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약속을 기다리는 자 (베드로후서 3장 8절~13절)

by 【고동엽】 2024. 7. 26.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약속을 기다리는 자 (베드로후서 3장 8절~13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리 약속대로 의(義)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한 여인이 결혼생활 10년만에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생활을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편의 사랑이 점점 식어지는 것 같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전화 한 통 없이 밤늦게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정성껏 저녁을 준비해놓고 기다립니다. 하지만 수고가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마침내 밤늦게 돌아오는 남편 기다리기에 지치고 맙니다. 자진하여 이혼을 해버리고 이제는 혼자 삽니다. 그러나 참 이상합니다. 저녁마다 마음이 허전합니다. 누군가가 꼭 올 것만 같습니다. 물론 올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는 이렇게 넋두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기다릴 사람이 있을 때가 좋았구나." 여러분, 공감이 가십니까? 못된 남편일지라도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기다릴 사람이 없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다릴 자격을 잃은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차라리 죽은 사람입니다. 기다리다 지쳐버린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기다릴 가치가 없는 일을 기다리는 사람은 허무한 사람이요 한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약속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은 많은 동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약속을 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사람만이 약속이 가능합니다. 약속된 미래와 그 약속을 기다리는 현재, 이 긴장관계 속에서 현재보다 약속된 미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인격자입니다. 여러분, 현재를 위하여 미래를 버려야합니까,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버려야 합니까? 학생들이 다가올 시험에 대비하여 공부를 합니다. 더구나 대입 학력고사를 앞둔 학생들을 보면 참으로 기특합니다. 무더운 여름 동안 머리를 싸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부를 합니다. 그들이라고 어찌 나가 놀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몇 달 후에 닥칠 일을 위하여 오늘을 참고 견디어냅니다. 내일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오늘의 이 고통을 참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내일 일은 내일하고 오늘은 놀고 보자"하면서 소중한 미래를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미래를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현재는 좀 괴로워도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저 앞에 약속된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 선생은 세상을 떠나면서 로마서 6장 18절을 무려 스물 다섯 번이나 외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저 앞에 너무도 즐겁고 귀한 약속이 있기에 지금의 이 고통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도 거듭 외었습니다. 외고 또 외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나는 어떤 유형의 사람입니까? 현재를 위하여 미래를 버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넉넉히 극복하는 미래지향적인 신앙의 사람입니까? 어느 쪽의 사람인가,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대상자와 그 약속, 그 소망, 그 기다림 자체를 즐기며 살아갈 수 있어야만 비로소 인간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제 2차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Auschwitz) 강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갇혀 있다가 끝내 가스실에서 무참히 학살당하고 맙니다. 그들이 갇혀 있던 지하실 벽에는 아직도 이러한 낙서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있다. 단지 그분의 도착이 좀 늦어지고 있을 뿐이다.'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그들은 이렇게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확실한 대망사상이 그들 생명의 뿌리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곧 약속입니다. 성경의 별명이 약속 아닙니까? 아시는 대로 성경전서, 즉 구약은 옛 약속이요 신약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거짓이 통하지 않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 의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의의 승리, 의의 실현 --- 이것을 보장하는 약속입니다.

