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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사명을 마치려는 사람(사도행전 20장 17절~27절)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서 지난날을 미루어가며 자신에 관하여 자세하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심각하고 중요한 유언을 합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로, 그는 그 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교회를 섬겨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나고는 어쩌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할 형편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장로들을 불러 교회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계속하여 성심껏 섬겨야 한다고 밤새 당부의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사람은 경주자이다' ---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달려갈 길을 마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달려갈 길, 헬라어로 '드로몬'이라고 하는 이 말은 경기장에서 행해지는 하나의 경주를 의미합니다. 모름지기 경주에는 출발점이 있고, 코스가 있고, 종착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출발을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코스 또한 그것이 길건 짧건, 장애물이 있건 없건, 어떻게 놓여져 있건, 인생이라고 하는 경주, 이 주어진 운명은 바로 하나님께로서 부여받은 것입니다.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이 긴 경주의 종착점, 끝 날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정하신 바, 그 뜻하신 바대로 내가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어 16절에서는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라고 말씀합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것과 헬라와 히브리 두 문화권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이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의 사도로 처음부터 키워지게 한 섭리입니다. 그의 일생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이 경기는 매우 소중한 것이요 단 한번의 경기이니만큼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자된 자신을 생각합니다. 내게 사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요 동시에 사명을 받은 '나'라는 존재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해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요 아주 몹쓸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불러 쓰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명이 확실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를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요, 더욱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One way trip --- 우리는 분명히 단 한번가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 중요한 의미를 바로 알고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달려갈 길, 그 길을 마치려 함에'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종착점에 이른 것입니다. 인생을 마감하는 시점에 왔습니다. 내가 이 시점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케네디(Kennedy, John Fitzgerald)가 저격 당하기 전날 밤에 만찬회에서 행한 연설이 있습니다. 그 연설은 내용도 중요합니다마는 다음날로 세상을 떠났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연설 가운데서 이러한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개혁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개척자적인 자세로 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개척자가 되어야 합니다.' 파이어니어(pioneer) 정신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역사의 법정 앞에 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자리에서 네 가지의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어 그 네 가지의 질문을 차례로 언급합니다. '첫째, 당신은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살아온 지난 1년을 생각해봅시다. 참으로 용기 있게 살았습니까? 아니면 비겁하게 살았습니까? 타협해서는 안될 일에 타협했습니까? 굽혀서는 안될 일에 굽히며 너절하게 살았습니까? 아니면 당당하고 용기 있는 생을 살았습니까?' 하찮은 이득을 위하여 양심을 굽혔던 일은 없었는가 묻고 있습니다. '둘째, 현명한 판단을 했습니까?' 후회스러운 일은 없었는지를 묻습니다. '셋째, 당신의 일에 성실을 다했습니까?' 성실을 묻습니다.
the best -----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넷째, 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였습니까?' totally commit ----- 전적으로 헌신했느냐고 질문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만 합니다. 에머슨(Emer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된다고 해서 죽음을 원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이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단 하나의 길은 사명을 다하는 것뿐이다.' 참으로 일리 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어려서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지께서는 달구지를 끌고 나가기 위해서 소에 멍에를 매곤 하셨습니다.
달구지에 무거운 짐을 잔뜩 실어놓고 소를 끌어다 멍에를 얹으려고 하면 이놈이 눈치를 채고는 살짝 피합니다. 다시 끌어오면 또 돌아가 버립니다. 결국에는 한대 얻어맞은 다음에야 가만히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이 멍에를 들어 얹고 목줄을 맵니다. 제아무리 사나운 소라도 이제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발버둥쳐도 소용없습니다. 멍에를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주인이 지정한 목적지까지 달구지를 끌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도착한 다음에야 주인이 멍에를 벗깁니다. 이렇듯 우리도 맡겨진 사명을 다하는 길 말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유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의 철학에 대하여 확고한 기본자세가 있었습니다. 본문에도 나타나 있습니다마는 그는 이 사명을 다하고자 함에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로 비겁해지는 사람처럼 볼품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맙시다. 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얼마만큼 오래 살 수 있는 가도 묻지 맙시다. 우리는 생명의 문제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생명을 깨끗이 하나님께 위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용기 있고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바울은 생명에 조금도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죽고서는 문제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일이 참 많습니다. 명예가 더 소중하고 때로는 사명이 더 소중합니다. 그러나 간혹 기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봅니다. 이러면 죽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전파를 귀한 사명으로 여깁니다. 생명보다 훨씬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5절에서 볼 수 있듯이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내가 오늘도 수고한다고 합니다. 내게 주신 경륜,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회상하면서 장로들에게 부탁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첫째로, 겸손하게 했노라고 합니다.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나 함께 살아갈 때에 겸손했노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눈물로 살았노라고 합니다. 일생을 두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사랑한 그 넘친 정열을 의미합니다. 회개와 기도와 사랑 --- 그래서 항상 눈물이 있었습니다.
