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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여호수아 14장 6절~12절)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겁이 없다는 것과 용기가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때로 겁없는 사람을 봅니다. 알고보면 겁없이 날뛰는 것은 대체로 무식과 무지와 고집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 고집은 절대로 용기가 아닙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탓에 겁이 없는 것입니다. 겁없는 사람, 참 바보스러운 사람입니다. 이에 반하여 용기란 참된 지식과 충분한 이해에서 비롯 됩니다. 미래에 될 일까지 알고 용기를 가질 수 있을 때에 그 용기는 참용기가 됩니다. 참용기에는 확실한 믿음을 근거로 한 적극적 의지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충분히 행복하고, 또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날을 생각해보십시다.
나이 많은 분들은 흔히 옛날 이야기를 잘합니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 "그때는 행복했는데"라고 말합니다마는 실인즉 그 당시에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다음에 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이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젊은 사람들은 그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그런데 불평이 많습니다. 하기야 나이든 사람들도 젊었을 때에는 불평도 원망도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보면 건강한 사람은 그 건강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젊은 사람은 그 젊음으로 충분히 행복한 것입니다. 성공이건 실패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여건 하에서 삽니다마는 자신이 지닌 그 행복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능력이 없다고 스스로 개탄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지혜의 고귀한 가치를 모르고 있어서입니다. 간혹 "나는 그 일을 못한다"라고 말합니다마는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일이 나와 상관이 없을 뿐입니다.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소관이 아니기에 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못한다고 해서, 안한다고 해서 그가 무능한 것이 아닙니다. 가령, 음악을 못한다고해서 그 사람이 무능한 사람입니까? 운동을 못한다고 해서 무능하다 할 것입니까? 무엇을 좀 못한다고 해서 무능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이 나와 상관없을 뿐이요 내게는 다른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보십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은 시시하다고 안 합니다. 또 할 수 없는 일은 못하니까 못합니다. 다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은 '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총력을 쏟아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절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릇 절망이란 지금껏 자기 능력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처음부터 내 능력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자기평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디 사람은 내 능력, 내 지혜로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무엇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쉽사리 절망합니다마는 이것은 자신에 대한 교만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불신앙으로 절망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어서 절망합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거의가 자기 능력을 오판하거나 자기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도 '힐튼 호텔'이 있습니다마는 호텔왕 콘라드 힐튼이 참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5달러짜리의 평범한 쇠막대를 들어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두면 아무 쓸모 없는 싸구려 쇠막대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쇠막대로 말발굽을 만들면 10달러 50센트를 벌 수 있고, 바늘을 만들면 3천 2백 50달러를 벌 수 있으며, 용수철을 만들면 250만 달러를 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원자재가 부족합니까? 아직도 가능성이 없습니까? '나'라고 하는 원자재를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가진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라고 하는 원자재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갈렙, 그의 나이는 여든 다섯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복 성업을 종료하려는 이 시점에서 끝으로 남은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먼저 헤브론 산지에 대하여 생각해보십시다. 헤브론은 그 옛날 아브라함이 살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토록 자기 땅을 소유한 적이 없었습니다마는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하여 막벨라 굴을 삽니다. 그래서 막벨라 굴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이 묻혔고 그 아내들인 사라, 리브가, 레아가 묻혔습니다. 다시 말하여 막벨라 굴이 있는 헤브론 산지는 믿음의 조상들, 즉 자신의 조상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또한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의 역사로 말하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맨 먼저 헤브론을 도읍으로 잡아 7년 동안 그 일대를 다스립니다.
그 다음에야 예루살렘으로 도읍을 옮겨서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고도(古都)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산지입니다. 전쟁하기에 아주 불리하고 요새가 많습니다. 특별히 성경에 보면 아낙 자손이 있다고 합니다. 본디 아낙 자손은 체구가 큰 반면 이스라엘 자손은 체구가 작습니다.
