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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영생의 말씀이 있는 곳(요 6:60~7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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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말씀이 있는 곳(6:6071)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구원이란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급한 문제입니다. 잘산다 못산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구원은 생명의 문제로써 심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이미 다루었지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중요한 두 가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첫째는 약속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믿음이 먼저인 것 같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이 먼저 있고, 그리고 그 약속에 대한 바른 응답으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간추려 말하면, 주신 약속에 대한 바른 응답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죄를 사했느니라" 고 말씀을 하셨으면, 이제부터 내가 나에 대해서도 사함을 받은 줄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네 죄를 사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아니에요, 저는 아직도 죄인입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불신입니다. 성경에는 말씀에 대한 바른 응답의 자세와 불신하는 자세의 좋은 본보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령,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에게 주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일어나 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합시다. 이 때 환자의 반응이, "나는 보통 앉은뱅이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라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말 한 마디로 내가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못됩니다"라고 말하며 가만히 앉아 있다면 그는 영영 일어나지 못합니다. "일어나라" 말씀하시면, 믿고 바로 움직여서 일어나는 것이 믿음이요, 바른 응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절대 순종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방편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성경이요, 설교요, 전도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듣지 않은 복음을 어찌 믿으리요, 믿지 않고 어떻게 구원을 얻으리요, 전하는 자가 없으니 어떻게 들으리요"라고 복음에는 반드시 전하는 자가 있어야만 듣고, 믿음을 가지며, 그리고 구원을 얻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말씀이 있어도 전하는 자가 없으면 들을 수가 없고, 듣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전하는 자가 있어도 내가 전하는 자를 만나야 하는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요, 기회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말씀이 전해지고 들려져서 여기에 대한 바른 응답, 즉 내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수락을 의미하여 이것이 바른 응답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전해지고, 전도자를 만나고,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마음 문을 여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전해지는 것도, 믿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관하셔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믿어 질 수도 있지만,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전했다면 생각도 하기 전에 마음 문을 닫아걸고 전혀 받아들이지를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이 좋은 분위기에서 전하고 또 성령이 감동케 하셔야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신 후에 이 기적을 놓고 중요한 말씀을 직접 전하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믿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됩니다. 필자는 가끔 어려운 환자를 심방할 때에 빨리 회복하게 되었으면 하고 기도를 하면서 엉뚱하게 예수님은 전도하시기가 쉬웠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장님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며, 앉은뱅이도 문둥병도 다 고치시면서 전도하셨으니 얼마나 쉬웠겠습니까? 그런데, 필자는 그저 위로의 말이나 몇 마디 하고 나오려니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환자를 심방할 때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뭔가를 좀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데 빈 손으로 가라 하시니 어찌합니까? 그저 가서 "많이 힘드시지만 참고 견딥시다"라는 말만 하고 오자니 정말 답답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시면서 복음을 친히 전하셨는데도 믿는 자는 믿고, 믿지 않는 자는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묘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렇게 변변치 않는 우리 교역자들이 전하는 설교를 듣고도 믿는 자는 믿습니다. 아니 병원에서 환자를 고치지 못하고 말씀만 전해도 믿는 자는 믿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앞에서도 여러번 언급했지만, 이적이라는 것이 믿음을 갖게 하는 데는 별로 효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동안 예수께서 깜짝 놀랄 기적도 행하셨고 높은 권세와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전하셨지만 사람들은 "어렵도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느냐" 하고 다 물러 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군중들이 다 물러가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고 계십니다(6: 67). 정말 가슴아픈 이야기입니다. 이 때 그래도 다행스럽게 베드로가 수제자답게 한 마디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68-69). 베드로의 바른 응답에 예수님께서 많은 위로를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에서 공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내 살은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하며,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귀한 말씀을 하셨는데, 군중들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물러갔습니다. 이 말씀은 육신을 입으신 말씀, 즉 성육신 된 말씀(incarnated word)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지만, 그러나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왜 믿지 못하고 물러갔습니까? 