또한 이 약속은 불가항력적인 은총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인자한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사랑의 아버지가 집을 나간 탕자를 사랑하듯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완전한 사랑, 창조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바로 사랑의 약속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반드시 사랑할만한 자로 만들고야 말 것이다 --- 적극적인 사랑의 약속입니다. 한편 이 약속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의 약속입니다. 세상이 다 거짓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반드시 반영될 것입니다. 그 약속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약속을 성취케 하는 능력이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약속은 부도수표가 아닙니다. 추상적 이론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약속에 대한 증거가 곧 성경의 역사입니다.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고 그대로 이루어지면서 또 다른 미래를 우리에게 약속해주십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보증하셨습니다. 이니셜(initial)로 사인을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약속대로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약속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 모든 인간의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며 절대적인 목적입니다. 필연적인 목적이며 결정적인 목적입니다.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이고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확증해주시는 약속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내용의 말씀이 수없이 나옵니다. 성경 주석가의 말에 따르면 신약성경에만도 무려 318번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따져보면 25절마다 한 번씩 말씀한 꼴이 됩니다. 한편 구약은 그 모든 말씀이 주님이 오시리라고 하는 데에 대한 약속입니다. 모든 말씀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약의 모든 말씀의 초점은 주님의 재림에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소위 메시야 대망사상에는 다분히 유대적이요 정치적이요 지역적이요 민족적이요 세속적인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이 성취된 확실한 증거 위에서 다시 저 미래를 향하여 재림을 약속할 때에는 우주적이요 종말론적이요 영원한 약속이 됩니다. 이 대망사상,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 마음속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오실 그 주님이 너무 더디 오시는 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2천 년 동안 그 문제로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학설이 분분합니다마는 이 시간에 그런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본문에 나타난 대로 이 지연(遲延)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그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시간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시간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시간을 단순히 시침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사건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건강할 때의 시간과 병들었을 때의 시간, 어느 쪽이 더 길게 느껴집니까? 건강할 때에는 하룻밤이 잠깐입니다.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날이 바뀌어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었을 때에는 하룻밤이 어찌나 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한 어렸을 때에는 '왜 이리 시간이 안가나, 얼른 커서 어른이 되었으면'하고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랍니다마는 마흔을 넘고, 쉰을 넘으면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1년이 하루 같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시간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으로 보면 하루가 천 년이고 천 년이 하루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시간 개념에서 시간을 이해하면 오늘의 이 지루한 시간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넓은 마음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 넓은 사랑 속에 인내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 바로 되기를, 구원받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말레이시아의 콸라룸푸르에 들러 그곳 오지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를 일부러 찾아가 만나보았습니다. 두어 시간 차를 몰고 산 속 깊숙이 들어가 보니 참 재미있는 것이 있습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 원주민들은 거의 벌거벗은 채 살았다고 합니다.

보기에 하도 민망하여 선교사가 제발 옷 좀 입어달라고 해서 어른들만 겨우 팬츠를 걸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집도 말만 집이지 원두막이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이부자리도 없습니다. 부엌도 없습니다. 밥그릇도 없습니다. 나무 열매를 따먹고 아무 데서나 자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선교사가 들어간 것입니다.