또한 셋째로, 인내했다고 자찬하고 있습니다. 유대사람의 간계를 묵묵히 참아냈습니다. 하필이면 동족인 유대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끈질기게 괴롭힙니다. 그러나 바울은 참았습니다. 교육적인 문제를 생각해서입니다. 몰라서 저러는 것이다, 언젠가 알게 되면 달라질 것이다 ----- 그래서 알려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육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래오래 참았습니다. 또한 선교적 이유로 참았습니다. 저 완악한 사람도 내가 구원해야 할 사람이다, 저 사람도 예수를 영접해야 할 사람이다, 주께서는 저 사람도 사랑하신다 ----- 선교적 이유로 끝내 참았습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애국적인 이유에서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절)."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동족이 예수 믿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내 동족이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지옥에 가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동족이 그를 괴롭히고 있어도 그들을 저주하지 못합니다. 끝까지 참습니다. 놀라운 인내였습니다.
넷째로, 그는 섬기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오직 주만을 섬겼다고 합니다. 사람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끝까지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주님만을 섬기고 살아왔습니다.
다섯째로, 그는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또한 여섯째로, 그는 순수성으로 충실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 플러스 알파가 있습니다. 수고를 다하고도 결코 보상을 바라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섬김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받는 기쁨밖에 모르는 사람은 유치한 사람이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섬기는 기쁨, 주면서 얻는 기쁨, 그 기쁨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주면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람입니다. 전혀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간혹 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봉사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늘상 문제입니다. 되돌려 받고자 하는 마음, 알아달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피곤해지고 급기야는 엉망이 되고 맙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처럼 행복한 인격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렇듯 수고하고도 땅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영광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칭찬이나 인정(認定)은 전혀 바라지 않고 오히려 저 앞에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앞에 순교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수고하고 마지막에 순교하는 것이 성도가 가는 길이요, 온갖 능욕을 받으며 죽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용감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일본의 학정에 견디다못한 청년들은 만주로 도망가서 독립군에 가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독립군에 입대하려면 세 가지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그 세 가지 질문이 이것입니다. 첫째, 당신은 총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둘째,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셋째, 얼어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 세 요건에 기꺼이 대답해야만 입대를 허락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를 따라야 하겠습니까? 아무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마음속에 진정한 행복과 용기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함에 다시 한번 헌신한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첫 동기로 돌아가 끝까지 복음 전하고 깨끗하게 생을 마치겠다는 것입니다.
바까스라고 하는 박사님이 의사의 진찰을 받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침통하게 말합니다. "당신의 생명은 이제 30분 남았습니다." 그러자 박사님은 그 불편한 몸으로 무릎을 꿇더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 남은 30분을 구원을 얻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바치겠습니다." 30분을 전세계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나더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마지막 1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다시 1년이 주어진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드릴 수 있겠습니까? 에반스라고 하는 목사님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장로들과 교인들이 목사님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거듭 쉬기를 권면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대답합니다. "녹슬어서 못쓰게 되기보다는 불태워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입니다 마는 저도 가끔 여기저기서 와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시간이 없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두어 시간 비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스케줄을 체크해보면 분명 두 시간 정도가 있는데 그 시간마저 달라고 합니다. 스스로도 좀 쉬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마는 제 비서도 너무 많이 나다닌다고 제발 좀 쉬라고 합니다. 그래 좀 쉬어야 하겠다, 시간이 없다고 거절을 할까 ---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속이 흔들립니다. 이런 때이면 나의 내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정 쉬고 싶다면 아주 푹 쉬게 해주마.'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푹 쉴 때가 옵니다. 가끔 건강을 위해서 쉰다고도 하지만 양심적으로 한번 자문해봅시다. 정말로 쉬는 것입니까, 아니면 게으른 것입니까? 시간을 앞에 두고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실명한 영국의 시인 밀턴(Milton, John)은 크롬웰(Cromwell)의 비서로 청교도혁명에도 참가하고 종교를 개혁하기 위하여 전심전력합니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크롬웰 장군은 죽고 맙니다. 밀턴도 정치범으로 몰려 사형수가 되었다가 간신히 석방되었습니다. 「실락원」을 쓸 무렵에 그는 완숙한 신앙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의 글 중에 이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내가 역경을 무릅쓰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보려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다리는 것이 더 위대한 믿음임을 깨달았다.' 여러분, 역경을 무릅쓰고 밀어붙이는 것, 고집을 부리면서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자신을 맡기고 자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더 위대한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믐쯤이 되어서야 지난 1년을 회상하고 반성하려 합니다. 