불신앙적인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에 갔다와서 보고하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아낙 자손들이 많이 사는데 가서 그들과 마주 서보니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았습니다."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헤브론은 이들 아낙 자손들의 본거지입니다. 체격이 큰 장사들이 있는 그 성을 어떻게 쳐들어가겠다는 것입니까? 갈렙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나이 여든 다섯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헤브론 산지를 내게 주소서. 내가 가서 점령하겠습니다." 놀라운 배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물러나 쉴 나이도 되었습니다. 쉬고 싶은 나이입니다. 가능하면 쉬운 일을 쉽게 처리하고 싶은 때입니다. 또한 이제 편안한 일을 분배받을만한 권리도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서 가나안 정복에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여호수아가 선두에 섰고 갈렙은 바로 뒤를 따르는, 두 번째 서열의 사람입니다. 갈렙, 그는 나이도 많고 두 번째 서열의 사람이므로 가장 좋은 땅, 가장 쉬운 일을 분배받을 수 있는 당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쉬운 일을 바라지 않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마무리하는 상징적 도성, 그 마지막으로 남은 곳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어려운 일을 맡겨달라고 합니다. 이 용기, 높이 평가해야 할 참 용기입니다.
현대인은 너무 쉬운 일만 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요샛 사람들을 보면 너무도 쉽게들 살려고 합니다. 혹 돈은 쉽게 벌 수 있을는지 몰라도 행복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행복은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만사를 쉽게쉽게 합니다.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쉽게 하려고만 듭니다. 큰 잘못입니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우리 나라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성인병이 많다고 합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한창 밖에서 뛰놀아야 할 아이들이 텔레비전 앞에 가만히 앉아 전자오락이나 즐기고 있으니 당연하지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심지어 노인까지도 움직여야 합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나약해지게 마련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성인병이라니 말이 됩니까?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제가 미국에 갔을 때에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유학생을 만났습니다.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냐고 했더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합니다. 공부하는 것이 아주 쉽답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대학 들어갈 때 삼수(三修)를 했습니다. 워낙 기초를 잘 닦아놓아서 여기서 공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녀가 대학입시 때문에 고생하는 것 안타까워하지 맙시다. 실컷 고생하도록 놔둡시다. 어차피 농사 지으면서 고생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부모들을 보면 아들을 군에 보내기 싫어서, 편하게 지낼 방위는 안되나 합니다. 왜 방위로 보냅니까? 진짜 군대에 들어가야 합니다. 고생 좀 시켜야 합니다. 고생 많이 해둘수록 나중에 좋습니다. 자식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이 자녀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아시다시피 세계적으로 뭇사람의 존경을 두루 에누리없이 받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존경받게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링컨 대통령은 껄껄 웃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더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실패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참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야구왕'이라 불리는 베이브루스는 생전에 714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1976년까지는 그가 최고의 홈런기록 보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714개의 홈런을 날린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 그의 뼈아픈 실패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1330개의 스트럭 아웃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1330개라는 스트럭 아웃 --- 뼈아픈 이 실패의 기록을 바탕으로 714개의 홈런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실패 없는 성공은 자신에게도 불행한 것입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참된 용기는 숱한 실패로부터 얻어집니다. 너무 쉬운 일만 찾지 맙시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갈 때마다 오래 전에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나곤 합니다. 필라델피아 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 기숙사 방을 정할 때에는 먼저 온 사람에게 좋은 방이 주어집니다. 서로들 어느 방이 좋은지를 알고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면 누구나 햇볕이 잘 들고 계단에서 멀고 화장실에서 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위치의 방을 달라고 합니다. 어느 날, 일찍 온 한 학생에게 총무처장이 묻습니다. "자네는 어떤 방을 원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다 들어가고 남은 방 하나 있으면 주십시오." 총무처장은 적이 놀랐습니다. 이 일이 소문이 나서 총장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학생이 앞으로 어떻게 되나 보자'하며 총장은 그 어린 학생의 이름을 비망록에 적어두었습니다. 후에 그 학생은 그 대학의 총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디에서든 쉬운 일만 찾지 마십시오. 교회에 나와 자리를 잡아 앉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앉기 싫어하는 데를 골라서 앉으십시다. 그것만으로도 큰복을 받을 것입니다. 불편한 것,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찾는 마음가짐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어려운 일, 힘든 일은 내가 하겠다 --- 이런 마음에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내가 가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 팔십오 세의 갈렙은 지금 이렇게 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노인이지만 스스로 말한 대로 전쟁이나 출입에 건강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 정신, 신앙, 인격이 건강했습니다. 이 건강은 그의 헌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헌신적인 사람이 건강합니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거기에 정열을 기울입니다. 건강의 바탕이 그의 헌신에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적극적인 헌신입니다. 언제나 저 먼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부정적으로 본 일이 없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밥이다.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에 얻을 수 있다'하고 적극적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둘째, 희생적인 헌신이 있었습니다. 생명은 이미 하나님께 바친 바입니다. 살거나죽거나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신앙적 헌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네 발로 밟은 땅을 다 내가 네게 주겠노라." 그러므로 "이것은 받은 것이다"라고 그는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했고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마지막으로 남은 땅을 내게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으로 보고 듣고 행동하게 됩니다. 신앙적 헌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 순전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내 몫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좋은 일을 하다가도 내 명예, 내 지위, 나에게 돌아오는 이권을 챙기느라고 정신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은 거기서 넘어지고 맙니다. 기왕에 바치기로 한 것이니 깨끗이 바칩니다. 깨끗이, 순전히 헌신했습니다.
