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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는 씨앗 비유(마가복음 4 : 26 - 29)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일반적으로 말하여 마가복음에는 네 가지의 비유가 나타나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넷마저도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것을 다시 설명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가복음에만 독특하게 나타난 것은 둘, 좀더 깊이 생각하면 셋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각 복음서는 저마다 형식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마태복음에는 비유가 많고 요한복음은 설교형의 말씀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비하여 마가복음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행적을 위주로 기록하고 있으면서 비유는 넷 뿐입니다. 그런가 하면 격언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격언 역시 집약된 하나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너희는 "소금과 같다" 혹은 "빛과 같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긴 문장의 이야기가 아닌 극히 짧은 한 마디에 불과하지만 그 뜻하는 바를 보면 그것 역시 집약된 비유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합하면 마가복음에는 모두 12개의 비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생각할 것은 씨앗이 자라는 비유입니다. 이것은 언뜻 생각하면 이미 예수님의 비유 강해 상권에서 설명한 바 있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비유를 연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 뜻하는 바의 내용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보면 씨앗은 언제나 좋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씨앗에 대한 비평은 없으며 단지 그 씨앗이 뿌려졌을 때,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밭이 길가나 돌작밭 아니면 가시덤불 혹은 옥토로 각각 다르다고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꼭 같은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이고 있지마는 마음 밭에 따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은혜를 받는 것이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원하는 바는 모두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라지의 비유 같은 것은 밭은 좋으나 좋지 못한 씨앗이 뿌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씨앗 자체에 알곡과 같은 씨앗이 있고 가라지와 같은 씨앗이 있으며, 이 두 씨앗이 꼭 같은 마음 밭에 뿌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옥토라는 것은 좋은 것이나 그 옥토만 가지고 좋은 결실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 참 좋지! 누구말이나 잘 들어주지, 할 정도로 수용성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그것만 가지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이 좋은 사람은 나쁜 말에 대해서도 마음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데에 소질이 있어서 이래도 오우케이(0.K) 저래도 오우케이 하다보면 모두가 다 오우케이가 되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마음 밭이 옥토라는 그것만 가지고는 아니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밭을 가지고 교회에만 나오면야 되겠지만 술집으로 갔다가는 전혀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가라지의 비유는 씨앗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겨자씨의 비유는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커진다는 것으로 이것은 복음의 역사가 미미한데서부터 시작하여 엄청나게 큰 역사를 이룬다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자라나는 씨앗에 대한 비유는 씨앗에 대한 분류나 밭의 종류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는 가운데 단지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만을 주제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씨 뿌리는 비유나 가라지 비유, 그리고 겨자씨의 비유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이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비유로서 매우 귀중한 생명의 신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고전 13:11 기록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누구에게나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유치한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마는 성장한 다음에는 그래도 좀 높은 수준에서 말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며, 깨닫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해야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언제나 유치한 가운데 머물 것이 아니라 당연히 성장된 수준에 이르러야 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벧후 3:18에 보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은혜 안에 자라가야 합니다. 이 은혜 밖으로 나가게 되면 이상한 방향으로 자라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자라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도 두 가지의 양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은혜가운데 자라는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은혜를 깊이 깨달아 이것도 은혜요 저것도 은혜이며,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합니다. 하루 하루 시간이 흐르는 만큼 더 크고, 더 깊게 느끼며 감사하는 성장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나쁜 방향으로 자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러자니 이것도 망했고 저것도 썩었으며, 저 사람도 형편없고 이 사람도 나쁩니다. 그저 악한 방향으로만 생각이나 지혜가 자라갑니다. 하지만 이것도 성장은 성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란다는 문제를 놓고 생각할 때에도 은혜 안에서 자라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안다면. 사실은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이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그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장의 문제를 두고 엘리코트(Ellicort)라는 신학자는 심리학적 단계로서의 3단계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사상, 곧 생각에 있어서의 성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이발전하고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책을 한 권 읽더라도 어린이가 읽는 것과 어른이 읽고 생각하는 바가 다른 것입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조그마한 사물 하나를 대하더라도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을 느끼게됩니다. 