이 때 반드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반성한다고 하다가 남을 비판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마주 앉아서 1년 동안 지내온 것을 반성합니다. 반성하다가는 서로 상대방 때문이라고 하며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성을 하려거든 단 한마디도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자신만을 비판해야 합니다. 모든 책임을 나 자신에게 돌리고 나만을 비판할 것입니다.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이 있다"는 등의 소리는 추호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성하려거든 자신만을 책망하십시오. 또한 자신을 책망하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반성하다가 종국에 가서는 '나는 구제불능이다'하고 절망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죄도 짓지 못한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위트 넘치게 말했습니다. 죄를 지으려고 할 때에 벼락이라도 내리치면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죄지은 것도 은혜요 죄를 짓고 살아남은 것도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구제불능인 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엄청난 은혜로 나를 감싸주십니다. 이 은총을 잊지 맙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반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종말론적인 내 모습을 보아야만 합니다.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고 지난 일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나된 본래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내가 세상에 났으며, 내가 살아온 지난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셨습니까? 오늘과 내일의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경륜하고 계신 것 같습니까? 그리고 그 하시는 일에 얼마나 충성을 다했습니까? 내 인생 경주, 종착점이 가까워온 이 시각에 내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 내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고 간증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애의 종착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헌신을 다짐하고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며 내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 사명을 다시금 확인해야 합니다. 새롭게 헌신하는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받은 사명을 마치려는 사람(사도행전 20장 17절~27절)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서 지난날을 미루어가며 자신에 관하여 자세하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심각하고 중요한 유언을 합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로, 그는 그 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교회를 섬겨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나고는 어쩌면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할 형편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장로들을 불러 교회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계속하여 성심껏 섬겨야 한다고 밤새 당부의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사람은 경주자이다' ---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달려갈 길을 마친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달려갈 길, 헬라어로 '드로몬'이라고 하는 이 말은 경기장에서 행해지는 하나의 경주를 의미합니다. 모름지기 경주에는 출발점이 있고, 코스가 있고, 종착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출발을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코스 또한 그것이 길건 짧건, 장애물이 있건 없건, 어떻게 놓여져 있건, 인생이라고 하는 경주, 이 주어진 운명은 바로 하나님께로서 부여받은 것입니다.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이 긴 경주의 종착점, 끝 날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정하신 바, 그 뜻하신 바대로 내가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어 16절에서는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라고 말씀합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것과 헬라와 히브리 두 문화권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이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의 사도로 처음부터 키워지게 한 섭리입니다. 그의 일생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이 경기는 매우 소중한 것이요 단 한번의 경기이니만큼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자된 자신을 생각합니다. 내게 사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요 동시에 사명을 받은 '나'라는 존재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해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요 아주 몹쓸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불러 쓰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명이 확실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를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이요, 더욱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One way trip --- 우리는 분명히 단 한번가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 중요한 의미를 바로 알고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달려갈 길, 그 길을 마치려 함에'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종착점에 이른 것입니다. 인생을 마감하는 시점에 왔습니다. 내가 이 시점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케네디(Kennedy, John Fitzgerald)가 저격 당하기 전날 밤에 만찬회에서 행한 연설이 있습니다. 그 연설은 내용도 중요합니다마는 다음날로 세상을 떠났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연설 가운데서 이러한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개혁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개척자적인 자세로 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개척자가 되어야 합니다.' 파이어니어(pioneer) 정신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역사의 법정 앞에 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자리에서 네 가지의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어 그 네 가지의 질문을 차례로 언급합니다. '첫째, 당신은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살아온 지난 1년을 생각해봅시다. 참으로 용기 있게 살았습니까? 아니면 비겁하게 살았습니까? 타협해서는 안될 일에 타협했습니까? 굽혀서는 안될 일에 굽히며 너절하게 살았습니까? 아니면 당당하고 용기 있는 생을 살았습니까?' 하찮은 이득을 위하여 양심을 굽혔던 일은 없었는가 묻고 있습니다. '둘째, 현명한 판단을 했습니까?' 후회스러운 일은 없었는지를 묻습니다. '셋째, 당신의 일에 성실을 다했습니까?' 성실을 묻습니다.