그것은 내 살은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한다는 상징적 언어가 그들에게는 통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상징적 언어란, 믿음으로만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그들에게 상징적 언어가 소통되기란 어려웠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내가 귀히 쓰던 어떤 물건을 사랑의 선물로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그 물건은 내가 십 년 동안 아끼고 사랑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선물을 받은 친구는 보자마자, "고물이군" 하며 다 낡아빠진 것을 주었다고 불평을 했다고 하면, 이런 친구와 무슨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서로 믿고 사랑해야 상징이 소중하게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먹이신 사실을, 믿고 생각하면 영원한 생명을 내게 주셨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이지만, 믿음 없이 생각하면 그저 식사 한끼 얻어먹었다는 것 외에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과 사랑이 전제되어야 상징이 주는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성령을 통해서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하는데, 그들의 마음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육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 예수님께서는 직선적으로 심판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이 그들에게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육신적인 것만을 요구했으니까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잘 살고, 출세하고, 병이 낫고, 나라가 독립되는 육신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며 주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혁명은 안중에도 없으시고 하늘나라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니 더 이상 따라다녀서 육신적으로 별 이익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전설까지 있습니다. 가룟 유다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능력 정도면 충분히 우리들을 잘 살게도 할 수 있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으신데, 가만히 계시니 어떻게 하든 십자가에 못박도록 사건을 몰고 가면 그 때에는 할 수 없이 무엇인가 보여주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말없이 그 십자가를 지셨으니 가룟 유다의 후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자살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그럴 법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속적이고 육적인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육신적인 것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하면, 건강보다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무엇을 준다고 해서 나의 몸 일부를 내어줄 수 있습니까? 정말 몸이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몸이지만 일단 죽고 나면, 즉 영혼 없는 몸, 생명 없는 몸이 되면 아무 쓸모가 없어 땅에 묻어 버립니다. 결국 영이 문제요, 생명이 문제란 말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영은 살리는 것이요, 육은 무익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들은 실망했고 물러가게 된 것입니다.

물러간 또 하나의 이유는 소극적 신앙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먼저 표적을 구했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찾아보면 이적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다소 이해하기가 어렵고 표적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었다고 해도 끝까지 알아보겠다는 자세였어야 했는데 물러갔습니다. 어렵다고 도중하차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우리들의 최후 문제입니다. 그 동안 계속해서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다 와서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가 버립니다. 필자에게 가끔 젊은이들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또는 오늘날 교회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만 필자는 그럴 때마다 그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성경을 얼마나 보았소?" ", 조금 읽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 한번 제대로 읽지 않고 이야기해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열 번 정도는 읽고 난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합니다. 만약 그런 정도의 사람에게 보여지고 이해되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잘못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소극적인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어렵다 하여 물러서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어렵다는 말과 틀리다는 말은 서로 다릅니다. 어렵다는 것은 내가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지 "아니다"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내게 어렵다는 말입니다. 어느 수학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아주 어려운 문제를 주시며, 당신은 바쁜 일로 약 한 시간 후에 돌아올 테니 그 동안 풀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려운 문제이지만 연구하면 풀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며 나가셨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풀어보려고 애를 쓰는데 역시 어려웠습니다. 어느 학생이"이런 문제는 배우지 않았으니 못한다"고 말하며 나갔습니다. 그러자, 또 몇 학생이 이것은 틀린 문제라고 투덜거리며 나갔고 연이어 모든 학생들이 그들 나름대로 먼저 나간 학생들의 의견에 동의하며 문제 풀기를 포기하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한 학생은 끝까지 남았습니다. 그 이유는 선생님께서 풀 수 있다고 하셨으므로 반드시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한 시간 내내 애쓴 덕택으로 드디어 그 문제를 풀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그는 해결했으므로 그만이 가지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문제였지만 풀 수 없는 문제는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도 이와 같이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 구원의 길은 정말 좁고 험난한 길이지만 갈 수 없는 길은 아닙니다. 물러서지 않고 참고 견디면 가능한 길입니다. 본문 63절에 예수님은 "나의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은혜가 있으므로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물리적 차원에서, 수학적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풀어지지 않습니다. 영은 영으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어려워도 이해하기 위해 어려움을 극복하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음식으로 말하면 단단하고 굳은 음식이므로, 꼭꼭 씹으면 소화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뚜렷한 방법은 없습니다. 단지 인내할 뿐입니다. 오늘 이해 못하면 내일, 내일도 이해 못하면 또 다음 날로, 언젠가는 이해될 줄로 알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가운데 이해될 것입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머님의 권고로 열 네 살 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마태복음을 보니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또 낳고 하는 말이 계속되어 혼자말로 "많이도 낳았구나" 하며 읽었습니다.

