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원망하지 말라(민수기 14장 1절~12절)

by 【고동엽】 2024. 8. 1.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원망하지 말라(민수기 14장 1절~12절)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사회심리학에 '원인귀속(原因歸屬)'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퍽 뜻깊은 용어입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은 하나의 결과로서 그 전후에 보이지 않는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를 가리켜 인과율(因果律)이라고 합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행복한 일에 대해서는 원인을 생각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네가 이렇게 행복한데 이 행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어떻게 되어서 내가 평안하고 복되게 살아가고 있는가 ---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반면 불행할 때에, 아플 때에, 실패할 때에, 고통을 당할 때에는 원인을 곧잘 생각합니다. 그 원인을 어디로든지 돌려보려고 애씁니다. 결과에는 정확한 사실이라고 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믿든 믿지 않든 간에 한 사건에는 엄연한 원인이 있습니다. 문제는 사건에 대한 원인을 원인 그대로 깨닫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데에 원인을 돌리는 것입니다. 지극히 사회심리학적인 문제입니다. 원인을 어디로 돌리느냐 --- 바로 이 원인귀속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원인을 나 자신에게 돌릴 때에는 후회가 따릅니다.

이것은 내 잘못이다, 그때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더 열심히 할 것을,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미 사건은 굳었습니다. 심어놓은 것이니 거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원인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결과는 부득불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는 후회라고 하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런가하면 원인을 나 아닌 다른 사람, 이웃에게 귀속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에는 원망이 나옵니다. 누구 때문에 내 생이 망쳐졌다, 누구 때문에 내 팔자가 이 모양이 되었다, 아무개가 원수다 하면서 늘 원망합니다. 이것은 증오로 이어집니다. 일생을 두고 이를 갑니다. 말끝마다 원수, 원수하며 삽니다. 원인을 나 아닌 이웃에게 귀속시키는 사람 --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과 대항할 수 있습니까? 어림없습니다. 어느 장군이 전쟁준비를 잘하였는데 당일에 그만 비가 와버리는 바람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잔뜩 화가 난 장군은 "비를 오게 한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졌다. 하나님을 향해서 화살을 쏘아라!" 하고 장병들에게 명령했습니다. 하늘을 향해서 쏜 화살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되돌아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습니다. 결코 하나님께 대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원인을 귀속시키는 순간, 두려움과 공포와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떨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원인을 사회로 돌리는 것입니다. 어느 개인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 전체적인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사회를 탓합니다. 혁명을 일으키자는 혁명철학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좋아합니다. 내가 잘못된 것은 다른 사람 탓이고 다른 사람의 잘못은 그 사람 자신의 탓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나의 불행은 그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고 남에게 있는 것이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의 성격 탓이며 그들이 게으르고 악하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귀속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성향입니다. '나는 항상 선하다, 다른 사람이 나쁘다, 나는 피해자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좀더 나아가 이 사회가 부정하다,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원망으로 이어집니다.

미국의 한 청년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성격이 아주 못되고 포악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습니다. 동생과는 달리 이 형은 공직에서 많은 수고를 하고 있고 나라를 위하여 큰공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은 처형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가엾은 동생을 살려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지사(州知事)를 찾아가 통사정하고 탄원서를 만들어 이곳저곳 애걸하고 다녔습니다. 형의 지극한 정성으로 마침내 주지사로부터 사면장을 받아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동생을 면회하러 달려갔습니다. "만약에 네가 사면되어 이 옥문을 나가게 된다면 앞으로 무엇을 하겠느냐?" 사면장을 주머니에 감춰둔 채 동생을 보고 물었습니다. "제일 먼저 나를 체포해서 이 감옥에 처넣은 형사놈을 죽이겠소. 그 다음에는 나를 재판한 재판장을 죽이고, 내게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들을 모조리 죽이겠소." 서슴없이 내뱉는 답변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은 말없이 눈물만 홀리며 사면장을 찢어버리고는 돌아서 나와버렸다고 합니다. 나의 잘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모든 불행의 원인을 남에게만 돌리며 증오하는 사람은 이 땅에 살아남을 자격이 없습니다.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추호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원망은 무책임한 자의 일입니다. 내게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책임 부정(否定)입니다. 나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책임을 부정합니다. 나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는 책임 부정, 바로 거기에 원망이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변명이 있고 게으름이 있고 폭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원망이라는 것은 상승작용을 합니다. 나의 조그마한 사건에 대해서 원망하다보면 형제를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까지 올라갑니다.