이와 같이 생각의 성장이 곧 인격의 성장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 성장은 행위의 성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행동 반경이 넓어지고 유능해지며, 전에는 말만하던 사람이 직접 행동으로 옮기게되는 그러한 성장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성장은 목적에 대한 성장입니다. 목적이란 전체에 대한 의미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숙한 사람은 매사에 있어서 항상 의미를 부여합니다. 반면에 의미를 모르고 사는 사람은 어린아이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적에 대한 바른 인식은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 직업을 가진 목적, 사는 목적 등, 지금 내가 가진 바의 목적은 어느 정도 성장해 있는 것입니까? 진정 우리의 목적이 어느 정도 성장한 단계에 이르렀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본래적인 그 목적이 크게, 그리고 전적으로 느껴지면서 그 목적 속에 내 자신이 흡수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나는 죽어도 좋고 수치를 당해도 좋은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단계를 보고 높은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여기에는 성장에 관계된 세 가지의 전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첫째가 씨앗입니다. 얼핏 보아 본문에서는 종자에 대한 거론을 하지 않는 것 같으나 사실은 중요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하여 본문은 그 내용의 시작을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림과 같으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장을 위해서라면 먼저 씨앗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곧 말씀이요 진리이며, 객관적으로 주어진 생명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밭이 좋은 옥토라고 만하여 거기에서 싹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싹은 밖으로부터 뿌리워진 씨앗에 의하여 돋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마음 밭이 곱고 고명한 인격의 소유자라 할찌라고 반드시 말씀의 능력이 객관적으로 부여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 두 번째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많은 씨앗이 있다 하더라도 뿌리는 자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14에서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며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이든 듣지 못한 복음을 믿을 수가 없으며 전하는 자가 없고서는 또한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반드시 전해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간혹 예수를 처음 믿기 시작하신 분들이 참으로 기뻐하면서 하는 이야기 중에 이렇게 좋은 예수를 왜 진작 믿으라고 권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것과 더욱이 아래 윗집이 모두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인데 단 한번도 진지하게 교회에 나가자는 말을 하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으로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저 사람은 어느 모로 보나 전도해도 안 믿을 사람 같아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전도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요 반드시 해야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한 마디 전한다고 하여 듣는 사람이 바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던지 안 믿던지 간에 전도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더욱이 이웃에 사는 분들이나 일가 친척, 친구분들께는 당연히, 그리고 부지런히 전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제대로 안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전도에는 무거운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는 기록하기를 이를 파숫군의 책임이라 고 하였습니다(3:17). 만약 파숫군이 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파숫군이 졸면 전체가 죽습니다. 따라서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은 파숫군이 져야 합니다. 이에 에스겔서는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 18).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반드시, 그리고 부지런히 전도해야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세번째는 땅이 있어야 합니다. 땅 중에서도 옥토가 준비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씨앗이나 그 씨앗을 뿌리는 사람,그 리고 주어지는 좋은 땅, 이 모두가 다 은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 속에서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얻어지는 생명! 이러한 생명을 두고 생각할 때 우리는 적어도 네 가지의 신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첫째는 출생의 신비로서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신비로운 일입니다마는 죽은 것과 같은 메마른 씨앗에서 싹이 나오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도무지 그 속에 무엇이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나타나는 생명이 있으니 이것이 생명이 출생하는 신비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장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는 고작 물을 주는 일밖에 없는 것 같은데 자라고 꽃이 핍니다. 게다가 요즈음에 와서는 사람들이 재주를 부리느라 소위 수중재배를 한다며 물만 부어 놓고 식물을 키우기까지 하니 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입니까? 아무튼 이와 같은 생명이 자란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다음 세 번째는 죽음의 신비입니다. 생명이 죽는다는 것! 다시 말하면 인간이 죽고, 동물이 죽으며, 식물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할 때 이것 역시 신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네번째는 부활의 신비입니다. 분명 죽고 썩어져 없어진 것 같은데 또 다시 살아나는 그 신비를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와 같은 신비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이기에 인간들이 이모 저모로 응용하고 있을 뿐 이 신비의 자체에 대해서는 인간으로서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비는 여전히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이와 같은 신비로운 역사는 지성 이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부름을 받은 것은 80세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80년 동안에 걸쳐, 다시 말하면 모세가 태어나 갈대상자에 실려 강물 위를 떠내려 가는 데서부터 건져내임을 받게 하시고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게 하셨으며, 미디안으로 보내시어 훈련을 받게하신 다음 그를 부르십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분명한 자아의식을 갖게된 것은 그의 나이 80이였을 때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미리 준비를 하셨으니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 어느 한 