다섯째, 지속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이 또한 중요한 점입니다.
대개 한두 번은 해보지만 지속력이 없습니다. 지구력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신도 수가 고작 4-50명밖에 안될 때입니다. 유민철 장로님 댁에 모여 앉아서 예배드리던 시절입니다.
이미「소망교회」라고 이름을 지어놓고 있었는데, 그 무렵에 저는 어느 학교의 학장을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주일날 그저 설교만 하고 있을 뿐인데 참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교회가 될까, 안될까'하고 가끔 교인들이 찾아와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 이 교회 언제까지 할 것입니까?" "이렇게 하다가 큰 교회에서 오시라고 하면 가버리실 것입니까, 계속하실 것입니까?" "학장일 하실 것입니까, 교회일 하실 것입니까?" 제가 그때 똑같은 대답을 여러 번 했습니다. "당신도 보자하니 인생 절반이나 살아왔는데 아직도 왔다갔다하겠소? 여기서 끝내고 맙시다. 내가 죽으면 내 장례식 해주시고 당신이 죽으면 내가 장례식 해주리다. 여기서 끝내십시다." 이렇게 모여들어서 오늘의 「소망교회」가 이룩된 것입니다. 여러분, 혹 교회를 이리저리 옮겨보았습니까? 이제는 끝냅시다. 더는 왔다갔다할 것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이제는 꾸준하게 하십시다. 10년 이상 계속해보고 이야기합시다. 말만 많고 생각만 복잡하면 안됩니다. 모든 일에는 생명을 건 지속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내가 하나님 앞에 서약한대로 그대로 밀고나갈 것이요, 순전하고 지속적인 헌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섯째, 온전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본문 8절 9절 14절에서 거듭거듭 말씀합니다. "온전히 좇았으므로" "온전히 좇았은즉" "온전히 좇았음이며" --- 이것입니다. 온전한 헌신입니다. 이러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강건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강건의 비결이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헬렌 켈러도 말했습니다. '이론을 위한 용기는 풍부하나 실천을 위한 용기는 미흡하다.' 말함에는 용기가 있으나 행동함에는 용기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의 치명적 약점이 바로 무기력입니다. 자기실망이요 불신앙이요 교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 약속을 믿고 과거와 미래에도 신앙적 용기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1년에 25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4천 번 이상의 설교를 했습니다. 40년 간 꾸준히 그렇게 했습니다. 4O0권의 저서를 남기고, 10개 국어를 구사했으며, 83세가 되어서도 매일 15시간씩 글을 썼습니다. 86세 때 그는 하루에 두 번 정도밖에 설교할 수 없음을 두고 부끄러워했습니다. 또한 나이 때문에 5시 30분에 일어났는데 이를 두고 그는 일기장에 적고 있습니다. '5시 30분까지 누워 있는 게으른 죄를 자복합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보다 30분 일찍 일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3시간이나 일찍 일어났습니다. 늦잠 자고 건강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시간 한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지금이 어느 때인데 게으름을 피우면서 살아갑니까? 안일(安逸)을 바라지 맙시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헤브론을 정복할 것입니다.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 신앙의 가능성입니다. 이 용기는 바로 신앙에 있습니다. 순전한 헌신, 여기에 승리의 생활과 경건함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여호수아 14장 6절~12절)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겁이 없다는 것과 용기가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때로 겁없는 사람을 봅니다. 알고보면 겁없이 날뛰는 것은 대체로 무식과 무지와 고집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 고집은 절대로 용기가 아닙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탓에 겁이 없는 것입니다. 겁없는 사람, 참 바보스러운 사람입니다. 이에 반하여 용기란 참된 지식과 충분한 이해에서 비롯 됩니다. 미래에 될 일까지 알고 용기를 가질 수 있을 때에 그 용기는 참용기가 됩니다. 참용기에는 확실한 믿음을 근거로 한 적극적 의지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충분히 행복하고, 또 행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날을 생각해보십시다.