모든 원망은 하나님께 도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상승작용을 합니다.

또한 원망이라는 것은 확산 작용을 합니다. 자꾸 퍼져 나갑니다. 내가 저를 원망하면 저도 나를 원망합니다. 이웃과는 말할 것도 없고 내 사랑하는 자녀 앞일지라도 원망조로 탓하면서 꾸짖으면 교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간혹 자녀를 나무랄 때에 홧김에 "내가 너를 세상에 낳은 것부터가 잘못이다!"하고 말한 적은 없습니까? 오죽하면 그런 소리가 나왔겠습니까마는 자녀 쪽에서는 할말이 더 많습니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 뭣하러 날 낳아서 고생을 합니까? 제 자식 제가 키우면서 무슨 말이 많습니까?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내 탓입니까? 당신 탓이지요." 아마 부모 자식간에 맞대고 싸우기로 들면은 자녀 쪽이 훨씬 더 할말이 많을 것입니다. 원망은 또 다른 원망을 낳습니다. 원망조로 교훈 해봐야 아무 소용없고, 원망조로 부부싸움 해봐야 잿더미에 올라앉을 뿐입니다. 원망은 반드시 또 다른 원망을 낳습니다. 원망에 대한 응답은 또 다른 원망입니다. 원망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은 자기 소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하는 동안에 자기 정체를 잃어버리고 자기 존재를 잃어버립니다. 사회를 향하여 원망하며 사는 학생들, 공부 안 합니다. 공부를 안 했으니 결국 그 신세가 처량해집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원망하는 사람은 제 할 도리를 못합니다. 남편에 대해서 노상 원망만 하는 어느 부인에게 제가 한마디했습니다. "수십 년을 두고 그렇게 원망만 하고 살 바에는 아예 헤어지는 게 낫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헤어질 수야 없지요." "같이 살 작정이면 제발 좋게 사십시오." 생각해보십시오. 원망하느라 그 많은 정력, 그 많은 시간, 그 많은 감정을 다 허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원망하며 사는 사람처럼 바보스러운 사람이 없습니다. 똑같은 세월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낭비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자기 존재를 낭비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하나의 자살행위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나 있는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요 상징적인 사건이며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사백 년 동안 노예생활을 해온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마침내 구원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 그들은 얼마나 감격하였습니까? 출애굽의 감격을 어디에다 비교하겠습니까? 온 백성이 기뻐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격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감격이 두어 주일밖에 못 갑니다.

금세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이 원망을 사회심리학적으로 보면 원망이 체질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망도 자꾸 하면 버릇이 됩니다. 위치와 상황이 어떠하든 원망은 할수록 자꾸 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생각으로는 가난한 사람에게 원망이 많을 것 같습니까? 부한 사람에게 원망이 더 많습니다. 가난한 집 자녀들이 원망이 적고 오히려 부잣집 자녀들이 원망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현실을 솔직히 토론해봅시다.

자동차가 없는 분들은 '자동차 한 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자동차를 갖지 못한 데에 대한 원망이 많고 불평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자동차를 마련하게 되면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가끔씩 '초보운전'이라고 써 붙여놓고 운전하는 사람을 보면 꽤나 기분 좋아합니다. 운전은 잘하지 못하면서 기분은 좋은가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얼마 가지 못합니다. 어느새 더 좋은 차를 타지 못하는 것에 불평이 생깁니다. 다른 차들은 가파른 언덕길도 쌩쌩 잘 올라가는데 내 차는 헐떡헐떡하며 겨우 올라갑니다. "에잇, 빌어먹을 고물차!" --- 원망과 불평이 터집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원망은 하나의 체질입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항상 원망하나 감사하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습관화하여버린 원망은 으레 집단화합니다. 원망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원망이 더 부풀립니다. 집단성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원망이 집단화한 다음에는 폭력화합니다. 본문말씀에도 이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1절)." 밤새도록 통곡을 하였으니 얼마나 원망하였겠습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다못해 마지막에는 모세를 죽이자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이 모세 때문이니 모세를 죽이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 이렇게 폭력화, 집단화해 가는 것입니다.

