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잃어버린 은전(누가복음 15:8-10)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앞서 공부한 잃은 양 비유와는 쌍둥이 비유라 할만큼 그 유사점이 많습니다. "잃어버렸다가 찾는다" 하는 입장에서 그 테마(theme)가 같고 "찾도록 찾는" 과정,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찾는 그 기쁨과 죄인 하나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 기쁨을 비교하며 동일시하여 말씀하신 것 등입니다. 그러니까 소재가 다르고 찾는 범위에 차이는 있지만 주제나 과정, 결론은 같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두 비유는 같은 내용, 같은 진리를 설명하는 두 가지 형식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 한 여자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여 그 여자의 사랑스런 애정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자의 삶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애정입니다. 흔히들 여자에게 있어서 두 가지를 빼어버리면 휘청거리게 된다고 말하는데, 그 하나가 아름다움이요, 다른 하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여성에게 있어서 사랑스러운 것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다면, 이는 끝난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여성이 억세다는 것은 좋은 표현이 아니며, 목소리가 큰 것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역시 여성은 아름답고 부드럽고 그런 가운데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있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것이 여성의 재산이요, 장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교회를 여성으로 표현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즉 교회를 여성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사랑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에베소서 5장에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또한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그렇게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피차에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교회를 여성에 비유하고 그리스도는 신랑에 비유함으로 여성은 교회를 설명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많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인도로 잃은 자를 찾고 키우며 성장케 하는 곳입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낳아 애써 돌보며 애지중지 키워 성장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교회도 하나님의 백성을 낳아 그 정도대로, 즉 어리면 어린 대로, 자랐으면 자란 대로 돌보아 더욱 성장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처음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많은 손이 가야하고 더 많은 친절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애지중지 돌보는 중에 조금 자라게되면 훈련도 시키고, 좀더 자라면 봉사도 하게 하여 성인으로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치 한 여인, 특별히 한 어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비유해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인을 돌보는 모습이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의 애정과도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기록 가운데에는 성령을 모성으로 표현한 것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제롬(Jerome) 이라는 교부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설명하고 있을 때에 어머니의 마음으로 설명을 하였고, 또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모습을 하나의 여성적, 모성적 애정으로 설명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누가복음 13 : 34 말씀에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하신 말씀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암탉이니 여성이요 모성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어린 자식을 돌보는 것처럼, 암탉이 새끼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성의 이러한 애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여자에게는 열 드라크마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드라크마라고 하는 것은 동그란 모양의 엽전과 같은 헬라의 화폐 단위입니다.
드라크마의 모양은 한 면에는 왕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다른 한 면에는 글자가 새겨져있는 은전입니다. 이러한 은전 열 개를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러나 단순하게 교환 가치의 돈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를 않습니다. 아마도 그 구멍에다 예쁜 실을 꿰어 장식용으로 사용하며 보화처럼 아껴 간직하는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이 여인에게 있어서 이 열 개의 드라크마는 얼마짜리의 돈 몇 푼이 아니라 노리개나 보화처럼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으며, 그러기에 이 돈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여인은 다른 진귀한 보화를 가질 만큼 넉넉지 못한 좀 가난한 형편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화로 삼아 만지고 사랑하며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이것이 자신에게 주는 기쁨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이 열 드라크마를 결혼할 때 어머니가 준 것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준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성경에 나타나는 대로 보면 분명 그렇게 함부로 쓰는 돈이 아닙니다. 이는 사랑과 기쁨과 관심을 담고있는 하나의 애물이요, 보화의 은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에서 상상을 해본다면, 밤에 혼자서 다시 한번 그 열 드라크마 묶음을 만져보는 중에 꿰었던 줄이 끊어지거나 풀어져 그만 드라크마 열 개가 바닥에 모두 떨어지게 되었는데 그 중 아홉 개는 쉽게 찾았으나 한 개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려서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하여야할 것은 자기의 부주의로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양 한 마리 잃어버린 것은 양이 떠나 도망간 것입니다. 때문에 그 책임도 양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드라크마를 잃은 것은 자기의 부주의로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더욱 괴롭고 초조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등불을 켜 들고 열심히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밝은 눈이 있어야합니다. 하지만 눈이 밝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빛이 있어야 본다는 것입니다. 내가 눈을 뜨고 아무리 보려고 하여도 이 빛이 꺼지면 그 후로는 볼 수가 없으며, 그렇게 되면 눈이란 있으나마나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 때문에 빛이 중요하고 빛이 있어야합니다.