사람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게된다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한 결혼식을 통하여서도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를 잘 믿는 장로님댁 아들과 온 집안이 불교 신자인 집 딸이 연애를 하게 된 나머지 처녀는 총각을 따라 교회를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총각이 처음에는 이 처녀의 신앙을 두고 이게 진짜인가 하여 1년간 시험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이 처녀가 세례를 받는 데까지 신앙이 자라게 되자 이제는 부모님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강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자니 특별히 처녀집 부모님들의 역정이 오죽하였겠습니까마는 놀라운 것은 그 처녀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 생각하기를 이제 내 사위 될 사람이 교인이고 더욱이 사돈 될 사람이 장로라면 그 성경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도 상식적으로라도 한번 읽어보아야지 하고서는 성경을 읽기 시작하여 신구약 성경을 다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 참 좋은 말이 많습니다."라고 하길래 저가 있다가 "이제 교회에 나오시면 더 좋은 말을 많이 들을 겝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분은 결국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제 그 집안은 하나가 믿음으로 인해 모두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란 말입니다. 처음 두 젊은이가 양 가정에 파문을 일으키며 연애를 시작했을 때 그 누구인들 이후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엄연히 한 가문을 구원하는 역사가 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신비로운 역사인 것입니까?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밤이라고 하는 것은 무의식 상태를 말합니다. 생명은 우리가 무의식 상태에서 쉬는 중에도 자라고 의식 속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도 자랍니다. 우리는 그 자라나는 모습을 확인하고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계속 성장할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식물의 성장을 3단계로 구분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보면 맨 먼저는 싹이요 그 다음은 이삭이며, 그리고 그 이삭에 충실한 곡식으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3단계로 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체에 오묘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싹이 나는 것을 보면 씨앗이 망그러지고 썩어지는 거기에서 연약하기 그지없는 조그마한 풀잎이 파르스름하게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생각할수록 참으로 신비로운 장면이며 아름답고 귀한 생명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 때의 모습은 너무나도 나약하여 어린아이의 발길이 스쳐도 곧장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시작이란 많은 사람의 희망이며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약한 새 생명은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예수를 믿어 새로운 생명으로의 새 사람이 된다고 할 때 그 처음은 매우 나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제 문제는 그러면서도 나약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흔들리고 바람만 세차게 불어도 추위를 타며, 조그만 추위에도 얼어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약한 것이 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가이북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에 보면 저의 고향에서는 고구마를 많이 심는 편인데 이 고구마의 순, 곧 싹을 내기 위하여 자그마치 안방을 할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한 기간에 걸쳐 마치 어린아이를 키우듯이 따뜻한 자리는 고구마가 차지하게 해놓고 사람들은 윗목에서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침 저녁으로 정성껏 물을 주면서 잘 돌본 싹이 20-30센치 정도로 자라게 되면 그 때에 그 싹을 땅에다 옮겨 심어 고구마를 생산케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연한 싹은 약한 만큼 잘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제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을 보게되면 본인은 물론 보는 사람도 참으로 고맙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리하여 열심과 성의를 다해 교회 일에 참여하며 찬양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우 약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혹 먼저 믿는 사람 중에서 누군가가 잘못된 말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인해 상처를 입는가하면 당장에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같은 경우라도 10년, 20년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모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그런 대로 넘겨 버릴 수가 있지만 처음 믿는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그 때문에 통계에 의하면 서울 시민의 60%가 적어도 한번쯤은 교회를 다녀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60%가 다 어디로 가고 불과20%밖에 안 되느냐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저들에게 실망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름 아닌 먼저 믿는 사람들이 실망을 주었단 말입니다. 이제 조그마한 싹이 예쁘게 올라온 것을 보면서 감격해하고 기뻐하면서 필요한 도움을 주어가며 잘 돌보았어야했겠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그만 상처를 입고 쓰러지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이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싹으로 태어나는 생명은 신비로움이 있고 희망과 기쁨을 주지만 동시에 너무도 약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다음에는 이삭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이삭이라고 할 때 이것은 자기 정체가 분명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삭이 쏙 내밀게 되면 그때에 가서는 이것은 알곡이다. 