나이 많은 분들은 흔히 옛날 이야기를 잘합니다. "그때가 참 좋았는데" "그때는 행복했는데"라고 말합니다마는 실인즉 그 당시에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다음에 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이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젊은 사람들은 그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그런데 불평이 많습니다. 하기야 나이든 사람들도 젊었을 때에는 불평도 원망도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보면 건강한 사람은 그 건강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젊은 사람은 그 젊음으로 충분히 행복한 것입니다. 성공이건 실패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여건 하에서 삽니다마는 자신이 지닌 그 행복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능력이 없다고 스스로 개탄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지혜의 고귀한 가치를 모르고 있어서입니다. 간혹 "나는 그 일을 못한다"라고 말합니다마는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일이 나와 상관이 없을 뿐입니다.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소관이 아니기에 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못한다고 해서, 안한다고 해서 그가 무능한 것이 아닙니다. 가령, 음악을 못한다고해서 그 사람이 무능한 사람입니까? 운동을 못한다고 해서 무능하다 할 것입니까? 무엇을 좀 못한다고 해서 무능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이 나와 상관없을 뿐이요 내게는 다른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보십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은 시시하다고 안 합니다. 또 할 수 없는 일은 못하니까 못합니다. 다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은 '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총력을 쏟아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절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릇 절망이란 지금껏 자기 능력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처음부터 내 능력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자기평가를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디 사람은 내 능력, 내 지혜로만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무엇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쉽사리 절망합니다마는 이것은 자신에 대한 교만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불신앙으로 절망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어서 절망합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거의가 자기 능력을 오판하거나 자기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도 '힐튼 호텔'이 있습니다마는 호텔왕 콘라드 힐튼이 참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5달러짜리의 평범한 쇠막대를 들어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두면 아무 쓸모 없는 싸구려 쇠막대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쇠막대로 말발굽을 만들면 10달러 50센트를 벌 수 있고, 바늘을 만들면 3천 2백 50달러를 벌 수 있으며, 용수철을 만들면 250만 달러를 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원자재가 부족합니까? 아직도 가능성이 없습니까? '나'라고 하는 원자재를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가진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라고 하는 원자재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갈렙, 그의 나이는 여든 다섯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복 성업을 종료하려는 이 시점에서 끝으로 남은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먼저 헤브론 산지에 대하여 생각해보십시다. 헤브론은 그 옛날 아브라함이 살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토록 자기 땅을 소유한 적이 없었습니다마는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하여 막벨라 굴을 삽니다. 그래서 막벨라 굴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이 묻혔고 그 아내들인 사라, 리브가, 레아가 묻혔습니다. 다시 말하여 막벨라 굴이 있는 헤브론 산지는 믿음의 조상들, 즉 자신의 조상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또한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의 역사로 말하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맨 먼저 헤브론을 도읍으로 잡아 7년 동안 그 일대를 다스립니다.
그 다음에야 예루살렘으로 도읍을 옮겨서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고도(古都)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산지입니다. 전쟁하기에 아주 불리하고 요새가 많습니다. 특별히 성경에 보면 아낙 자손이 있다고 합니다. 본디 아낙 자손은 체구가 큰 반면 이스라엘 자손은 체구가 작습니다.