이제 이 여인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데에도 등불이 있어야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 빛은 곧 말씀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며, 진리의 빛이요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이 빛이 있어야만 내가 잃은 것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빛이 아니고서는 잃은 것을 찾을 수도, 가진 것을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등불을 밝혀 들고는 온 집안을 뒤지며 찾습니다. 잃은 양을 찾을 때에는 멀리 들로 나가 찾았으나, 오늘 주신 이 말씀은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말씀드린다면 이는 나 자신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나 자신 속에서 잃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은 일차적으로 어둡다는 것입니다. 본래 창문이 많지 않은 어두운 구조에 불을 켰다고는 하지만 조그만 등잔불의 어둠침침한 빛을 가지고 잃은 은전 한 닢을 찾겠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게다가 바닥에는 갈대로 엮어 만든 돗자리 같은 것이 두툼하게 깔려있어서 작은 물건을 떨어뜨리게 되면 찾기가 힘이 듭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 여인은 본문에 의하면 등불을 켜놓고 쓸며 부지런히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차례 차례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쓸어 뒤지며 찾은 다음에는, 너무 좋아서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으니 함께 즐기자"며 즐겼다는 것입니다. 앞서 잃은 양의 비유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여인이 즐긴다면서 몇 냥어치나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쁨에 도취하여 은전 다 날려보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동네 잔치를 할 정도의 큰 기쁨이었으니 다른 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문장을 자세히 보면 대단히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서 잃은 양을 찾아온 목자는 말하기를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하며 "내 양"이라고 하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오늘 본문은 우리말로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로 기록되어 있지만, 헬라 원문이나 영어 성경에는 부정관사가 아닌 정관사가 앞에 있어서 "그 드라크마를 찾았다"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그 드라크마", "그 은전"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은전은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찾는 것은 내가 잃어버렸던 바로 그 은전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나를 기쁘게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내가 잃어버린 은전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할 때 딱하게 생각한 어떤 사람이 은전 열 개를 준다고 하여도 싫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는 내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가 없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잃어버렸던 바로 그것을 찾아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은전" 입니다. 이것이 곧 아무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가치의 그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린이들이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잘못되어 인형의 팔이라도 부러뜨려버리게 되면 그 어린이는 자기의 팔이라도 떨어져나간 것처럼 아파하며 우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생각 없는 어른들은 쉽게 하는 말이 "내버려라, 다른 것 사줄게. 혹은 더 좋은 것 사줄게." 아니면 더 낮은 수준에서는 "더 비싼 것 사줄게" 하며 달래려하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물론 요즈음은 우리 나라에도 인형 병원이 있는데 우선은 교육적인 측면에서 고장난 인형부위에 응급조치를 하여 붕대를 감고 치료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선 하룻밤만 집에서 재우자 하고서는 뒷날 인형 병원에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 인형을 고쳐 나올 때 이 어린이의 마음은 대단히 기쁜 것입니다. 이것은 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인형을 고쳐야지, 다른 어떤 인형으로도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돈이야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의 마음은 다른 것으로는 위로가 되지를 않습니다. 오직 잃어버렸던 바로 그 돈이라야만 합니다. 그 은전이 아니고는 내 마음이 기뻐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마음의 문제이지 돈으로 계산할 경제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진정한 마음이요, 가장 여성적인 사랑의 진실입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것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나 어떤 특별한 사람으로부터 받은, 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분명히 돈으로만 취급될 수 없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때문에 이것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며 다른 것으로 그 자리를 채워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한 번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먼저는 나의 생활 중에 잃은 것이 없나를 살펴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은 온전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말하기를 교육의 최고 목적은 온전한 인격을 갖추게 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 정신적으로 온전하며, 지식과 의지면에서 그리고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다 온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신앙적으로 온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온전함을 향해 그렇게 성장하고 그렇게 가르치며 그렇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온전하여야 합니다. 