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예배를 드리는 중이었습니다. 얼마나 거룩해 보이는지 몰랐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이 땅에는 한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야 마침내 끝이 오리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에 세상 끝이 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복음을 받지 못한 민족, 복음을 전혀 들을 수 없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복음을 다 들을 때, 바로 그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마지막 -- 종말이 진정한 역사의 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개 종말이란 임시적이라 그 다음 그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마는 이것은 우주의 끝입니다. 다시는 회복할 길이 없고 뉘우치고 회개할 기회도 없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때이기에 더디 오고 있습니다. 구원의 날이요 동시에 심판의 날입니다. 구원받는 자에게는 초조하게 기다려지는 날이지만 심판받는 사람에게는 이토록 무서운 날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비하신 주님께서 그날을 지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번 실존적으로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 자신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대로 주님 앞에 가도 상관없겠습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고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고 끊어야 할 일이 있고 버려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생활이 거룩해지기를 안타깝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처럼 긴장된 기대 속에서 항상 준비하고 꾸준하게 그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칼뱅 선생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기다림 속에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문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 역사의 끝에 서 있는 우리가 이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먼저, 약속하신 자와 그 약속의 내용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거듭하여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자가 누구입니까? 그분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그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하여 깊이 상고하고 항상 새롭게 해야 합니다. 기다림 그 자체의 바른 뜻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다림 속에 선교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도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이것이 바로 오늘의 의미가 될 것6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거룩한 행실'로 그날을 준비하라고 말씀합니다. 소극적인 의미로는 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뜻이요, 적극적인 의미로는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끊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끊지 못한 일이 있습니까? 고쳐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직도 고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이제는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해야 합니다. 집중적으로 마지막을 위해서 무엇인가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경건함'으로 준비하라고 합니다. 이 경건은 감상이 아니요 행동을 말합니다. '유세베이아'라는 헬라어는 곧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행동적인 경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생활, 하나님 앞에서의 생각, 하나님 앞에서의 행동이 반드시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모하라'고 합니다. 사모한다 ---- 사랑을 담아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착점에 무관심한 것이 현대인의 가장 큰 결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세계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물질이 어떻고…… 하여간 골치가 아픕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우리의 생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어떤 모양으로 끝날 것 같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릴 때마다 저는 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마지막 설교가 생각납니다. 그가 멤피스에서 암살 당하기 직전에 한 설교로, 카세트 테이프가 없던 때라 레코드판에 녹음되어 있는 것을 저도 한 장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소중한 것을 이사 몇 번 다니면서 잃어버려 아직도 애석하기만 합니다. 아무튼 그 설교 내용 중에 제게 충격을 준말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장례식을 거행하면 조사(弔詞)를 하는 사람이 나와 그 죽은 사람이 살아서는 어떠 어떠한 사람이었다고 추모하게 됩니다. 킹 목사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그때 관속에 누워서 어떠한 말을 듣기 원하십니까?' 그리고는 자신이 그러한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 오직 이 한마디를 듣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요즘은 생각지도 않았던 돌발사고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불의에 사고로 생을 끝낸다고 하면 장례식을 인도하는 사람이 과연 당신을 어떻게 추모하겠습니까? 자녀들에게 비친 당신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이웃과 형제들에게 보여진 당신은 과연 어떠한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욕심 많은 사람이었지." "극성스럽게 살았지." 그럴 것입니까? 여러분은 무슨 말을 듣고 싶습니까? 바로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좀 잘살고 못살고 좀 잘되고 못되고 해봐야 다 시시합니다. 권좌에 앉아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앉아 보았자 별것도 아닐 것 같습디다. 돈도 그렇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저 미래에 주님 앞에서 과연 어떤 평가를 받게 되느냐입니다. 미래에 평가될 나, 오늘 내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이것뿐입니다. 종착점에 대한 깊은 관심, 잃어버린 관심을 다시 한번 찾아보십시다.