불신앙적인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에 갔다와서 보고하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아낙 자손들이 많이 사는데 가서 그들과 마주 서보니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았습니다."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헤브론은 이들 아낙 자손들의 본거지입니다. 체격이 큰 장사들이 있는 그 성을 어떻게 쳐들어가겠다는 것입니까? 갈렙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나이 여든 다섯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헤브론 산지를 내게 주소서. 내가 가서 점령하겠습니다." 놀라운 배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물러나 쉴 나이도 되었습니다. 쉬고 싶은 나이입니다. 가능하면 쉬운 일을 쉽게 처리하고 싶은 때입니다. 또한 이제 편안한 일을 분배받을만한 권리도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서 가나안 정복에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여호수아가 선두에 섰고 갈렙은 바로 뒤를 따르는, 두 번째 서열의 사람입니다. 갈렙, 그는 나이도 많고 두 번째 서열의 사람이므로 가장 좋은 땅, 가장 쉬운 일을 분배받을 수 있는 당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쉬운 일을 바라지 않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마무리하는 상징적 도성, 그 마지막으로 남은 곳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어려운 일을 맡겨달라고 합니다. 이 용기, 높이 평가해야 할 참 용기입니다.
현대인은 너무 쉬운 일만 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요샛 사람들을 보면 너무도 쉽게들 살려고 합니다. 혹 돈은 쉽게 벌 수 있을는지 몰라도 행복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행복은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이 점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만사를 쉽게쉽게 합니다.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쉽게 하려고만 듭니다. 큰 잘못입니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우리 나라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성인병이 많다고 합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한창 밖에서 뛰놀아야 할 아이들이 텔레비전 앞에 가만히 앉아 전자오락이나 즐기고 있으니 당연하지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심지어 노인까지도 움직여야 합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나약해지게 마련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성인병이라니 말이 됩니까?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제가 미국에 갔을 때에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유학생을 만났습니다.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냐고 했더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합니다. 공부하는 것이 아주 쉽답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대학 들어갈 때 삼수(三修)를 했습니다. 워낙 기초를 잘 닦아놓아서 여기서 공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녀가 대학입시 때문에 고생하는 것 안타까워하지 맙시다. 실컷 고생하도록 놔둡시다. 어차피 농사 지으면서 고생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부모들을 보면 아들을 군에 보내기 싫어서, 편하게 지낼 방위는 안되나 합니다. 왜 방위로 보냅니까? 진짜 군대에 들어가야 합니다. 고생 좀 시켜야 합니다. 고생 많이 해둘수록 나중에 좋습니다. 자식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이 자녀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아시다시피 세계적으로 뭇사람의 존경을 두루 에누리없이 받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존경받게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링컨 대통령은 껄껄 웃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더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실패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참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야구왕'이라 불리는 베이브루스는 생전에 714개의 홈런을 날렸습니다. 1976년까지는 그가 최고의 홈런기록 보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714개의 홈런을 날린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 그의 뼈아픈 실패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1330개의 스트럭 아웃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1330개라는 스트럭 아웃 --- 뼈아픈 이 실패의 기록을 바탕으로 714개의 홈런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실패 없는 성공은 자신에게도 불행한 것입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참된 용기는 숱한 실패로부터 얻어집니다. 너무 쉬운 일만 찾지 맙시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갈 때마다 오래 전에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나곤 합니다. 필라델피아 대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 기숙사 방을 정할 때에는 먼저 온 사람에게 좋은 방이 주어집니다. 서로들 어느 방이 좋은지를 알고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이면 누구나 햇볕이 잘 들고 계단에서 멀고 화장실에서 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위치의 방을 달라고 합니다. 어느 날, 일찍 온 한 학생에게 총무처장이 묻습니다. "자네는 어떤 방을 원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다 들어가고 남은 방 하나 있으면 주십시오." 총무처장은 적이 놀랐습니다. 이 일이 소문이 나서 총장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학생이 앞으로 어떻게 되나 보자'하며 총장은 그 어린 학생의 이름을 비망록에 적어두었습니다. 후에 그 학생은 그 대학의 총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디에서든 쉬운 일만 찾지 마십시오. 교회에 나와 자리를 잡아 앉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앉기 싫어하는 데를 골라서 앉으십시다. 그것만으로도 큰복을 받을 것입니다. 불편한 것,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찾는 마음가짐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어려운 일, 힘든 일은 내가 하겠다 --- 이런 마음에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내가 가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 팔십오 세의 갈렙은 지금 이렇게 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노인이지만 스스로 말한 대로 전쟁이나 출입에 건강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 정신, 신앙, 인격이 건강했습니다. 이 건강은 그의 헌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헌신적인 사람이 건강합니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거기에 정열을 기울입니다. 건강의 바탕이 그의 헌신에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적극적인 헌신입니다. 언제나 저 먼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부정적으로 본 일이 없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밥이다.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에 얻을 수 있다'하고 적극적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둘째, 희생적인 헌신이 있었습니다. 생명은 이미 하나님께 바친 바입니다. 살거나죽거나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신앙적 헌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네 발로 밟은 땅을 다 내가 네게 주겠노라." 그러므로 "이것은 받은 것이다"라고 그는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했고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마지막으로 남은 땅을 내게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으로 보고 듣고 행동하게 됩니다. 신앙적 헌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 순전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내 몫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좋은 일을 하다가도 내 명예, 내 지위, 나에게 돌아오는 이권을 챙기느라고 정신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은 거기서 넘어지고 맙니다. 기왕에 바치기로 한 것이니 깨끗이 바칩니다. 깨끗이, 순전히 헌신했습니다.