너무 감상적인 신앙이 좋은 것이 못되는가 하면, 너무 쌀쌀해도 안되고 너무 뜨거워도 안됩니다. 그 때문에 말하기를,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워야 하며 그리고 힘은 있어야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무엇이 빠져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을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에베소 교회는 참으로 칭찬할 것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인내하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악과 거짓을 선별하는 데에도 능숙합니다. 이처럼 잘했고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첫사랑을 잃은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수고하고 인내하며 악한 사람, 잘못한 사람을 비판하여 꼬집어내는 둥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사랑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랑을 말입니다. 그러고도 언제 잃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명령하시는 말씀이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다보면 어디서 무엇을 잃었는지 조차 모르게되고 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은 자기가 잃은 것을 알고 그리고 부지런히 찾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그 때문에 "뭐니뭐니 해도 자신이 무엇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 이라는 말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떠들다가 더 큰 실수를 하게됩니다. 어느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잃어버린 것,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실수요 책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러한 현재의 자신과 가능성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성서 속에 한 사건을 기억해봅시다. 도저히 잃어버려서는 안될 아들 예수를 잃고도 몰랐던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말입니다. 유월절을 지킨 다음 친척들과 이웃들에 휩싸여 분주하게 내려갔는데, 하룻길을 간 후에 찾아보니 가장 중요한 어린 아들 예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겨우 12살난 어린 예수가 없어졌건만 그것도 하룻길을 간 후에야 발견했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결국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사흘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 예수를 만나게됩니다. 정말 가장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지나 않았는지 깊이 생각하여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결코 외적 상실이 아닌 내적으로 오는 자기 상실입니다. 만약에 돈을 얻고라도 믿음을 잃었다면, 그것은 가장 큰 손해요 실패입니다. 성공을 했다지만 진실을 잃고 인격을 잃었다면,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은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자기 성찰의 안목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은 하나를 잃은 상태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아홉은 그대로 자기 손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홉이 있는 것으로 하여 잃어버린 그 하나를 잊어버리거나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있는 아홉 때문에 잃어버린 하나를 못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기 이 여인은 잃어버린 하나를 알았을 뿐더러 그 잃은 것을 꼭 찾아야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기어이 찾아 열이라고 하는 본래의 숫자에 채워야지, 그렇지 않고 하나 빠진 아홉으로서는 그 아홉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어이 찾아 열의 모습으로 맞추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적당히 믿고, 적당히 신앙생활 하려들지 맙시다. 진정 우리의 신앙생활은 열이 꽉 찬 생활을 목표로 하여야합니다. 대체로 "이만하면 되지 않았나! 아홉도 여덟보다야 낫지!"하는 그러한 식의 생각은 하지 맙시다.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열입니다. 열을 다 가져야하고, 하나 없는 아홉은 아홉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의 목표를 두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은 빛이 있어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고 나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찾게되는 것으로 생각지 말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쓰며 수고를 하여도 빛이 없어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마치 농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햇빛이 없으면 어떠한 수고도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빛! 곧 마음에 빛이 있어야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잃은 것을 찾기 위해서는 말씀의 빛이 비추어져야합니다. 오직 그 빛 안에서만이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으며, 또한 잃어버린 자와 잃어버린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의 빛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상고하여 이 말씀의 빛 앞에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빛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은 자기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 때문에 자기의 허물을 모르고 자기의 부족함을 모릅니다. 