원망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원망하는 사건치고도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까지 왔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정탐꾼을 보냈다는 사실부터가 불신앙적입니다.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선히 여겨 너희 중에서 매지파에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신 1:22,23)"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정탐꾼을 보내자고 자꾸 조르니까 하나님께서 부득이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실수입니다마는 도대체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이정표를 가지고 나왔습니까, 계획표가 있었습니까? 오로지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될 일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묵묵히 순종하면 될 터입니다.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무슨 쓸데없는 정탐꾼을 보내는 것입니까?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은 열두 사람으로 하여금 가나안땅을 탐지하도록 합니다.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온 그들이 이제 보고를 하는데 열 사람은 불신앙적인 보고를 하고 단 두 사람만이 신앙적인 보고를 합니다. 백성들은 신앙적인 보고는 받아들이지 않고 불신앙적인 보고,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서 밤새도록 통곡하는 것입니다. 원망이 충천하게 되었습니다. 불신앙적인 열 사람의 보고를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께 대한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그 말 중에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에 비하여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의 짤막한 보고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이 세 번이나 언급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점입니다. 불신앙적인 열 사람은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나 신앙의 사람은 긍정적으로 봅니다.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 밥이다, 우리 떡이다, 우리 레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다, 우리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무슨 말로도 고칠 수 없고 무슨 설명으로도 소용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하다못해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항상 비뚤어지게 보는 사람은 아마 배냇병신인가보다.' 중생밖에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신앙을 기초로 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이 불 신앙적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신 1:28)."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그들 앞에서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말합니다. 성은 높고 든든하니 어림도 없습니다, 저것은 아성(牙城)입니다, 못 쳐들어갑니다 ---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보고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봅니다. 깊은 면을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땅을 봅니다. 그런고로 가능하다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적인 열 사람은 용기를 잃어버리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까지 다 원망의 사람들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백성들을 타락시켰습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만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백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있습니다. 불 신앙적인 사람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목적의식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 하나님의 타이밍,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대한 신앙이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내가 기대하는 그 시간대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방법대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늘 조급하게 구하나 하나님은 저 뒤에 허락하시고, 나는 작은 것을 구하나 하나님은 큰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 놀라운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믿고 기다리고 소망해야 합니다.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소망의 문제입니다. 오늘 당장의 문제가 아니라 내일의 문제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소망을 모르는 사람은 참을 수 없습니다. 좀더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소위 '걸프전'이 한창일 때에 우리는 그 때문에 걱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걱정이 하나 생겼었습니다. 방송국 아나운서들이 길거리에 나와 젊은이들과 인터뷰하는 내용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전쟁이 났으니 정말 큰일입니다. 세계평화는 이루어져야 하며, 이 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각오해야 될 텐데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 이렇게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한쪽에서는 엄청난 전쟁의 희생을 치르고 있고, 평화를 지키려는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현장으로 나가고 있는 판국에 우리 젊은이들은 기름 값 올라간다고 투덜거리고 있습니다. 기껏 이런 생각에 그치고 있습니다. 세계가 불바다가 되느냐, 살아남느냐 죽어 없어지느냐 하는 판국에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대 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전쟁을 치러본 백성입니다. 40년 전에 불바다가 되었던 이 서울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자기 앞에 오는 손익이나 헤아리고 있으니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다 똑같습니다. 평화가 공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소망의 문제입니다. 한발 더 앞에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득불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버립니다. 미래의 영광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을 택합니다.