그리고 '바라라'라고 합니다. 소망을 합니다. 구체적으로 기다립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 온 세상이 아무리 곤두박질을 쳐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릴 뿐입니다. 요사이 저는 이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서울에 쓰레기를 처리할 데가 없어서 여기저기로 나누어 묻는다고 합니다마는 그러다가는 얼마 안 가서 온통 쓰레기 더미가 될 것 같습니다. 세상이 끝나기는 분명 끝나야 되겠습디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 하나만 보아도 종말이 가까워 옴을 느낍니다. 그러나 종말의 날은 끝이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새로운 날의 시작입니다. 호라티우스보나르라고 하는 박사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저녁에 커튼을 닫으면서 "주님, 오늘밤에 오실 것입니까?" 또 아침에 커튼을 열면서 "혹시 오늘인가요, 주님?"하면서 늘 그날을 대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말구유에 오신 주님, 이제는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멸시를 받으면서 오신 주님, 이제는 영광 중에 오십니다. 고난을 받으러 오신 주님, 이제는 권세로 오십니다.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 이제는 면류관을 쓰고 오십니다. 지난날에는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마는 이제는 만왕의 왕으로 오십니다. 유대사람들은 그렇게도 기다렸으면서 예수님을 바로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바른 자세로 영접하여 그 크신 영광에 함께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 주여 오시옵소서. *  

약속을 기다리는 자 (베드로후서 3장 8절~13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리 약속대로 의(義)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한 여인이 결혼생활 10년만에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생활을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편의 사랑이 점점 식어지는 것 같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전화 한 통 없이 밤늦게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정성껏 저녁을 준비해놓고 기다립니다. 하지만 수고가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마침내 밤늦게 돌아오는 남편 기다리기에 지치고 맙니다. 자진하여 이혼을 해버리고 이제는 혼자 삽니다. 그러나 참 이상합니다. 저녁마다 마음이 허전합니다. 누군가가 꼭 올 것만 같습니다. 물론 올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는 이렇게 넋두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기다릴 사람이 있을 때가 좋았구나." 여러분, 공감이 가십니까? 못된 남편일지라도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기다릴 사람이 없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다릴 자격을 잃은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차라리 죽은 사람입니다. 기다리다 지쳐버린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기다릴 가치가 없는 일을 기다리는 사람은 허무한 사람이요 한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약속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은 많은 동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약속을 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사람만이 약속이 가능합니다. 약속된 미래와 그 약속을 기다리는 현재, 이 긴장관계 속에서 현재보다 약속된 미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인격자입니다. 여러분, 현재를 위하여 미래를 버려야합니까,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버려야 합니까? 학생들이 다가올 시험에 대비하여 공부를 합니다. 더구나 대입 학력고사를 앞둔 학생들을 보면 참으로 기특합니다. 무더운 여름 동안 머리를 싸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부를 합니다. 그들이라고 어찌 나가 놀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몇 달 후에 닥칠 일을 위하여 오늘을 참고 견디어냅니다. 내일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오늘의 이 고통을 참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내일 일은 내일하고 오늘은 놀고 보자"하면서 소중한 미래를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미래를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현재는 좀 괴로워도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저 앞에 약속된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 선생은 세상을 떠나면서 로마서 6장 18절을 무려 스물 다섯 번이나 외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저 앞에 너무도 즐겁고 귀한 약속이 있기에 지금의 이 고통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도 거듭 외었습니다. 외고 또 외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나는 어떤 유형의 사람입니까? 현재를 위하여 미래를 버리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넉넉히 극복하는 미래지향적인 신앙의 사람입니까? 어느 쪽의 사람인가,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대상자와 그 약속, 그 소망, 그 기다림 자체를 즐기며 살아갈 수 있어야만 비로소 인간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제 2차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Auschwitz) 강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갇혀 있다가 끝내 가스실에서 무참히 학살당하고 맙니다. 그들이 갇혀 있던 지하실 벽에는 아직도 이러한 낙서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있다. 단지 그분의 도착이 좀 늦어지고 있을 뿐이다.'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그들은 이렇게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확실한 대망사상이 그들 생명의 뿌리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곧 약속입니다. 성경의 별명이 약속 아닙니까? 아시는 대로 성경전서, 즉 구약은 옛 약속이요 신약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거짓이 통하지 않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 의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의의 승리, 의의 실현 --- 이것을 보장하는 약속입니다.