그래서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자만의 생각을 합니다마는, 그러나 빛 앞에 나서게되면 모든 것이 숨김없이 환하게 드러나고 맙니다. 이처럼 빛 앞에서는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완전하게 자기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좀더 밝은 빛 앞에서 살아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모든 수고도 실효를 거둘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갖은 수고가 다 무효로 돌아갑니다. 마음에 빛이 없으니 마음이 흐려지고 혼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어둠의 상태에서는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빛! 진리의 그 빛 안에서만이 우리의 모든 수고가 열매맺을 수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이 여인의 마음이 무척 조급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노라면 왜 이렇게 조급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이렇게 조급한 데가 있습니다. 오늘밤에 잃어버렸다면 한밤 자고 내일 아침에 찾아도 될 것인데 그것을 못 참아 이토록 급하게 찾으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심정으로는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단순히 경제적인 생각만 한다면 못 참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애정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 여인에게 있어서는 지금 이 시간에 꼭 찾고야말겠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렇습니다. 괜히 조급하고 기다릴 수가 없어서 더욱 조급합니다. 그 때문에 때때로 안달을 하며 일부러 말썽을 부리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특별히 우리의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서는 이렇게 서둘러 애써야합니다. 내가 잃어버린 믿음, 내가 잃어버린 진실, 내가 잃어버린 사랑을 찾기 위해서 정말 급하게 서둘러야합니다. 좀 더 있다 기도하지, 좀 더 있다 봉사하지, 좀 더 있다 전도하지, 좀 더 있다 불쌍한 이웃을 돌보지 하고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서둘러야합니다. 이후의 시간은 나를 위해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단히 적극적이고 종말적인 자세로 애를 써야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 고치신 일로 인해 자주 시비를 받아오셨습니다.
한 예가 누가복음 13장에 기록된 18년간 귀신들렸던 여인을 고치신 일입니다. 이 때에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을 문제로 삼아 분을 내며 시비를 하게됩니다. 문제삼는 저들의 말인 즉 일할 날이 엿새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한 마리의 가축도 물을 찾아 먹이고 구덩이에라도 빠졌으면 건져내는 것이 도리라면, 이 여인이 사탄에게 매여서 18년 동안이나 고생을 해왔는데 단 한 시간이라도 빨리 풀어주는 것이 합당치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18년간 그렇게 살아온 것이라면 하루 지나서 고친다고 하여 안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그렇지를 않고, 그럴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루, 이틀 더 지난들 어떠리 하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행위는 미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애쓰는 마음, 그의 구원을 위하여 전도하는 마음이 이렇게 급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니 오늘 전도하여야 합니다. 바로 오늘 이 시간에 찾을 것입니다. 이는 결코 뒤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잃은 양도, 잃은 드라크마도 오늘 이 시간 급하게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꼭 찾아야하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이 여인의 애정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서 구원에 참여하도록 하여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후에는 너무도 기뻐서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아 잔치를 하며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잃었다가 찾은 마음의 기쁨은 굉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때마다 이러한 기쁨의 감격이 있어야합니다. 이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모를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애쓰며 안타까워하는 마음! 잃은 자를 찾아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의 기쁨과 그 감격!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인의 기쁨이며, 그리스도인의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잃어버린 자가 너무도 많습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와 함께 꼭 있어야할 그 사람이 여기에 없습니다. 나와 함께 기도하여야할 그 사람이 오늘 여기에 없습니다. 같이 예배하여야할 그 사람이 이 자리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 사람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에 안타깝게 생각을 하여야합니다. 어디에고 돌아다니다가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를 기어이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가 여기 함께 하지 않고는 내 마음이 충만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나와 같이 구원의 반열에 있게 하고 나서야 만족할 수 있듯이 그러한 사랑의 마음으로 전도할 것입니다. 여기 이 여인처럼 애지중지하던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하나를 잃고는 애를 쓰다가 찾게되자 너무도 기뻐하는 그 감격! 그 감격이 곧 우리의 감격이 될 수 있도록 잃은 것을 찾고 또 찾는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전한 담력 (1장 19절~21절) (0) | 2024.03.19 |
---|---|
은 양 비유(누가복음 15:3-7) (0) | 2024.03.19 |
왕의 잔치 비유(마태복음 22:1-14) (0) | 2024.03.19 |
예수님의 비유 강해(마태복음 13:1-9) (0) | 2024.03.19 |
열매 없는 무화과(누가복음 13:6-9)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