다섯째, 지속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이 또한 중요한 점입니다.
대개 한두 번은 해보지만 지속력이 없습니다. 지구력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신도 수가 고작 4-50명밖에 안될 때입니다. 유민철 장로님 댁에 모여 앉아서 예배드리던 시절입니다.
이미「소망교회」라고 이름을 지어놓고 있었는데, 그 무렵에 저는 어느 학교의 학장을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주일날 그저 설교만 하고 있을 뿐인데 참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교회가 될까, 안될까'하고 가끔 교인들이 찾아와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 이 교회 언제까지 할 것입니까?" "이렇게 하다가 큰 교회에서 오시라고 하면 가버리실 것입니까, 계속하실 것입니까?" "학장일 하실 것입니까, 교회일 하실 것입니까?" 제가 그때 똑같은 대답을 여러 번 했습니다. "당신도 보자하니 인생 절반이나 살아왔는데 아직도 왔다갔다하겠소? 여기서 끝내고 맙시다. 내가 죽으면 내 장례식 해주시고 당신이 죽으면 내가 장례식 해주리다. 여기서 끝내십시다." 이렇게 모여들어서 오늘의 「소망교회」가 이룩된 것입니다. 여러분, 혹 교회를 이리저리 옮겨보았습니까? 이제는 끝냅시다. 더는 왔다갔다할 것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이제는 꾸준하게 하십시다. 10년 이상 계속해보고 이야기합시다. 말만 많고 생각만 복잡하면 안됩니다. 모든 일에는 생명을 건 지속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내가 하나님 앞에 서약한대로 그대로 밀고나갈 것이요, 순전하고 지속적인 헌신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섯째, 온전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본문 8절 9절 14절에서 거듭거듭 말씀합니다. "온전히 좇았으므로" "온전히 좇았은즉" "온전히 좇았음이며" --- 이것입니다. 온전한 헌신입니다. 이러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강건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강건의 비결이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헬렌 켈러도 말했습니다. '이론을 위한 용기는 풍부하나 실천을 위한 용기는 미흡하다.' 말함에는 용기가 있으나 행동함에는 용기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의 치명적 약점이 바로 무기력입니다. 자기실망이요 불신앙이요 교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 약속을 믿고 과거와 미래에도 신앙적 용기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1년에 25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4천 번 이상의 설교를 했습니다. 40년 간 꾸준히 그렇게 했습니다. 4O0권의 저서를 남기고, 10개 국어를 구사했으며, 83세가 되어서도 매일 15시간씩 글을 썼습니다. 86세 때 그는 하루에 두 번 정도밖에 설교할 수 없음을 두고 부끄러워했습니다. 또한 나이 때문에 5시 30분에 일어났는데 이를 두고 그는 일기장에 적고 있습니다. '5시 30분까지 누워 있는 게으른 죄를 자복합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보다 30분 일찍 일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3시간이나 일찍 일어났습니다. 늦잠 자고 건강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시간 한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지금이 어느 때인데 게으름을 피우면서 살아갑니까? 안일(安逸)을 바라지 맙시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헤브론을 정복할 것입니다.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 신앙의 가능성입니다. 이 용기는 바로 신앙에 있습니다. 순전한 헌신, 여기에 승리의 생활과 경건함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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