the best -----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넷째, 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였습니까?' totally commit ----- 전적으로 헌신했느냐고 질문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만 합니다. 에머슨(Emers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된다고 해서 죽음을 원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이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단 하나의 길은 사명을 다하는 것뿐이다.' 참으로 일리 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어려서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지께서는 달구지를 끌고 나가기 위해서 소에 멍에를 매곤 하셨습니다.
달구지에 무거운 짐을 잔뜩 실어놓고 소를 끌어다 멍에를 얹으려고 하면 이놈이 눈치를 채고는 살짝 피합니다. 다시 끌어오면 또 돌아가 버립니다. 결국에는 한대 얻어맞은 다음에야 가만히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이 멍에를 들어 얹고 목줄을 맵니다. 제아무리 사나운 소라도 이제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발버둥쳐도 소용없습니다. 멍에를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주인이 지정한 목적지까지 달구지를 끌고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도착한 다음에야 주인이 멍에를 벗깁니다. 이렇듯 우리도 맡겨진 사명을 다하는 길 말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자유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의 철학에 대하여 확고한 기본자세가 있었습니다. 본문에도 나타나 있습니다마는 그는 이 사명을 다하고자 함에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로 비겁해지는 사람처럼 볼품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맙시다. 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얼마만큼 오래 살 수 있는 가도 묻지 맙시다. 우리는 생명의 문제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생명을 깨끗이 하나님께 위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용기 있고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바울은 생명에 조금도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죽고서는 문제보다 더 소중한 일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일이 참 많습니다. 명예가 더 소중하고 때로는 사명이 더 소중합니다. 그러나 간혹 기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봅니다. 이러면 죽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전파를 귀한 사명으로 여깁니다. 생명보다 훨씬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5절에서 볼 수 있듯이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내가 오늘도 수고한다고 합니다. 내게 주신 경륜,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회상하면서 장로들에게 부탁하는 말을 들어봅시다. 첫째로, 겸손하게 했노라고 합니다.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나 함께 살아갈 때에 겸손했노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눈물로 살았노라고 합니다. 일생을 두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사랑한 그 넘친 정열을 의미합니다. 회개와 기도와 사랑 --- 그래서 항상 눈물이 있었습니다.
또한 셋째로, 인내했다고 자찬하고 있습니다. 유대사람의 간계를 묵묵히 참아냈습니다. 하필이면 동족인 유대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끈질기게 괴롭힙니다. 그러나 바울은 참았습니다. 교육적인 문제를 생각해서입니다. 몰라서 저러는 것이다, 언젠가 알게 되면 달라질 것이다 ----- 그래서 알려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육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래오래 참았습니다. 또한 선교적 이유로 참았습니다. 저 완악한 사람도 내가 구원해야 할 사람이다, 저 사람도 예수를 영접해야 할 사람이다, 주께서는 저 사람도 사랑하신다 ----- 선교적 이유로 끝내 참았습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애국적인 이유에서입니다.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절)."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동족이 예수 믿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내 동족이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지옥에 가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동족이 그를 괴롭히고 있어도 그들을 저주하지 못합니다. 끝까지 참습니다. 놀라운 인내였습니다.
넷째로, 그는 섬기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오직 주만을 섬겼다고 합니다. 사람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끝까지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주님만을 섬기고 살아왔습니다.