또한 이 약속은 불가항력적인 은총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인자한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사랑의 아버지가 집을 나간 탕자를 사랑하듯이 끝까지 사랑하시는 완전한 사랑, 창조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바로 사랑의 약속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반드시 사랑할만한 자로 만들고야 말 것이다 --- 적극적인 사랑의 약속입니다. 한편 이 약속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의 약속입니다. 세상이 다 거짓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반드시 반영될 것입니다. 그 약속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약속을 성취케 하는 능력이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약속은 부도수표가 아닙니다. 추상적 이론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약속에 대한 증거가 곧 성경의 역사입니다.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고 그대로 이루어지면서 또 다른 미래를 우리에게 약속해주십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보증하셨습니다. 이니셜(initial)로 사인을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약속대로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약속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 모든 인간의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며 절대적인 목적입니다. 필연적인 목적이며 결정적인 목적입니다.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이고 그리스도 사건 안에서 확증해주시는 약속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내용의 말씀이 수없이 나옵니다. 성경 주석가의 말에 따르면 신약성경에만도 무려 318번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따져보면 25절마다 한 번씩 말씀한 꼴이 됩니다. 한편 구약은 그 모든 말씀이 주님이 오시리라고 하는 데에 대한 약속입니다. 모든 말씀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약의 모든 말씀의 초점은 주님의 재림에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소위 메시야 대망사상에는 다분히 유대적이요 정치적이요 지역적이요 민족적이요 세속적인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이 성취된 확실한 증거 위에서 다시 저 미래를 향하여 재림을 약속할 때에는 우주적이요 종말론적이요 영원한 약속이 됩니다. 이 대망사상,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 마음속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는 오실 그 주님이 너무 더디 오시는 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2천 년 동안 그 문제로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학설이 분분합니다마는 이 시간에 그런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본문에 나타난 대로 이 지연(遲延)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그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시간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시간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시간을 단순히 시침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사건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건강할 때의 시간과 병들었을 때의 시간, 어느 쪽이 더 길게 느껴집니까? 건강할 때에는 하룻밤이 잠깐입니다.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날이 바뀌어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었을 때에는 하룻밤이 어찌나 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또한 어렸을 때에는 '왜 이리 시간이 안가나, 얼른 커서 어른이 되었으면'하고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랍니다마는 마흔을 넘고, 쉰을 넘으면 세월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1년이 하루 같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시간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으로 보면 하루가 천 년이고 천 년이 하루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시간 개념에서 시간을 이해하면 오늘의 이 지루한 시간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넓은 마음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 넓은 사랑 속에 인내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 바로 되기를, 구원받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말레이시아의 콸라룸푸르에 들러 그곳 오지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를 일부러 찾아가 만나보았습니다. 두어 시간 차를 몰고 산 속 깊숙이 들어가 보니 참 재미있는 것이 있습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 원주민들은 거의 벌거벗은 채 살았다고 합니다.

보기에 하도 민망하여 선교사가 제발 옷 좀 입어달라고 해서 어른들만 겨우 팬츠를 걸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집도 말만 집이지 원두막이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이부자리도 없습니다. 부엌도 없습니다. 밥그릇도 없습니다. 나무 열매를 따먹고 아무 데서나 자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선교사가 들어간 것입니다.

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예배를 드리는 중이었습니다. 얼마나 거룩해 보이는지 몰랐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이 땅에는 한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야 마침내 끝이 오리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에 세상 끝이 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복음을 받지 못한 민족, 복음을 전혀 들을 수 없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복음을 다 들을 때, 바로 그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마지막 -- 종말이 진정한 역사의 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개 종말이란 임시적이라 그 다음 그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마는 이것은 우주의 끝입니다. 다시는 회복할 길이 없고 뉘우치고 회개할 기회도 없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때이기에 더디 오고 있습니다. 구원의 날이요 동시에 심판의 날입니다. 구원받는 자에게는 초조하게 기다려지는 날이지만 심판받는 사람에게는 이토록 무서운 날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비하신 주님께서 그날을 지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번 실존적으로 생각해보십시다. 