혹은 가라지다 하고 분명한 자기 정체를 들어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잎들만 푸르게 있을 때에는 거기에 대한 상당한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자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삭이 돋아난 후에는 알곡과 알곡이 아닌 여타의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삭이 나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느 정도의 신앙이 성장한 다음에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밝혀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한 장병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비록 군대에서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식사 때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사실 보통 용기가 아니면 힘든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근간에 속한 부대에서는 식사 때가 되면 "감사의 묵념"을 하고서는 식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다른 사람이 묵념을 하는 동안 자기는 기도를 할 수가 있어서 좋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었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마구 먹는 판에 혼자서 기도하기가 매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어느 장소에서든 혼자서 기도하고, 어디에서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요"하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동차 뒤에 부치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고백을 담은 초대교회 믿음의 상징인 물고기 모양의 스티카를 많은 교인들이 좋아할 것같아서 만들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사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안 사느냐 할 때 이제 좀 다른 데도 가야하겠고 행동으로도 제재 받고 싶지가 않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저따위냐?"할까 봐서 못 달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붙치고 다닐 자신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기에 회개하여야 합니다. 어디서나 자신 있게 자동차 뒤에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요"하고 다닐 수 있어야지 이것을 술집에 대어 놓으면 곤란한데, 혹은 다른 사람이 보면 무엇이라고 할까하는 정도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유치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이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더러는 예수 믿는 사람의 자동차인 것을 알면 차를 찌그러트리기도 하고 자국을 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런 정도의 손해쯤은 좀 본들 어떻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슴에다 직접 십자가를 달거나 복장을 별나게 하고 그럴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감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고 그렇게 말하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명확한 이상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려운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 이웃을 만나고 시험을 이기며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이 있게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 이삭이 충실한 곡식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충실한 곡식은 햇빛을 받아 무르익어 갑니다. 제맛을 낼 수 있도록 확실하게 익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고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맛을 내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요소를 다 제거하면서 오직 봉사와 희생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마침내 충실히 무르익어 고개를 숙인 다음에는 "이제 나를 베어 잡수세요"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쉬운 예로서 감 같은 것을 두고 생각해 보더라도 맛이 들어 익기 전에는 나무 잎과 같은 록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뭇잎과 같은 보호색으로 있으면서 "나를 따 먹지마세요"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다가 다 익어 빨갛게 된 다음에는 무성했던 잎들도 떨어져 나가고 이제는 "빨리 따가 주세요"라는 자태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 무르익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는 곧 자기를 주기 위해 준비된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나를 사용하십시오 하면서 봉사적인 인간으로, 희생적인 인간으로, 쓰여짐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내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마치 훈장처럼 생각하며 영광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옥중에서도 기쁨이요, 매를 맞으면서도 기쁘기만 한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의 교육관을 신축하면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섯대의 피아노를 비롯하여 강대상을 준비하는 일 등 필요한 비품들을 갖추는 일에 앞장서서 하겠다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조금 늦게 말씀하신 분들은 부득불 그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봉사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 누구인들 돈이 아까운 줄을 모를리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나를 따 가세요!"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리고 무르익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여기에 비해 무엇이고 좀 봉사하라고 하기만 하면 징징거리며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곤란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며 고생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성숙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중생이 신비요, 성화가 신비며, 영화가 신비입니다. 이런 신비함 속에서 생명은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생명의 역사 앞에서 성장의 문제로 인하여 절대 염려할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생명 자체의 신비한 능력에 의해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왜 믿음이 빨리 자라지 않는가라며 조바심을 부릴 일이 아닙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그 자람을 기다리며 지켜보는 인내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말씀하신 바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어야 하듯이 온전히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하며, 그 가지를 깨끗이 하여야 합니다. 마음이나 생각은 물론 그 생활이 순수하고 깨끗한 것이라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될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굳이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따로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나무만 되면 좋은 열매는 자연히 맺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나무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바의 은사이며 나로서는 그저 깨끗하게 할 뿐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언제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비롭게 열매가 맺혀 제맛을 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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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마태복음 8장 18절~22절) (0) | 2024.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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