어리석게도 현재의 안일을 위하여 소중한 미래를 버리는 그런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토로하고 있는 불평들을 잘 보십시오. 현재의 고난 때문에 미래에 대한 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현재의 난관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많은 이적을 보여주셨는데도 다 까먹고 오늘까지 은혜 주신 것을 다 부정해버렸습니다. 도리어 왜 우리를 구원해냈느냐고 대들고 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현재의 시련 때문에 심지어는 과거로 돌아가자. 노예생활이 차라리 낫다고까지 합니다. 자유인으로 죽는 것이 낫지, 노예로 평생 사는 것이 낫습니까? 어찌 이렇게도 우매한 것입니까? 현재 중심, 물질 중심, 완전히 자기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불평을 한번 정리해봅시다. 열 가지 재앙을 엄연히 목격하고서 애굽을 빠져 나온 사람들이 앞에 홍해가 가로막히고 뒤에 애굽사람들이 쫓아오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 많은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광야에 이르러서는 공동묘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나와 죽이려 하느냐고 원망합니다. 물이 쓰다고 원망하고, 배고프다고 원망하고, 목마르다고 원망합니다. 만나를 내려주실 때에도 내일 만나를 주시지 않으면 어떡하느냐고 지레 원망합니다. 우상을 섬기면서 원망하고, 곤경이 심하다고 원망하고, 할 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알고 보면 다 시시하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원망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원망의 이유로 들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마는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 하는 자가 되리라(14:33)" --- 무서운 선고입니다. 40년, 이 원망하는 백성을 다스리는 데 40년이 걸립니다. 이 원망하는 백성들을 다 없애버리고 감사하는 백성으로 만든 후에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세계관(world view) 이 바뀌는 데 40년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누구를 미워합니까? 그 미워하는 마음을 고쳐서 사랑하기까지는 40년이 걸립니다. 학술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 남․북한이 서로 원수처럼 여기며 지내왔지만 이제는 동질감이니 통일이니 하는 이야기가 오고가고 있습니다. 40년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40년 동안을 광야에 머물게 하리라, 원망을 그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백성으로 만든 후에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리라 ---하나님의 마지막 선언입니다. 자기를 원망하지 말 것이요, 이웃을 원망하지 말 것이요, 사회를 원망하지 말 것이요, 지도자를 원망하지 말 것입니다. 이런 원망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결과가 됩니다. 이제 원망을 그치고, 큰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감사드릴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에 어떤 일을 당하든지 원망의 소리, 원망의 생각은 하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원망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많이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를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는 저 요단강을 분명히 열어서 우리에게 가나안땅을 마침내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원망하지 말라(민수기 14장 1절~12절)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사회심리학에 '원인귀속(原因歸屬)'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퍽 뜻깊은 용어입니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은 하나의 결과로서 그 전후에 보이지 않는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를 가리켜 인과율(因果律)이라고 합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행복한 일에 대해서는 원인을 생각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네가 이렇게 행복한데 이 행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어떻게 되어서 내가 평안하고 복되게 살아가고 있는가 ---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반면 불행할 때에, 아플 때에, 실패할 때에, 고통을 당할 때에는 원인을 곧잘 생각합니다. 그 원인을 어디로든지 돌려보려고 애씁니다. 결과에는 정확한 사실이라고 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믿든 믿지 않든 간에 한 사건에는 엄연한 원인이 있습니다. 문제는 사건에 대한 원인을 원인 그대로 깨닫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데에 원인을 돌리는 것입니다. 지극히 사회심리학적인 문제입니다. 원인을 어디로 돌리느냐 --- 바로 이 원인귀속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원인을 나 자신에게 돌릴 때에는 후회가 따릅니다.

이것은 내 잘못이다, 그때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더 열심히 할 것을,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미 사건은 굳었습니다. 심어놓은 것이니 거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원인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돌아오는 결과는 부득불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는 후회라고 하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런가하면 원인을 나 아닌 다른 사람, 이웃에게 귀속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에는 원망이 나옵니다. 누구 때문에 내 생이 망쳐졌다, 누구 때문에 내 팔자가 이 모양이 되었다, 아무개가 원수다 하면서 늘 원망합니다. 이것은 증오로 이어집니다. 일생을 두고 이를 갑니다. 말끝마다 원수, 원수하며 삽니다. 원인을 나 아닌 이웃에게 귀속시키는 사람 --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과 대항할 수 있습니까? 어림없습니다. 어느 장군이 전쟁준비를 잘하였는데 당일에 그만 비가 와버리는 바람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잔뜩 화가 난 장군은 "비를 오게 한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졌다. 하나님을 향해서 화살을 쏘아라!" 하고 장병들에게 명령했습니다. 하늘을 향해서 쏜 화살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되돌아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습니다. 결코 하나님께 대항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원인을 귀속시키는 순간, 두려움과 공포와 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떨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원인을 사회로 돌리는 것입니다. 어느 개인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 전체적인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사회를 탓합니다. 혁명을 일으키자는 혁명철학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좋아합니다. 내가 잘못된 것은 다른 사람 탓이고 다른 사람의 잘못은 그 사람 자신의 탓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나의 불행은 그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고 남에게 있는 것이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의 성격 탓이며 그들이 게으르고 악하기 때문이라고 원인을 귀속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성향입니다. '나는 항상 선하다, 다른 사람이 나쁘다, 나는 피해자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좀더 나아가 이 사회가 부정하다,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원망으로 이어집니다.

