원망 속에서 전도해봐야 헛일입니다. '나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나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쁩니다'---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이 한마디가 으뜸의 전도가 됩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웅변입니다. 보십시오. 원망하면서 가르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 문을 엽니다.
자녀 교육을 잘하고 싶습니까? 자녀에게 고맙다고 하십시오. 남편의 마음을 열고 싶습니까? 바가지나 긁는다고 되지 않습니다. 고맙다고 해보십시오.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대의 설교가 됩니다. 또한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이 한마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제 조건을 따져 묻지 맙시다. 조건을 기다리지도, 환경이 변화할 것을 기다리지도 맙시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선적으로 감사하고 절대적으로 감사합시다. 우리의 생이 다하도록 감사하고 생이 끝나는 그 순간에도 감사할 것입니다. 감사의 은혜가 어두운 세상을 거뜬히 이기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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