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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기적(요 6:1~13)
"그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이 본문은 대단히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주일학교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수없이 들어왔던 내용일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학에서는 가능하면 탕자 이야기와 오병이어의 기적은 설교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서 모두 취급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이적 기사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우리에게 주신 귀한 진리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오병이어의 기사를 찾아보면, 마태복음 14 : 13 이하와 마가복음 6 : 32 이하, 누가복음 9:10 이하, 그리고 요한복음 6:1 이하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이 사건의 배경을 생각하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요 6:1-2). 갈릴리 바다는, 바다라고 하기보다는 호수에 가까운 조그마한 바다로서 고구마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가운데 두고 서쪽인 가버나움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면 동쪽은 벳새다이며 거리는 약 4마일 정도로 25리쯤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해서 전도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병을 고치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몹시 피곤하신 예수님은 가끔 휴식을 위해 잠깐씩 피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사람들에게 묻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적한 곳을 찾으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도 가끔 내가 사는 생활로부터 한번쯤 후퇴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조용한 시간을 갖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생산적인 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계속해서 생활에 묻혀 사건의 연속에 몰두해 있으면 어느 사이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고 때로는 동화되기도 하여 올바른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처해 있는 사건으로부터 잠시 뒤로 물러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을 관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디베랴 바다를 건너서 벳새다로 가신 이유도 잠깐 쉬시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동행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단독으로 보다 더 깊은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또한 기도 시간을 갖기 위한 피신이었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휴식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이요, 기도하는 시간이 곧 휴식이었음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쉰다고 하면 편안하게 행동을 정지한 상태나 잠을 자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일하심으로 쉬셨습니다(요 4장). 앞장에서 공부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시고 너무 좋아서 피곤이 풀리는 그러한 휴식을 이미 보았습니다. 또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의 시간이 큰 휴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창의적인 휴식 방법을 우리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예수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건너가시는 것을 그들은 보았고, 혹시 놓칠세라 육로로 재빨리 돌아가서 예수님보다 먼저 벳새다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군중들을 피하여 건너오신 예수님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되면 짜증스러운 것입니다. 모처럼 피하여 조용한 시간을 갖기를 원했는데, 사람들이 뒷길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탓하거나 물리치지 않으셨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가복음 6:34에 보면 떼를 지어 다니는 무리들을 보시고 "목자없는 양처럼 이리저리 밀리는구나, 불쌍하다" 하시며, 오히려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곤하셨음에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 예수님의 생활 양식이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정해 놓은 스케줄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 또는 쉬고 싶은데 무슨 일이 겹치면 짜증을 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피곤하고 쉬고 싶고 기도하기를 원하셨지만, "나" 중심적이 아니라 저들을 먼저 생각하셨고 육로로 돌아온 갈급한 군중들의 심령을 살피시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흘렀고 많은 무리들이 지치고 배고픈 시간이 되었다는 데까지 신경을 쓰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4: 16이나 마가복음 6:37에 보면, "너희가 (제자들) 먹을 것을 주라"고, 군중들이 지쳐 쓰러질 것을 걱정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 군중들이 예수님께 먹을 것까지 바랬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흔적이 사복음서에는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바랬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며 병고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소원과 필요까지 알아보셨다는 데 중요함이 있습니다. 구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미리 아시고, 그들의 사정을 헤아려 주시는 아름다운 뜻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방향을 바꾸어 5천 명이나 되는 무리에 대해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이 많은 군중들이 어디서 모여들었습니까? 그들은 순례자(pilgrim)들입니다. 