미국의 한 청년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성격이 아주 못되고 포악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습니다. 동생과는 달리 이 형은 공직에서 많은 수고를 하고 있고 나라를 위하여 큰공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형은 처형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가엾은 동생을 살려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지사(州知事)를 찾아가 통사정하고 탄원서를 만들어 이곳저곳 애걸하고 다녔습니다. 형의 지극한 정성으로 마침내 주지사로부터 사면장을 받아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동생을 면회하러 달려갔습니다. "만약에 네가 사면되어 이 옥문을 나가게 된다면 앞으로 무엇을 하겠느냐?" 사면장을 주머니에 감춰둔 채 동생을 보고 물었습니다. "제일 먼저 나를 체포해서 이 감옥에 처넣은 형사놈을 죽이겠소. 그 다음에는 나를 재판한 재판장을 죽이고, 내게 불리한 증언을 한 증인들을 모조리 죽이겠소." 서슴없이 내뱉는 답변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은 말없이 눈물만 홀리며 사면장을 찢어버리고는 돌아서 나와버렸다고 합니다. 나의 잘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모든 불행의 원인을 남에게만 돌리며 증오하는 사람은 이 땅에 살아남을 자격이 없습니다.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추호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원망은 무책임한 자의 일입니다. 내게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책임 부정(否定)입니다. 나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책임을 부정합니다. 나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는 책임 부정, 바로 거기에 원망이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변명이 있고 게으름이 있고 폭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원망이라는 것은 상승작용을 합니다. 나의 조그마한 사건에 대해서 원망하다보면 형제를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까지 올라갑니다.

모든 원망은 하나님께 도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상승작용을 합니다.

또한 원망이라는 것은 확산 작용을 합니다. 자꾸 퍼져 나갑니다. 내가 저를 원망하면 저도 나를 원망합니다. 이웃과는 말할 것도 없고 내 사랑하는 자녀 앞일지라도 원망조로 탓하면서 꾸짖으면 교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간혹 자녀를 나무랄 때에 홧김에 "내가 너를 세상에 낳은 것부터가 잘못이다!"하고 말한 적은 없습니까? 오죽하면 그런 소리가 나왔겠습니까마는 자녀 쪽에서는 할말이 더 많습니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 뭣하러 날 낳아서 고생을 합니까? 제 자식 제가 키우면서 무슨 말이 많습니까?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내 탓입니까? 당신 탓이지요." 아마 부모 자식간에 맞대고 싸우기로 들면은 자녀 쪽이 훨씬 더 할말이 많을 것입니다. 원망은 또 다른 원망을 낳습니다. 원망조로 교훈 해봐야 아무 소용없고, 원망조로 부부싸움 해봐야 잿더미에 올라앉을 뿐입니다. 원망은 반드시 또 다른 원망을 낳습니다. 원망에 대한 응답은 또 다른 원망입니다. 원망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은 자기 소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하는 동안에 자기 정체를 잃어버리고 자기 존재를 잃어버립니다. 사회를 향하여 원망하며 사는 학생들, 공부 안 합니다. 공부를 안 했으니 결국 그 신세가 처량해집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원망하는 사람은 제 할 도리를 못합니다. 남편에 대해서 노상 원망만 하는 어느 부인에게 제가 한마디했습니다. "수십 년을 두고 그렇게 원망만 하고 살 바에는 아예 헤어지는 게 낫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헤어질 수야 없지요." "같이 살 작정이면 제발 좋게 사십시오." 생각해보십시오. 원망하느라 그 많은 정력, 그 많은 시간, 그 많은 감정을 다 허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원망하며 사는 사람처럼 바보스러운 사람이 없습니다. 똑같은 세월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낭비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자기 존재를 낭비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하나의 자살행위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나 있는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요 상징적인 사건이며 계시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사백 년 동안 노예생활을 해온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마침내 구원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 그들은 얼마나 감격하였습니까? 출애굽의 감격을 어디에다 비교하겠습니까? 온 백성이 기뻐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격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감격이 두어 주일밖에 못 갑니다.