그러나, 재미가 없어서 마태복음 1장은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도 마태복음을 읽을 때에는 항상 일장은 빼놓고 보았습니다. 후에 좀 성장해서 철이 드니, 마태복음 1장도 하나님 말씀인데 빼고 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유심히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 한 마디가 제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1:6)라는 구절입니다. 왜 다윗의 아내가 아니고 우리야의 아내입니까? 이것은 요염한 밧세바와 다윗의 사이에서 솔로몬 왕이 태어났다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본처의 아들이 아니요 첩의 아들이니 그것이 보통 일입니까? 그러나, 다윗과 밧세바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깨끗이 사하시는 순간에 그 사이에서 지혜의 왕이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어렵습니다. 상당한 연륜이 쌓이고 시간이 지나 후에라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당장 이해하지 못 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갖다 붙이고 쪼개어서는 안 됩니다. 가만히 두고 기다려야 합니다. 누군가가 비유하기를 "성경을 볼 때 성미 급한 여인이 생선 조리는 것처럼 하지 말라"고 재미있게 표현한 말이 있습니다. 생선을 조릴 때, 성미 급한 사람은 익었는가 하여 자꾸 뒤적거려서 생선 외형을 다 망가뜨려 놓고 맙니다. 생선은 물을 적당히 넣고 알맞게 불을 조정하여 한쪽이 완전히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생선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됩니다. 그와 같이 성경이 어렵더라도 끼어 맞추려고 애쓰지 말고 그대로 놓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고 또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므로, 원문을 그대로 두고 이해되는 것만 이해하면 읽어나갈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성장하면, 그 단계에서 이해될 것이므로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어렵다고 포기해서 물러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어려운 말씀이란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어렵다는 순간에 벌써 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의 결정적인 이 말이 걸림이 되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심판적인 말씀입니다. 이것을 넘어서면 구원을 얻고, 넘어서지 못하면 유감스럽게도 버려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려지고, 듣고 싶고, 그리고 말씀이 즐겁고 감사한 것이 은혜입니다. 항상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효과적이고 온전한 은혜가 있어야만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반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65).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겸손하게 만들어 놓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대개 건강하거나 성공했을 때 받지 않습니다. 낙심하고, 병들고 사업에 실패하면 받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오게 하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끌어 준다는 말은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대답한 것은 적극적인 신앙임을 보여 주고 있는 하나의 신앙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말과 같은 고백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는 주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레마타 조에스 아이오니온 에케이스"로서 영어로 직역하면 "You have the word of eternal life.(당신이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입니다.

, 베드로의 말을 풀이하면 영생의 말씀을 당신이 가지고 있으므로 내가 다른 데로 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말씀 중심의 신앙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말씀 하나로 만족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외에 다른 것을 찾는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하나로만 만족할 수 있는 영생의 말씀, 이 말씀은 곧 인격 관계를 말합니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주시는 은사가 말씀입니다. 유식한 자나 인격자는 말씀을 좋아하고 교훈을 좋아하고 지혜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유치한 사람은 먹을 것만 좋아합니다. 사실 좋은 말씀 한 마디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러나, 유치한 사람은 말씀의 고귀함과 행복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즉 속죄된 생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화목하고 사랑의 관계인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생을 말하면서 동시에 오늘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다음, 베드로의 대답은 믿음이 근거가 되어 알게 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69). 믿고 알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리 내가 불붙는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한다 하더라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믿음으로만 알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감격할 수 있고, 그 사랑이 내게 와서 능력화할 수 있습니다. 더우기 먼 미래의 약속은 믿는 자만이 기쁨이 넘치고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전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었고, 그리고 알았습니다. 믿었다는 말이 헬라어로 과거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영생의 말씀이 있는 줄 믿었기 때문에 주가 말씀이신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무엇입니까? 제자 베드로처럼 영생의 말씀뿐이어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은 바라보지 말고, 가지지도 말며 오직 주님만 따라야 하겠습니다.

말씀만으로 만족하고 말씀의 능력, 그 안에서 충만한 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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