여러분 자신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대로 주님 앞에 가도 상관없겠습니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라고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고 끊어야 할 일이 있고 버려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생활이 거룩해지기를 안타깝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처럼 긴장된 기대 속에서 항상 준비하고 꾸준하게 그날을 기다려야 한다'고 칼뱅 선생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기다림 속에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문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 역사의 끝에 서 있는 우리가 이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먼저, 약속하신 자와 그 약속의 내용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거듭하여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자가 누구입니까? 그분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그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하여 깊이 상고하고 항상 새롭게 해야 합니다. 기다림 그 자체의 바른 뜻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다림 속에 선교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도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이것이 바로 오늘의 의미가 될 것6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거룩한 행실'로 그날을 준비하라고 말씀합니다. 소극적인 의미로는 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뜻이요, 적극적인 의미로는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끊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끊지 못한 일이 있습니까? 고쳐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직도 고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이제는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해야 합니다. 집중적으로 마지막을 위해서 무엇인가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경건함'으로 준비하라고 합니다. 이 경건은 감상이 아니요 행동을 말합니다. '유세베이아'라는 헬라어는 곧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행동적인 경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생활, 하나님 앞에서의 생각, 하나님 앞에서의 행동이 반드시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모하라'고 합니다. 사모한다 ---- 사랑을 담아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착점에 무관심한 것이 현대인의 가장 큰 결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지막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세계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물질이 어떻고…… 하여간 골치가 아픕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우리의 생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어떤 모양으로 끝날 것 같습니까? 이런 말씀을 드릴 때마다 저는 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마지막 설교가 생각납니다. 그가 멤피스에서 암살 당하기 직전에 한 설교로, 카세트 테이프가 없던 때라 레코드판에 녹음되어 있는 것을 저도 한 장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소중한 것을 이사 몇 번 다니면서 잃어버려 아직도 애석하기만 합니다. 아무튼 그 설교 내용 중에 제게 충격을 준말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장례식을 거행하면 조사(弔詞)를 하는 사람이 나와 그 죽은 사람이 살아서는 어떠 어떠한 사람이었다고 추모하게 됩니다. 킹 목사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그때 관속에 누워서 어떠한 말을 듣기 원하십니까?' 그리고는 자신이 그러한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 오직 이 한마디를 듣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요즘은 생각지도 않았던 돌발사고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불의에 사고로 생을 끝낸다고 하면 장례식을 인도하는 사람이 과연 당신을 어떻게 추모하겠습니까? 자녀들에게 비친 당신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이웃과 형제들에게 보여진 당신은 과연 어떠한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욕심 많은 사람이었지." "극성스럽게 살았지." 그럴 것입니까? 여러분은 무슨 말을 듣고 싶습니까? 바로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좀 잘살고 못살고 좀 잘되고 못되고 해봐야 다 시시합니다. 권좌에 앉아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앉아 보았자 별것도 아닐 것 같습디다. 돈도 그렇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저 미래에 주님 앞에서 과연 어떤 평가를 받게 되느냐입니다. 미래에 평가될 나, 오늘 내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이것뿐입니다. 종착점에 대한 깊은 관심, 잃어버린 관심을 다시 한번 찾아보십시다.

그리고 '바라라'라고 합니다. 소망을 합니다. 구체적으로 기다립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 온 세상이 아무리 곤두박질을 쳐도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릴 뿐입니다. 요사이 저는 이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서울에 쓰레기를 처리할 데가 없어서 여기저기로 나누어 묻는다고 합니다마는 그러다가는 얼마 안 가서 온통 쓰레기 더미가 될 것 같습니다. 세상이 끝나기는 분명 끝나야 되겠습디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 하나만 보아도 종말이 가까워 옴을 느낍니다. 그러나 종말의 날은 끝이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새로운 날의 시작입니다. 호라티우스보나르라고 하는 박사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았다고 합니다. 저녁에 커튼을 닫으면서 "주님, 오늘밤에 오실 것입니까?" 또 아침에 커튼을 열면서 "혹시 오늘인가요, 주님?"하면서 늘 그날을 대비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말구유에 오신 주님, 이제는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멸시를 받으면서 오신 주님, 이제는 영광 중에 오십니다. 고난을 받으러 오신 주님, 이제는 권세로 오십니다.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 이제는 면류관을 쓰고 오십니다. 지난날에는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마는 이제는 만왕의 왕으로 오십니다. 유대사람들은 그렇게도 기다렸으면서 예수님을 바로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바른 자세로 영접하여 그 크신 영광에 함께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 주여 오시옵소서.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