금세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이 원망을 사회심리학적으로 보면 원망이 체질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망도 자꾸 하면 버릇이 됩니다. 위치와 상황이 어떠하든 원망은 할수록 자꾸 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생각으로는 가난한 사람에게 원망이 많을 것 같습니까? 부한 사람에게 원망이 더 많습니다. 가난한 집 자녀들이 원망이 적고 오히려 부잣집 자녀들이 원망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현실을 솔직히 토론해봅시다.

자동차가 없는 분들은 '자동차 한 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자동차를 갖지 못한 데에 대한 원망이 많고 불평도 많습니다. 그러다가 자동차를 마련하게 되면 무척이나 기뻐합니다. 가끔씩 '초보운전'이라고 써 붙여놓고 운전하는 사람을 보면 꽤나 기분 좋아합니다. 운전은 잘하지 못하면서 기분은 좋은가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얼마 가지 못합니다. 어느새 더 좋은 차를 타지 못하는 것에 불평이 생깁니다. 다른 차들은 가파른 언덕길도 쌩쌩 잘 올라가는데 내 차는 헐떡헐떡하며 겨우 올라갑니다. "에잇, 빌어먹을 고물차!" --- 원망과 불평이 터집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원망은 하나의 체질입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항상 원망하나 감사하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습관화하여버린 원망은 으레 집단화합니다. 원망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원망이 더 부풀립니다. 집단성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원망이 집단화한 다음에는 폭력화합니다. 본문말씀에도 이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1절)." 밤새도록 통곡을 하였으니 얼마나 원망하였겠습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다못해 마지막에는 모세를 죽이자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이 모세 때문이니 모세를 죽이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 이렇게 폭력화, 집단화해 가는 것입니다.

원망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원망하는 사건치고도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까지 왔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정탐꾼을 보냈다는 사실부터가 불신앙적입니다.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선히 여겨 너희 중에서 매지파에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신 1:22,23)"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정탐꾼을 보내자고 자꾸 조르니까 하나님께서 부득이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실수입니다마는 도대체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이정표를 가지고 나왔습니까, 계획표가 있었습니까? 오로지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될 일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묵묵히 순종하면 될 터입니다.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무슨 쓸데없는 정탐꾼을 보내는 것입니까?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은 열두 사람으로 하여금 가나안땅을 탐지하도록 합니다.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온 그들이 이제 보고를 하는데 열 사람은 불신앙적인 보고를 하고 단 두 사람만이 신앙적인 보고를 합니다. 백성들은 신앙적인 보고는 받아들이지 않고 불신앙적인 보고,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서 밤새도록 통곡하는 것입니다. 원망이 충천하게 되었습니다. 불신앙적인 열 사람의 보고를 자세히 보십시오. 하나님께 대한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그 말 중에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에 비하여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의 짤막한 보고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이 세 번이나 언급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점입니다. 불신앙적인 열 사람은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나 신앙의 사람은 긍정적으로 봅니다.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 밥이다, 우리 떡이다, 우리 레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다, 우리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무슨 말로도 고칠 수 없고 무슨 설명으로도 소용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하다못해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항상 비뚤어지게 보는 사람은 아마 배냇병신인가보다.' 중생밖에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신앙을 기초로 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이 불 신앙적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신 1:28)."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그들 앞에서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말합니다. 성은 높고 든든하니 어림도 없습니다, 저것은 아성(牙城)입니다, 못 쳐들어갑니다 ---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보고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봅니다. 깊은 면을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땅을 봅니다. 그런고로 가능하다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적인 열 사람은 용기를 잃어버리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까지 다 원망의 사람들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백성들을 타락시켰습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만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백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있습니다. 불 신앙적인 사람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목적의식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 하나님의 타이밍,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대한 신앙이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내가 기대하는 그 시간대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방법대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늘 조급하게 구하나 하나님은 저 뒤에 허락하시고, 나는 작은 것을 구하나 하나님은 큰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 놀라운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믿고 기다리고 소망해야 합니다.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소망의 문제입니다. 오늘 당장의 문제가 아니라 내일의 문제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참을 수 있습니다. 소망을 모르는 사람은 참을 수 없습니다. 좀더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소위 '걸프전'이 한창일 때에 우리는 그 때문에 걱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걱정이 하나 생겼었습니다. 방송국 아나운서들이 길거리에 나와 젊은이들과 인터뷰하는 내용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전쟁이 났으니 정말 큰일입니다. 세계평화는 이루어져야 하며, 이 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각오해야 될 텐데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 이렇게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한쪽에서는 엄청난 전쟁의 희생을 치르고 있고, 평화를 지키려는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현장으로 나가고 있는 판국에 우리 젊은이들은 기름 값 올라간다고 투덜거리고 있습니다. 기껏 이런 생각에 그치고 있습니다. 세계가 불바다가 되느냐, 살아남느냐 죽어 없어지느냐 하는 판국에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대 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우리는 전쟁을 치러본 백성입니다. 40년 전에 불바다가 되었던 이 서울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자기 앞에 오는 손익이나 헤아리고 있으니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다 똑같습니다. 평화가 공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소망의 문제입니다. 한발 더 앞에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득불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버립니다. 미래의 영광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을 택합니다.