열 두 살 이상의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모였으므로 지금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짐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왕 떠난 여행길에서 소문난 예수님을 한번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만나 보고 정말 소문대로 유대인의 왕이 될 만한 인물인가를 탐지해 보고 싶었던 저의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뒤에 보면 억지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되는 바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들을 행하신 것을 알고 있었고, 더러는 직접 장님을 눈뜨게 한 사실을 본 사람들도 있었으며, 또한 문둥병을 깨끗이 한 사실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들이 소문이냐 진짜냐 하며, 모두들 호기심에 차서 예루살렘 잔치에 가는 것을 일단 미루고 예수님께로 모여들은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은 일단 피신하셨고, 무리들은 육로로 걸어서 다시 예수님과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육의 양식까지 염려하여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에게 먹게 하겠느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요 6 : 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빌립은, 각 사람에게 조금씩 받게 해도 이백 데나리온이 부족하다고 재빠르게 계산을 해서 대답을 했습니다(요 6 : 7). 한 데나리온의 돈의 가치는 노동자의 하루 품값이므로, 이백 데나리온이라면 노동자가 먹지도 쓰지도 않고 6개월간 벌어도 될까 말까한 돈입니다. 물론 이런 계산을 하고 있었지만 그 상황에서는 돈도 물건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요 6: 8-9)라고 대답을 합니다. 안드레는 원래 빌립의 친구로서 한 고향인 벳새다 사람입니다. 한 편에서는 이백 데나리온씩이나 모자란다는 절망적인 계산을 하고 있는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왜 내어놓았는지 다소 어리둥절합니다. 여기서 빌립의 의견과 안드레의 의견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빌립은 완전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있는데 비해 안드레는 특별히 어떤 기적을 바랬던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실정이 이렇다는 것을 주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별로 소용이 안될 줄은 알지만 그래도 사실대로, 여기 보리떡과 물고기가 있습니다 하고 내놓은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내가 미리 판단해서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일이 이루어질만 하면 기도하고 애쓰지만,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을 것 같으면 포기하고 아예 기도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루어지고 아니하고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고 우리는 사실 있는 그대로를 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옳다 그르다 하는 판단이나, 할 수 있다 없다의 결정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대로 내가 가진 사정, 진실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아뢰는 기도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보다 사실은 "이렇게 됐습니다"라는 기도가 훨씬 의미있는 기도입니다. 빌립은, 계산은 빨랐던 사람이나 불신앙적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시기 위해,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는데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이야기는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조금 예수님께 다가온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해 생각하려 합니다. 보리떡은 아주 가난한 사람이 먹는 음식으로 그 당시 나귀에게도 먹였다고 합니다. 짐승에게도 먹이는 떡이었으므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먹는 음식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다음 물고기는, 신학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마태․마가․누가복음에서는 원어로 '잌두스'라고 했고 요한복음에서는 '옵사리온'이라고 말을 바꾸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단어는, 마치 굴비와 조기와의 차이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잌두스나 옵사리온은 다같이 물고기의 뜻인데, 잌두스는 보통 물고기를 말하고 옵사리온은 소금에 절인 조그마한 물고기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게 되면, 성경 법에 의해 큰 고기는 잡아서 바구니에 담아 집으로 가져오고 작은 고기는 다시 물 속에 집어넣어 살리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가져가기도 물 속에 넣기도 어중간한 크기의 고기가 잡히면 그냥 바닷가에 내어 버립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주워서 짜게 절여 자기들의 양식으로 삼았는데, 이 고기가 바로 옵사리온입니다. 즉, 지금 예수님 앞에 내놓은 고기가 바로 소금에 절인 작은 물고기 옵사리온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마가․누가복음에서는 그저 물고기라고 했는데, 사도 요한이 자세히 보니 그것은 큰 물고기가 아니라 소금에 절인 옵사리온이었다고 구별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보리떡이나 물고기는 둘 다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입니다. 이 보잘것 없는 음식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이적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나타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이적은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아들 됨의 권능을 증명하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오늘 이 기적에서도, 첫째로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곧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정말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뜨거운 마음으로 위하여 기도하면 이 기도에 응답이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안드레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만약 안드레의 수고가 없었다면 이 이적은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졌거나 또는 이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이적에는 안드레의 지혜 있는 수고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발견해서 소개하는 소개자의 중요한 역할이 이 이적을 이루게 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더욱 중요한 것은 어린 소년이 이 음식을 예수님께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적고 보잘것없는 음식이었지만 예수님의 손에 들리워질 때 큰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적은 하늘에서 그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린 소년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적을 받을 만한 그릇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만한 수고, 이만한 희생, 이만한 믿음이 있어야 이적은 이루어집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그릇 위에 이적이 담긴 것입니다.