다섯째로, 그는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또한 여섯째로, 그는 순수성으로 충실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 플러스 알파가 있습니다. 수고를 다하고도 결코 보상을 바라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섬김의 기쁨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받는 기쁨밖에 모르는 사람은 유치한 사람이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섬기는 기쁨, 주면서 얻는 기쁨, 그 기쁨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주면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람입니다. 전혀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간혹 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봉사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늘상 문제입니다. 되돌려 받고자 하는 마음, 알아달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피곤해지고 급기야는 엉망이 되고 맙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처럼 행복한 인격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렇듯 수고하고도 땅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영광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칭찬이나 인정(認定)은 전혀 바라지 않고 오히려 저 앞에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앞에 순교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수고하고 마지막에 순교하는 것이 성도가 가는 길이요, 온갖 능욕을 받으며 죽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용감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일본의 학정에 견디다못한 청년들은 만주로 도망가서 독립군에 가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독립군에 입대하려면 세 가지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그 세 가지 질문이 이것입니다. 첫째, 당신은 총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둘째,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셋째, 얼어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 세 요건에 기꺼이 대답해야만 입대를 허락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를 따라야 하겠습니까? 아무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마음속에 진정한 행복과 용기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함에 다시 한번 헌신한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첫 동기로 돌아가 끝까지 복음 전하고 깨끗하게 생을 마치겠다는 것입니다.
바까스라고 하는 박사님이 의사의 진찰을 받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침통하게 말합니다. "당신의 생명은 이제 30분 남았습니다." 그러자 박사님은 그 불편한 몸으로 무릎을 꿇더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 남은 30분을 구원을 얻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바치겠습니다." 30분을 전세계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나더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마지막 1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다시 1년이 주어진다면 이제 무엇을 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약속드릴 수 있겠습니까? 에반스라고 하는 목사님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장로들과 교인들이 목사님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거듭 쉬기를 권면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대답합니다. "녹슬어서 못쓰게 되기보다는 불태워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죄송한 이야기입니다 마는 저도 가끔 여기저기서 와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시간이 없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두어 시간 비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스케줄을 체크해보면 분명 두 시간 정도가 있는데 그 시간마저 달라고 합니다. 스스로도 좀 쉬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마는 제 비서도 너무 많이 나다닌다고 제발 좀 쉬라고 합니다. 그래 좀 쉬어야 하겠다, 시간이 없다고 거절을 할까 ---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속이 흔들립니다. 이런 때이면 나의 내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정 쉬고 싶다면 아주 푹 쉬게 해주마.'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푹 쉴 때가 옵니다. 가끔 건강을 위해서 쉰다고도 하지만 양심적으로 한번 자문해봅시다. 정말로 쉬는 것입니까, 아니면 게으른 것입니까? 시간을 앞에 두고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실명한 영국의 시인 밀턴(Milton, John)은 크롬웰(Cromwell)의 비서로 청교도혁명에도 참가하고 종교를 개혁하기 위하여 전심전력합니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크롬웰 장군은 죽고 맙니다. 밀턴도 정치범으로 몰려 사형수가 되었다가 간신히 석방되었습니다. 「실락원」을 쓸 무렵에 그는 완숙한 신앙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의 글 중에 이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내가 역경을 무릅쓰고 무엇인가를 만들어보려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다리는 것이 더 위대한 믿음임을 깨달았다.' 여러분, 역경을 무릅쓰고 밀어붙이는 것, 고집을 부리면서 무엇인가를 이루어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자신을 맡기고 자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더 위대한 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믐쯤이 되어서야 지난 1년을 회상하고 반성하려 합니다. 이 때 반드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반성한다고 하다가 남을 비판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마주 앉아서 1년 동안 지내온 것을 반성합니다. 반성하다가는 서로 상대방 때문이라고 하며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성을 하려거든 단 한마디도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자신만을 비판해야 합니다. 모든 책임을 나 자신에게 돌리고 나만을 비판할 것입니다.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잘못이 있다"는 등의 소리는 추호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성하려거든 자신만을 책망하십시오. 또한 자신을 책망하되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반성하다가 종국에 가서는 '나는 구제불능이다'하고 절망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죄도 짓지 못한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위트 넘치게 말했습니다. 죄를 지으려고 할 때에 벼락이라도 내리치면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죄지은 것도 은혜요 죄를 짓고 살아남은 것도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구제불능인 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엄청난 은혜로 나를 감싸주십니다. 이 은총을 잊지 맙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반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종말론적인 내 모습을 보아야만 합니다.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고 지난 일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나된 본래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내가 세상에 났으며, 내가 살아온 지난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셨습니까? 오늘과 내일의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경륜하고 계신 것 같습니까? 그리고 그 하시는 일에 얼마나 충성을 다했습니까? 내 인생 경주, 종착점이 가까워온 이 시각에 내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 내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고 간증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생애의 종착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헌신을 다짐하고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며 내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 사명을 다시금 확인해야 합니다. 새롭게 헌신하는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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