어리석게도 현재의 안일을 위하여 소중한 미래를 버리는 그런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토로하고 있는 불평들을 잘 보십시오. 현재의 고난 때문에 미래에 대한 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현재의 난관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많은 이적을 보여주셨는데도 다 까먹고 오늘까지 은혜 주신 것을 다 부정해버렸습니다. 도리어 왜 우리를 구원해냈느냐고 대들고 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현재의 시련 때문에 심지어는 과거로 돌아가자. 노예생활이 차라리 낫다고까지 합니다. 자유인으로 죽는 것이 낫지, 노예로 평생 사는 것이 낫습니까? 어찌 이렇게도 우매한 것입니까? 현재 중심, 물질 중심, 완전히 자기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불평을 한번 정리해봅시다. 열 가지 재앙을 엄연히 목격하고서 애굽을 빠져 나온 사람들이 앞에 홍해가 가로막히고 뒤에 애굽사람들이 쫓아오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 많은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광야에 이르러서는 공동묘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나와 죽이려 하느냐고 원망합니다. 물이 쓰다고 원망하고, 배고프다고 원망하고, 목마르다고 원망합니다. 만나를 내려주실 때에도 내일 만나를 주시지 않으면 어떡하느냐고 지레 원망합니다. 우상을 섬기면서 원망하고, 곤경이 심하다고 원망하고, 할 일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알고 보면 다 시시하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원망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원망의 이유로 들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마는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 하는 자가 되리라(14:33)" --- 무서운 선고입니다. 40년, 이 원망하는 백성을 다스리는 데 40년이 걸립니다. 이 원망하는 백성들을 다 없애버리고 감사하는 백성으로 만든 후에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세계관(world view) 이 바뀌는 데 40년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누구를 미워합니까? 그 미워하는 마음을 고쳐서 사랑하기까지는 40년이 걸립니다. 학술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 남․북한이 서로 원수처럼 여기며 지내왔지만 이제는 동질감이니 통일이니 하는 이야기가 오고가고 있습니다. 40년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40년 동안을 광야에 머물게 하리라, 원망을 그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백성으로 만든 후에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리라 ---하나님의 마지막 선언입니다. 자기를 원망하지 말 것이요, 이웃을 원망하지 말 것이요, 사회를 원망하지 말 것이요, 지도자를 원망하지 말 것입니다. 이런 원망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결과가 됩니다. 이제 원망을 그치고, 큰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을 감사드릴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에 어떤 일을 당하든지 원망의 소리, 원망의 생각은 하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원망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많이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를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는 저 요단강을 분명히 열어서 우리에게 가나안땅을 마침내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