기적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바로 그 장소에 그렇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꼭 믿음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 어린 소년이 바친 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손에 들리워질 때 큰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보리떡과 물고기와 같이 아주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서 안드레가 말한 것처럼 이 작고 초라한 떡과 물고기가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소용이 있다 없다의 판단을 내가 하지 말고, 주의 손에 바쳐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주의 손에 바쳐질 때, 거기에 기적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질(質)로써 바쳐야 할 것이고, 그것이 양(量)적으로 크게 만들고 역사를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므로, 결과를 내가 생각할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실은 우리가 하고, 업적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건강, 인격, 지식, 지혜 또는 무엇이든 깨끗한 마음으로 바쳐지기만 하면 주의 손에서 엄청난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 어린 소년도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으로 자기가 가진 전부를 내놓은 것 같습니다. 비록 적지만 전체를 다 바치므로, 이것을 통해 역사는 크게 이루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내 손에 있을 때는 비록 작은 것이나 그리스도에게는 큰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에는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가치 인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는 것은 대단히 가치 있는 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음은 예수께서 이 보리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축사하신 것입니다(요 6 : 11). 축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카리스테사스'로서 감사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장면은 기가 막힌 장면입니다. 빌립이나 안드레의 생각뿐만 아니라 누가 보아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앉혀 놓고 어떻게 감사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물론 성경은 요약되어 기록된 줄 압니다만 모든 복음서들이 다같이 이 기적을 증거 하면서도 한결같이 "축사하셨다"는 말씀밖에는 다른 말이 없습니다. 이 말은 유대 사람들이 식사 때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반적 감사기도였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대략 그런 내용의 감사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첫째 어떻게 오천 명을 앞에 놓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감사기도를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감사하셨습니다. 형편없고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가진 바대로 감사할 줄 아는 자세가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감사는 미래적인 감사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중요하지만, 이제 이것을 통해서 오천 명이 먹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난 날의 일만 감사하거나, 현재 손에 쥐고 있는 것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받을 것도 미리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스운 이야기로 요새 선불제가 유행하여 모든 것이 다 선불이니 감사도 선불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재미있는 말이 나왔습니다만 사실 먼저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받을 축복이 더 많을진대 그것을 믿는다면, 믿음으로 미래의 것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지금 보리떡 다섯 개를 손에 들고 계시지만 벌써 저 멀리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 열 두 광주리가 남은 것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이 떡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축사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먼 미래를 바라보고 미리 감사할 수 있고,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감사하는 신앙이 있어야겠습니다.
다음, 이렇게 감사할 때 이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감사기도를 들으십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기도하는 방법을 설명하시면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감사기도를 해야 들으신다고 하셨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어느 부인은 자기도 남편 문제로 감사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하고 함숨을 쉬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남편은 매일같이 술이 만취되어 늦게 귀가하는 술고래였습니다. 그 날도 다른 날과 같이 술로써 인사불성이 되어 겨우 집에까지 도착해 문 앞에서 쓰러진 남편을 힘들게 끌어다가 겨우 눕혔더니 세상 모르게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니 자기 신세가 처량하고 화도 나서 기구한 팔자타령을 하며 "하나님, 나는 왜 이런 남자에게 시집을 와서 고생을 합니까?" 하고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울면서 절반은 신세타령하고 절반은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감사 기도하라는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한참 동안 감사할 조건을 생각하다가, 감사할 것이 없어서 그저 감사하다고 기도했답니다. 바로 그 때 성령의 감동으로 감사할 일이 생각났습니다.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을 생각하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앞으로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감사하고, 저토록 취했어도 집을 찾아올 수 있음에 감사하고, 토요일은 더욱 술을 많이 먹어 주일날은 집을 잘 봐주어서 교회 나오는 데 불편하지 않아 좋고, 계속해서 감사해야 할 일들이 자꾸 생각나서 정말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남편은 갈증이 나서 잠을 깨고 보니 부인이 웃으며 기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남편은 무엇이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물었더니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렇다고 감사를 구체적으로 나열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나도 예수 믿어 줄께" 하며 선뜻 교회에 나갈 것을 약속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그 동안 왜 몰랐겠습니까? 또한 자기 아내의 소원이 무엇인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이 부인이 간증하기를 10년 동안 그렇게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 번의 감사기도로써 이루어졌다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어느 때 들으실 것 같습니까? 오천 명을 앞에 놓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하는 이런 감사기도에 기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떡을 떼어서 나누어줍니다. 나누어 줄 때 제자들이 전부 분배합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떡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떡은 여기에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목사님들은 예수님께서 만들어 주신 떡을 성도들에게 나누어 드리는 것뿐입니다. 여기에 전도의 양상이 있고 성격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이 되고 내가 예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 즉 그 떡을 교역자들은 여러분에게 배달해서 나누어 줄 뿐입니다. 배달하는 수고가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다음, 재미있는 것은 예수께서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은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요 6 : 12-13). 생각하면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았는데 또 만들면 되지, 버릴 것이 없게 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적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적은 한꺼번에 이루어졌다고 함부로 남용해서 될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얼마든지 있는 떡이지만 버릴 것이 없도록 아껴야 합니다. 함부로 기도하지 말고 주신 기도의 능력은 조심스럽게 소중히 여겨서 남용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이 없이 다 모았더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이제 결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사건은 사건대로 있으면서, 상징적인 의미로는 오천 명에 대한 성만찬 예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요한복음 6장 전체에 기록하면서 앞으로 이제 계속 사건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온 세계 만민이 그 분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떡이 다섯 개냐, 한 개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떡에 의해서, 그 피에 의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앞에 놓고 장엄한 성만찬을 행한 것이라고 사도 요한은 이해하며 표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뜻을 알아서 이 기적이 무엇을 뜻하고, 어떻게 나타났으며, 오늘 나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이해하고 이 표적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을 충만히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영원히 부족함이 없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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